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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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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8
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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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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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아랑누_쇳디

DUMMY

금협의 밤거리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구름이 끼어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상비위대 순찰조를 제외하면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민가의 창문으로 흐린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 불빛마저 없다면 금협은 폐허나 다름없을 것이다.


“누님, 꼭 오늘 찾으려고요? 호설더러 알아보라고 하죠.”

“호설도 둘러보고 있어. 하지만 상대가 진짜 요괴라면 호설을 피해갈 거야. 우리가 찾아야 해.”

“이건 뭐, 우리가 살아있는 미끼네요. 아훔, 정말 피곤한데···. 누님, 제가 소품도 손질하는 거 아세요? 단장님이 그림 잘 그린다고 칭찬해주셨어요.”


이연이 졸린 눈을 억지로 뜨면서 자랑을 늘어놓았다. 졸음이 몰려와서 말이 점차 웅얼거리는 소리가 되어갔다.


아랑누가 지팡이를 세우고 걸음을 멈추었다.

골목 저편에서 음습한 기운이 몰려왔다. 발소리도 들렸다. 보통 사람은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발을 끌며 걷는 소리. 적어도 세 사람 정도는 되어 보였다.


“쇳디입니다.”

이연이 한발 나서며 아랑누 앞을 막아섰다. 소년의 몸 안에 숨어있던 혼이 얼핏 내비쳤다.


짙은 자줏빛으로 바뀐 이연의 눈에 쇳디들이 들어왔다.


찢어진 옷자락이 너덜너덜거렸다. 때 묻고 갈라진 살갗은 마른 저수지 바닥 같았고 군데군데 피딱지가 앉았다.

두리번거리며 비틀거렸다. 그들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아랑누의 영안에도 그들이 보였다. 어둠보다 짙은 어둠이 다가왔다.

‘저들도 미사랑의 혼 조각을 찾는 걸까?’


이연의 몸속 깊은 곳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선량하고 강직한 혼은 아직 영력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결계의 주문 정도는 가능했다.

그의 주문은 공기를 타고 아랑누의 신령석과 만나 보호막이 되었다.


‘이 결계···. 스승님만큼이나 강해. 대체 누구의 영혼일까?’

죽어가는 이연을 살려주고 그 몸에 숨은 혼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가 만든 결계에서 강하고 순수한 기운을 읽었다.


아랑누의 놀라움에는 아랑곳없이 이연은 보호 결계에 집중했다. 결계 안은 아늑하고 편안했다.


흉측한 쇳디가 다가와도 무섭지 않았다.

바로 옆을 지날 때 서늘한 살갗이 느껴졌다. 흠칫 몸이 굳었다.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쇳디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쇳디가 지나가자 순식간에 결계가 사라졌다.


이연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아랑누의 지팡이를 요란하게 흔들었다.

“누님, 지금 뭔가 지나갔죠? 그렇죠? 뭐예요?”

“아니야. 아무것도.”

“이상하다? 분명 뭔가 서늘한 것이 지나갔는데?”

이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계를 만들어준 혼을 찾아보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 여린 영혼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너무 힘을 많이 썼구나. 가뜩이나 미약한 힘이었는데.’


신령석 팔찌를 바라보았다. 흐린 불빛 아래에서도 연둣빛을 품었다.

‘이런 능력도 있었나.’

그녀가 보는 것을 아는지 신령석이 깜빡거렸다. 색도 빛도 보지 못하나 빛이 흐려졌다 세지는 것은 느꼈다.


사뿐히 땅을 딛는 발소리가 났다. 흰 털을 날리며 호설이 물결치듯 다가왔다.

“보았느냐? 쇳디들이다.”

“어떻게 없애지?”


“내 발톱이면 단숨에 가루가 되겠지. 하지만···.”

“하지만이라니?”

“요귀가 혼을 가둬놓았을 거다. 육신을 먼저 처리하면 혼은 찾을 수 없다.”


바늘이 지나가듯 마음이 따끔거렸다.

“안 돼. 혼이라도 편히 쉬게 해줘야지. 먼저 혼을 찾아야 해.”


호설이 흰 꼬리를 천천히 세웠다.

“네가 하겠다면···, 도와주마. 성읍 근처에는 요귀가 없으니, 벼리산을 살펴보겠다.”


이연의 옆을 지나치며 호설이 고갯짓했다.

“어서 돌아가라. 여기는 위험하다.”

“예! 예! 빨리 들어가야죠.”

이연이 아랑누의 지팡이를 잡아끌었다. 그제야 호설은 거리의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누님, 나한테 거짓말했죠? 쇳디라잖아요.”

“안 보는 게 좋을 거야. 사람들이 못 보게 주술을 걸어서 고마울 정도라니까.”


“그 정도예요? 얼마나 끔찍한지 보고 싶네요. 어서 가요, 또 부딪치면 어떡해요. 아휴, 무서워라.”

“얼마나 끔찍한지 보고 싶다며?”

“말이 그렇다는 거죠. 누님도 참. 어떻게 해야 없앤대요?”

“이미 죽은 몸이라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될 거야.”

“방법이 없어요?”


그들이 찾는 존재는 아랑누 자신일 것이다.

보라사막에서 사다녜들을 괴롭히던 거미 요귀가 떠올랐다. 이연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아침 햇살이 극단 정원에 비쳐드는가 싶었는데, 요란한 까마귀 소리가 아랑누를 깨웠다.

창문 밖에서 울리는 도조의 목소리는 흥분을 이기지 못해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이것 봐, 이것 봐! 멧돼지다! 멧돼지라고!”

“쉿! 사람들 다 깨겠다. 조용히 해.”

“눈사람, 네가 잡아 왔어? 아니지, 그 눈호랑이···.”

도조가 말하려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온설지가 까마귀의 다리를 낚아챘다.


도조는 거꾸로 매달려 바동거리다 간신히 빠져나왔다.

“알았다, 알았다고. 대신 나한테 다리 한 짝 줘.”

“맹랑하네. 네가 어떻게 그걸 다 먹어?”

“뭐야? 나 이래 봬도 신조···.”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바닥을 통통거리다가 단원들의 발을 피해 서둘러 날아올랐다.


단원들이 멧돼지를 보러 부리나케 달려왔다. 시끄러운 까마귀 소리에 이끌려 멧돼지를 발견한 것이다.


둥그렇게 모여서 환호성을 올렸다.

“와, 이게 웬 횡재야? 잔치해도 되겠어.”

“마침 오늘 공연도 없는데.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지?”


그들 사이를 비집고 아라치와 두나가 온설지를 찾아 들어갔다.

“온설지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잡아 온 거예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는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두나가 손뼉을 치며 뛰어올랐다.

“와, 정말 멋있어요. 오라버니, 그런데 이거 어떻게 해요?”

“내가 손질할게.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야. 요리는 내 전문이잖아.”


온설지는 커다란 멧돼지를 들쳐 메고 부엌으로 향했다.

단원들이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기대에 부풀어 노래를 부르며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었다.


*


사람들이 숙소에서 멀어지자 아랑누는 창문에서 물러나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끌어안고 다시 잠을 청하려다가 포기하고 일어났다.


‘쇳디를 찾겠다더니 멧돼지 사냥을 한 거였어?’

호설에게 그런 엉뚱한 면이 있다니.

그래도 사람들이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살림이 어렵다는 것을 호설도 알았을까.


‘쇳디를 찾았는지는 밤이 되어야 알 수 있으니, 나도 구경이나 할까?’

아랑누도 온설지의 솜씨를 구경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


온설지는 능숙하게 털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발라냈다. 고기를 손질하고 장작을 지피는 일이 몸에 밴 듯 자연스러웠다. 망설임도 군더더기도 없었다.


“형씨,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아예 전속 요리사로 남지, 그래?”

나이 많은 단원이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


“오라버니가 우리랑 같이 지내면 좋겠다. 어디 안 가고.”

두나가 말하자 도조가 노려보았다.


“눈사람은 이 몸을 위해 할 일이 있다. 찾을 것도 많고, 갈 곳도 많아.”

도조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까마귀 소리로만 들리니 아무리 꽥꽥거려도 소용없었다.


장작불 위에 통돼지가 얹어졌다.

이연이 도조를 붙잡아 마당으로 데리고 나왔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불이나 잘 지켜.”

“그럴 거다. 누가 내 고기 가져가면 안 되니까.”

“네 고기?”

“다리 한 짝은 내 거야. 꼬맹아. 건드리지 마.”

“어휴, 그래. 꼼짝 말고 여기서 잘 지켜. 알았지?”


이연이 말하지 않아도 도조는 고기 앞을 떠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장작을 부리로 밀어 굴리는데 침이 뚝뚝 떨어졌다. 땀인지 침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도 팔이 있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쳇!’


도조가 씩씩거리는 동안 이연과 다른 단원들도 온설지를 도왔다. 오늘 점심은 풍성한 만찬이 되리라. 모두의 마음이 부풀었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아랑누는 길가온을 찾았다. 부엌과 마당 어디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아랑누는 지팡이를 또각거리며 극단 건물을 둘러보았다.


*


원형극장 안은 어두워도 높은 창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맞은편 벽을 밝게 비추었다. 그 덕에 불을 켜지 않아도 극장 안을 다닐 수 있었다.


아랑누는 빛이 없어도 긴 의자와 무대를 알 수 있지만, 아침 햇살에서 밝고 힘찬 기운을 받으니 기껍고 즐거웠다.


무대 바로 앞에 길가온이 앉아있었다. 지팡이 소리를 들었을 텐데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랑누가 들어온 것을 느끼고 유기의 혼이 먼저 다가왔다. 반갑다고 인사하듯 지팡이 주위를 맴돌았다.

“왜 여기 혼자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잔치 분위기인데?”


길가온은 옆자리의 아랑누를 바라보고는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유기의 혼을 본다고 하셨죠? 유기가 뭐라던가요?”

“당신을 도와주고 싶대요.”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마개로 막힌 듯 꺼끌거리는 목소리가 극장 안을 울렸다.

“도와준다고요? 나 같은 사람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요?”


아랑누는 가만히 길가온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당신의 노래 들었어요. 나도 노래하고 싶어졌죠. 그래서 더 괴로워요.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 이런 소리로 소망을 가진다는 것이.”


그의 공허한 눈이 무대 속 다른 세상을 찾았다.

“난 노래할 자격도 없어요. 유기도 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용서받고 싶다면 지금도 할 수 있어요. 당신이 가장 잘하는 것으로, 그가 가장 바라는 것으로요.”

아랑누가 유기의 혼을 향해 손을 들었다.

유기의 혼이 길가온 주변을 맴돌다가 그녀의 손바닥 위로 내려앉았다. 풀이 죽어 축 늘어졌다.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좋은 징조야. 조금만 기다리면 스스로 방법을 찾을 거야.’

아랑누가 마음으로 속삭이자 유기의 혼도 동그란 모양을 되찾았다.


길가온의 눈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숨겨둔 울음이 한숨으로 나올 때까지 아랑누는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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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사로잔_임무 수행 22.06.28 48 1 12쪽
90 사로잔_설명과 증언 22.06.27 44 1 11쪽
89 사로잔_별의 심장 22.06.27 47 1 11쪽
88 사로잔_휘파람의 주인 22.06.26 40 1 10쪽
87 사로잔_정찰대 22.06.26 41 1 12쪽
86 사로잔_마른 협곡 22.06.25 46 2 12쪽
85 사로잔_흥겨운 만찬 22.06.25 43 1 11쪽
84 사로잔_늑대조와 사자조 22.06.24 43 1 12쪽
83 사로잔_의외의 임무 22.06.24 40 1 12쪽
82 사로잔_소년병 22.06.23 41 1 10쪽
81 사로잔_용병 모집소 22.06.23 43 1 11쪽
80 사로잔_소문과 소문 22.06.22 42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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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천계_염라성 아유라 22.06.19 40 1 10쪽
73 천계_진백성 율명 22.06.19 48 1 13쪽
72 아랑누_일상다반사 22.06.18 52 1 10쪽
71 아랑누_오두막의 공연 22.06.18 41 1 11쪽
70 아랑누_송환술 22.06.17 41 1 11쪽
69 아랑누_공조 22.06.17 41 1 10쪽
68 아랑누_유기의 사연 22.06.16 44 1 14쪽
67 아랑누_지하 사당 22.06.16 43 1 14쪽
» 아랑누_쇳디 22.06.15 44 1 11쪽
65 아랑누_극단 가빈 22.06.15 53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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