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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난 님의 서재입니다.

천로행(天路行)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김유난
그림/삽화
본인
작품등록일 :
2024.01.15 22:19
최근연재일 :
2024.03.15 22:50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6,278
추천수 :
45
글자수 :
254,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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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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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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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30. 하북행 (1)

DUMMY

나는 하루에 걸쳐, 종약으로부터 흑량기공의 원리와 요령을 전수받았다.


종약의 말대로, 흑량기공은 내가 오랜 세월을 몰두해 경지에 이른 절학, 육맥신검(六脈神劍)과 그 원리가 상당히 유사했다.


본래 육맥신검은 십이경맥(十二經脈) 중 손으로 뻗은 육맥으로 흐르는 내력의 흐름을 활용하는 수법 혹은 지법의 일종이었다. 일정 경지에 이르면, 강맹한 내력이 경맥을 타고 손가락 끝으로 뻗어나가 마치 단단한 검과 같은 강기를 형성해냈다.


정형화된 초식은 없었으나, 내력의 운행을 강화하고 강기를 구체화 하는데는 이만한 천하에 이만한 무공이 없었다. 나는 이를 무당파의 양의태극검(兩儀太極劍)과 접목해 나만의 검로를 개척했었지.


흑량기공 역시 손가락에 뻗은 경맥에 흐르는 내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육맥신검과 일맥상통했다.


다른 점이라면, 육맥신검은 경맥의 내력을 외부로 내지르는데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흑량기공은 내력을 내부로 흡수하는데 초점을 둔다는 점일 것이다.


나는 지금 종약에게 흑량기공을 전수받은 후, 이를 연습하기 위해 수련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수련장으로 가는 언덕 비탈길에서 몇번 연습을 반복하니, 이미 손가락의 경맥을 통해 내력이 몸 안쪽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수련장에 이르기도 전에 나는 이미 미약하게나마 흑량기공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이번에도 운이 좋았군.’


손가락의 경맥이 고도로 발달한 나는, 흑량기공을 익히기에 최적화된 몸이었다. 이 정도의 진척이라면, 오늘 중으로 흑량기공을 완전히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곧장 팽가인들과 합류해 하북으로 향해도 괜찮겠지.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언덕을 올라 수련장에 이르렀다.


그런데 수련장에 도착한 나는, 뜻밖의 광경을 마주쳤다.


어떤 녀석이 맞은편 참나무에 기대 물구나무를 선 채 끙끙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나는 놈을 알아보았다.


‘아, 내가 이놈을 까맣게 잊고 있었군.’


팔이 하나 없이 물구나무를 선 그는 다름 아닌 번계였다.


내가 죽어라 수련을 하지 않으면 줘 패버리겠다 으름장을 놨었지.


‘좋아. 보아하니 태음진기를 정통으로 수련하고 있군!’


좀 더 다가가 보니 놈은 물구나무 자세로 한참을 수련했는지,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흙바닥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의 몸을 지탱하는 팔이 부들거리며 떨리는데 놈의 눈이 평온하게 감겨 있다는 점이었다. 이 자식 이거, 얼마나 수련을 해온 거야?


“야, 이놈아. 형님이 오셨는데 인사도 안 올리느냐.”


내가 한껏 근엄한 목소리로 놈에게 말을 걸었다.


내 말에, 번계는 마치 깊은 잠에 들었던 사람처럼 천천히 눈을 떴다.


“으음···.”


장시간의 수련을 지속하며 땀으로 범벅된 번계. 그럼에도 그의 얼굴은 마치 낮잠을 한숨 때리다 깬 자의 얼굴처럼 느긋했다.


“오셨습니까, 형님···, 으음···.”


그가 어기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품이라도 할 기세였다.


“야 이놈아,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냐? 땅이 땀으로 젖은 것을 보니, 한참을 이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으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 방금 올라온 것 같기는 한데···. 아니. 되게 오래 있었던 느낌도 들고···.“


”하늘을 봐라. 대충 오시(午時)를 지나고 있다.“


”에엑?! 정말요?!“


”······.“


”도, 동이 틀 때쯤 올라왔는데···,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제가 그렇게 오래 있었을 리가···!“


”흐음···.“


보아하니 심몰입과(心沒入過) 상태가 왔었나 보군. 적절히 끊어주지 않았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그나저나 놀라웠다.


심몰입과란 보통 무공을 수련한지 반년 정도 되는 초심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건만···. 이 자식은 겨우 며칠이 지났는데 이 상태에 이르렀단 말인가?


물론 내가 죽어라 굴리긴 했지만 말야.


“번계야, 그렇게 미친놈같이 하루 종일 같은 수련만 지속하면···. 아직 신력의 발달이 미약한 초보자들은 경을 치를 수가 있다.“


”에에···? 그게 또 무슨 말입니까? 형님이 저번에 하루 종일 연습 안하면 패버리겠다고 하셔서···.“


”그건 임마, 내가 너를 과소평가했다. 설마 단시간에 이 정도까지 해낼 줄은 몰랐으니까. 딱히 경고가 필요 없으리라 생각했지.“


내 칭찬에 번계 놈이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 그런가요?”


“······.”


번계가 만족스럽게 한쪽 팔을 휘휘 저었다. 나는 우쭐하는 녀석의 표정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금 내가 녀석에게 한 말 역시, 나의 놀라움을 최대한 감추며 뱉은 말이었으니까.



* * *



어느새 붉은 노을이 서쪽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번계와 나는 계속해서 각자의 수련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번계는 수련장 한 켠에서 여덟 방향으로 걸음을 밟으며 천양신공(天陽神功)을 수련하고 있었고, 나는 수련장 중앙에서 가부좌를 튼 채 흑량기공(黑亮氣功)을 연마 중이었다.


흑량기공의 시작 단계는 수월했으나, 이를 제대로 발현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종약 선생이 가르쳐준 바와 같이, 나는 양손의 손가락을 맞대어 둥근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양 손가락의 경맥에 번갈아 기를 집중시키며 경맥을 타고 흡수된 기가 온몸의 혈맥을 운행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손가락에서 만들어진 진기는 반대편 손가락으로 온전히 전달되지 않았다. 아주 약간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계속해서 외부로 흘러나갔다.


무공의 진척이 더딘 것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에라이, 썅···!”


다만 지금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진기가 올바르게 운행할 듯하다가도 기로를 벗어나는 일이 아주 오래 반복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나를 열받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번계놈이었다.


수행도 잘 안되고, 짜증나 죽겠구만···.


”······.“


저 자식은 왜 자꾸 날 힐끔거리면서 웃는 거야?


물론 지금 내 꼴이 웃기긴 할 것이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하루 종일 양 손가락을 맞댄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욕이나 시부렁거리는 꼴이 그리 멋지진 않겠지.


그렇지만 내 모습이 우습기로서니, 감히 네놈이 나를 비웃다니.


‘이놈 새끼. 그동안 처맞은 매타작이 여전히 부족한가 보군.’


번계는 이제 나와 눈이 마주쳐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한가로이 천양신공을 수행하던 번계. 그가 실실 웃는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는 내게 말을 걸었다.


“형님, 수행은 잘 되십니까?”


“······.”


내 표정을 보고, 필시 수행이 원활하지 않음을 간파하고 던진 질문이 틀림 없었다.


‘니가 보기엔 잘 되가는 것으로 보이냐. 이 새끼야.’


나는 도끼눈을 뜨고 놈을 노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번계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다시 이죽거리는 투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형님, 이제 슬슬 내려갈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제 땅거미도 다 내려앉았어요.“


”···닥쳐라 좀. 니 혼자 내려가던가.“


”아니 형님, 하늘을 좀 보세요. 해가 지면 여기선 한 치 앞도 분간을···.”


“흐, 흐엇!”


내가 뜬금없이 소리를 지르자 번계가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형님?


“······.”


“···형님, 이제···.”


번계 놈은 무어라 더 지껄여댔지만, 그의 말은 더 이상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ㅡ 구구구궁. 구구구궁.


내 귀에는 거대한 폭포수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해가 저물고 어두운 기운이 천지에 가득 일기 시작하니, 이제야 흑량기공의 진기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손가락의 경맥을 따라 기가 운행하며 온 몸의 혈맥을 데우기 시작했다.


이는 육맥신검을 발현할 때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육맥신검의 직선적이고 밝은 강기와 달리···.


구불거리고 축축하고 음산한, 어둠의 기운.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가락 끝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낯선 강기가 검은 불꽃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그렇게 흑량기공의 강기를 한참을 들여다보니, 어느새 귀를 울리던 폭포수 소리가 잠잠해졌다. 내 귀에는 다시 번계 놈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혀, 형님! 괜찮으세요?! 왜 대답이 없으세요?! 아까부터 손이 시커멓게 썩은 것 마냥 변해서는···.”


나는 대답 대신 씨익 웃고는, 팔을 크게 휘둘러 흑량기공의 강기를 사방에 흩뿌렸다.


검은 강기는 마치 긴 채찍처럼 늘어나 여러 갈래로 흩어지더니, 거대한 고목을 세 그루나 베어 쓰러뜨렸다.


- 쿵. 쿠웅!


거대한 나무가 굉음을 일으키며 쓰러졌고, 번계가 호들갑을 떨어댔다.


흑량기공의 첫 번째 발현은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다.


무공의 위력이 엄청났을 뿐 아니라, 그렇게 마음껏 힘을 발휘하고 나니, 번계 놈의 얼굴에도 다시 기강이 잡힌 것이었다.



* * *



나는 번계와 대화를 나누며 뒷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번계야. 머리가 나빠 못알아 먹을 듯하니, 다시 한번 말해주겠다. 물론 백 번을 더 들어도 못알아 처먹을 것 같긴 하다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사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이 새낄 확 그냥!“


번계는 내가 놈을 후려치는 시늉을 하자, 한쪽밖에 남지 않은 팔로 머리를 감쌌다.


”후우···. 딱 한번만 더 말하겠다. 알겠느냐.”


“···네.”


“젠장. 이번엔 특별히 네놈의 수준에 맞추어, 가장 일차원적인 방식으로 설명을 해주겠다. 아까 물구나무섰을 때, 얼굴로 피가 쏠리다가도 하복부 쪽에 무언가 묵직한 느낌을 받았지? 맞지?“


”그렇긴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다지, 그렇긴 한건 뭐야?!“

“···그렇습니다.”


“아무튼 그게 임마, 음의 기운이라는 것이다. 음의 기운이 뭔진 네 수준에선 알 필요도 없고, 그냥 외워라, 새끼야.“


”···네.“


”좋아. 그리고 여덟 방향으로 걸음을 밟았을 때는, 처음에는 발이 뜨겁다가 정수리 쪽에 쨍한 기분이 느껴졌잖느냐. 그건 양의 기운이다.“


”음···, 근데 기운이라는 게 어떤···.“


“닥치고 들어라. 모르겠어도 그냥 끄덕여! 어차피 네놈이 천지 태극의 운행 원리를 이해할 리는 없으니까!”


”······.“


”아무튼, 지금 꼴을 보니 한 달 정도면 충분할 듯하다. 한달 동안 그 두 가지 감각을 최대한 강하게 끌어올린 후에 종약 선생을 찾아가라. 기의 운행(運行) 다음의 단계는 적공(積功)인데, 이 부분은 선생께서 친히 알려주실 것이다. 알겠느냐.“


나의 말에 번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달 후에 종약 선생을 찾아가라는 말은 알아먹은 모양이었다.


”음···. 네.”


“좋아. 그럼 질문을 딱 하나만 받겠다.”


딱 하나의 허락된 질문. 번계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제일 궁금한거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그래.“


”전 왜 이 짓을 해야 하는 겁니까?“


”······.“


순간, 내 말문이 턱 막혔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답하기 어렵고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이놈에게 무공을 가르치기로 생각하던 때를 잠시 떠올려야 했다.


나는 결론부터 말해주기로 했다.


”그것은···, 네놈에게 부량회의 총관 역할을 맡기기 위함이다.“


”아니! 그럼 형님은 무얼 하시고요?“


따지듯 물어오는 번계. 나는 덤덤하게 답했다.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예···? 언제요?“


”아마도 내일 당장?“


”······?!“


내 말에 번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놈은 당황해 말을 더듬더니,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번계의 얼굴을 마주 보며, 씁쓸한 투로 말했다.


“나도 이렇게 빨리 가게될 줄은 몰랐지. 아마 내일 이 시간이면, 나는 하북으로 향하는 마차에 타 있을 것 같구나.”


“그러면···, 가시는 김에 질문 하나만 더 해보겠습니다.”


“그래.”


“물구나무서는 일과 부량회의 총관 일이 무슨 상관입니까?”


“이 멍청한 놈아. 심법 수련을 거듭해 내공을 쌓으면 감각이 예리해지고 힘이 세진다고 했잖냐. 부량회 총관이 하는 일이 뭐가 있겠냐. 여기 삥땅치는 놈팽이들을 패주는 것이 주무가 아니겠느냐.“


”음···, 아무래도 제 적성엔 안 맞을 것 같습니다.“


”적성···?“


”저는 천성이 착해, 아무래도 구걸과 소매치기 쪽이···.”


- 빠악!


또다시 튀어나오는 헛소리에, 나는 놈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갈겼다. 머리를 얻어맞은 번계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근데 이걸 해서 저나 부량회에 득이 될 것이 뭐가 있습니까? 형님도 알다시피 저는 부량회 제일의 소매치기인데, 제가 여기 눌러 앉아 총관이나 하고 앉아있으면···.“


젠장. 이 망할 놈을 찬찬히 설득하는 것은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듯하군.


나는 결국 그의 이름을 꺼내오는 수밖에 없었다.


”···종약 선생께서 내게 시키신 일이다.“


계속 투덜거리던 번계의 표정이 진지하게 굳었다. 확실히 종약 선생의 이름은 부량회에서는 절대적이었다.


은혜라곤 전혀 모르게 생긴 이 거지놈들도 종약이라는 이름에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부량회를 위해 헌신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선생도 나이가 있으신데, 언제까지 계속 거지들 뒤치닥거리만 하고 돌아다니실 수는 없지 않냐.”


“음···. 그건 그렇죠.”


번계가 곧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께서 내게 당신을 도울 자를 하나 찾아오라 하셨다. 내가 보기엔 네가 심성으로나, 무공의 재능으로나 이 일에 적합하다. 생각을 해봐라. 여기 어떤 놈에게 선생께서 믿고 일을 맡기겠냐?“


끄덕이는 번계. 종약 선생의 이름이 거론되자, 어느새 놈의 눈빛은 꽤나 진지해 보였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당장은 귀찮겠지만, 곧 무공을 배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지금의 속도라면 한 달 안에 문지기 두어 놈은 때려눕힐 수 있을 테니. 날 한 번 믿어 보거라.”


고개를 끄덕이던 번계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근데 형님···, 인사는 하고 떠나실 예정입니까?“


”글쎄. 아마도 안 할 것 같다.“


”종은이가 섭섭해 하겠네요.“


”그렇겠구나. 네가 말을 잘 좀 전해줘라. 어차피 때가 되면 다시 만날 일이 있을 테니.“


그렇게 한동안 다시 걷던 우리는, 종약 선생의 집 앞에 멈추어 섰다.


이젠 헤어질 시간이었다.


번계 놈은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얼굴로.


”형님, 근데 여기서 같이 지내시면 안됩니까? 일은 제가 다 하겠습니다. 좀 지저분하긴 해도 나름 재밌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내가 피식 웃었다.


번계의 말은 사실이었다.


거들떠보기도 싫던 거지굴이었는데, 막상 떠나려 하니 꽤나 아쉬웠다.


이 양아치 같은 놈과도 나름 정이 들었고.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나는 가야 할 길이 있다.“


”그게 무슨 길입니까?“


”천로(天路).“


“······.”


내 말에 번계는 말없이 끄덕였다.


당연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겠지.


‘못 알아먹겠으면 그냥 끄덕이라는 방내 말 때문에 그냥 끄덕이나 보군.’


어떨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멍청해 보이다가도, 가끔 한없이 영리해 보일 때도 있는, 아주 골 때리는 녀석이었다.


“몸조심하십시오, 형님.”


“그래. 또 보자.”


번계는 내게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하고는, 언덕을 내려갔다.


하지만 번계야.


이번엔 네가 멍청해서 이해를 못한 것이 아니다.


‘천로라···, 나도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거든.’


그렇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흑표방 형님들께 지껄이던 때보다는, 완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주 희미했지만, 그 실체가 저 밤하늘 어딘가에 어른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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