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에피루스 [email protected]

영웅의 도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대체역사

이원호
작품등록일 :
2018.01.29 15:05
최근연재일 :
2018.01.29 15:10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3,982
추천수 :
62
글자수 :
90,574

작성
18.01.29 15:08
조회
318
추천
7
글자
20쪽

영웅의 도시 6화

DUMMY

“여보시오, 우린 한국의 대영그룹의 중역이오. 알고 있소?”

소리치듯 최선호가 말했으나 옆에 앉은 회색 머리칼에 눈동자도 회색인 사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당신도 들었을 거요, 한국의 대영그룹.”

“닥쳐!”

앞자리에 탄 사내가 몸을 돌리더니 거칠게 두 마디의 영어 단어를 뱉었다.

“알았어? 닥쳐.”

그것으로 차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차가 모스크바 호텔을 지나 스베르틀로프 광장 쪽으로 다가가자 문득 최선호의 머리에 러시아 호텔로 간 김성만 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그곳에 묵고 있는 경도대학의 이윤제 교수와 서은영 조교를 접촉하러 간 것이다.

이맛살을 찌푸린 최선호가 고정문을 바라보았다.

“이것, 러시아 호텔 쪽이라도 잘 되어야 할 텐데. 우리는 이 미친놈들한테 끌려가서 바로 나오기가 힘들 테니까 말이야.”

고정문이 겨우 기력을 차린 듯 최선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대영물산의 베를린 주재원으로 사교에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었지만 지금은 속수무책 인 것이다.

“어떻게든 지사에 연락을 해야겠는데요, 전무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끌고 가는 것을 보면······.”

최선호는 잠자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로서도 지금 상황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안인석이 배치 받은 곳은 고려전자의 영업부로 그가 지망했던 곳이다. 1년 매출액이 5조 원에 이르고 그중 4조 원 가량을 수출하는 고려전자는 종업원 수만 해도 3만 명에 이르는 거대기업이었다. 영업부는 본부장 밑으로 5개 부와 20개 팀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안인석은 영업 2부의 구주팀 소속이다.

팀장은 과장급이었지만 독립채산 방식으로 운영이 되고 있어서 독자적 인 자금집행을 했고 필요에 따라 팀원을 증감시킬 권한도 있다. 물론 연말 결산에서 팀의 실적이나 이익, 장래성 등이 엄격하게 평가되고 그에 따라 팀이 해체되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전쟁 이었다.

영업 2부는 메모리형 반도체의 수출부서로 올해의 매출목표는 1조 2000억 원, 달러로 환산하면 15억 달러이다. 그것을 네 개의 팀이 달성해야 하는데 구주팀의 목표는 2억 달러였다.

구주팀장 엄기호는 35세로 마른 몸매에 금테 안경을 낀 이지적인 용모의 사내였다 입사 10년째인 그는 작년의 과장 진급에 이어 올해에는 팀장이 되었으므로 매사에 의욕적이었다. 영업부서는 오로지 실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올해의 구주팀 내부 목표를 회사에서 책정한 2억 달러보다 20% 많은 2억 4000만 달러로 세워 두고 있었다.

컴퓨터에 나타난 1월의 수출 집계를 바라보던 엄기호가 머리를 들었다.

“안인석 씨, 박미정 씨.”

그가 부르자 앞쪽 책상에 앉아 있던 두 남녀가 일어나 다가왔다.

“당신들은 2개월쯤 수원공장에 내려가 현장실습을 받아야 정상인데.”

엄기호의 시선이 빠르게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팀 일이 바빠서 내가 당신들 교육 계획을 조정했어. 당분간은 팀의 일을 돕도록, 이상이야.”

엄기호는 컴퓨터의 모니터로 다시 시선을 돌렸고 그들은 자리로 돌아왔다.

“잘 됐죠?”

박미정이 옆자리에 앉은 안인석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녀는 영업 2부에 배속된 유일한 여사원이었는데 아직도 영업의 현장부서에서는 여사원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우선 체력에서 뒤지고 궂은일을 시키기가 거북한데다가 일반적으로 꼼꼼하기는 하지만 순발력과 뱃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안인석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강 대리가 팀장한테 그렇게 건의하겠다고 어제 오후에 말하더군요.”

강 대리라면 강형문 대리로 그들의 조장이다. 팀은 다시 네 개의 조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대리급이 조장이었고 조원은 5, 6명 규모였다.

그러자 이야기의 주인공 강형문 대리가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34세로 입사 9년째의 고참 대리였는데 내년에 과장 진급과 더불어 팀장이 되는 것에 모든 것을 건 것 같은 사내였다. 그리고 회사측도 그러한 전력투구를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안인석 씨, 고마쓰의 64메가 D수출가격을 조사하라고 했을 텐데.”

책상에 두 손을 짚은 강형문이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만의 합작공장에서 만들어낸 웨이퍼 가격이 덤핑으로 들어가고 있어.”

“알아보고 있습니다.”

안인석이 서류를 펼치며 대답했다.

“영국의 지사에 연락을 했더니 오늘 중으로 회신을 주겠다고 합니다.”

“다시 연락해 봐, 급하다고.”

“예.”

강형문이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독일의 공급가격 조사는 끝냈나?”

“여기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박미정이 컴퓨터에서 뽑아낸 자료를 건네주었다. 둥근 얼굴에 혈색이 좋은 강형문은 사람이 좋아 보이지만 독종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거기에다 술이 말술이어서 지난번 신입사원 환영회에서는 폭탄주를 열 잔이나 마시고 나서야 정식으로 술을 시작하는 바람에 신입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었다.

“좋아, 됐어.”

선 채로 자료를 훑어보고 난 강형문이 머리를 끄덕였다.

칭찬이었다. 그가 몸을 돌리자 박미정이 안인석을 향해 어깨를 슬쩍 추켜올렸다가 내렸다. 두 눈에 장난기가 스며들어 있다.

“강 대리가 여자한테는 약한데.”

안인석의 말에 박미정이 머리를 저었다.

“아니, 체크하는 거예요, 나를. 빈틈이 보이나 하고. 아마 방심했다가는 느닷없이 후려칠걸요. 저 사람 눈빛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그들이 회사 앞의 레스토랑에 들어섰을 때는 저녁 8시 30분이었다.

빌딩의 식사손님으로 아침부터 붐비는 곳이었지만 밤에는 손님이 뜸해져서 언제나 빈자리가 많았는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배고프지는 않으니까 와인이나 한 잔 해요, 간단하게.”

자리에 앉자 박미정이 말했다.

“정식 근무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마치 일 년도 더 지난 것 같아.”

매일 밤 9시가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고 일에 밀려서 토요일 도 6시까지 근무를 해온 것이다. 오늘은 일찍 끝난 셈이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입사동기로 같은 조에 배속되었지만 단 둘이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나른한 몸으로 와인 잔을 부딪쳤다.

“술맛이 나네. 이제야 직장인들이 퇴근 후에 한잔하는 기분을 알 것 같아요.”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애인 만나지 않아요?”

“걔도 바빠서.”

“회사 다녀요?”

“여행사에.”

이유미는 아버지가 소개시켜준 잡지사에 사흘을 다니다가 그만두고는 그랜드 여행사라는 대형 여행사에 당당히 시험을 쳐서 합격되었다. 오후 6시면 정확히 퇴근을 하는 이유미가 회사 앞에서 기다리는 것을 퇴근길의 박미정이 본 것이다. 와인 몇 잔에 박미정의 두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짧게 커트한 머리에 두 눈은 생기 있게 반짝였고 다소 엷은 입술 끝이 언제나 단정하게 닫혀 있는 그녀에게서 이유미와는 다른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박미정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술잔을 들었다.

“일 년쯤 지나면 제대로 일을 익힐 수 있을까? 안인석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 그보다 더 걸린다고도 하고. 하지만 당장에 일을 맡은 사람도 있으니까.”

“당장에 일을 맡다니, 그런 신입이 어디 있어? 경력사원 말하는 거 아녜요?”

“아니, 내 친구 중에 그런 놈이 있어. 신입사원 연수장에서 차출되어서 지금은 러시아에 가 있는데.”

“러시아에는 왜? 지사요원으로?”

“아니, 시베리아로. 개척단이래나 뭐라는 조직의 일원으로.”

“개척단이라니 거창하네.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데요?”

“글쎄, 그건 모르겠어. 어쨌든 험한 일인가 봐. 조건도 좋지 않고, 영하 40도가 넘는대나? 사람도 살지 않는 곳으로 들어간댔어.”

“그렇다면 차라리 이곳에서 몇 년이 걸리더라도 보조업무를 하는 게 낫겠다. 안인석 씨 친구는 자원한 거예요?”

“아니, 차출되었지, 강한 놈이니까. 합기도 챔피언을 지냈고, 머리도 좋아.”

“재미있는 사람이겠네요.”

“살아온다면 소개시켜 주지.”

안인석은 부드러운 와인을 조금씩 삼켰다. 헤어진 지 20일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 때문일 것이다. 회사에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그를 까맣게 잊고 있을 때가 많았고 이제는 이유미조차도 일주일에 한두 번밖에 볼 수가 없다.

안인석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직원들과 회식이 있다는 이유미도 지금쯤 어느 식당에 앉아 있을 것이었다.



세계 65개국을 가보았다는 스물아홉 살 난 박정남 대리는 별명이 발정남이었다. 허우대가 멀쑥했고 시원스러운 용모의 그가 어울리지 않게 목하 발정난 상태라는 후끈한 별명을 갖게 된 동기는 누군가가 그가 올린 결재파일의 이름에서 박을 발로 고쳐 썼기 때문이다.

그 박정남이 이유미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아까부터 잔만 비워지면 서둘러서 술을 채워준다. 영업부 미주과의 회식이어서 십여 명의 남녀 사원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

“자, 상 위에 있는 술들을 어서치우고 2차로 가자.”

상좌에 앉은 미주과장 오병식이 호기 있게 소리쳤다. 그는 이미 눈이 풀려져 있었는데 남자 직원들이 연달아서 술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유미 씨, 2차에 가서는 과장이 틀림없이 뻗을 거요. 아마 도중에 밖으로 샐 텐데 그때 우리끼리 3차로 갑시다.”

박정남이 낮게 말하자 이유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는 여사원들에게 인기가 있는 미혼남이었고 건너편에서 이쪽에 자주 눈길을 보내고 있는 미스 양이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박정남이 다시 입을 열려고 머리를 이쪽으로 숙였을 때다. 과장이 소리쳤다.

“야, 발대리.”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오병식 쪽으로 모아졌다.

“날 떼어놓고 너희들만 3차 갈 모의는 말아. 오늘은 안 넘어갈 테니까.”

“내빼지나 마십시오, 과장님.”

여행사의 분위기는 가벼운 편으로 상하관계가 격식을 따지지 않아 좋은 점도 있었지만 질서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여행사 사장 홍만규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홍만규는 프린스턴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작년부터 여행사의 전무로 경영에 참여했다가 금년 초에 사장이 되었다. 그의 부친 홍동수는 영동에 부동산만 몇 천억 원대를 가지고 있다는 재벌이었다.

“자, 500인을 위하여 건배다.”

다시 과장이 술잔을 들고 소리쳤다.

1월말이 아직 닷새나 남았는데 미국과는 이미 목표인 500명의 승객을 채운 것이다. 술잔을 든 이유미는 코끝이 빨개진 박정남 대리와 그 옆의 남자 직원, 그리고 입가가 지저분해진 여직원들과 끝자리의 과장까지를 한눈에 훑어보았다. 그러자 안인석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도 연일 야근을 하는 참이어서 며칠 전에 만났을 때에는 무척이나 지쳐 보였던 것이다.



박 대리의 예상대로 오 과장은 1차가 끝나기도 전에 정신을 못 차리는 바람에 겨우 택시에 밀어 넣었다. 그 와중에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남은 직원은 박 대리와 이유미, 그리고 남자 직원 두 명에 미스 양까지 다섯 명이다. 택시를 타기에도 어중간한 숫자여서 그들은 근처의 조그만 나이트클럽으로 들어섰다. 미스 양은 이유미보다 2년 선배인 스물다섯으로 피부가 고왔고 깔끔한 외모의 여자였다.

소문대로 술좌석 내내 그녀의 시선은 박 대리 근처에서 맴돌았는데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언니가 이쪽에 앉아.”

박 대리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미스 양을 그의 옆으로 밀어 앉힌 이유미는 남자 사원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양주를 두어 잔 마시고 나서 번갈아 가며 플로어에 나가 춤을 추고 돌아온 이유미와 남자사원 둘이 테이블에 남았을 때다.

“박 대리는 사장의 고등학교 1년 선배가 돼요. 사장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 갔지만 선배는 선배지.”

한 직원이 턱으로 플로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사장은 고둥학교 동문을 별로 챙기는 것 같지도 않는데 저 양반은 정성이야. 작년부터 동창회에 꼭 참석하고 나서 사장께 보고한단 말이야.”

“그것만 해도 굉장한 인연이네요. 뭐, 박 대리님은 출세하시겠네.”

이유미의 말에 한 사원이 웃었다. 그녀보다 2, 3년 선배로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는 사내였다.

“하긴 우리 여행사는 한국의 20대 여행사 안에는 드니까, 재력도 탄탄하고.”

“김 선배는 조금 피곤하신 것 같아요.”

“조금 지쳤을 뿐이에요, 일에.”

“벌써 지치면 어떻게 해요? 내가 보기에는 분위기도 좋고 보수도 괜찮던데요.”

“월급쟁이는 다 그게 그거지 뭐.”

그 선배가 양주를 홀짝이며 마시더니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내 나이에 사장 자리를 차고앉은 우리 사장을 봐요. 부모 잘 만나서 외제차 굴리고 다니면서 한 달에 몇 천만 원씩을 뿌리고 사는데 기 안 죽게 생겼소?”

“능력이 있으면 기회가 와요.”

이유미가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나는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봐요. 성공과 실패는.”

“이유미 씨는 꿈이 뭐요?

“글쎄요.”

술잔을 든 이유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대학 때는 그런 거 없었는데 회사생활을 하면서부터 생각이 만들어졌어요. 회사를 경영하는 거, 도전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미스 양이 환하게 펴진 얼굴로 박 대리와 함께 돌아왔으므로 그들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이유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일행들은 놀란 듯 머리를 들었다.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늦었어요.”

머리를 숙여 보인 이유미가 몸을 돌렸다. 박 대리가 몇 번 불렀지만 소음에 묻혀 곧 들리지 않게 되었다.



흰 눈에 덮인 대평원에는 나무 한 그루 자라나 있지 않았다. 한낮이었지만 흐린 하늘에 태양의 자취는 없고 칼끝 같은 바람이 눈가루를 날리며 평원 안쪽으로 휘몰고 갔다. 북위 62도, 서경 143도 5분 위치의 시베리아 대륙의 동남단. 아래쪽으로는 오호츠크 해로 이어지고 위쪽으로 거대한 대륙이 펼쳐진 불모의 땅이다. 40여 대의 트럭과 10여 대의 랜드로버로 구성된 개척단의 대열은 장관을 이루며 하바롭스크를 떠났지만 16일 후인 지금, 평원에 줄을 이어 서 있는 차량은 트럭 25대에 7대의 랜드로버로 줄어들어 있었다. 전문가 그룹 중에서 축산과 임업 두 분야의 네 명이 동상과 설사로 하바롭스크로 돌아갔고 직원 18명 중 5명도 마찬가지였다. 뒤쪽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스리코프 대위가 다가왔다. 그가 인솔해온 80여 명 병사와 12대의 트럭은 이제 60명에 7대가 되어 있었다.

“미스터 유, 동쪽으로 70킬로미터 정도만 가면 삼림이 나옵니다. 일단은 그곳으로 갑시다.”

30대 전후의 나이였지만 거친 피부에 수염이 무성해서 4, 50대로 보이는 그의 콧수염에는 얼음덩이가 매달려 있었다. 유장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은 이 바람부터 피하고 보자.”

기지를 선정해 두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잠시 정지되었던 대열이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장을 선 차는 김상철이 운전하는 예비트럭이었는데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앳된 얼굴의 러시아 병사였다. 길도 나 있지 않는 평원인데다 눈에 덮여 있어서 언제 함정에 빠질지, 얼어붙은 호수로 들어갈지 알 수가 없다. 이를테면 김상철의 트럭은 대자연에 던져진 미끼였다.

김상철의 트럭은 끝없이 펼쳐진 빙설 위를 천천히 나아갔다.

“이바노프, 유리 창 좀 닦아라.”

히터는 작동이 되었지만 환풍 장치가 막혔는지 유리창 안쪽이 부옇게 흐려졌다.

러시아어를 익히기 위해서 한쪽 귀에 카세트와 연결된 이어폰을 꽃은 김상철이 소리치자 이바노프가 서둘러 유리창을 닦았다. 그는 열아홉 살로 바이칼 호 근처의 타츠 태생 이었다.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서 군에 입대했지만 일 년이 지나도록 하바롭스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김, 사령관한테 달러를 많이 주었다는데, 당신 알고 있어?”

이바노프가 물었으므로 김상철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일주일이 넘게 같이 지내고 있는데 이바노프는 순진했다. 가끔씩 한국산 담배와 소주병을 주면 뛰어오를 듯이 기뻐하면서 가슴에 품고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즐겁기도 했다.

“난 모르는 일이야, 이바노프. 그리고 너도 그런 것 알 필요 없어.”

“김, 당신들은 한국에서 제일 큰 회사 사람들이고 달러를 엄청나게 갖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그건 회사가 그런 거지. 우린 너희들과 똑같아. 월급을 받는 월급쟁이란 말이다.”

다시 안개가 끼었으므로 이바노프가 수건으로 유리창을 닦았다. 트럭은 시속 20킬로미터 정도의 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눈구덩이를 지날 때는 10킬로미터 미만이 된다. 평원에 굴곡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눈에 덮인 비탈과 골짜기에서는 이런 속력도 낼 수가 없을 것이다.

갑자기 전방에 검은 무리가 나타났으므로 김상철의 몸이 굳어 졌다. 긴장한 이바노프도 옆에 세워 둔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움켜쥐었다.

“순록 떼야.”

앞쪽을 쏘아보던 이바노프가 이윽고 말했다.

“몇 마리 쏘아서 싱싱한 고기를 먹고 싶은데 안 됐군.”

요즘 며칠 사이에도 벼랑에서 구른 트럭이 두 대나 되었고 웅덩이에 빠져 엔진을 못쓰게 된 트럭이 세 대, 랜드로버가 세 대나 되었다. 처음에는 군의 트럭 서너 대가 앞장섰고 개척단의 랜드로버와 장비를 실은 트럭이 가운데, 그리고 후위에 다시 군 트럭들의 순서로 대열을 이루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대열은 흐트러졌다. 선두를 맡았던 군 트럭들이 계속해서 사고를 냈으므로 이제는 김상철이 선두를 서서 일주일이 넘게 달리고 있는 것이다.

“김, 대위가 마르첸코 중위를 딸려 부상자와 허약자를 돌려보내려고 하고 있어.”

이바노프의 말에 김상철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스무 명을 넘게 보내 놓고는 또 보낸단 말이야? 지금도 환자가 많아?”

“아니, 환자는 거의 없어.”

“그렇다면 왜?”

“대위가 자기 몫을 늘리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대위는 곧 당신들에게 사례비를 요구할 거야, 사례비를 받으면 졸병인 우리한테도 몇 달러씩 나눠주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바노프는 영어를 꽤 잘했으므로 김상철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머릿수를 줄여야 몫이 커진다는 말이었다.

“마르첸코 중위는 화를 내겠지만 허약자나 동상 걸린 놈들을 데리고 돌아갈 거야. 아마 20명쯤 돌아갈 거라고 해.”

김상철이 이바노프를 바라보았다.

“이바노프, 너는?”

“당신이 준 술과 담배를 대위한테 바쳤으니 아마 나는 남게 될 거야.”



영하 40도가 넘는 추위가 되자 대기 속의 미세한 얼음 결정이 달라붙으면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 차 있는 것이 공기마저 투명한 얼음덩이로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시베리아 사람들은 이것을 별의 속삭임이라고 부르지만 남쪽에서 온 사람들에게 그것은 온몸이 얼음이 되어 부서져 내릴 것 같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유장석은 모피 코트를 걸치고 눈만 내놓은 채 트럭 안으로 들어온 김상철을 맞았다.

“어서 와, 무슨 일 있나?”

그는 이제 김상철을 믿음직한 부하 취급을 했는데 그의 옆에 앉은 이대각이나 과장급 간부들도 이의가 없다.

김상철은 머리에 눌러쓴 털모자를 벗었다. 트럭은 뒷부분을 박스형으로 만들고 히터 장치를 해놓아서 10명까지 잘 수 있게 만들었는데 8대가 남아 있었으므로 러시아군에게도 4대를 나눠주었다.

“대위가 중위에게 20여 명을 딸려 되돌려 보낼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영웅의 도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0 영웅의 도시 10화 +1 18.01.29 428 7 20쪽
9 영웅의 도시 9화 18.01.29 286 6 20쪽
8 영웅의 도시 8화 18.01.29 283 6 20쪽
7 영웅의 도시 7화 18.01.29 303 9 20쪽
» 영웅의 도시 6화 18.01.29 319 7 20쪽
5 영웅의 도시 5화 18.01.29 335 5 19쪽
4 영웅의 도시 4화 18.01.29 326 5 20쪽
3 영웅의 도시 3화 18.01.29 351 5 20쪽
2 영웅의 도시 2화 18.01.29 438 5 20쪽
1 영웅의 도시 1화 18.01.29 914 7 2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