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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카네 님의 서재입니다.

혼돈을 칭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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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카네
작품등록일 :
2020.02.23 17:00
최근연재일 :
2023.01.0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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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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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2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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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기대치 않았던 일거리 (4)

DUMMY

***


루히가 막 마도구의 세팅을 끝냈을 즈음, 주변에서 다시금 키리릿 하는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부러진 문짝과 그 속에 희미한 어둠을 품은 건물의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반향음을 품어 웅웅 울렸다. 이어서 문틀을 붙잡은 커다란 손이 보였으며 기다란 손톱이 벽을 긁으면서 자국을 남겼다. 잘 무두질한 가죽마냥 윤기가 나는 전완근의 모습이 보였으며 머리부터 슬금슬금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짜부라든 불독과 비슷했고 흰자위가 없는 붉은 눈이 네 개 달렸다. 눈 두 개는 전면을 바라보고 나머지 둘은 일직선상의 관자놀이 부근에 박혀 있어 언뜻 기괴한 느낌을 자아냈다.

앵글러 원숭이를 닮았으나 그건 다른 생명체였다.

루히는 박살 나서 구멍만 뚫려있는 문을 가득 채우며 모습을 드러내는 커다란 마물을 살피고, 고개를 슬며시 기울였다. 그를 여기까지 이끈 감각이 마물에게선 느껴지지 않아서다.

그러나 확연한 적의는 알아차릴 수 있다. 다짜고짜 적대하는 생물을 앞에 두고 달칵. 마도구를 작동시키자,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지며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멀리서도 살필 수 있을 강력한 결계를 발동하자마자 퍼억이란 결계의 경계면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화를 나눌 지능은 없는 건가.”


루히는 결계에 냅다 달려들어 일단 손톱부터 쑤셔 박은 몬스터를 향해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뱉었다. 행동력은 칭찬할만하지만, 오히려 평범한 앵글러 원숭이들이 더 영리했다. 적어도 이상하다고 느꼈다면 줄행랑을 쳤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그가 느꼈던 시선의 주인이 마물이 아닌 걸 확인하곤 그래도 좀 덜 피곤하게 흘러갈 여지가 있다고 여겼다.


“일단 나와 보시오. 묻고 싶은 말이 있소.”


대화는 서로를 이해할 훌륭한 수단이니, 말부터 꺼내본다. 누군가가 봤다면 입을 떡하게 벌릴 만큼 어처구니가 없는 제안이지만 그런 루히를 향해 들려오는 답변은 몬스터의 입에서 나오는 “키리리릭!”하는 거센 울음소리다.


“어째서 범람과 비슷한 일을 벌이는지 알고 싶소.”


팍!팍!

몬스터가 손톱으로 결계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키리리릭!”하고 귀청이 떠질 것 같은 울부짖음이 이어졌다.


“···아직 서로 말로 풀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이건 나를 위한 게 아니라 당신을 위한 일이오.”


팍팍!

몬스터는 계속 결계를 손톱으로 긁어대지만 고대신의 영역에서도 멀쩡하리라 자부할 수 있는 결계의 앞에선 허망한 몸짓에 불과했고, 빛의 안쪽에 보이는 먹잇감에 손이 닿지 않는 마물이 약이 잔뜩 올라 “키리리리릭!”하고 더욱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루히는 그제야 눈치챘다. 조금 늦은 감이 있으나, 그에게 있어선 지극히 정상인지라 위화감이 없다.


“아, 방해로군.”


분명 결계에 들러붙은 몬스터는 대화할 마음이 들지 않도록 만드는 장치였다. 그것이 우연히 이 자리에 머무른 몬스터건, 올로몬트를 살피던 자들의 소행이건 방해다.

루히의 눈이 몬스터에게 향했다. 두 팔을 쭉쭉 내뻗어서 휘두르며 결계를 깎아내 보려 하지만 차라리 절벽을 깎아내는 일이 더욱 건설적인 행동이라 여겨지는 아둔한 생명체를 살핀다.

몇몇 특징적인 부분이 익숙하여 루히는 혀를 찼다.


‘손톱은 데스클로(deathclaw)의 것으로 여겨지고, 꼬리 끝에 달린 독침은 전갈형 몬스터의 소재며, 굵직한 다리는 확연히 비대칭적이군. 아마도 오거(ogre)와 같은 거대종의 것을 썼겠지. 접합부를 유지하려면 비정상적인 생명력 또한 갖췄을 거다. 트롤이나 증식하는 살덩어리 같은 것들을. 불사종이나 고대종을 사용했다고 보기엔 조악하니까, 트롤이라 보는 편이 낫겠지.’


생명을 마음대로 주물러댄 흔적이 눈에 밟힌다. 그러나 루히는 그보다 더 훌륭한 솜씨를 가진 용을 알기에 딱히 놀라워하지 않았다. 아카샤가 만든 실험용 쥐와 비교하면 어린아이의 소꿉장난 수준이다.

루히는 질척질척한 피로 덮였고 이제는 말라붙어 갈색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겉옷을 벗었다. 그리곤 우산을 집어 든다. 끄트머리에 달아둔 상급마석의 빛을 살짝 살펴보고 여유롭다 가늠하곤 결계 밖으로 튀어 나왔다.

발이 결계의 경계 밖을 내딛자마자, 탕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루히의 몸이 순식간에 몇 장이나 되는 거리를 뛰어올랐다. 중력에 쏠린 체중으로 근질대는 감각을 받으면서 순식간에 건물의 꼭대기에 올라선 루히는 킁하는 소리를 내며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곤 미간을 살짝 주름지게 만든다. 그를 이끈 묘한 감각이 다시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키리리릭!”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거구의 몬스터가 루히를 향해 달려들었다. 손톱을 벽에 쑤셔 박으면서 삽시간에 뛰어올라 루히를 향해 휘둘러댔다.

루히는 뒤로 물러나며 어느 쪽을 우선시해야 하는가 짧게 고민했다.

그러나 그런 고민도 잠시, 콰르르 소리를 내면서 발판이 무너져 내렸다. 원형을 겨우 간직하던, 폐허에 가까운 건물인지라 몬스터의 거체를 견뎌내지 못한 거다.

탁, 탁, 탁 뛰면서 거리를 벌리는 루히와 다르게 몬스터는 발밑이 쑥 꺼져서 아래로 떨어졌다.

쿠궁!

천장을 이루던 돌들이 떨어져 커다란 소리가 들렸고 이어 흙먼지가 풀풀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루히의 발밑에서 손톱이 솟아올라 교차하듯 움직였다. 아래로 떨어진 몬스터가 천장을 향해 뛰어오르며 데스클로의 손톱을 휘둘렀고 거대한 돌을 두부마냥 베어버렸다.

순간 울린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뒤뜰에 내려선 루히는 마땅찮은 얼굴을 만들었다. 얼기설기 짜 맞춘 키메라의 손톱만큼은 가공할 파괴력을 갖췄다. 상급 재료인지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상급 재료인지라 온존하고 싶어진다.

적어도 근방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리라.


‘어쩔까?’


품 안으로 파고드는 일은 위험하기에 마법을 사용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미리 기억해둔 마법은 온존하고 싶다.

애초에 루히에겐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다. 즉석에서 짜 올리는 마법은 고도의 연산이 필요하기에 캐스팅이라 부르는, 주문을 시전 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기적이 신의 힘을 불러오는 약속이라면 캐스팅은 마력 회로를 미리 찍어낸 금속활자와 같다. 아무리 줄인다고 한들, 강한 힘을 일으키려면 그만큼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용의 마법은 좀 더 즉각적이지만, 파괴 마법은 이후를 보장하기 힘들다. 적어도 주변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 거라 여기지만 그 여파가 어디까지 닿을 진 그조차 알 수 없다. 10의 힘이 필요한 상황인데 100면체, 500면체의 주사위를 굴려대는 일과 마찬가지다. 다양한 것들을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적어도 당장엔 쉽사리 써먹기 힘들다.

그리고 최소한 손톱만은 가지고 싶다.


그때, 성채의 벽면에 몬스터의 손톱이 박히고, 그물망처럼 잘라내며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콰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육중한 두 다리가 돌바닥을 쪼개면서 달려든다. 벌린 입에선 걸쭉한 침을 질질 흘리면서 루히를 향해 쇄도했다.

포탄처럼 날아오는 거구의 몸체는 가히 위압적이지만 맞추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탕, 타닥, 탕 하는 박자와 함께 루히는 비스듬히 뛰어올라 재차 성채 위에 올라섰다. 이것이 술래잡기라면 적어도 몬스터의 손에 잡히지 않을 빠르기로.

그리곤 키메라 제작자의 실수를 비웃기라도 하듯 우산을 휘둘렀다.


쿠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성채의 한쪽 귀퉁이가 날아갔다. 박살난 돌덩이들이 이제 막 성채의 돌담에 처박히던 몬스터를 향해 쏟아졌다. 몬스터의 거체에 탄환처럼 내리꽂힌 돌들이 퍼버벅하는 물기 어린 타격음을 냈다.


“키리리릿!”


몬스터의 성난 울부짖음을 뒤로하고 루히는 재차 성채를 박살내며 유용하게 사용한다. 쿠앙, 쾅, 콰앙하고 연이어 들리는 폭발음이 초목을 떨게 만든다.


잠시 후, 석공과 목수들이 몇 년에 걸쳐 만들어낸 성채는 반파되었고 모진 비바람을 맞아가며 담쟁이덩굴의 묘상이 되어주던 벽도 무너져 이제 더욱 폐허다운 모습을 갖췄다. 어차피 버려져 스러지던 건물이니 불만을 내뱉을 사람은 영주밖에 없으리라.

콰르륵 소리를 내면서 혼자서 무너지는 돌담 앞에 선 몬스터의 신체는 반쯤 걸레짝이나 다름없다. 탄환처럼 파고 든 돌멩이가 거구에 박혀 피를 철철 흘려댔고 뜰과 벽면을 붉게 칠하여 비릿한 냄새를 자욱하게 풍겨댔다. 다만 끈질긴 생명력은 여전하여 오히려 광포한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루히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려는 강렬한 분노만이 전해져온다.

루히는 기분 좋게 뻐근한 손목과 곧 이어질 자그마한 희열감을 기대하며 입 꼬리를 올렸다.

옥상에 자리 잡은 창고로 썼던 부속 건물의 벽을 우산으로 때리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나간 벽면에서 돌멩이들이 우르르 몬스터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몬스터도 육중한 몸뚱이를 날리며 달려들었다. 이제 슬슬 돌멩이 찜질에 익숙해졌거나,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으리라.

그리고 루히는 제작자의 어설픔에 웃음을 보내며 오른손으로 반파된 건물 벽을 붙잡았다. 사람 머리통만 한 돌을 집어 들었고 피부 아래의 푸른 혈관이 꿈틀댔다. 이내 크게 휘두르면서 던졌다.

쐐액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돌이 몬스터의 머리통에 맞는 순간, 퍼억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통 반쪽이 날아갔다. 이어 뇌수를 흩뿌리면서 날아오는 키메라의 거체를 살짝 피하고 우산을 휘둘러 재차 공격을 이어나갔다. 젖은 파열음과 함께 몸통 한쪽이 터졌고 안에 담긴 것을 쏟아냈고, 반쯤 죽은 살덩이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나마 간신히 유지하던 옥상이 다시금 와르르 무너지고, 바닥으로 처박히는 몬스터의 몸뚱이를 쫓아 뛰어내리는 루히의 입가엔 어느새 웃음기가 그득했다.

이어, 펑, 철벅. 펑, 철벅.

가문 날 흙먼지가 피어오르지 않게 사방에 물을 뿌리듯 눅눅한 잔해가 흩날렸다. 코를 찌르는 피 냄새가 아지랑이마저 붉게 물들이는 듯하다.

잠시 후, 키메라는 두 팔을 제외하곤 멀쩡한 형태를 남기지 못했다. 루히는 피와 살점을 잔뜩 뒤집어 쓴 얼굴을 닦아냈다. 들불처럼 일렁이는 환희가 삽시간에 잠재워진다.

조금 과했나 싶었으나 머리를 반이나 날렸음에도 꿈틀대는 강인한 생명력엔 나름 합당한 행동이었다고 여긴다. 이제는 육편으로 변한 살덩이들 속에 또 어떤 마물이 섞였을지 모르니까.

다만 두 팔의 피부 밑이 조금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이제, 대화할 마음이 들었소?”


루히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실력행사였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마법의 화살이 튀어나왔다. 마법을 시전하는 전조나 낌새도 없이 튀어나왔기에 완벽한 기습이다.

그러나 문지기를 보내어 이토록 성대하게 맞이해 주었는데, 주인이 모습을 드러낼 건 당연지사라 루히는 풀쩍풀쩍 뒤로 뛰어서 피해냈다. 마법의 화살은 공간을 가르며 날아가 흉물스럽게 변한 벽을 때렸다. 이어 루히가 마침 발을 디딘 자리가 검게 변하더니 끓어올랐고 그걸 피해 냈을 때엔 벼락이 날아들었다.

화살은 미끼, 바닥은 함정, 그리고 벼락이야 말로 직격을 노린 마법이다. 연계가 잘 된 마법사들의 마법은 수 싸움에 능숙한 느낌을 자아냈다. 다만 좀 더 광범위하게 주변을 모조리 휩쓰는 마법이 아니라면 루히의 기동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

루히는 한족 벽을 발로 디디며 우산의 자루 부분을 뽑아내어 휘둘렀다. 촤르륵 뻗어 나오는 벼락 줄기가 마력검을 타고 흐르며 파직 거렸다. 마법에 대한 대처는 마법으로. 그런 의미에서 마석의 마력을 품은 마도구는 동일한 효과를 빚어냈다.

벼락을 막아낸 루히는 마법이 튀어나온 공간을 바라보았다. 엉망진창으로 변한 몬스터의 피와 살점이 흩뿌려진 쇠락한 공간엔 아무도 없었으나 그건 환상이거나 그에 준하는 마법이다.

어쨌건 마법의 발동 속도를 고려하면 그 너머에 다수의 마법사가 있는 건 확실하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의문들 가운데 가장 궁금한 하나를 물어본다.


“범람을 꾸민 일과 마족은 관계가 있소?”


이번 일이 마족과 관련되었으리라 여겼기에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장막 너머에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법사에게 시간을 주는 일은 위험하다 판단한 루히가 일단 베고 다음 기회를 노리려고 마음 먹을 즈음, 뒤늦게 마법의 장막 너머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문양이 없는 잿빛 로브를 둘러쓴 남자는 움푹 파여 음울한 기색을 품은 눈으로 루히를 살피더니, 지팡이로 루히를 가리켰다. 행색은 특색이 없어 초라한 수준이지만 두 손으로 척하고 들어 올린 지팡이만큼은 일품에 속한다.

지팡이의 머리 부분을 꾸민 몬스터의 꽁지깃, 단단하게 감싼 금속판에 새겨진 문양들 하나하나가 눈길을 끈다. 그것은 자존심이며 동시에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적어도 그가 수준급의 마법사임을.

남자, 로무스는 다소 난감한 기분을 느끼면서 레이달로프의 명을 따랐다.


“너는 누구지?”


로무스는 스스로가 말하면서도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순 없었다.

야심작에 속한 전투 키메라를 가뿐히 죽인 상대는 분명 어제까지만 하여도 마법사라 여겼다. 그러나 검을 쓰는 모습에 위화감이 없다. 설혹 마도구를 사용한다지만 평범한 마법사가 보일만 한 움직임은 절대 아니다. 아무리 보호마법을 둘렀다고 한들, 익숙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애초에 보호마법은 제 몸을 건사하기 위한 용도니까.

하물며 이젠 폐허라 불러도 위화감이 없는 성채의 입구에 펼쳐진 결계에 이르러선 의문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도구의 핵으로 삼은 마석, 드래곤 하트를 보았으며 그것이 오색으로 빛나는 요정용의 심장이라면 더욱.

적어도 림판 왕국에선 볼 수 없는 물건이다. 왕궁의 보물고에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다. 인근 나라도 그들이 파악하기론 가지지 않았다고 여긴다.

그러니, 상대의 정체가 개인적으로도 몹시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순순히 밝히지 않을 거라 여깁니다만.’


로무스의 짧은 생각에 응하듯 루히의 입이 열렸다.


“내가 먼저 물어봤소.”

“모른다. 그러면 넌 누구지?”

“···헛걸음인가.”


루히의 목소리엔 희미한 실망이 감돌았고 말을 마칠 무렵엔 봄철 고양이의 수염에 깃든 미풍처럼 흩어졌다.


“루트비히. 당신들에겐 그냥 루트비히요.”

“루트비히? 어디의 마탑이지?”


루히는 마법사들은 어지간히도 남의 출신에 신경 쓴다고 여겼다. 그러고 보니 마법사뿐만 아니라 그가 만난 대다수가 그러했으니, 어쩌면 인족들의 공통된 성질일지도 모른다.


“마탑이 아니오.”

“그러면···.”


로무스가 말을 꺼내기 전에 루히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그럼 당신들은 어느 마탑의 소속이오?”

“알 필요 없다.”

“아, 이해했소.”

“···뭘?”

“서로 원하는 게 달랐다는 걸.”


빗나간 화살이 잠깐 엇갈렸을 뿐이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선 그렇다.

루히는 잠깐 고민했다. 마법사에게 시간을 주는 건 상책이 아니다. 숙련된 마법사는 공성병기에 필적한다. 마법사들이 마탑을 포기할 수 없듯, 권력자들도 마탑을 포기하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가더라도 공생관계를 쌓아가는 까닭엔 서로 그만큼 강한 무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금쯤 불가시의 장막 뒤에선 더욱 강력한 공격 마법을 캐스팅하는 중일 거다. 기습으로 숨통을 끊거나 무력화하지 못했으니 철저히 준비할 테고, 눈앞의 남자는 의구심이 절반이며 나머지 절반은 시간 벌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루히는 일단 서로의 말이 통하는 상대이니, 다소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권유해본다.


“항복하면 살려주겠소. 처분은···, 저 도시의 영주가 내릴 테니, 그에게 아량을 구해보시오.”

“뭐? ···아니.”


로무스의 판단은 빨랐다. 눈 앞의 남자는 전투 키메라를 농락하듯 가뿐하게 죽인 자였다. 기사나 토벌대와 버금가는 실력도 가졌다. 피를 잔뜩 뒤집어 쓴 몰골도 이렇게 대치하는 상황에선 두려움이 앞선다.

애초에 적으로 상정한 상대. 그건 수상쩍은 마법사도 마찬가지일 터. 설혹 우연히 들렀다고 한들 공격 받았으니, 이미 서로 죽일 이유는 충분했다.

마법사의 싸움은 수 싸움이 절반이다. 찰나의 시간에 공방을 주고받으며 천변만화한 싸움을 펼치는 기사들과 다르게 마법사는 손에 든 카드를 얼마나 적절하게 꺼내느냐로 승패가 갈린다. 한 번 발동한 마법은 중도에 바꿀 수 없으니까.


“《아케인 실드 arcane shield》”

“불꽃을, 《틴더 tinder》”


콰앙-.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성채마저 집어삼킬 정도로 피어오른 불꽃은 하늘을 달구었으며 동시에 갈 곳 잃은 불이 뿜어져 나오는 창문 구멍으로 한 사람의 인형이 튀어나왔다.

루히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딛는 자세로 착지했다. 축축하게 젖었던 옷이 어느새 바짝 말랐다. 갑작스레 끼얹어진 열기로 몸에선 연기가 푸시시 솟아오른다.

정해둔 범위보다 조금 더 광범위하게 발동되어서 살짝 그슬렸으나 오차 범위 내였다. 주변 일대를 날려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기초마법에 불과하지만, 오늘은 마법의 발동률이 제법 좋다. 운수 좋은 날인지도 모른다.

고개를 들어 불길을 바라보며 속으로 타이밍을 잰다.


‘하나, 둘, 지금!’


동시에 마법의 불길이 훅하고 순식간에 사라진 건물의 안으로 루히는 뛰어 들어갔다. 달궈진 공기가 그의 피부를 팽팽하게 당긴다.

로브를 입은 마법사는 유막처럼 불투명한 생김새의 아케인 실드를 펼쳐둔 상태였다. 처음부터 시간을 끌 생각이었던 게 다행이란 얼굴이다. 적절한 대처 덕분에 틴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러나 창졸간에 거리를 좁혀드는 루히를 보면서 그저 얼빠진 얼굴을 보여준다.


‘이해해.’


당황할만하다. 기초마법은 사전 준비가 필요 없는 단순한 마법. 그만큼 간단하기에 발동도 무척 빠르다. 그러나 그 용도는 장작을 때울 때나 쓰는 생활 마법에 가깝다. 마탑의 문을 넘지 않은 자들도 아주 가끔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루히의 마력을 때려 박은 틴더는 중급 마법인 화염 폭발에 버금갔다.


‘그렇다면 그냥 중급 마법이라 간주하면 그만이다.’


스승님, 용의 마법과 비교하면 상당히 친절하다. 적어도 대화의 사이에 교묘하게 집어넣은 용언, 거짓 캐스팅과 같은 속임수는 없으니까.

루히는 마력이 흐르는 검으로 불투명한 보랏빛 장막에 연격을 가한다. 일섬, 일섬의 기세가 강하여 순식간에 마법 장막이 불안정해진다.

그제야 마법사가 뒤늦게 다른 마법을 시전하려고 들었으나, 장막을 찢어발긴 루히의 장저가 마법사의 목을 후려쳤다.


“브, 블링···, 커억.”


우득, 뼈가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몇 미터는 날아가 뒤쪽 벽에 처박혔다. 목뼈가 부러졌는지, 아니면 벽에 처박힌 충격에 실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루히는 날려버린 마법사에게서 눈을 떼어 후텁지근하게 달궈진 공기에 섞인, 살이 익는 냄새를 쫓아 몸을 날렸다.

후욱하는, 뒤쪽으로 쏠리는 느낌과 함께 경계선을 넘자, 루히를 반기는 건 네 사람의 마법사였다. 둘은 화염에 직격으로 휘말렸는지 연기를 풀풀 피어 올리며 끄윽 하는 소리를 내었고, 나머지 둘은 시동어만을 기다리는 마법진을 준비해뒀다.


“《바인드 bind》.”

“《데스 레이 death ray》.”


루히의 발밑에서 마력으로 된 손이 올라와서 발을 묶으려 들고, 그렇게 발이 묶인 상대에게 치명적인 광선을 쏘아낸다. 서로 상쇄되지 않는 완벽한 타이밍의 연계이며, 직전의 투사체가 아닌, 원뿔형의 광범위한 공간을 훑어내는 중급 공격 마법을 사용하는 점에선 전투에 나름 익숙하단걸 읽을 수 있다.

다섯이서 동시에 마법전을 펼쳤다면 제법 곤란했으리라 여긴다.

하지만 고작 둘로는 발을 묶을 수 없다.

검으로 마법의 손을 잘라내며 신발에 마력을 붓자, 타당 소리와 함께 신체가 벽면을 따라 내달린다. 기사에 버금가는 순발력으로 순식간에 마법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으며 다시금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을 차자 거듭된 충격으로 약해진 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루히는 그 반동으로 마법사들의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


“큭, 마력이여, 다가오는 적을 막는, 장벽이 되어라. 《포스 실드 force shield》.”


마법사가 보호마법을 발동하지만 더욱 강도 높은 상급 마법인 아케인 실드도 잘라내는 마력검의 앞에 포스 실드는 거품마냥 잘려나간다.

이후 슉 하는 소리와 함께 뒤늦은 절규가 울려 퍼졌다.

마법사들을 제압해 낸 루히는 주변을 슥 훑어보았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덩치 큰 마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커다란 구멍이다. 주변엔 손톱자국과 피와 살점이 눅진하게 들러붙어 있어 키메라가 거기서 나왔음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살짝 고민하는 까닭은 우산의 뒤에 꽂은 마석의 빛이 어느새 바래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마도구에 따라 다르지만 적어도 개월 단위로 쓸 수 있는 상급 마석이지만 전투 몇 번에 벌써 마력이 쇠했다. 특히 검집을 착용한 상태로 휘두른 결과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마석을 새로이 교체하며 짧은 한숨을 휴하고 내쉰다. 검의 내구성은 만족스러우나 다른 부분에선 그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다. 아직 한참 모자라다. 한 번에 뽑아내는 충격파의 출력은 겨우 합격점에 닿을 수준이다. 그렇지만 역시 출력대비 소모가 너무 심하다. 마석이 품은 마력의 수준은 거의 정해져 있기에 유지력을 감안하면 전투 도중에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한 건 엄연한 약점이다.

더욱 고순도의 마석을 사용하거나 마력 변환의 효율성을 끌어올려야 한다.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 그건 아직 답을 구하는 도중이다.

그러나 절약보다는 출력이 더욱 중요하다. 용을 상대하던 기준에선 여전히 모자라다.

루히는 속에 품은 고민과는 다르게 서슴없이 지하로 향했다.

지하실엔, 커다란 공간이 존재했고 버려지기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양쪽 벽에는 배양액이 담긴 커다란 유리통이 줄을 맞춰 놓여 있었고 안에는 생명체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살점이 부글부글 올라오는 거품을 맞아가며 꿈틀댔다. 각각의 기구에선 기다란 호스가 뻗어 나와 한쪽 벽면을 향해 모였는데, 비대한 살덩이에 푹푹 박혀 있었다.

살덩이의 앞에는 알껍데기가 수도 없이 모여 있고 안에 담긴 새끼가 꾸불거리며 그림자를 비춰댄다.


‘이게 여왕인가?’


몇몇 특징적인 부분에서 앵글러 원숭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적어도 신체의 베이스는 여왕이라 여긴다. 다만 제어하기 위해서 약체화 시켰다. 커다란 자궁을 품은 하반신과 다르게 상반신은 인족 여성을 박아 넣었으며 전라의 신체엔 문신처럼 마력 회로가 새겨져 있다.


‘명령을 내리기 위해선가.’


마물을 가르치기보단 효율적인 발상이다. 다만 접합부의 조잡함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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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기대치 않았던 일거리 (2) 23.01.01 34 0 27쪽
42 기대치 않았던 일거리 (1) 23.01.01 33 0 36쪽
41 대면 23.01.01 39 0 22쪽
40 조우 (2) 23.01.01 40 0 33쪽
39 조우 (1) 22.12.31 50 0 22쪽
38 햄튼을 뒤로 하며 22.12.31 48 1 18쪽
37 필연 혹은 우연 (9) 20.07.04 80 1 17쪽
36 필연 혹은 우연 (8) 20.06.30 56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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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햄튼 (2) 20.03.17 116 1 14쪽
22 햄튼 (1) 20.03.16 130 1 16쪽
21 검은 안개 (8) +1 20.03.14 129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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