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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대체역사

이원호
작품등록일 :
2018.01.29 15:05
최근연재일 :
2018.01.29 15:10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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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3
추천수 :
62
글자수 :
90,574

작성
18.01.29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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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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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20쪽

영웅의 도시 2화

DUMMY

“그렇다면 조사단을 구성해서 보내야겠다. 아니, 조사단으로는 약해. 지금도 호랑이가 나오고 산적들이 있다는 곳이야. 그렇지, 개척단이라고 해야 옳다.”

강 회장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가 이런 기풍으로 고려그룹을 성장시켜 왔으므로 그의 심복들 중에는 산적 두목 같은 무리들이 많다. 강용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러시아 정부에 개척단을 파견한다는 통보를 하고 허락을 받겠습니다. 그리고 한국 정부에도.”

“빌어먹을.”

강 회장의 얼굴이 다시 찌푸려졌다. 받아들이는 러시아 정부보다 보내는 이쪽 정부가 더 까다로울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도 청와대에 말해야겠군. 그 말 많은 놈들한테.”

“허락이 날 겁니다, 아버님. 러시아 정부가 허락해 주면 말입니다.”

“그렇지, 그게 순서지. 러시아의 신경을 거스를 배짱이 있는 놈은 없지, 이곳에.”

강 회장이 만족한 듯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시베리아의 땅을 50년 임차한다는 것은 그곳의 주인이 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강 회장과 그 다음 세대, 그리고 손주의 세대까지 그 땅에서 살다가 뼈를 묻게 되어도 남을 기간인 것이다. 남북한을 합한 면적의 두 배가 넘는 땅이 강 씨 일문의 땅이 되는 것이다.

그곳에 도시를 짓고, 공장과 학교, 그리고 산적을 막는 군대도 키울 수가 있을 것이다. 강 회장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영감의 로비는 당할 자가 없어. 멧돼지처럼 달려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 사이에 뱀이 되어서 상대방을 감고 있단 말이야.”

조영규 실장이 테 없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주그주르 산맥 지역은 원목뿐만이 아니라 광물질도 풍부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어, 정밀조사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투자할 돈으로 전자단지를 몇 개 더 세우는 게 나아.”

“강 회장은 꽤 집착하는 모양입니다.”

앞에 앉은 최선호 전무가 말했다. 그는 비서실의 개발담당 팀장이었는데 직급은 전무이나 계열사로 내려가면 사장급이었다. 비서실장 조영규도 사장직급으로 대영그룹의 회장단 회의에 간사로 참석하고 있는 것이다.

조영규가 입을 열었다.

“우린 아직 시베리아 땅이라든가 유전 개발 같은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다른 일이 산적해 있단 말이야.”

조영규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전 10시 5분 전이었다. 10시 30분에 전자그룹 회장과 함께 미국의 파인사 회장을 만나기로 했으므로 회장에게 준비를 시켜야 했지만 5분쯤 더 기다리기로 했다. 아마 회장은 반도체 공장 증설에 관한 계획서를 검토하고 있을 것이다. 대영그룹이 전자 분야에서 세계의 초일류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선대의 김상모 회장이 기반을 구축했지만 2대째인 김호경 회장의 집념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첨단 분야의 산업을 개발, 발전시키는 것만이 회사를 살아남게 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땅 넓이가 남북한 합친 면적의 두 배나 된다면서요?”

최선호는 강우진 회장의 시베리아 개척 프로젝트에 마음을 빼앗긴 모양이었다.

“임차기간이 50년이라면 영국이 홍콩을 빌린 것만은 못하지만 자기 땅이라고 해도 되겠는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

“우리 회장님께서는 그걸 알고 계시겠지요?”

“내가 어제 간략하게 말씀드렸어. 그랬더니 아무 말씀 없으시더군.”

잠자코 머리를 끄덕인 최선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50대 초반의 최선호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반도체에 대한 자료나 정보를 수집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내였다. 그가 거느리는 개발팀 안에는 CIA나 모사드 특공대에 못지않는 A반이 있었는데 평시에 그들은 회장의 경호를 맡기도 했다. 최선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영규는 자리에게 일어섰다.

회장실로 들어서자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얹고 앉아 있던 김호경 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표정이었다.

“회장님, 파인사의 그렌트 회장과 10시 30분에 약속이 있으십니다.”

“알고 있어요.”

차갑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목소리는 부드럽다.

“그런데 조 실장, 어제 이야기한 고려의 시베리아 개발건 말인데요.”

“네, 회장님.”

긴장한 조영규가 그를 바라보았다. 건성으로 들은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장이 말을 이었다.

“그 프로젝트를 알아보도록 하시오.”

“알아보시라면, 저······.”

“조사를 해요. 그곳이 가능성이 있는지.”

“예, 가능성을 조사하겠습니다.”

“물론 고려 쪽에는 비밀로 하고.”

“물론입니다, 회장님.”

“러시아와 한국 정부 양쪽의 입장도 알아보도록 하고, 계약조건도 함께.”

“알겠습니다. 그러면 러시아가 내놓은 다른 임차지역도 함께 조사를 해도 좋겠습니까?”

그러자 한동안 조영규를 바라보던 회장이 희미한 웃음을 띠면서 머리를 저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조영규는 머리를 숙였다. 회장의 의도를 안 것이다. 회장은 러시아의 땅 임차 같은 것은 처음부터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고려그룹과 러시아와의 밀착인 것이다.



대전 교도소의 면회실에서 김상철은 아버지 김영환을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유리벽에 둥근 구멍이 총알자국처럼 뚫린 통화구로 다투듯 말하는 면회자와 수감자들은 모두 쫓기는 표정 이었다.

시멘트 벽에 부딪친 말소리들이 웅웅 떠다니면서 방 안은 울림소리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제각기 목소리들을 높인다. 그러다가 양쪽에 서 있던 교도관의 주의를 받고 다시 말소리가 낮아지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

김상철이 입을 통화구에 가져다 댔다.

“아버지, 건강하셔야 돼요.”

“오냐, 고맙다.”

볼이 홀쭉하게 여윈 김영환 씨가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흰 머리가 반쯤 섞인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깔끔하게 면도를 했지만 시선 끝은 무디어져 있었다.

“아버지, 책 가져왔어요.”

“그래, 고맙다.”

“아버지, 저, 고려그룹에 들어 갈 생각입니다.”

이미 고려그룹에 지원서는 제출했고 입사시험은 20일 후인 12월 1일이다.

“아버지.”

김상철이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김영환 씨의 먼 허공을 향하던 시선에 초점이 잡혀졌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믿습니다.”

“나는······.”

김영환 씨가 헛기침을 했다.

“상철아, 나는 공금인 줄 알면서 받아썼어. 세금을 탕감해 준 것도 돌아올 돈을 기대했기 때문이야.”

김영환 씨가 유리 벽에 바짝 얼굴을 댔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검찰이나 법원에서는 몰랐다고 했지만 알고 받아쓴 거야. 난 내 자식 앞에서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

전에 대여섯 번 면회를 왔었지만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긴장한 김상철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너한테만은 꼭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리벽에 얼굴을 바짝 붙인 그가 말을 이었다.

“강한 자만이 사는 세상이야. 이 애비의 인생은 실패작이다. 하지만 너는 이겨야 한다. 성공해야 된다.”

“아버지.”

“절대로 좌절하지 마라. 이 애비의 전과가 네 장래에 지장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단호하게 나를 부정해라. 나를 욕하고 매도하고 아예 지워버려라.”

“아버지.”

김상철의 두 눈도 부릅떠져 있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욕한다면 그놈들을 상대로 싸우지요.”

“이런 바보 같은 놈!”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치자 교도관이 주의를 주었다.

“내말을 알아듣지 못했단 말이냐? 애비가 김영환이라는 걸 알게 하면 안 된단 말이다. 절대로.”

“······.”

“떳떳하게 말한다고 해서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사회라는 것은.”

“······.”

“난 너를 어릴 적부터 강하게 키웠어. 하지만 너는 아직 타협을 모른다. 상철아, 이기려면 타협을 해라, 너무 곧으면 부러지는 법이야. 굽혔다가 나중에 기회를 보아라.”

“알겠어요, 아버지.”

거의 얼굴을 맞댄 김상철이 말했다.

“타협하지요, 굽히겠습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네 엄마와 동생을 잘 부탁한다.”

“기운을 내세요. 아버지.”

면회시간이 끝났다는 벨이 울렸으나 그들은 얼굴을 마주댄 채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어머니가 쓰러진 것은 김상철이 면회를 다녀온 나흘 후였다. 함께 방을 쓰는 민희가 아침이 되었는데도 일어나지 않는 어머니를 깨우다가 의식을 잃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어머니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면서 김상철은 이를 악물었다. 겹쳐오는 시련에 대한 분노와 함께 견디어 내겠다는 투지가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병명은 자궁암이었다. 의사는 이런 상태가 되도록 방치해둔 환자와 가족들의 무지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어머니를 두 남매가 간병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낮 시간은 민희가 맡고 밤에는 김상철이 병실을 지켰다.

일주일째 되는 날 아침이다. 교대하러 온 민희와 김상철이 병실 밖에서 마주보고 섰다.

“수술은 닷새 후로 잡혔어.”

김상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몸이 약해져서 의사가 걱정을 하더라. 하지만 잘 되겠지.”

“뭐라고 했는데? 위험하대?”

민희가 목소리를 떨면서 묻자 김상철이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의사들이나 변호사들은 원래 그래. 우선 어렵고 힘들다고 하는 거야. 그래야 책임도 덜고 생색도 나는 법이니까.”

“오빠, 돈은? 수술비가······.”

“걱정 마, 내가 모아둔 돈이 있어.”

김상철이 민희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네가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넌 기운만 차리면 돼. 알았지?

민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춘 김상철이 몸을 돌렸다.



한 시간쯤 후에 그는 천호동의 대로변에서 거대한 철골 구조물을 올리고 있는 빌딩 공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작업 인부를 체크하고 있던 반장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저 친구, 이제 오는구먼.”

안전모를 젖힌 반장이 손짓을 해서 그를 가까이 불렀다.

“이봐, 장 씨가 오늘 안 나왔어. 그래서 자네가 대신 올라가 줘야겠어.”

“제가요?”

김상철이 붉은색 철근빔만이 얽혀져 있는 빌딩의 골격을 올려다보았다. 15층까지 어제 놓였으니 오늘은 16층을 쌓을 차례였다. 그러나 이제까지 잔일을 거들려고 아래위로 오르내렸을 뿐 위에서 작업을 한 적은 없는 것이다.

“자네는 이 씨 보조야. 이 씨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반장이 자르듯 말하자 김상철은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요, 뭐.”

“배짱만 있으면 돼. 그리고 허리에 로프를 매고.”

“알았습니다.”

반장이 만족한 듯 웃었다.

“일당이 2만 원이나 차이가 난단 말이야. 저 병신들은 죽어야 돼.”

크레인으로 끌어올린 거대한 빔을 가로 세로로 맞추어 끼우는 작업이었는데 보기에는 간단한 것 같지만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크레인 기사와 호흡이 맞아야 했고 첫째로 폭이 50센티도 안 되는 빔 위를 걸어 다녀야 한다. 그것은 15층 높이에서 줄을 타는 것과 같은 상황이어서 초보자들은 아예 올라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입에 담배를 문 이 씨가 다가왔다. 40대 중반으로 철근조립 기술자여서 반장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봐, 김 군. 내가 자네를 데리고 일하겠다고 했어.”

“저를 왜요?”

“자네 하체가 든든해서.”

이 씨가 턱으로 김상철의 하반신을 가리켰다.

“척 보면 알지, 자넨 연장도 튼실할 거야.”

“······.”

“하체가 든든해야 돼, 위에서 일하려면.”

그러자 반장이 이를 드러내며 맞장구를 쳤다.

“암만, 여자 위에서도 마찬가지여.”



창으로 다가간 이유미가 커튼을 젖히자 눈부신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유리창을 배경으로 드러난 이유미의 나신도 빛살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안인석은 눈을 가늘게 떴다.

“벌써 아홉 시야, 일어나.”

이유미가 다가왔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단단하게 솟은 젖가슴이 탄력으로 떨리듯 흔들렸다.

“어서 일어나, 아침 먹으러 가게.”

강남의 조그만 호텔 방 안이다. 어젯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나서 가까운 곳에 있던 이곳에 들어온 것이다. 이유미가 침대 위에 걸터앉더니 안인석을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왜 이렇게 비실거려?

“야, 30분만 더 있다가. 너무 일러.”

이맛살을 찌푸린 안인석이 손을 뻗어 이유미의 젖가슴을 쥐었다.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그래?”

“난 게으른 남자가 싫어.”

안인석의 손을 털어낸 이유미가 일어나 팬티와 브래지어를 찾아 걸쳤다. 이유미는 윤곽이 서구형 미모에다 몸매도 미끈해서 문리대 안에서 모르는 남학생이 없다. 또한 이유미는 수많은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는데 담당 교수와 호텔에 들어갔다든지, 방송국의 PD와 동거를 했다는 등 별것이 다 많았지만 본인은 해명이나 변명 같은 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

이유미는 안인석의 애인으로 영문과 클래스메이트였다. 성격이 밝고 붙임성이 있어서 안인석의 부모는 이유미를 며느릿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모처럼의 의견일치를 보았던 터였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이유미의 아버지도 물론 안인석을 사윗감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둘의 외박은 이제 반쯤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이유미가 밤늦게 어머니한테 전화를 해서 ‘나, 지금 인석 씨하고 같이 있어’ 하고서 외박하는 식이다. 그래서 양쪽 집안은 지난달에 어머니끼리 한번 인사를 나누었고 내년 중으로 결혼식을 올리자는 구두 약속까지 하게 되었다. 안인석이 침대 옆의 탁자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누운 채 다이얼을 누른 안인석이 한동안 귀에 대고 있던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 자식, 시험이 내일 모렌데 어디 간 거야?

혼잣소리로 투덜거리자 이유미가 침대에서 일어나 옆쪽의 의자에 앉았다.

“왜, 전화를 안 받아?”

“응, 아무래도 여동생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김상철은 도서관에도, 체육관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밤에 집으로 전화를 하면 여동생이 받는데 한결같이 모른다고만 하는 것이다. 이유미가 탁자 위에 놓인 담배를 집어 입에 물었다.

“어디 놀러 갔겠지, 뭐.”

“팔자 좋은 소리 그만해.”

이맛살을 찌푸린 안인석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럴 형편이 아니야, 그놈은.”

“난 그 사람이 싫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자기 친구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분위기의 남자는 질색이야.”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걔에 대해서.”

“분위기가 싫다고 그랬지, 내가 뭘 안다고 했어? 알 필요도 없는 사람이고.”

“분위기가 어때서?”

“질겨. 그리고 어둡고, 때로는 섬뜩할 때가 있어. 그 눈빛이 무서워.”

“······.”

“상철 씨 애인은 그런 남자가 좋은지 모르지만 난 아냐.”

안인석이 시트를 젖히고 일어섰다. 알몸이다. 바닥에 떨어진 팬티를 주어 입은 그가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그 자식은 애인도 떨어졌어, 지금.”

“아니, 왜?”

“글쎄, 네 말대로 그 여자도 그런 분위기가 질색이었는지 모르지.”

한지은과도 서너 번 같이 만난 적이 있었던 이유미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 9시 5분.

유장석 이사는 비서실의 소파에서 일어섰다. 각진 턱에 눈매가 예리했고 키는 보통이었지만 어깨가 넓다. 그는 비서실장 이남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섰다.

“실장님, 시간되었는데 들어갈까요?”

“가만.”

이남호가 서둘러 책상에서 일어섰다.

“내가 여쭤보고 올 테니 기다려.”

회장실은 바로 옆방이다. 그가 회장실로 들어가자 유장석은 들고 있던 파일을 겨드랑이에 끼고는 넥타이의 매듭을 추켜올렸다. 고려건설에 입사하여 이사가 될 때까지 20년을 근무했지만 회장실로 들어가는 것도 처음이고 회장과 독대하는 것도 처음이다. 그는 날이 선 바지의 주름과 잘 닦여진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회장실의 문이 열리더니 이남호가 나왔다.

“유 이사, 들어 와.”

유장석은 헛기침을 조그맣게 하고는 배에 힘을 주었다. 어제 오후 회장실로 출두하라는 지시를 받고 현재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세 곳의 공사장 현황을 꼼꼼히 점검해 보았었다. 진척률은 계획대로였고 사고가 한 건 있었지만 부상자는 경상인데다 노조 문제도 없었다. 그리고 자금 문제나 금전비리도 없는 것으로 확인 되었다.

강우진 회장은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이남호와 유장석이 테이블 앞에 다가가 섰는데도 머리를 들지 않았다.

회장실은 예상보다 좁았다. 회장 옆쪽 벽에 붙은 책장은 낡아서 옻칠이 벗겨졌고 반대편의 철제 캐비닛은 공사 현장에서도 쓰지 않을 정도로 녹이 슬어 있었다. 유장석은 침을 끌어모아 삼켰다. 영동의 공사 현장에 있는 자신의 현장소장 사무실보다도 옹색한 방이었다.

이윽고 강 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어, 왔나. 거기 앉아라.”

걸걸한 목청으로 말한 강 회장이 턱을 들어 옆쪽의 소파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자신도 일어서서 소파로 다가와 앉는다.

“너, 나하고 사우디에서 만났지? 그게 어디더라, 담맘인가?”

강 회장이 말하자 앞에 앉은 유장석이 허리를 폈다.

“쥬베일입니다. 회장님.”

“그렇지, 쥬베일이었다. 넌 그때 하역 담당 졸자였지, 20년쯤 전이니까.”

회장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가 좋아하는 대화중의 하나는 옛날의 무용담이다. 회장이 손으로 그를 가리켰다.

“넌 물에 빠진 장비를 구한다고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어, 그렇지?”

잠자코 머리를 숙인 유장석을 향해 회장의 말이 이어졌다.

“너는 두 번이나 들어갔는데도 빈손으로 나왔어. 얼굴이 시퍼렇게 되어서 말이야.”

“······.”

“가만, 빠진 장비가 뭐였더라?”

“트럭 엔진 부속이었습니다. 회장님.”

“세 번째 네가 들어가려는 것을 내가 말렸다, 그렇지?”

“예, 회장님.”

“내가 목숨을 아끼라고 했을 것이다.”

“······.”

“그렇지 않나?”

“아닙니다, 회장님.”

“그럼, 뭐라고 했는데?”

“네놈이 죽으면 돈이 더 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회장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을 것이다. 나는 내가 보고 있었기 때문에 네가 만용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 놈들이 대부분이지.”

“······.”

“그런데 너는 내가 떠난 후에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꺼냈더구먼.”

“······.”

“그래서 너를 기억한 것이다.”

회장이 헛기침을 하고는 소파에서 허리를 뗐다. 어느새 표정이 굳어져 있다.

“나는 내 일생의 숙원사업으로 시베리아의 땅을 임차해서 개간할 생각이다. 자네는 모스크바 지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지?”

“예, 회장님.”

“러시아어는 잘하나?”

“좀 합니다.”

머리를 끄덕인 강 회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직 그놈의 땅을 사진만 보았지 답사해 보지 못했어. 이건 마치 100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간 우리 조상이 사진만 보고 색시를 데려온 것과 비슷한 꼴이 될 것 같단 말이야.”

“······.”

“네가 이 일을 맡아라. 필요한 인원과 장비를 최대한 지원해 줄 테니 네가 끌고 시베리아로 가란 말이다, 알겠어?”

“알겠습니다.”

그러자 얼굴에 웃음을 띤 강 회장이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그것보라는 표정이다.

“그곳은 위험한 곳이야. 산적이 있고 요즘은 군에서 이탈한 무리들이 무장 강도 집단을 이루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짐승도 많고, 호랑이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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