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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대체역사

이원호
작품등록일 :
2018.01.29 15:05
최근연재일 :
2018.01.29 15:10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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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7
추천수 :
62
글자수 :
90,574

작성
18.01.2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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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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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9쪽

영웅의 도시 5화

DUMMY

“어떻게 되긴, 나도 교육을 받았지. 이것 봐라.”

김상철이 스웨터의 소매를 걷어 올려 보였다.

“체력단련 교육이었어. 로프에 쓸려서 생긴 상처다.”

“아니, 이게.”

안인석의 두 눈이 둥그레졌다.

“체력단련을 하다니, 나는 도무지······.”

“군대에서 교관 노릇 한 것이 도움이 되었지. 여기서도 교관이 되었으니까.”

“누구를 가르쳤는데요?”

이유미가 정색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신입사원들이었어요?”

“아니, 과장도 있었고 대리도 있었지요. 모두 러시아로 파견 나갈 사람들이었는데 나도 그중의 하나요.”

“네가 러시아로?,

놀란 안인석이 바짝 다가앉았다.

“네가 왜? 너 같은 신입이 뭘 한다고?”

“신입이지만 체력이 좋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놈이거든, 나는.”

“······.”

“난 이 일에 파견되기 위해서 합격된 것 같다. 면접 때 분위기가 이상해서 떨어진 줄 알았거든.”

그들을 둘러보며 김상철이 웃었다.

“아버지와 고려그룹 계열사와의 세금 문제가 있었어. 계열사들은 세금을 탕감 받았지만 결국 흐지부지 되었지. 아버지만 교도소에 갔고.”

“······.”

“그런데 날 입사시켰다는 것이 알려지면 아버지와의 관계를 오해할 소지가 있었어, 그래서 난 거의 단념했었는데.”

“러시아에 무엇 하러 가는 거야?”

안인석이 다그치듯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말할 수 없어. 다만 조금 위험하다는 것밖에.”

그는 호주머니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안인석 앞에 내려놓았다.

“회사에서 생명보험을 들어주었어, 직장인 보험도 함께,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회사에서 보상금을 내주기로 계약도 되어 있다. 수취인은 민희 앞으로 했어.”

“······.”

“네가 갖고 있다가 처리해 줘.”

“언제 떠나는데요?”

이유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언제 귀국할 예정이에요?”

“출발은 내일 오후, 귀국은 미정이야.”

“······.”

“어제 아버지께 말씀도 드렸고 민희는 이모 집으로 옮기게 했어, 갠 매달 내 월급을 수령하게 될 거야. 이 서류를 써먹기 전까지는.”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손으로 두드리며 김상철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오늘밤엔 술 마실 시간이 있어.”



심란할 때는 시끄러운 곳이 낫다면서 안인석이 그들을 데려간 곳은 논현로에 있는 나이트클럽이었다. 그의 말대로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울리는 음악과 어지러운 조명이 얼을 빼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야기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청각이 무디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안인석이 폭주를 했으므로 양주 두 병을 금방 비우고 세 병째가 놓였는데 그들은 플로어에도 나가지 않았다.

홀 안에 명멸하는 불빛을 무심히 바라보던 김상철이 머리를 돌리자 이쪽을 향한 이유미의 시선과 마주쳤다. 곧 시선을 비낀 김상철이 술잔을 들었고 이유미는 안인석에게 무언가를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술잔을 비운 김상철이 빈 잔에 술을 채우고 있을 때였다. 이유미가 상체를 그에게로 굽히더니 소리치듯 말했다.

“한지은이를 만났어요. 얼마 전에.”

“······.”

“걱정을 하고 있더군요. 혹시나 앞날을 방해하지나 않을까 하고.”

“······.”

“그래서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김상철 씨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았었다고.”

그러자 김상철이 잠자코 술잔을 들었다. 이유미의 얼굴에 형형색색의 불빛이 스쳐 지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굴 사랑한다면 그렇게 쉽게 포기 할 남자가 아냐.”

이유미가 말하자 이제 김상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에게 관심이 많군, 유미 씨는.”

“당연하지. 언제나 당신 이야기를 듣고 지내왔는데.”

그러자 김상철이 플로어를 바라보고 있는 안인석을 턱으로 가켰다.

“저 놈을 아껴줘야 돼. 나에게 남은 유일한 선이 있다면 저 놈과의 우정 이니까.”

“나는 뭐야?

이유미가 바짝 상체를 굽히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곁가지야?”

그러자 안인석이 이쪽으로 머리를 돌리고는 소리 쳤다.

“야, 나가자. 가만히 있었더니 술이 올라서 안 되겠다.”

테이블에서 일어난 그들은 플로어의 인파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발 디딜 틈도 없게 들어차 있는 남녀들이 광란에 빠진 듯 뒤틀며 소리치고 있었다. 음악이 폭발음처럼 들렸고 조명의 빛발은 쏟아지는 포탄 같아서 플로어의 무리들은 마치 단말마의 순간을 맞아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였다. 무리 속에 끼어 있던 김상철은 곧 몸을 뺐다. 다시 테이블로 돌아온 그는 잔에 남아 있던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륙으로



러시아 호텔은 크렘린 궁에서 동쪽으로 모스크바 강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세워진 거대한 건물이다.

어젯밤에 도착한 이윤제 박사가 시차 때문에 뒤치락거리다가 늦게 잠이 든 바람에 깨어난 것은 모스크바 시간으로 아침 9시 40분. 놀란 그가 서둘러 옷을 주워 입고는 로비에 내려오자 서은영이 밝은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잘 주무셨어요?”

“못 잤어. 시차 때문에.”

이윤제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0시가 다 됐는데 이 자들이 왜 나타나지 않는 거야?”

“그 동안 커피나 드세요.”

로비 라운지에 앉은 그들은 커피를 시켜 마셨다. 학술회의장으로 자주 쓰이는 호텔이어서 외국인 손님들이 그들 주위에 앉아 있었는데 영어와 독어, 불어가 이쪽저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곳 어디엔가 있을 텐데.”

이윤제가 라운지를 둘러보며 말했다.

“하바롭스크에서 합류시킬 모양인가?”

바로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두 명의 사내를 발견한 이윤제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저기 오는군, 박 대리께서.”

박동원 대리는 장신의 사내와 동행이었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젯밤 공항에서는 다른 고려그룹 지사원이 마중을 나와 호텔에 안내해주고 돌아갔던 것이다.

“잘 쉬셨습니까?”

다가온 박동원이 떠들썩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의 옆에 선 사람은 김상철이었다. 박동원이 김상철을 소개하고는 그들과 마주앉았다.

“러시아 정부에서 오늘 중으로 조사 허가서를 발급해줄 것입니다. 그러면 내일 오전 중에 하바롭스크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허가서를 하바롭스크에서 내줄 수는 없었나요?”

이윤제가 묻자 박동원이 머리를 저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스크바까지 올 필요가 없었지요, 박사님.”

“다른 조사단원들은 어디 있습니까? 임업이나 기상학자들.”

“다른 호텔에 계십니다. 내일이면 모두 만나게 되실 겁니다.”

박동원이 김상철의 어깨를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저녁 일곱 시에 연락을 드릴 테니까 그 동안 시내 구경이나 하시지요. 그럼, 저희들은 이만.”

로비를 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윤제가 서은영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시내 구경은 무슨, 영하 20도 가까운 날씨에 뭘 구경한다고.”

“시베리아는 영하 40도라고 했어요. 미리 단련해 두셔야죠.”

웃음 띤 얼굴로 그녀가 말했지만 이윤제는 머리를 저었다.

“방한장비를 입고 있겠지, 그때는. 지금처럼 코트에 멋을 낸 차림으로는 안 돼.”

이윤제가 손을 뻗어 서은영의 손을 쥐었다.

“일곱 시까지 시간이 있다니, 내 방에서 보드카나 한잔 하는 게 어때? 방은 따뜻하더구먼.”

“낮에는 싫어요.”

“술말인가?”

“아니, 교수님 이 바라시는 다른 것.”

이윤제가 쓴웃음을 지었으나 손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러시아 호텔을 나온 그들은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랐다. 모스크바 지사의 승용차로 운전사는 현지인이다.

“이윤제는 제 정부를 데려 왔어.”

박동원이 혼잣소리처럼 말하자 김상철이 머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조교가 아닙니까?”

“아니, 조교는 맞아. 하지만 둘이는 그렇고 그런 사이야.”

박동원이 잇몸을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시베리아에서 밀월을 즐기려는 생각을 하고 왔다면 매운맛을 보게 될 거야. 저 지질학자 놈은.”

승용차는 제르진스키 광장을 지나 옛 KGB 건물을 좌측으로 바라보며 달려 나갔다. 김상철은 박동원과 한조였는데 맡은 일은 연락과 감시역이다. 서울에서부터 박동원과 호흡을 맞추며 함께 행동했는데 그는 눈치가 빠르고 성격도 급한데다가 몸이 날랜 사내였다. 대부분의 개척단 요원이 그런 것처럼 박동원도 유장석 상무가 총애하는 심복중의 한사람이었다.

“저것들이 속을 썩이지 말아야 할 텐데.”

박동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대가리한테서 들었는데 현지 사정이 더러워. 하바롭스크에서 자동차로 2주일 가량 북쪽으로 올라가야 되는데 무인지대라 러시아군 탈주병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는 거야.”

“······.”

“지사요원 세 명이 현지인 세 명의 안내를 받고 조사차 들어갔다가 차 한 대를 잃고 도중에서 돌아왔어. 놈들의 총격을 받아서 죽을 뻔 했다는군.”

“이 부장님은 하바롭스크에서 러시아군이 우리와 동행할 것이라고 하시던데요.”

“글쎄, 그거야 그렇지만.”

박동원이 입맛을 다셨다. 고려건설에 입사한 지 6년으로 동남아의 오지와 중동의 사막지대 공사장을 거친 그였지만 이러한 조건의 땅은 처음인 것이다.



그들이 모스크바의 거리를 달리고 있을 때 강우진 회장은 본사의 회장실에 앉아 이남호 실장의 보고를 듣는 중이었다.

“이 부장이 1진을 데리고 어제 하바롭스크에 도착해서 장비를 점검하고 있습니다. 유 상무는 조사단의 허가증을 받는 대로 내일 하바롭스크로 출발할 것입니다, 회장님.”

“그쪽 군부대의 지원은 어때? 경호부대를 딸려 주겠다고 체르넨코가 말했는데.”

“예. 이 부장의 보고로는 하바롭스크 주둔군에서 1개 중대 병력을 경호 병력으로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야?”

“부대 사령관이 차량의 기름비용과 주부식비, 거기에다 병사들의 수당까지 합쳐 미화로 5만 달러를 요구한다고 합니다.”

“썩어빠진 놈들.”

강 회장이 혀를 찼다.

“그 돈은 모두 사령관 놈의 호주머니로 들어가 버릴 거야. 개척단을 따라가는 병사들한테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아.”

“예. 아무래도······.”

“사령관 놈의 아가리에 5만 달러를 처넣어주라고 하고 따로 5만 달러를 준비해 가도록 해. 틀림없이 따라가는 군인들이 손을 벌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회장님.”

“총리실에서 연락 온 것 없나?”

“예. 지난번에 보신 공문 이후로는 연락이 없습니다.”

강 회장이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러시아 대사를 외교통상부 장관과 만나게 한 것이 약효가 있는 모양이군.”

“예. 하지만······ 회장님.”

이남호가 테이블 앞으로 반걸음쯤 다가섰다.

“저는 청와대가 잠자코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만.”

“청와대가 나설 일이 아니야.”

자리에서 일어선 강 회장이 뒷짐을 지고 창가로 다가섰다.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는 흐린 1월의 오후였다.

“러시아 정부가 적극 추진하려는 자동차 산업과 시베리아 개발을 청와대가 나서서 막는다면 당장에 한·러 관계가 악화될 거야. 아마 총리실이나 외무부와 연락하면서 화를 삭이고 있을 거야.”

“······.”

“도대체 북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뭐야? 아직도 그 쓰잘데 없는 정상회담에 미련이 있나?”

“북한의 반대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남호의 말에 강 회장이 창에서 몸을 돌렸다. 늘어져 있던 눈시울이 조금 치켜 올라가 있었다. 재촉하는 듯한 그의 시선에 끌려 이남호가 말을 이었다.

“경쟁사의 방해공작이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회장님.”

“대영그룹의 비서실 최선호 전무가 사흘 전에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들어갔답니다. 러시아 대사관의 플레노프가 오전에 알려 주었습니다.”

“부대사 말인가?”

“예. 회장님.”

“쥐새끼 같은 놈들.”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앉은 강 회장이 이남호를 쏘아보았다.

“방해할 이유가 있나? 하긴 이렇게 묻는 내가 어리석지만.”

“충분합니다, 회장님.”

이남호가 그의 시선을 받았다

“임차된 땅에서 석유가 나온다든가, 또는 철이나 구리, 중금속이 생산된다면 우리 고려그룹은 원료를 생산하는 유일한 그룹이 됩니다. 그것이 2차나 3차산업으로 연결되면 대영그룹은 이제 우리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의 경우에 말이지.”

“그자들은 만일의 경우에 생길 일에 대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회장님.”

그러자 강 회장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놈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해. 보안에 신경을 쓰도록 러시아에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남호가 방을 나가자 강 회장은 머리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부딪치는 눈발이 아까보다 더 굵어져 있었다.



크렘린은 원래 성벽을 뜻하는 러시아어로 미국의 백악관이 그렇듯 아직도 러시아 최고 권력의 대명사이다. 러시아 호텔에서 붉은 광장을 건너면 바로 크렘린 궁의 입구인 트로이츠카야 탑이었으므로 서은영은 크렘린 궁에서 오후를 보냈다. 그녀가 러시아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4시경으로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파카에 두 손을 찌르고 호텔의 계단을 오르던 그녀는 위쪽에서 내려오는 동양인을 보았다. 단정한 코트 차림에 머리에는 러시아인들처럼 검정 털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 분이시죠?”

걸음을 멈춘 그가 웃으며 물었으므로 서은영도 멈춰 섰다.

“네, 그래요. 한국 분이신가요?”

한국을 확인하는 이유는 북한인을 가려내기 위해서였다. 북한 사람은 한국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도 서울에서 왔습니다.”

“여행 오신 거예요?”

“아니, 업무관계로.”

사내가 몸을 돌리더니 호텔 쪽으로 발을 옮겼으므로 서은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신우그룹의 김 부장이라고 합니다. 모스크바 지사에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30대 후반쯤의 나이로 웃는 모습이 귀여 운 사내였다.

“그런데요?”

아직도 서은영의 경계심은 늦춰지지 않았다. 호텔의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서은영이 발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만 실례하겠어요.”

“잠깐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쪽에서 10분이면 되겠는데요.”

사내가 턱으로 로비 옆쪽의 라운지를 가리켰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저는 생각하시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지 여기서 하세요.”

서은영이 움직이지 않자 사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 곧 시베리아로 떠나시죠? 고려그룹의 일을 하시려고 말입니다.”

놀란 서은영이 눈을 치켜뜨자 사내가 얼굴을 부드럽게 풀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모스크바에 있는 한국 지사원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왜 그러세요?”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저하고 거래를 맺고 정보를 주십시오. 그 대가로 2천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서울 계좌를 말씀해 주시면 내일 당장 송금해 드리지요.”

“······.”

“정보는 시베리아에서 돌아오시고 나서 주시면 됩니다. 어떻습니까?

서은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비에 가득 찬 사람들 중에서 이쪽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다.

“고려그룹에 신의를 지키실 이유라도 있습니까? 어차피 그쪽으로부터도 돈으로 고용되셨을 텐데요. 그리고 이것은 국가기밀도 아닙니다. 기업 간의 정보전일 뿐이지요.”

사내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그쪽 땅에 대한 정보만 필요할 뿐입니다. 서은영 씨 전공인 지질 문제 외에도 기상이나 자원 문제를 함께 조사하실 테니까 상당히 입체적인 정보가 되겠지요. 그것을 정리해서 넘겨주십시오.”

“······.”

“그들은 서은영 씨가 정보를 누출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도 없을 겁니다. 만에 하나 노출된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일을 비밀리에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이지요. 한국 정부가 반대하고 있거든요.”



로비 기둥에 기대 선 김상철은 서은영이 사내와 헤어져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가자 피우고 있던 담배를 옆에 놓인 재떨이에 넣고는 가방을 들었다. 그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갔을 때 이미 서은영은 보이지 않았다. 곧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탄 그는 6층에서 내려 618호의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서은영이 안에서 영어로 묻는 소리가 났다.

“김상철입니다.”

그가 한국어로 말하자 곧 문이 열렸다.

“웬일이세요?”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조금 전의 모습 그대로인 서은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걸 드리려고.”

김상철이 손에 쥔 커다란 비닐가방을 들어 보였다.

“방한복입니다.”

“들어오세요.”

가방만 받아들고 문을 닫기가 미안했는지 문을 열고 비켜섰다.

“이 교수님한테는 조금 전에 드렸습니다.”

가방을 건네준 김상철이 창가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창밖으로 붉은 광장과 크렘린 궁이 바로 보였다.

“내일 출발하실 때에 그 옷을 입고 가셔야 합니다. 신발은 넉넉하게 250으로 가져왔는데 양말이 두터우니까 맞으실 겁니다.”

김상철의 말을 들으며 모피 방한복을 꺼내던 서은영이 시선을 들었다.

“하바롭스크에서는 차로 간다면서요?”

“예. 차로 2주일쯤.”

방한화를 든 그녀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김상철 씨는 그곳, 가보신 적 있어요?”

“아니, 저는 모스크바도 처음입니다.”

신발을 벗고 발가락을 굽혔다 편 서은영이 방한화를 신어보았다.

“김상철 씨는 아직 젊으신데 고려그룹에는 언제 입사했어요?”

“아직 한 달이 안 되었습니다.”

다시 머리를 든 서은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입사하자마자 바로 선발되었지요.”

“축하드려요.”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닙니다.”

“어쨌든 잘 부탁드려요. 같이 일하는 동안만이라도.”

“아마 제가 근처에 있을 겁니다. 어려우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방한화를 신은 서은영이 의자에서 일어나 새 신을 신은 어린애처럼 몇 걸음을 걸어보았다.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마실 걸 드릴까요? 보드카가 있던데.”

“우유나 한 잔 주십시오.”

김상철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박동원이 데리러 올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투리스트 호텔의 로비에 들어선 최선호 전무와 고정문 부장은 앞을 가로막고 선 두 명의 사내들 때문에 걸음을 멈추었다. 두 명 모두 두터운 코트 차림의 러시아인으로 한눈에 경찰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여권을.”

사내 한 명이 주머니에서 꺼낸 수첩을 잠깐 보이더니 짧게 말했다.

“잠깐 우리를 따라오시오.”

최선호와 고정문이 내민 여권을 받아 쥔 사내들은 몸을 돌렸다.

“이것 보시오.”

그들을 따라 호텔의 현관을 나서면서 최선호가 말했다

“무슨 일로 이러는 거요?”

“조사할 것이 있어.”

힐끗 최선호에게 시선을 준 사내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이것 보시오. 잠깐 이야기를 합시다.”

“경찰서에 가서 이야기 해.”

호텔 앞에는 배기관에서 흰 증기를 뿜어내며 검정색 볼가가 대기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최선호가 고정문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새끼들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거야?

“글쎄요, 저도 통······.”

고정문은 긴장이 지나쳐 아예 사색이 되어 있었다. KGB는 그들이 쓰던 구건물이 서방세계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코스의 일부가 되어 있을 만큼 위력을 잃고 있었지만, 아직도 러시아 경찰의 권위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등을 떠밀려 승용차의 뒷좌석에 올랐다. 최선호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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