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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난 님의 서재입니다.

천로행(天路行)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김유난
그림/삽화
본인
작품등록일 :
2024.01.15 22:19
최근연재일 :
2024.03.15 22:50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6,281
추천수 :
45
글자수 :
254,396

작성
24.02.12 00:00
조회
176
추천
2
글자
16쪽

12. 저잣거리 혈투 (1)

DUMMY

“멈춰라, 노땅 새끼야.“


”자고로 말야. 건달들끼리는 쉬지 않고 싸워 저들끼리 머릿수를 줄여야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의문의 사내와 마주한 설광.


그런데 설광은 자신을 막아선 붉은 두건의 사내를 바라보며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꽤나 어려보이는데, 내 경공을 이렇게 쉽게 따라잡았단 말인가.’


싸움에는 별 자신이 없어도 경공만큼은 흑표방 제일인 설광이었는데, 이 어린 적사방 놈은 자신을 너무나도 쉽게 멈춰 세웠다.


그러나 설광은 이내 표정을 굳히며 자신을 막아선 자를 꾸짖었다.


“이놈! 길을 비켜라. 어젯밤의 일로 흑표방주의 명을 받아 너희 방주를 찾아가는 중이다.”


두건을 두른 사내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네가 뭔데 우리 위대하신 적사방주님을 알현하나?”


“어린 놈이 무례하구나! 나는 흑표방의 삼은각주(三銀閣主) 설광이다! 너희 적사방에는 위아래도 없더냐?!“


”아니, 무슨 깡패끼리 위아래를 따지고 있어.“


- 스르릉.


사내가 허리춤에서 다짜고짜 칼을 꺼냈다.


“여기선 싸움 잘하는 놈이 형님 먹는 거지. 안 그렇소?”


그 말을 들은 설광이 노하여 사내를 꾸짖으려 했으나, 그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붉은 두건의 사내는,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후딱 끝냅시다. 아우님.”


사내가 건조하게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검의 궤적을 따라 검풍이 일어나더니 선명한 검강이 뻗어나오며 설광을 덮쳤다.


설광 역시 곧장 검을 꺼내 내공을 일으키며 그의 일격을 막아냈지만, 뒤따라 불어닥치는 검풍이 그의 몸을 헤집어 놓는 것까지 막아낼 수는 없었다.


“크으읏!”


순식간에 기경팔맥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덮었고 입에서 비릿한 혈향이 올라왔다. 기와지붕 위를 밟고 선 그의 두 발이 뒤로 밀리며 십수 개의 기와가 지붕에서 떨어졌다.


“이 개자식아! 자, 잠깐만 말을···!”


감당하기 힘든 강맹한 일격에 당황한 설광. 그가 소리를 지르며 사내를 제지하려 했지만, 놈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설광의 눈이 상대를 좇았다. 붉은 두건의 사내는 이미 공중에 크게 날아올라 사냥감을 노리는 매와 같이 낙하를 준비하고있었다.


하늘에서 사내의 몸이 설광을 향해 쏘아져 내려왔다. 설광은 즉시 능파미보(凌波微步)의 보법을 펼쳐 종으로 내리 꽂는사내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했다.


- 콰 앙


검풍이 지붕을 강타하며 기와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잠시 허공에 뜬 설광은, 섬짓한 바람이 그의 팔 언저리를스쳐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곤 땅에 착지한 설광.


“헉, 헉···!”


그는 분수처럼 뿜어 나온 피가 바닥에 고일 때가 되어서야, 자신의 오른팔이 깨끗이 잘려나간 것을 깨달았다.


좀 더 일찍 들었으면 좋았을 생각이, 그제야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상대는 까마득한 고수. 내가 상대할 만한 존재가 아니다!’


대단한 무공실력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설광이 흑표방의 삼인자까지 오른 것은 그 상황판단과 처세 덕이었다.


상황판단 만큼은 누구보다 빠른 그였다.


“흐아압!!”


즉각 도망치기로 마음을 정한 설광은, 사내를 향해 있는 힘껏 칼집을 던져 주위를 분산시킨 후 사력을 다해 경공을 펼쳤다.


혹여나 놈이 나를 추적해 공격한다면 그대로 등을 내주고 죽겠다는 각오로, 경공에 모든 내공을 쏟아부은 설광.


그렇게 한참을 정신없이 도망치다 뒤를 돌아보니, 그를 쫓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악귀 같은 놈에게 설광의 목숨은 그리 탐나는 물건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잘려버린 팔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출혈이 얼마나 심한 것인지, 장포가 전부 피로 흠뻑 젖어있다.


그의 머리가 핑 돌았다.


젠장. 평생 팔병신으로 살겠군.


“각주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멀리서 설광을 발견한 부하들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습격을 당했다···. 적사파 놈이···!”


설광은 부하들에게 이 말 한마디를 던지며 그대로 자빠져 정신을 잃었다.



* * *



나는 삼은각주가 흑표방 근거지로 무사히 도망친 것을 확인한 후, 머리에 두른 붉은 두건을 벗어 던졌다.


“아오, 잠깐 쓰고만 있어도 병신 삼류 양아치가 되는 기분이군. 선택한 편이 그나마 흑표방이어서 다행이다!”


나는 이놈에 빨간 두건을 다시는 쓰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저잣거리 건물의 지붕들을 타고 넘었다.


나는 곧 어느 주루의 지붕에 이르렀다. 그곳은 내가 흑표방의 검은 장포를 숨겨둔 곳이었다. 주변을 한번 살핀 나는, 다시 장포를 걸쳐 입고 흑표방의 곽자명으로 돌아왔다.


삼은각주. 이름이 설광이라고 했었나.


상황판단은 꽤 뛰어난 녀석이었다.


팔을 베어 버렸지만 죽을 만큼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지금쯤 삼은각주는 흑표방 똘마니들과 마주쳤을 것이고, 방주를 포함한 흑표방 간부들은 전부 난리가 났을 것이 분명했다.


어느새 삼은각 지붕에 이른 나는, 나는 행여 누군가의 눈에 띌까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기둥을 타고 뒷골목으로 내려왔다.


나는 그렇게 삼은각 앞에 우르르 모여 잡담을 지껄이던 흑표방 무리에 조용히 다시 합류했다.


아직 일반 방원에는 설광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엄중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고, 평소와 같이 껄렁한 건달조직의 모습이었다.


황현장과 소하문이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이봐, 곽가. 여기에 있었군. 아까부터 찾았다고.”


소하문이 반갑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어디 계셨습니까. 저도 놀라서 형님들부터 찾았습니다만.”


“그랬구만. 별로 놀랄 건 없다. 소집령이야 그냥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내려오는 거야. 이번에도 상생이니 뭐니 헛소리나 하면서 해산하겠지.”


“금일봉이나 좀 나눠줬으면 좋겠습니다. 받아본 지 한참 된 것 같은데요.”


소하문이 투덜거리며 말하자 황현장이 동조했다.


“그러게 말이다. 이럴 때 돈이라도 좀 나눠줘야 일할 맛이 나지. 지랄은 지랄대로 떨어놓고 이번에도 입을 싹 씻어버리면 나도 맥이 빠질 것 같다.”


그런 황현장의 말을 엿듣기라도 한 듯, 삼은각 삼층 노대(露臺)의 창이 열리고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등장했다.


푸른 검날과 같은 노기에 휩싸인 그는, 다름 아닌 흑표방주 이자헌이었다.


갑작스런 방주의 등장에 모든 흑표방원들이 웅성거리며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명령에 따라 모여든 수백의 사내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흑표방주. 그가 숨을 한번 들이쉬더니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나의 충성스러운 형제들아! 정주의 의를 수호하는 검은 표범들아!”


“와아아아!”


조직원들이 일제히 열광적인 호응을 보냈다.


‘의를 수호하는 검은 표범은 무슨. 다들 그냥 할 짓 없는 한량 새끼들이잖아.’


열광적으로 방주를 향해 손을 흔들어 제끼는 사내들 사이에서, 나는 좀 삐딱한 자세로 방주의 말을 들었다.


“제군들도 알다시피, 어젯밤 사이 우리들의 동지 둘이 극악무도한 적사방 세력의 습격에 중상을 입었다. 게다가 오늘, 적사방주에 사과를 요구하러 떠난 삼은각주 역시, 매복하던 자들의 급습에 한쪽 팔을 잃는 참사를 당했다!.”


흑표방주의 말에 조직원들이 술렁거렸다.


삼은각주가 공격을 당했다니. 삼은각주는 흑표방의 삼인자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는 명백한 적사방의 선전포고일 터.


동요하는 그들을 향해 흑표방주가 외쳤다.


“나 흑표방주 이자헌은 선포하노라. 우리는 형제의 아픔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오래전의 맹세대로 형제의 원수를 열 배 스무 배로 갚아줄 것이다.”


“와아아아!”


“존명!”


그의 결연한 연설에 내 주변에 도열한 멍청이들은 또 한번 열광적인 호응을 보냈다.


이윽고 반응이 잠잠해지자, 흑표방주는 모두가 기다리던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오늘의 의거에 동참하고 공을 세우는 자에게도 그 공을 갚아줄 것이다. 제군들은 익히 알고 있다. 내가 목숨을 걸고 공을 세운 자를 어떻게 대우해 왔는지 말이다!”


아까보다 훨씬 더 열광적인 함성이 터져나왔다.


보아하니 저 흑표방주 녀석은 논곤행상에 있어서는 꽤나 통이 큰 사내인 듯했다. 하기야, 그러니 이정도 규모의 건달패를 일구어낼 수 있었겠지.


“방주는 오늘 나를 따르라 명령하지 않을 것이다! 단, 형제를 위해 싸울 자들은 모여라! 형제의 원통한 아픔에 피가 거꾸로 솟는 자들은! 나와 함께 나아가자!”


“와아아아아!”


”뜻이 있는 자들에게 전한다. 그대들은 해시(亥時. 저녁 9시)에 이곳으로 모여라!”


“와아아아!”


“단 한 명만 나와 함께한다면, 나는 그자와 함께 오늘 형제의 원수들을 칠 것이다!”


“죽여버리자! 적사방 개새끼들!”


“흑표방주 만세!”


사방에서 열광적인 함성이 터져나왔다.


‘좋아. 드디어 싸움 시작이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흑표방주를 향해 환호하는 시늉을 했다.


좋았어. 곧 저잣거리 대혈투가 시작되겠군!



* * *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간.


거사가 치러질 저녁 해시(亥時)까지는 시간의 여유가 꽤 있었다.


내가 황현장과 소하문에게 제안했다.


“조식을 드시지 않아 시장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밥이나 한 번 사겠습니다.”


“됐다. 무슨 너한테 밥을 얻어먹냐.”


소하문은 그렇게 말했지만 싫지 않은 눈치였다.


“두 분 다 저 때문에 다치기도 하셨으니, 제가 식사는 한번 대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머무는 곳 가까이에 기가 막히는 국수집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황현장과 소하문을 데리고 나의 단골 국수집 석화반점으로 향했다.


이 주변에서는 꽤나 유명한 식당이었지만, 둘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흑표방 조직원들은 대부분 흑표방에서 운영하는 객잔에서 식사를 하기 때문이었다.


“자아, 안녕하시오.”


내가 호기롭게 문을 열자, 우리 셋을 발견한 공 부인이 호들갑을 떨었다.


“자명이.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 우리 가게 들어올 때는 그 시커먼 옷은 좀 벗고 들어오라고. 이힉! 이번엔 게다가 혼자가 아니네?! 아이고!! 시커먼 녀석들이 셋이나 왔어!”


“벗고 들어오나 들어와서 벗으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자, 형님들. 들으셨지요? 장포는 잠시 벗어 둡시다.”


황현장과 소하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장포를 벗었다.


그러고 보니 장포를 벗은 이들의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둘 다 장포를 벗으니 평범한 정주 청년의 모습이었다. 특히 소하문은 쌀가게에서 일하면 딱 어울리게 생겼군.


“황 아저씨, 안녕하십니까.”


나는 오늘도 맨 구석에 놓인 식탁에 앉아 차를 홀짝이는 황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는 검은 장포 여럿을 보자 겁을 먹었는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딴청을 피웠다.


나는 피식 웃으며 중앙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공 부인. 오늘은 제가 흑표방 형님을 둘이나 데려왔습니다. 국수를 평소보다 좀 더 맛있게 말아주십시오. 매일 흑표방 객잔에서 말라빠진 만두나 드신다고 하시니.”


“안된다. 괜히 맛있게 먹였다가 저 시커먼 옷 입고 맨날 찾아오면 어떡해?”


공 부인의 장난스러운 투덜거림에, 소하문이 웃으며 답했다.


“걱정 마쇼. 패거리랑 올 때는 시커먼 옷은 어디 숨겨두고 올테니깐. 우리가 한번 단골을 삼으면 무지하게 팔아주는 놈들이라고. 상생 흑표 모르시오?“


그의 능청스런 말에 공 부인이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식탁 위 마주 앉은 황현장과 소하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야겠군.


“두 형님께서는, 오늘 밤 삼은각에 가실 생각이십니까.“


”가야지.“


황현장이 무덤덤하게 대답했고, 옆에 있던 소하문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두 분께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은 좀 외람되지만, 두 분의 무공이 그리 깊은 것도 아니고···.“


”그래도 어쩌겠냐. 방주가 하는 말을 못 들었냐. 이번에 따라오는 놈들에겐 돈을 두둑히 준다잖냐.“


”맞아. 이런 기회가 흔히 오는 것은 아니거든. 흑표방에 들어온 지 삼 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포상금을 받은 적이 없다. 망할 봉급은 얼마 되지도 않고.“


황현장과 소하문이 차례로 대답했다.


그래. 관건은 돈이었다. 그렇다면 내겐 이들을 설득해 낼 확실한 무기가 있지.


“포상금이 대체 어느 정도길래 그럽니까?”


“흑표방주가 통이 제법 크거든. 저번에 전면전이 일어났을 때, 전투에 참여한 자들에게는 전부 은자 다섯 냥씩을 돌렸다고 한다. 살아 있기만 하면 그 돈을 벌었다는 거지.“


소하문의 말에 황현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자 다섯 냥이라. 한 달에 기껏해야 은자 한 냥을 받는 이들로선 충분히 혹할만한 액수였다.


‘그렇담 대충 그에 두 배를 주면 되겠지.’


- 쿵.


나는 품속에서 묵직한 전낭 꺼내 상 위에 올렸다. 내가 전낭을 풀어 은자를 꺼내자 마주 앉은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명아. 이게 무슨 돈이냐···!?”


어젯밤 어느 병신놈의 술집을 때려 부수고 훔친 돈이오.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애써 참아낸 나는, 상인이던 아버지가 남긴 돈이라 대충 둘러댔다.


나는 말 없이 황현장과 소하문에게 은자 열 냥씩을 건네주었다. 둘은 아직까지도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내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이 돈을 줄 테니, 형님들은 오늘 밤 삼은각에 오지 마시오.”


“···왜 이러는 거냐?”


황현장이 애써 평정을 찾으며 물었다.


“나에게는 무용한 돈이니, 짧은 시간이지만 내게 정을 느끼게 해준 형님들께 드리는 거요.“


“우리가 삼은각에 가지 않을 이유는 뭐지?”


“큰 살생이 있을 테니까. 수많은 자가 목숨을 잃는 밤이 될 거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안다는 말이냐?“


”내 말이 진짜인지는 내일 아침이 되어보면 아시겠지. 자, 그래서 어쩔거요? 은자 열 냥을 받고 집에 계시겠소. 아니면···.“


”······.“


이들로서는 사실 고민을 하는게 우스운 상황이었다.


황현장과 소하문은 서로를 한번 슥 쳐다보고는, 식탁 위에 놓인 은자를 황급히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때, 공 부인이 때맞게 국수를 내어왔다.


“건달 오빠들. 착하게 살라고 고기 팍팍 넣었어. 그러니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어야 된다.”


매콤한 고추기름 냄새와 쇠고기의 진한 육향이 식탁 위를 진동했다.


우리는 일체의 대화를 멈추고 국수 그릇에 얼굴을 처박았다.


후르륵. 국수를 넘기는 소리만이 석화반점 안을 가득 채웠다.


정신 없이 국수를 먹던 소하문이 콧물을 닦으며 말했다.


“이야, 진짜 죽이네요. 형님, 국수 맛이 어떠십니까. 형님은 사천 출신이잖아요.”


“내가 사천에서 이런 걸 먹어 봤겠냐. 찢어지게 가난한 화전농 집안에서. 거기선 칡뿌리나 캐먹고 살았다.”


황현장도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황홀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나는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공 부인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다시 매콤한 국물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근데 자명아. 하나만 물어보자.”


“뭡니까.”


소하문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방금 네겐 돈이 무용하다 하지 않았냐. 그게 정말이냐? 돈이 무용한 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그냥, 좀 다른 길을 걷는다고만 알아 두시오.“


”무슨 길인데? 말을 좀 해봐라.“


나는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나는 천로(天路)를 걷소.“


나의 알 수 없는 대답에, 황현장과 소하문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이군.


하지만 이들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거든.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지껄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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