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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난 님의 서재입니다.

천로행(天路行)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김유난
그림/삽화
본인
작품등록일 :
2024.01.15 22:19
최근연재일 :
2024.03.15 22:50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6,282
추천수 :
45
글자수 :
254,396

작성
24.03.0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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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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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6쪽

32. 하북행 (3)

DUMMY

종약 선생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평범한 이들의 삶을 지켜내겠다는 이유로 이곳에 정착했지만, 그렇게 나 자신마저 속였지만···, 생각해보면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천마가 마지막까지 거들떠보지 않을 곳을 찾다 보니, 결국 이 지저분한 도시를 택하게 되었지.”


“······.”


“선행에 몰두했던 것은···, 나도 잘 모르겠구나. 성현의 가르침을 따른 진심으로 의행(義行)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겠다는 발버둥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천마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함이었는지.”


“아니, 어찌 선생께서 자책하시오?”


종약의 말에, 내가 따지듯 대꾸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입신경(入神境)에 오른 천마를 두려워함은 너무나 당연하오. 나는 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였고, 그저 그의 편린(片鱗)만을 엿보았을 뿐이나, 나 역시도 그가 심히 두렵소이다.”


여전히 회한에 잠긴 선생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말을 이어갔다.


“선생, 군자의 도는 행함으로 좇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생께서는 이미 밤낮으로 성인의 덕을 행해 오셨고···.”


“그렇게 생각하느냐.”


종약은 거지굴과 그 너머 펼쳐진 산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군자는 행함으로 도를 좇는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군자가 무엇을 행할지를 정할 때는, 그의 앎을 따라 정하는 것이렸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앎과 행함이 너무나 달랐던 놈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네가 나라면 어떻게 판단하겠느냐? 내가 천하 만민을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일까? 이곳 정주 거지굴에서 빈자들을 돌보는 일일까, 아니면 사천 암산(巖山)에서 마주한 그 마도(魔道)의 존재를 다시 한번 좇는 일일까?”


“······.”


“그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일이다. 천마의 존재를 목도한 내가 이 강호를 위해 해야 할 일이란, 목숨을 걸고 너와 함께 천마를 좇는 일일 터. 내가 방금 너를 내 스승이라 부른 이유가 이것이다. 네가 여기 머문 석 달의 시간 동안 내게 이를 깨닫게 해주었으니까. 그런데 이놈의 늙은 머리가 돌처럼 굳어버렸는지, 너무나 명백한 이 이치를 어젯밤이 되어서야 깨달았군. 하하하.”


종약의 말에 나는 숙연해졌다.


한참 동안이나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선생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줄은 미처 몰랐소.”


“나조차도 잘 몰랐다. 정주 저잣거리에서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네놈 앞에서는 잘난 척이나 했지. 네가 나를 가르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하.”


나는 평상에서 몸을 일으켜 종약 선생 곁에 나란히 섰다.


우리 눈 아래로 거지굴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넓은 평야가, 그리고 저 멀리 높다란 산등성이가 솟아있었다.


난 아마 오늘 저녁쯤, 팽가인들과 저 산을 넘고 있겠지.


“평생 천하 만민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오신 선생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선생께서 어떻게 느끼시든, 선생의 높은 공덕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것이오. 선생만큼 옳은 길을 걸어온 이를 나는 알지 못하오.”


“닥쳐라, 이놈아. 날 지금 위로하려는 것이냐?”


종약이 툴툴거리며 말하자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럴 리가. 아무튼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저와 함께 팽가로 가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선생의 무공이라면 곤륜을 상대하는 데 그 누구보다 큰 힘이 될 터···.”


“당장 이곳을 떠날 수는 없다. 한두 달은 더 머물면서 사람을 세워 저들끼리 잘 지낼 수 있도록 해야겠지. 그리고 준비가 된다면, 나는 하북이 아닌 사천으로 갈 생각이다.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떠오르는구나. 놈의 자취를 찾아내야지.”


새로운 길을 떠나기로 마음을 정한 종약 선생. 그의 안광이 어느때보다도 빛났다.


“알겠습니다. 선생···. 아, 참! 사람을 세운다면 총관 자리에는 번계 놈을 추천드리겠소. 내가 안 그래도 이놈에게 기초 심법을 가르쳤는데, 몸 쓰는데 재능이 대단하더군.”


“이놈아. 나도 종은이에게 전해들었다! 네가 그리 무섭게 윽박지르며 가르쳤다면서? 껄껄!”


정겹게 웃던 종약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 이제 떠나거라.”


참으로 그 다운, 너무나 급작스러운 작별 인사.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덤덤하게 돌아와 있었다.


“함께 같은 놈을 좇다 보면, 어차피 머지않아 만나게 될 것이다. 몸조심하거라.”


“······.”


그 말이 맞소. 은명검 선생.


거악에 함께 맞선 우리는 틀림 없이 다시 만날거요.


저번의 삶에서도 만났었고, 이번에도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속에서 무언가 울컥 차오르는 것을, 나는 애써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선생도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나는 몇 발을 물러서, 종약 선생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 * *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어느 한낮이었다.


길을 나선 나의 허리춤에는 가벼운 검 한 자루가 메어 있었고, 어깨에 짊어진 작은 행낭에는 옷가지 몇 벌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나는 종약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 후 부량회 거지굴을 떠나와, 지금은 정주성 남문을 지나 팽가 일행이 묵고 있는 객잔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숙소는 저잣거리 동편의 고송루라 했었지.


고송루(孤松樓). 겉에서 보면 이층 규모의 아담한 객잔이었으나, 정주에서 가장 비싼 숙박비로 유명한 곳이었다. 수용 인원은 겨우 스무 명 남짓이었으나, 최고급 음식과 객실, 목욕탕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객잔 앞에 도착하자 마구간에 묶인 덩치 좋은 준마들과, 팽가의 휘장이 장식된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그럭저럭 잘 찾아온 모양이군.’


- 끼익.


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는 식탁에 둘러앉은 팽가인들과 눈이 마주쳤다.


“여어! 오셨습니까, 곽 소협!”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한 팽가의 호사(護士) 청헌이 내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그와 함께 식사하던 부하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였다. 구석에서 차를 홀짝이던 팽가의 집사장 공손학도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았다.


“하하, 소협! 오늘 저녁에 출발하려 했는데, 조금 일찍 와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계속 노심초사 하고 있었다오!”


“송구합니다. 정주에서 처리할 일이 남아있어 어쩔 수 없었소.”


“식사는 하셨습니까? 이곳 음식이 정말 기가 막히는군요. 특히 향고장육(香菇醬肉)이라고, 각종 버섯과 돼지고기를 졸여 만든 요리인데···, 천하 어디에도 없을 맛입니다!”


청헌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미 배가 불렀던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권해주어 감사하오만, 이미 닭을 두 마리나 해치우고 왔소.”


“그렇다면 차나 한 잔 하시겠소? 아니면, 객잔 이층에 마련된 목욕탕을 이용하셔도 좋소. 약초가 풀린 뜨끈한 온수탕에 몸을 담그니 여로(旅路)의 노곤함이 싹 풀리더군요. 저희는 행관이 도착하지 않아, 저녁이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을 듯합니다.”


공손학의 말에 내 눈이 번쩍 뜨였다.


‘온수탕이라니!’


이제껏 거지굴에서 매일 차디찬 개울가에서 몸을 씻어 온 나였다. 객잔의 온수 목욕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그런데 여기엔 아예 큼지막한 온수탕이 있다고?!


내 표정을 읽은 눈치 빠른 공손학. 그가 씩 웃으며 나를 이층 계단으로 인도했다.


“소협, 그럼 사양 마시고 이리 오시지요. 그리고 목욕을 마치시면 갈아입으실 옷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아, 생각해 보니 내 지금 옷차림으로는 팽가인들과 어울려 다니기에는 많이 허름하구만.


공손학의 배려에 나는 다시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했다.


욕실 입구에 이른 공손학은, 내게 수건과 향료를 건네주고는 뜬금 없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탕으로 들어가시지요. 곽 소협에 대한 말씀은 저희가 많이 드려서, 아마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온수탕을 만끽한다는 흥분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나는 발가벗고 목욕탕에 들어섰다.


목욕탕의 육중한 문을 열자 탕 안에 가득찬 뜨거운 김이 내 얼굴을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값비싼 목재로 지어진 바닥에서는 향긋한 약초 냄새가 올라왔다.


- 촤아악.


어디선가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촤아악.


나는 눈앞에 겹겹이 피어오른 김을 흩어내고서야 물줄기 소리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윤기 가득한 긴 흑발의 남자가, 바가지로 몸에 물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가 누군지는, 떡 벌어진 그의 등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팽현광이었다.


본래의 삶에서 나의 제일 가는 막역지우였음에도, 그의 나신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장난기가 동해 그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했다.


- 첨벙!


나는 일부러 세게 몸을 던져 첨벙거리는 소리를 내며 탕에 뛰어들었다.


“아, 씨! 뭐야?!”


별안간 울린 소음에, 팽현광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허허. 뭘 그리 놀라시오?”


현광은 잔뜩 짜증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곧장 온수욕의 안락한 기운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아, 얼마만의 온수욕인가. 몸이 나른하게 녹아내리는 느낌이야!’


“이놈아. 그리 세게 물의 튀기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례하기 짝이 없군.”


팽현광이 나를 향해 아이처럼 툴툴거렸다.


‘저 어리숙한 표정은 이때부터 똑같았었군.’


나는 또다시 장난기가 동해 이번에는 제법 정중한 투로 말을 걸었다.


“허허. 그렇담 사과드리겠소. 그런데 혹시 팽가의 현광 공자 되시오?”


“뭐, 맞긴 맞소이다. 댁은 뉘쇼?”


팽현광이 퉁명스럽게 답하며 탕 반대편 쪽으로 걸어와 몸을 담갔다.


“하하. 누구긴 누굽니까. 팽형, 절 못 알아보시겠소?”


“음···, 나랑 면식이 있는 사이요? 송구하나 술에 취하고 뵌 사이면 내가 기억을 못한다오.”


“그러시구만. 하하하!”


내가 싱겁게 말을 끊어버리자, 현광이 궁금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다.


“우리는···, 혹시 청해루에서 본 사이요?”


“맞소. 그저께 밤에 청해루 오층에서 만났었소. 그곳에선 팽형이 저를 아우라 부르셨다오.”


그제야 팽현광은 자기 이마를 탁 치며 말을 쏟아냈다.


“그랬군, 젠장. 미안하다. 그날은 하도 취해서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어. 총관 놈이 나한테 공갈을 쳐서 맛대가리 없는 술이 나왔었고, 뭔 원숭이같이 생긴 년이 술을 따른다고 방에 들어왔지. 화가 나서 술을 퍼먹고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청해루에서의 기억은 여기가 끝이다. 돈만 돈대로 써 제꼈지. 빌어먹을!”


“하하. 팽형, 입담은 여전하시오.”


내 말은 진심이었다.


본래의 삶에서도, 나는 그가 저질러 온 바보같은 일에 대해 듣는 것을 퍽 좋아했었지.


“아무튼 네가 날 팽형이라 부르는 것을 보니, 그날 우리가 꽤 친해졌나 보군?”


현광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짐짓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미안하다. 젠장. 보통 이 정도로 기억을 잃지는 않는다만, 그날은 어떤 개자식이 내 턱을 후려갈겨서 내가 기절했다고 하더군. 그래서 기억이 까맣게 사라진 게 아닌가 싶은데···. 망할, 아직도 턱이 얼얼하다.”


“푸하하하!”


현광의 말에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현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야 이놈아. 뭐가 재밌어서 그리 웃나?”


“무엇이 재밌기는. 팽형 턱을 갈긴 이가 바로 나요. 이게 어찌 안 웃길 수 있겠나? 하하하!”


내가 고개를 젖히며 웃어대자 현광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이 새끼가, 지금 진심으로 지껄이는 소리렸다?!”


“아직도 주둥이가 퉁퉁 부어있으시군. 무슨 두꺼비 같소.”


“···야 이 씨발아!”


현광이 탕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의 우람한 나신을 슥 훑어보고는 짧게 내뱉었다.


“앉아. 팽형.”


“···이, 이 새끼···.”


팽현광은 한동안 주먹을 부들대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 근육은 분노로 경련했지만, 눈빛은 꽤나 유순했다.


나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의 머릿속을 대충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신력(身力)은 강호 제일의 수준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팽가 비전의 심법인 혼원법력신공(混元法力神功)을 독파한 그의 육체는, 어지간해선 작은 위해(危害)조차 가하기 힘든 강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아무리 그가 만취한 상태였다고는 하나, 그런 그를 주먹 한 방에 기절시켰다는 사실은, 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수완 좋은 공손 집사장이 이미 말을 해둔 모양이군.


쉽게 건드려선 안될 놈이라고.


“팽형. 앉으시오 좀. 보기 민망하니까!”


“···그렇담 네가 오성상단의 양자인 곽가렸다. 너 나이가 몇이냐? 나보다 한참 어려보이는데.”


“나이가 기억은 잘 안나는군. 대충 팽형보다 대여섯 살 어릴 거요.”


“건방진 새끼 같으니···.”


팽현광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얌전히 온수탕에 몸을 담갔다.


탕에 몸을 담근 그는, 한동안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이번엔 한껏 누그러진 말투였다.


“으음, 맞다. 생각해 보니 우리 집사장과 진설이에게 그런 얘기도 들었다. 네가 우리 팽가인들을 살수들의 습격에서 구했다면서?”


“좋은 이야기도 함께 들으셨다니 다행이오.”


내 말에 눈을 이리저리 돌리던 현광. 그가 우물거리는 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으음···, 감히 내 턱을 갈긴 네놈을 여기에서 패버려야 마땅하나, 네놈이 세운 공이 있으니 일단 넘어가도록 하지.”


“···뭔가 정신 승리를 하시는 것 같소만.”


“닥쳐라.”


팽현광이 씩씩거리며 내뱉었다.


짜증을 내면서도 그는, 응당 나누어야 할 대화를 이어갔다.


“아무튼, 네 녀석이 이번에 하북행에 동행한다 들었는데 맞느냐?”


“그렇소. 소저 생명의 은인으로 초청받았소만, 팽형께서는 영 마음에 안 드시나 보오?”


“네놈 말하는 꼬라지는 마음에 안 든다만···, 아무튼 네 무공이 절륜하다 들었으니, 험로를 가는데 힘이 되긴 하겠구나.”


“정겨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진대, 험로일 것이 뭐가 있소?”


“왜긴 왜냐?! 너도 보지 않았느냐. 내가 죽기를 바라는 놈들이 세상에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진설이까지 해치려 했더군. 개새끼들!”


“······.”


하기야. 아무리 호쾌한 팽현광이라지만, 여동생과 가신들이 살수에게 위협당한 지금, 그의 마음 속은 꽤나 심란할 것이었다.


무거운 표정으로 잠시 침묵한 그가, 한숨을 쉬며 탕에서 일어났다.


“가기 전에 네게 하나만 물어보겠다.”


“물어보시오.”


“정말 팽가인을 친 이들이 곤륜이 맞았느냐.”


나는 현광을 한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팽현광은 눈썹을 찌푸리며 짧은 신음성을 내고는, 목욕탕을 떠났다.


나는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는 머리를 온수에 푹 담갔다.


‘그래. 어차피 앞으로 계속 수백 수천의 적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머리가 깨지도록 아파질 텐데···, 지금은 복잡한 생각따위 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한 시진(時辰 : 두시간)이 넘도록 온수욕을 즐기고 나서야 탕을 나왔다.


욕실을 나오니, 공손학이 나를 위해 준비한 고급스런 회색 장포가 정갈히 개여있었다. 나는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회색 장포를 걸쳐입고 객잔 정원을 거닐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초저녁이 되자 팽가의 행관 조균이 말 먹이를 구해 돌아왔다.


하남(下南) 정주(靜州).


산서로 가던 길을 꺾어 도착한, 천로를 걷기로 결단한 나의 첫 번째 도성.


이전의 오십 평생에서도 겪지 못했던, 온갖 우여곡절과 색다른 경험을 안겨준 정주.


이곳을 떠날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자, 모두 마차에 타시오! 곽 소협! 출발합시다!”


나는 공손학의 부름에 마차에 올랐다.


우리 일행을 실은 마차 두 대는, 노을이 지는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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