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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대체역사

이원호
작품등록일 :
2018.01.29 15:05
최근연재일 :
2018.01.29 15:10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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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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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글자수 :
90,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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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2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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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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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자
20쪽

영웅의 도시 10화

DUMMY

“나 없을 때 발대리라고 하지나 말아라.”

이유미는 5박 6일 일정으로 LA에 있는 현지 대리점에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신입사원들에게 담당지역을 익히고 현지 대리점의 업무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회사방침이었다. 박정남에게서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듣고 난 이유미가 자리로 돌아오자 이제는 미스 양이 다가왔다.

“내일 몇 시 비행기야?”

“오전 11시 30분 KLM이야.”

미스 양이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당겨 다가앉았다. 점심시간이 지난 지 얼마 안 된 때라 다소 업무태도가 느슨해진 시간이다.

“저 발정남 자식, 어젯밤 외박을 했어.”

낮은 목소리로 미스 양이 말했다.

“저 셔츠에 타이, 양말이 어제와 똑같아. 딴 데서 자고 나온 거야.”

“언니도 참.”

이유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고 있어? 그럼, 어때? 아직 미혼인데.”

“나한테는 아버지 제사라 일찍 들어가야 된다고 했단 말이야.”

“그럼, 그렇겠지 뭐.”

“네 남자가 그랬다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봐, 그냥 지나갈 수 있겠니?”

그러자 이유미가 웃었다.

“난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상의 안 해.”

“······.”

“그럴 만한 가치도 없거든, 안 그래?”

“얘 좀 봐.”

얼굴이 굳어진 미스 양이 이유미를 쏘아보았다.

“그건 네 성격이지, 난 달라.”

“언니, 도대체 박 대리하고는 어떤 사이야? 서로 무슨 약속이라도 했어?”

잠자코 있던 미스 양을 바라보던 이유미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것도 내 성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저런 남자는 잊어. 싹수가 없으니까.”

“······.”

“한마디로 가능성이 없어. 내가 보기에는.”

그러자 미스 양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유미가 풀썩 웃고는 전화기를 들었다. 안인석에게 미국 출장 이야기를 해주려는 것이다. 번호판을 누르던 그녀는 문득 김상철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시선 끝이 멀어졌다. 그의 주변 환경과 차가운 표정이 뒤섞였고 그러자 혹한의 시베리아가 그에게 어울리는 곳처럼 느껴졌다.



한낮이었지만 눈보라가 휘날리고 있어서 주위는 어두웠다. 평원 쪽에서 휘몰아친 바람이 기지의 벽 역할을 하는 트럭의 대열에 부딪치면서 갖가지 소리를 냈다. 마치 넓고 긴 바람의 원형이 가닥으로 찢겨지면서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반월형 기지의 안쪽에서는 바람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눈보라를 위쪽으로 뿜어냈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림스키의 지휘로 병사들이 바깥 줄의 연료 트럭에서 드럼통을 굴러 내리는 중이었고 일부 병사들은 트럭 사이의 공간을 텐트용 천을 사용해서 막고 있다. 방한모에 방풍안경까지 쓰고 있어서 우주인처럼 보이는 유장석이 부속품 트럭으로 다가갔다.

“이봐, 눈보라는 사흘쯤 계속 될 모양이야. 조금 전에 연락이 왔어.”

그가 소리쳐 말하자 트럭 안으로 상반신을 넣고 있던 이대각이 몸을 폈다.

“우리야 눈보라가 멎기만 기다리면 되지만 시추공 기지는 야단났는데요. 이동 중이라.”

“목표지점 30킬로 아래에서 정지했다니 그들도 눈을 피할 준비를 하고 있겠지.”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두 시간쯤 전이었다. 시추공 기지는 시도한 지역에서 유정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중에 눈보라를 만난 것이다.

그들은 무거운 공구 박스를 함께 들고 안쪽의 박스 트럭을 향해 다가갔다. 트럭 뒤로 들어서자 바람의 기세가 뚝 떨어졌으므로 유장석은 방풍안경을 벗었다.

“김상철이는 지질 탐사기지 5킬로미터 앞이라고 연락해 왔어. 그쪽은 바람만 셀 뿐 눈보라는 없다는 거야.”

지질 탐사기지는 이틀 작업하고 사흘째 되는 날 옮겨가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벌써 여덟 번째 이동해 있었다.

탐사자료를 체크한 김진모 교수의 시추공팀이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기지를 옮기는 순서로 작업을 하는 것이다.

“사흘간 눈보라가 계속된다면 보급헬기가 사흘 후에 도착할 텐데 늦어지겠는데요.”

상자를 내려놓은 이대각이 말했다. 그들은 옷에 묻은 눈을 털어 내고는 박스 트럭 안으로 들어갔다.

뒤쪽에 배치된 트럭의 중간에 자리 잡은 이곳은 통신실이다. 최신형 위성통신 시스템 장비를 갖춘 통신실에는 두 명의 직원이 24시간 교대근무를 했다. 그러나 통신지역은 하바롭스크에 있는 고려그룹의 연락사무소까지가 한계였고 서울까지는 러시아군 당국이 허가하지 않았다.

“시추공 기지의 최 과장을 불러라.”

유장석의 말에 직원이 스위치를 켜고 주파수를 맞췄다. 시추공 기지의 최 과장이 가지고 있는 소형 무전기의 통신거리는 150킬로미터여서 지금까지는 문제가 없었으나 다음 주에는 기지본부를 동쪽으로 이동해야만 할 것이다. 유장석은 직원이 건네주는 무전기를 받았다.

“최 과장이야? 그곳 어때?”

대뜸 소리쳐 물었으나 그쪽 목소리는 가물거렸다.

“골짜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상무님.”

깊숙한 골짜기로 이동해 있기 때문에 목소리가 가물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눈이 엄청나게 내립니다. 그래서 방풍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골짜기라면 어떤 지형이야? 혹시 눈사태 만나는 것 아니야?”

“아닙니다. 구릉 사이의 꽤 넓은 골짜기여서 그런 염려는 없습니다. 구릉도 5, 60미터 높이로 나무가 빽빽해서······.”

가물거리다가 말이 끊겼으므로 유장석이 손에 든 무전기를 내려다보았다.

“이것, 우리 고려 제품을 써야지 미제는 아무래도······.”

무전기를 건네준 유장석이 벽에 걸려 있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최 과장의 위치는 이미 파악해 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김상철이다.

“이봐, 김상철한테 연락을 해. 그놈은 아마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김상철은 수화기를 귀에 댔다.

“예, 김상철입니다.”

“도착했나?”

유장석이 소리치듯 물었으므로 그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기지가 1킬로미터 전방에 보입니다, 상무님.”

“그곳은 어때? 기상이.”

“바람이 셉니다만 운행하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이곳하고 시추공 기지는 눈보라가 심해서 움직이지도 못한다. 시추공 기지는 이동하다가 대피했어. 그러니 너도 그곳에서 쉬어.”

“알겠습니다, 상무님.”

수화기를 무전기에 걸어 놓자 이바노프가 그를 바라보았다.

“김, 무슨 일이요?”

“서쪽 지역에 눈보라가 심해서 여기서 쉬라는 거야.”

“잘 됐군.”

탐사기지는 툰드라 지역을 벗어나 내륙의 평원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 시추공 기지보다 북방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위치였고 본부로부터는 직선거리로 130킬로미터가 된다. 그들이 기지에 도착하자 전 과장이 강풍에 머리를 숙이며 다가왔다.

“잘 왔어, 김상철 씨.”

그는 30대 중반으로 마른 몸매의 사내였는데 원자력 발전소 시설 전문가였다. 유장석이 믿을 만한 부하만을 뽑다보니 그도 걸려들었는데 이곳의 상황이 아무리 험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전 과장은 김상철의 팔을 끌고는 비어있는 박스 트럭 안으로 들어섰다.

“문제가 있어, 김상철 씨.”

방한모를 벗으며 전 과장이 말했다.

“탐사기가 아침부터 작동하지 않아. 그래서 매뉴얼을 달랬더니 여자가 버렸다는 거야.”

“서은영이가 말입니까?”

“조금 전에 이윤제가 말해주었어. 그 여자가 오는 도중에 버렸다고.”

김상철이 잠자코 전 과장을 바라보았다.

본부에 사흘간 잡아두었던 서은영을 감시 직원 하나를 딸려 이곳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말썽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고하셨습니까?”

김상철이 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그리고 날이 개면 서은영을 자네가 데리고 돌아오라는 지시였어.”

“또 말입니까?”

“이윤제가 조금 전에 실토했는데 서은영이 협박을 했다는 거야. 이번에 그 자가 받은 사례금을 반분하지 않으면 탐사기 작동법을 알려주지 않겠다고. 그래서 할 수 없이 허락했다는데.”

“그럴 리가, 그 여자는 이윤제의 정부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글쎄, 나도 이 부장한테서 들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했어. 둘은 서로 거의 말도 하지 않았고 물론 잠자리도 따로였거든.”

“······.”

“시베리아까지 와서도 여자가 말썽이야.”

“어쨌든 서은영이 탐사기를 고장 낸 것이 틀림없군요, 과장님.”

“틀림없어. 나하고 오상원 씨가 하루 종일 매달려서 조사해 보았더니 결국 컴퓨터 칩 두 개가 없어졌고 작동선이 끊겨져 있더군. 선은 이으면 되겠지만 칩이 없으면 저 기계는 버려야 돼.”

전 과장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여자에게 다그쳤더니 본부로 보내 달라는 거야. 거기서 유 상무와 이야기를 하겠다고. 내 말에는 꿈쩍도 안 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벗어 들고 있던 방한모를 머리에 썼다.



“이거 왜 이래!”

김상철에게 잡힌 팔을 뿌리치려고 애를 쓰면서 서은영이 소리쳤다.

“놔! 이 자식아!”

바람은 세었지만 아직 한낮이다. 러시아 병사들이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김상철은 서은영을 끌고 자신의 트럭 앞으로 다가갔다.

옆쪽의 랜드로버에 기대 서 있던 이윤제가 그들이 다가오자 머리를 돌렸다.

“이바노프!”

러시아어를 익히기 위해서 한쪽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을 빼고 트럭의 운전석 문을 열면서 김상철이 소리쳐 부르자 이바노프가 달려 왔다.

“이년을 차 안으로 밀어 넣어!”

“옛써.”

이바노프가 서은영을 뒤에서 번쩍 안아들었다. 운전석에 오른 김상철은 서은영과 이바노프를 싣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이제 바람 끝에 눈발이 실려 있었다.

와이퍼를 작동시킨 김상철이 차에 속력을 내자 이바노프에게 안겨 몸부림을 치던 서은영이 소리쳤다.

“이것 놔! 따라갈 테니까.”

한국말이었으므로 이바노프는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 반응이 없다.

“이바노프, 그만 풀어 줘.”

김상철의 말에 이바노프가 떨어졌다. 트럭을 스치고 지나는 바람소리가 날카롭게 들렸고 몰아치는 눈발도 점점 굵어져서 시야가 좁혀지고 있었다.

서은영이 머리를 들고 김상철을 쏘아보았다.

“왜 폭력을 써서 끌고 가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날 본부로 보내 달라고 했는데 말로 하면 될 것 아냐!”

앞쪽은 직선 코스로 흰 눈에 덮인 평원을 10킬로미터쯤 달리면 울창한 삼림에 덮인 구릉지가 나온다. 서은영이 말을 이었다.

“난 돌아가겠어. 보내 주지 않으면 너희들 회사를 고발할 거야. 모조리.”

“······.”

“내가 고려그룹의 조사단원으로 시베리아로 떠난 건 모두 다 알아. 너희들은 날 어떻게 하지 못해.”

트럭은 이미 나 있는 바퀴자국을 따라 제법 속력을 냈지만 눈발이 세지면 자국을 찾기 힘들어질 것이었다. 시간은 오후 3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바노프가 힐끗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속력을 내며 달리던 트럭이 가끔씩 바위나 웅덩이를 지나면서 기우뚱거렸으므로 이제 이바노프는 그녀의 몸에 부딪치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20분쯤 달려갔을 때 김상철은 눈보라 속에 희미하게 나타난 숲을 보았다. 이제부터 구릉지역이었고 끝없이 숲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구릉지역을 다시 10분쯤 달려간 김상철이 차를 멈추자 서은영과 이바노프가 동시에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너, 여기서 내려!”

김상철의 목소리가 차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어서! 끌어내기 전에.”

“날 어떻게 하려는 거야!”

목소리는 높았지만 그녀의 두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곧 이리떼들이 네 냄새를 맡고 몰려올 것이다. 네 시체는 흔적도 없이 찢겨질 것이고. 그러면 아무도 못 찾지.”

서은영이 이를 악물었다.

“고발할 거다.”

“고발 못하도록 없앤다는 거야.”

김상철의 시선이 이바노프에게로 옮겨졌다.

“이바노프, 이년을 끌어 내.”

둘이 주고받는 한국말에 잔뜩 귀를 기울였지만 답답하기만 했던 이바노프였다. 이바노프가 서은영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놔!”

이제 서은영이 찢어 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놓지 못해!”

그러나 이바노프의 힘에 끌려 서은영은 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밖은 이제 곧 영하 30도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김상철이 핸들을 틀어 트럭의 앞머리를 지질 탐사기지 쪽으로 옮겼을 때 서은영이 운전석의 문을 두드렸다. 트럭이 10여 미터를 달려 나가는 동안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트럭과 함께 달렸다.

트럭을 멈춘 김상철이 유리창을 내리고는 그녀를 바라다보았다. 넘어져서 이미 머리와 얼굴이 눈 범벅이 된 서은영이 흐느껴 울었다.

“한마디만 묻겠다. 컴퓨터 칩을 어디에 두었어?”

김상철이 소리쳐 묻자 서은영이 울음을 그쳤다.

“트럭 안에. 크림통 속에.”

무전기를 꺼내면서 김상철이 서은영을 향해 다시 소리쳤다.

“기지에 연락해서 찾을 때까지 거기서 기다려.”



밤이 되자 눈발은 조금 기세를 잃었지만 바람은 점점 더 거세졌다. 본부 경비 책임자인 림스키 상사는 트럭 밖으로 나와 좌우를 둘러보았다. 일주일 전부터 그의 제의에 따라 기지를 환하게 비추던 야외등을 모두 꺼 놓았으므로 밖은 먹물을 씌운 것처럼 어두웠다.

11시 30분이 되었지만 아직도 주위의 트럭에서는 희미한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들이 술을 마시며 떠드는 소리 였다. 병사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이곳의 분위기가 자유로운 데다가, 수당을 달러로 받게 될 희망 때문이었다. 술과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병사들의 사기를 한껏 높여주는 이유였다. 부대에서 가져온 식량과 부식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림스키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앞쪽의 화장실로 다가갔다. 병사들은 고려 직원들과 똑같은 식사를 제공받았다. 계약에는 없는 사항이었지만 유장석은 병사들 몫까지 식량을 보급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며칠 전에 세 대의 헬리콥터가 싣고 온 보급품 중에 보드카가 100병이나 들어 있었는데 유장석은 그 중 50병을 병사들 몫으로 나눠주었다. 화장실로 들어 간 림스키는 트림을 하고는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는 버릇처럼 목을 뽑고는 눈높이에 있는 환풍기 구멍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화장실용 트럭과 맞닿아 있는 러시아군 트럭의 운전석이었다.

“망할 놈들 같으니.”

오줌 줄기를 내뿜으면서 림스키가 투덜거렸다. 운전석이 비어있었던 것이다.

“이 개자식들이 어디로 갔지?

투덜거리던 림스키의 눈이 커졌다. 운전석의 바깥쪽 문이 반쯤 열려져 있었던 것이다. 림스키는 아직도 오줌 줄기를 뿜는 자신의 물건을 서둘러 바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곧 다리가 뜨뜻해졌으나 그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벨트에 차고 있던 루가를 뽑아든 그는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 총은 스리코프가 차고 다니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화장실의 문고리를 움켜 쥔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운전석에는 안드레이와 티코프 두 명이 보초근무로 나와 있었다. 영하 40도가 되는 이런 상황에서 운전석이 비어 있는데다가 문까지 열려 있다면······. 뻔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윽고 림스키는 어금니를 물고는 화장실의 문을 걷어차듯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허공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요란한 총성이 기지를 울리는 순간 림스키는 땅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비상! 비상이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면서 다시 몸을 굴렸을 때 옆쪽의 트럭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물체가 보였다.

“탕! 탕!”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며 림스키는 다시 몸을 한 바퀴 굴렸다.

“타타타타타.”

정확히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총구는 모두 림스키를 향하고 있었다. 림스키는 둔중한 몸을 굴려 트럭 밑으로 들어갔다. 식은땀이 흘렸다. 연속적으로 들려오는 총성은 모두 트럭 바깥쪽에서 안쪽을 향한 것이다. 림스키는 식은땀을 흘리며 루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적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려고 눈을 번뜩였다. 술에 취하긴 했지만 그는 군인이었다.



총소리에 제일 먼저 뛰어 일어난 것은 이대각이었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따라 일어선 유장석에게 말했다.

“상무님은 여기 계십시오.”

아직 잠을 자지 않고 있던 박스 안의 직원들도 서둘러 일어섰다.

밖에서는 이제 요란한 기관총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외침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박스 안을 두리번거리던 이대각이 급히 집어든 것은 얼음을 깨는 조그만 손도끼였다. 총알이 박스의 철판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대각을 선두로 직원들이 구르듯 밖으로 나가자 유장석도 방한복의 지퍼를 올리지도 못한 채 밖으로 뛰어내렸다. 이미 무장을 갖춘 러시아 병사들도 대부분 바깥으로 뛰쳐나와 요란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전실로 달려가던 유장석이 무엇인가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는데 감촉으로 보아 사람 같았다.

“이 부장! 이 부장 어디 있나!”

엎드린 채 그가 소리치자 총성 속에서 이대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깁니다! 무전실 앞입니다!”

그 순간 요란한 폭음과 함께 수류탄이 터지면서 트럭 한 대가 기우뚱거리며 옆으로 넘어졌다.

“이 부장! 불을 켜라!”

무전실 안에는 기지의 안팎에 세워진 전등의 스위치가 있다. 유장석은 손바닥을 더듬거리며 발에 걸렸던 물체 쪽으로 다가갔다.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인지 구분할 수는 없다 그의 더듬는 손끝에 차갑고 딱딱한 물체가 잡혀졌으므로 그는 서둘러 움켜쥐었다. 그가 찾고 있던 총이었다. 그 순간 사방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갑작스런 불빛에 유장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대각이 전등을 켠 것이다.

유장석은 바깥의 트럭 대열 사이에서 엎드리거나 서 있는 사내들을 보았다.

“쏘아라!”

목이 터져라고 이쪽에서 외치는 사람은 림스키일 것이다.

이쪽에서 빗발처럼 총탄을 쏘아대자 저쪽은 순식간에 너댓 명이 쓰러지더니 트럭의 바깥쪽으로 몸을 숨겼다.

“쫓아라!”

림스키가 권총을 휘두르며 달려 나갔고 부하들이 뒤를 따랐다.

“상무님!”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이대각이 그의 옆에 눈보라를 일으키며 엎드렸다. 그의 손에도 어디서 주웠는지 칼라시니코프 소총이 쥐어져 있었다.



전등이 켜지면서 쌍방이 노출된 상황 하에 총격을 주고받자 습격자들은 곧 어둠 속으로 물러갔다. 습격자의 정체는 예상했던 대로 그레고리 소령의 무리라는 것이 포로로 잡힌 부상자의 입을 통해 밝혀졌다. 그들은 10여 일 전부터 기지를 염탐했다는 것이다. 김상철과 이바노프가 보았던 불빛도 결국은 그들의 차량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모두 20명이 기지를 습격했다가 일곱 구의 시체와 두 명의 포로를 남기고 도망쳤는데 이쪽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20여 명 병사 중에서 네 명이 죽고 여덟 명의 부상자가 생긴 것이다.

그 중 두 사람의 부상자가 고려그룹 직원이었다. 아침이 되자 간밤을 꼬박 새운 사람들은 이곳 저 곳에 불을 피워놓고 둘러 앉아 지친 몸을 쉬었다. 다행히 무전기는 파괴되지 않아서 유장석과 림스키는 제각기 상황을 보고할 수 있었다. 유장석이 부상당한 주방장 양 씨와 장 대리를 살펴보고 있는데 트럭 안으로 림스키가 들어섰다.

“유 상무, 그레고리는 이곳에서 200킬로미터 남서쪽의 주그주르 산맥 중간 부근에 있다는 거요.”

림스키가 벽에 붙여 놓은 시베리아 지도의 한곳을 손끝으로 짚었다.

“본래 그레고리가 지휘해서 습격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정찰을 하던 놈들이 제멋대로 쳐들어 온 겁니다.”

“상사, 당신이 눈치 채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몰살당할 뻔 했습니다. 고맙소.”

“천만에, 난 내 임무를 다했을 뿐이오.”

“도망친 놈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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