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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대체역사

이원호
작품등록일 :
2018.01.29 15:05
최근연재일 :
2018.01.29 15:10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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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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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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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574

작성
18.01.29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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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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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영웅의 도시 3화

DUMMY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곳을 철저히 조사하는 거야. 지질, 광맥, 그리고 원목의 상태 등 모든 것을, 여러 분야의 전문가를 데려 가야 하는데 네가 총책임자다.”

“예, 회장님.”

“너는 개척단장으로 상무 승진을 시키겠다. 한 달 동안 여기 이 실장과 함께 개척단을 구성하도록 해. 출발은 12월 20일로 잡는다.”

강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므로 이남호와 유장석은 따라 일어섰다. 유장석에게로 손을 내민 강 회장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아마 그곳에서 물속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게다. 강이 모두 얼었거든.”



김상철이 나타난 것은 처음으로 서울에 물이 언 날로, 입사시험을 사흘 앞둔 11월 27일이었다. 전화를 받은 안인석이 한달음에 약속장소인 카페로 달려왔다. 저녁 무렵이어서 카페에는 손님이 많았다.

“이 새끼, 어떻게 된 거야? 너 어디 있었어?”

그러자 김상철이 수척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며 웃었다.

“서울에 있었지, 어디 갈 데가 있나?”

“이 새끼야, 그럼, 왜 연락을 안 해?”

“어머니가 입원해서 병원에 있었다. 네 놈 걱정시키기 싫어서 민희한테는 여행 떠났다고 하라고 시켰는데······.”

놀라 눈을 치켜 뜬 안인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어디가 아프신 거냐? 이젠 괜찮으셔?”

“수술이 끝나서 조금 나아지셨어. 하지만······.”

그리고는 김상철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동안 공부를 못했어. 마무리를 했어야 되는데 야단났다.”

“기본실력이 있으니 넌 염려 없어, 인마. 네가 떨어진다면 붙을 놈이 없다.”

고려그룹의 1차 시험은 외국어와 상식이다. 거기에다 대학 4년의 성적을 참조하여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다른 기업처럼 1차에서 서류전형으로 골라내고 2차에서 시험을 치는 방식이 아닌 것은 학점이 좋다고 쓸 만한 재목이 된다는 법은 없다는 강 회장의 주장 때문이었다. 덕분에 경쟁률은 30대 1이 넘어서 시험장만 해도 십여 개가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 병원은 어디냐? 내가 문병을 가야겠는데.”

안인석이 다시 말머리를 돌리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시험이나 끝나고. 지금은 안정을 해야 돼. 걱정해 줘서 고맙다.”

“망할 자식, 날 친구로 생각했다면 진즉 이야기를 해주었어야지.”

“번번이 신세만 지기 싫었어.”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공사판에 나가 수술비를 보탰지. 반달쯤 일했는데 수당까지 합쳐서 100만 원 가깝게 벌었다.”

“너 설마 날 비꼬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 다른 놈이라면 몰라도 안인석이한테는 아니다.”

안인석이 시계를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다.

“네 전화를 받고 유미도 이쪽으로 나오라고 했어. 걔도 네 걱정을 했다.”

“난 지금 병원에 가봐야 돼. 잠깐 네 얼굴만 보려고 나온 참이야.”

“시간이 다 됐어, 10분만 기다려.”

“너희들끼리 있어, 난 갈 테니까.”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사람한테 다시 중언부언 말 늘어놓기 피곤해서 그런다.”

“야 인마, 걔도 네 걱정했다니까.”

“고맙다고 전해라.”

그러면서 몸을 돌린 김상철의 눈에 카페 입구로 들어서는 이유미의 화사한 모습이 들어 왔다.



저녁이나 먹고 헤어지자면서 안인석이 끌고 간 곳은 근처의 경양식집이었는데 모두 저녁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술을 마셨다. 두 병째 양주를 반쯤 비웠을 때 잔에 술을 채우는 김상철을 향해 이유미가 물었다.

“상철 씨, 내가 친구 소개시켜 줄까요? 괜찮은 애가 있는데.”

순간 안인석의 몸이 굳어졌지만 김상철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저 자식이 또 입을 놀렸구먼. 내가 지은이하고 헤어졌다는 걸 들은 모양이군.”

“말하면 어때요? 그게 무슨 비밀인가요?”

이유미가 테이블 위에 두 팔을 포개 얹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소개시켜 줄까요?

“고맙지만 싫어. 여유도 없고.”

“그럴수록 필요한 것 아녜요? 여자가.”

“아니, 오히려 짐만 되는 것 같아서.”

이유미가 힐끗 안인석을 바라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경양식 집이었지만 이곳저곳의 테이블은 술을 마시는 손님들로 차 있었다. 술병을 든 김상철이 이유미의 잔에 술을 채웠다

“인석이가 또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합디까?”

안인석이 눈을 치켜떴다.

“야, 인마,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마셔.”

“우리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 않습디까?”

“야, 상철아.”

김상철이 당황한 표정의 안인석을 바라보며 웃었다.

“인마, 그것까지 얘기해 줘야 여자 소개시켜 준다는 말이 안 나올 것 아냐?”

“그만해 둬, 인마.”

이제는 안인석도 화가 난 표정이다.

“넌 피해망상이야, 신경과민이라고.”

“내가 그랬다면 벌써 정신병원에 갔을 것이다.”

술잔을 든 김상철이 한 모금에 술을 삼켰다.

“넌 유미 씨한테 내 이야기를 모두 해 주도록 해.”

“무슨 이야긴데 그래요?”

이유미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

“내가 실수한 것 있어요?”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버지 이야기는 뭐죠?”

“나중에 인석이한테 들어요.”

가라앉은 분위기를 끌어올릴 화제도 없었고 모두 의욕도 나지 않았으므로 술좌석은 곧 끝이 났다.

경양식집을 나와 김상철과 헤어진 안인석과 이유미는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갔다.

“재수 없어, 정말.”

안인석의 팔을 낀 이유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버지 이야기는 뭐야? 말해 봐, 무슨 일인지.”



시련과 도전



고려그룹의 비서실은 실장 밑에 십여 명의 남자직원과 대여섯 명의 여직원이 있을 뿐이어서 대영그룹의 방대한 비서실 조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비서실장은 대영그룹처럼 회장단이나 사장단 회의에 참석하는 적도 드물고 그룹의 경영을 조정하거나 감시하는 권한도 없다. 따라서 비서실장 이남호는 고려그룹 사원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물론 비서실의 업무도 알려져 있는 것이 드물다. 그래서 고려그룹 직원들은 비서실 업무가 강 회장의 일정이나 조정하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부서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겉으로 나타내지 않을 뿐이지 강 회장의 모든 지시는 비서실에서 다듬어져 나갔고 모아져서 보고되었으므로 중역들은 비서실의 눈치를 보았다. 이남호는 회장의 분신 같은 사내로 20년이 넘게 회장을 모시고 있었는데 회장의 심기를 누구보다도 잘 읽는 사람이어서 그룹장인 회장들도 그에게 회장의 근황을 물을 때가 있다.

회장실에서 나온 이남호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 옆쪽의 소파에 앉아 있던 유장석이 일어섰다. 그는 이제 비서실에 만들어진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소파로 다가가 앉은 이남호가 입을 열었다.

“밀고 나가기로 했어, 다만 개척단은 우리 내부에서만 사용하는 명칭으로 하고. 유 상무의 공식 직함은 러시아 지사 특별자문역이야.”

“특별자문역이요?”

멍한 표정으로 유장석이 되묻자 이남호가 둥근 얼굴을 더 넓게 펴며 웃었다.

“그래, 그 빌어먹을 놈들이 북한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할 수 없어.”

러시아와는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는 주그주르 산맥 근처의 임차계약에 난데없는 방해꾼이 나타난 것은 일주일쯤 전이다. 그것은 북한당국이었는데 북한주재 러시아 대사를 불러 강력히 항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부장이 모스크바로 날아가 수상을 만나기까지 했다. 일차적인 이유는 임차 예정지역에서 200킬로미터쯤 아래쪽으로 북한의 벌목사업소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러시아 정부는 태도를 변치 않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쪽의 한국 정부가 우려를 나타낸 것이다. 기업 활동이 국가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는 말이었으나 그것이 어떤 정책인지를 말해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강 회장은 편법을 만들어 개척단 전원을 모스크바 지사로 발령을 내고 그곳에서 시베리아로 보낼 작정인 것이었다.

“정부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북한 벌목소가 무슨 문제라고, 개새끼들.”

유장석이 투덜거렸다.

“쓸데없는 간섭만 안 했다면 한국기업은 지금보다 두 배는 더 성장했을 겁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남호가 탁자 위에 서류를 펼쳤다.

“지질, 임업, 자원, 영농 네 분야의 전문가는 모두 준비가 되었는데 축산은 아직 연락이 없나?

“오늘 중으로 결정이 날 겁니다, 전무님. 제가 두 사람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어설픈 사람을 고르면 안 돼. 신체도 강해야 하고, 괜히 며칠 있다가 돌아오게 되면 낭패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 달간 조사에 숙식을 제공하고 3천만 원씩이나 지급하는데 만약 공개모집을 한다면 줄을 설 겁니다.”

“이젠 입조심을 해야 돼. 그 사람들을 개별 출국을 시켜서 모스크바에 집합시켜야 된단 말이야. 정부에서 알면 어떤 조처를 취할지도 모르니까.”

“알고 있습니다.”

“정말 짜증나는구먼.”

이제는 이남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쨌든 그 사람들에게 정부의 입장 따위를 말해줄 필요는 없어. 기업비밀이니까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유럽으로 장기여행을 떠난다고 말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또······ 내부에서 선발할 인원이 남았는데.”

서류를 덮은 이남호가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전권을 자네에게 맡기겠어, 자네가 데려갈 사람들은 자네가 뽑아.”



외국어는 말하기와 듣기에다 해석과 작문으로 두 시간에 걸쳐 시험을 보았고 상식은 완전 필기시험으로 한 시간이었다. 아침 9시에 시작된 시험은 오후 1시 가깝게 되어서야 끝났다.

이제 일주일 후에 1차 합격자 발표가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면접이 있다. 1차 합격자는 750명 모집 정원에 1천 명 정도가 될 것이라니 면접심사에서 약 25%가 다시 제외되는 것이다.

시험을 끝낸 김상철이 어머니의 병실에 들어선 것은 오후 3시 무렵이었다. 링거를 팔에 꽃은 어머니는 잠이 든 모양인지 움직이지 않았고 침대 옆에 서 있던 민희가 머리를 들었다.

“오빠, 시험 잘 봤어?”

어머니를 닳아 작은 체구에 목소리도 가늘다.

“그래, 그런데 어머니는 어떠셔?”

“계속 잠만 자.”

“너 점심 먹었어?”

“배 안 고파.”

“가서 먹고 와.”

김상철이 점퍼 주머니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민희에게 내밀었다.

“생활비다. 3백만 원이야.”

“오빠, 돈을 이렇게 많이······.”

민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인석이한테 빌렸어. 입원비가 모자랄 것 같아서.”

안인석이 생활비를 대주고 있는 것을 민희는 모른다.

민희를 내보낸 김상철은 간이침대에 앉아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잠든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이제까지 한 번도 아버지를 거역하거나 말다툼조차 해본 적이 없는 어머니였다. 물론 아버지가 어머니의 속을 썩인 적도 김상철의 기억에는 거의 없다. 어머니는 아직도 아버지의 결백을 믿었고 설령 아버지가 사실을 털어놓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었다.

김상철은 어머니의 앙상한 손을 쥐었다.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으므로 그는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눈을 떴다.

“시험 잘 끝났니?”

가늘고 약한 목소리로 물으며 어머니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잘 끝났어, 어머니.”

“일주일 후가 발표라고?”

“응.”

어머니는 가늘고 긴 숨을 내쉬었다.

“네 아버지한데 내가 병원에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

“안했어. 어머니는 일 때문에 바쁘시다고, 이모하고 같이.”

그러던 김상철은 말을 멈추었다. 어머니의 눈초리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귀를 적시고 있었다.

“어서 나아서 면회를 가야 돼, 엄마.”

김상철이 손끝으로 어머니의 눈물을 훔쳤다.

“내 불쌍한 새끼들.”

천장을 바라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네 아버지가 그렇게 된 것은 모두 내 탓이다. 나는 아버지가 돈을 들고 오면 좋아하기만 했어.”

“엄마, 이제 그만.”

“상철아.”

어머니가 김상철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의사가 뭐라고 했어? 낫는대?”

“그럼, 엄마. 수술도 잘 끝났는데, 엄마가 기운만 차리면 낫는대요.”

“차릴 거야.”

그러던 어머니가 지친 듯 눈을 감았다. 얼굴이 엷게 상기된 어머니는 가쁘게 숨을 쉬다가 이윽고 다시 잠이 들었다. 의사는 수술은 잘 끝났지만 허약한 체질이어서 합병증이 염려된다고 말했다. 회복가능성은 수술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로 반반이라고 했는데 그건 환자가 위험한 상태임을 나타내는 의사들 특유의 표현인 것 같다.



“더구나 어머니가 병원에 계셔서 생활이 말이 아닌가 봐.”

커피 잔을 내려놓은 이유미가 한지은을 바라보았다. 강남대로 변에 있는 2층 카페는 언제나 손님이 들끓었는데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빈자리를 기다리려고 카운터 앞에도 십여 명의 손님이 서 있었다.

“오해하지 마, 지은 씨. 난 김상철 씨와 지은 씨 사이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다만 나는 김상철 씨를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만나야만 돼. 인석 씨가 그 사람하고 둘도 없는 친구니까 말이야.”

“안됐어. 어머니까지 그렇게 되셔서, 정말 견디기 힘들 거야.”

한지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그저 잘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이유미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한지은과는 김상철과 넷이서 여러 번 어울린 적이 있었으나 이렇게 둘이 만난 것은 처음이다. 이유미가 불러내자 그녀는 순순히 나왔지만 경계하는 빛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조금 풀려져 있다.

“하긴 나도 며칠 전에야 알았으니까, 김상철 씨 집안에 대해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면서 이유미가 말했다.

“인석 씨도 철저히 입을 다물고 있었단 말이야, 난 배신당한 기분이었어.”

“난 말도 못해. 아버지가 우연히 그 일을 알게 되시고 나선 집안이 뒤집혔어.”

“······.”

“전에 집으로 인사 왔을 때, 오빠는 아버지가 시골에 계신다고 했어. 공무원이셨는데 쉬고 계신다고.”

“······.”

“그래서 어머니가 무슨 공무원이셨냐고 물으니까 세무공무원이라면서 웃었어. 난 그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해.”

“······.”

“우리 부모님은 오빠를 좋아하셨어.”

“교도소에 계신다고 말했으면 나아졌을까? 지금보다?”

한지은이 머리를 끄덕였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이해하려고 노력은 했을 거야. 우리 부모님도 막힌 분들은 아냐.”

“······.”

“비뚤어졌어. 아버지의 말씀이 맞아. 난 이제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야.”

“이제 알았어.”

담배 연기를 내뿜은 이유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둘이 헤어진 이유를 말이야.”

“아버지가 생활에 보태 쓰라고 준 돈도 거절했어. 비뚤어져서 우리 호의까지 무시한 거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니까 그랬겠지.”

그러자 한지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존심은 무슨······ 아버지는 걱정하고 계셔.”

“뭘 말이야?”

“혹시나 하고.”

“상철 씨가 어떻게 나올까 봐?”

“그 사람은······ 어떨 때는 무서워.”

이유미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나도 그 사람이 싫었어. 분위기가 어둡고, 짐승처럼 사납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아냐.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이해 할 수 있을 것도 같아.”

“나하고는 입장이 다를 테니까, 아무도 내 입장이 되어서 생각 할 수 없어.”

“솔직히 오늘 내가 지은 씨를 만난 것은 인석 씨가 부탁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그래. 무슨 문제가 생기면 상의할 사람이 있어서.”

“무슨 문제라니?”

“나 요즘 남자 생겼어. 친척 소개로.”

“잘 됐네. 그런데 무슨 문제야?”

“귀찮게 될까 봐.”

그러자 이유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꿈에서 깨어났다면서 아직도 꿈같은 소릴 하네. 그럴 일 없어. 왜냐하면 상철 씨는 지은 씨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았으니까.”

“······.”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어. 그 사람에 대해서 숱하게 들어왔으니까. 인석 씨한테서.”

“······.”

“그러니 걱정 마.”

이유미가 밝은 표정으로 일어났으나 한지은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때? 가겠나?”

유장석이 부드럽게 물었으나 앞에 앉은 이윤환 대리는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유장석이 아끼는 부하로 지금 충주의 공사 현장에서 자재업무를 맡고 있다가 불려 올라온 것이었다. 이윽고 떡 벌어진 어깨를 펴며 이윤환이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소장님, 그럼, 저희들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시베리아로 가서 그곳에 계속 근무하게 되는 겁니까?”

“기반이 잡힐 때까지다.”

유장석이 잘라 말했다. 성격이 사내다워서 거친 일꾼들도 그의 말은 고분고분 따랐고 업무처리 능력도 뛰어난 이윤환인지라 이번 일에 꼭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시베리아는 다른 곳과 다르다. 완전 미개척지 야. 그곳을 우리가 개발하는 것이지.”

유장석이 이윤환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 갈 테냐 안 갈 테냐? 대답을 해.”

이제 다그치듯 유장석이 묻자 이윤환이 몸을 굳혔다.

“소장님, 저는 한국을 떠날 형편이 못 됩니다. 처가 임신 중이고······.”

유장석이 탁자 위에 놓인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윤환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한국은 어느 곳이라도 소장님을 따라가겠습니다만, 외국은······.”

“알았다.”

머리를 끄덕인 유장석이 손을 저었다.

“나가 봐.”

“소장님, 죄송합니다.”

이윤환이 나가자 이대각 부장이 방으로 들어섰다. 작달막한 몸매에 머리가 커서 이대가리라고도 불리는 사내였는데 유장석의 심복으로 이번 개척단의 부사령관이다. 물론 부사령관이란 직함은 제 스스로 지어서 저만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간답니까?”

앞에 앉으며 그가 대뜸 물었다.

“눈치를 보니까 뺀 것 같은데, 어때요?”

“마누라가 임신 중이고 어쩌고 해서 못 간다는데, 외국은.”

“개새끼 같은 새끼.”

이대각이 눈을 치켜떴다.

“저 개새끼, 자재 맡으면서 상납 받을 것이 밀린 모양이오. 자릅시다, 상무님.”

건설에서 잔뼈가 굵은 이대각이라 말투가 험하다. 유장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정보만 새겠어. 안 간다는 놈들을 모두 자를 수는 없고 말이야. 병신 같은 놈들 같으니.”

“외국은 못 간다니 저 놈은 소록도의 도로공사 현장으로 보내지요. 소록도 소장에게 철저하게 다루라고 해놓고 말입니다.”

“앞으로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해.”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이대각이 탁자 위에 서류를 펼쳤다.

“자재만 빼놓고는 책임자급 사원은 결정되었습니다. 이건 보조사원 후보자들의 인적사항입니다.”

개척단의 인원은 외부에서 초빙한 전문가 8명과 그들의 장비를 수송하고 개척단 업무를 진행 할 고려그룹 사원 20명으로 구성될 계획이었다. 유장석은 대부분의 인원을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고려 건설 내부에서 선발하고 있었다.

후보자 명단을 바라보던 유장석이 머리를 들었다.

“이 일은 그룹 내에서도 비밀이야. 회장님과 비서실장, 그리고 중공업 회장 등 몇 명만이 알고 있는 일이야, 비밀을 지켜야 돼.”

“염려 마십시오. 모두 믿을 만한 놈들이라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물으면 모스크바 지사에 파견 나간다고만 하라고 했습니다.”

“어제 이 실장이 그러는데 총리실에서 연락이 왔다는 거야. 남북관계에 지장이 있는 행동은 기업측에서 삼가해 달라고.”

“웃기는 일입니다, 상무님.”

“내일부터 연수원의 사무실에 모여서 준비를 하도록. 장비도 먼저 보내야 할 테니까, 보안도 유지할 겸 말이야.”

“알겠습니다.”

이대각이 활기 있게 일어섰다.

“서로 얼굴을 익히고 팀워크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 모르는 사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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