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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카네 님의 서재입니다.

혼돈을 칭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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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카네
작품등록일 :
2020.02.23 17:00
최근연재일 :
2023.01.0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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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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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필연 혹은 우연 (7)

DUMMY

***


주변이 이미 반쯤 허허벌판이 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사람 몇 정돈 묻어도 괜찮을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거기에 묻으면 딱 어울릴 유해의 조각들은 처참히 너부러져 있다.

잔혹이 파괴된 건물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 한 사람을 주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키는 제법 크나 미끈하다 여길 호리호리한 체구. 갓 피어난 여린 순처럼 색이 옅은 머리칼. 석양의 마지막 빛을 남김없이 받아들일 정도의 하얀 피부. 무감한 얼굴을 지녔으며 한 손엔 돌돌 만 우산 하나를 쥐어 마치 산책을 나온 노중년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몸에 자연히 깃든 여유와 평온함이 주름하나 없는 스무살 즈음의 얼굴에 깃들어 있어 어딘가 무척 수상쩍다.


루히는 자신의 말 한마디가 빚은 사태를 보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마족은 무언갈 행하려고 했으며 에이미를 포함한 기사와 마법사, 햄튼에서 싸울 수 있는 자들은 그걸 막으려고 했다. 서로 원하는 바가 명확한 상황에서 굳이 그가 끼어들 필욘 없었다.

어쩌면 재차 이어지는 신마 대전의 시작이 여기, 지금 이 순간일진 모르나 일이 터지기 전까진 그저 하나의 소요일 뿐. 어떤 거대한 위협쯤으로 인식된다면 누군가가 나설 거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속엔 루히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만약 용왕이 원한다면?

그런 끔찍한 상상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도시에 마족이 있고 그 사실을 알렸을 뿐이니 책임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 말을 너무 일찍 꺼냈다는 점이었다.

마법을 사용한 반동을 추스르고 햄튼을 떠날 즈음하여 넌지시 알려주었다면 그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던 일이다.

그러나 그는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일찍 알렸으며 스스로가 불러일으킨 소동의 사이에 고통 받는 처지가 되었다.

마족이 위험하다는 것을 이미 아는 눈치였기에 햄튼의 마족이 얼마나 위험한지 강조하지 않았다. 에이미라면 믿었으리라 여기니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설명이 부족하다 여긴지가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 비어버린 한 마디, 이 부분이 그의 실책이었다.


“다들 잠시 멈춰보시오.”


루히의 목소리는 마족과 신관 등 그 누구도 주목시키지 못했다.

오직 그의 뒤쪽 편, 배낭을 짊어진 케네디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에서?’


익숙해진다 싶었으나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리고 익숙해지면 질수록 뭔가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고. 세간의 상식에서 점점 동떨어져가는 기분. 적어도 그는 루히보단 평범한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기에 자신의 포지션을 고수하고 싶었다.


“다들 하던 일을 잠시 멈추시오.”


목소리가 조금 강해졌으나 여전히 주목을 끌기엔 힘들었다. 그야, 하늘을 가득 채운 마력의 창들이 언제 지면을 후벼 팔지 모르니까. 일대의 주역은 찬란한 마법이지, 새로이 나타난 한 사내가 아니었다.


“···짜증나는군.”


루히는 미간을 좁히며 불평을 내뱉었다. 그로썬 꽤나 강한 감정이다.

다들 열심히 집중하던 일들을 멈추고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들려면 성가신 일을 해야 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진탕 퍼마시고 숙취에 시달려 골골대는 자에게 다시 술을 권하는 느낌과 비슷했다. 살의를 피어내지 않는 까닭은 그가 루히라서다. 오히려 짙은 살의를 피워냈더라도 역으로 성립가능한 말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단 시작해본다.


“《그만둬라》.”


속에 품은 마력의 우물에서 힘이 방출된다.

가감 없이 퍼 올리는 용의 마법. 출력은 여전히 조절할 줄 모르고 그저 몸 상태 같은 다양한 변수에 따라 마나를 움직인다. 허나 세심한 조절이 필요한 인족의 마법과는 다르게 그 효과는 확실하다. 적어도 그를 펑 하고 터트려 버리진 않으니까.

하늘을 메운 창들이 순간, 사라졌다. 아지랑이라도 사라질 때엔 미약한 기척이라도 남기는데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는 듯 지워졌다.

남은 건 그저 갑작스런 변화에 다리를 비틀거리는 에이미와 황금색의 눈에 증오를 싣는 가린샤, 이제 완연한 밤의 색을 품은 하늘뿐이다. 시끄러이 울리던 경종은 멎고 일찍 모습을 드러낸 샛별이 반짝, 스쳐가는 빛을 남긴다.

마법사들이 두 눈을 크게 떠, 내면의 경악을 밖으로 표출했다. 주변을 들쑤시는 마나의 후폭풍은 마치 격류와도 같았으며 기운이 빠진 자리에 가라앉는 마나의 고요함은 연락 받은 대로 무시무시했다.

카날라의 소서러. 종족을 불문하고 포섭하고 싶은 사내였다.


“역겨운 위선자들!”


가린샤는 한 차례 으르렁거린 뒤에 가로로 쭉 째진 동공을 좁히며 ‘용’을 찾았다. 그리고 인족의 모습으로 변신한 용의 모습을 발견했다.

낮에 저택을 들른 남자였다. 여신관과 함께.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운을 뿜어내진 않았으나 용의 마법을 썼으니 그가 용이다.

용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많은 궁금증이 풀렸다. 그리고 동시에 강한 반발심을 드러낸다.


“탐욕스런 용아. 내가 먼저 놀고 있었다.”


얼마나 재수가 없으면 심심하여 나온 용에게 덜미를 잡힐까.

그들은 관조하면서 또 무료하다고 자기마음대로 행동한다.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도록 한다는 건 허울뿐인 명분. 한 번에 갈아엎는 것은 아니지만 부수고 망가뜨린다. 그저 그 영향이 국지적이며 간격이 길기에 드물다 여기고 개개가 강하기에 불만을 직접 말하기 힘들 뿐.


루히는 마법의 반동으로 불편한 얼굴을 감추며, 마족의 찌르는 듯 한 시선에 일말의 망설임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렸다. 다짜고짜 살기부터 뿜었다면 그는 해야 할 일을 했을 거다.


‘조짐이 좋군.’


말이 통하는 상대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자신을 용이라 부르는 것도 조금 듣기 좋았다.

어쩌면 마족과 먼저 이야기를 해봤더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반동으로 인하여 기분이 썩 좋지 않았기에 훗날을 도모했으나 마족은 오랜만에 보니까. 그 교묘한 위장술과 겉으로 들어난 외모는 충분히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줬을 거다.

다만 루히는 몸을 틀어 에이미를 보았다. 루히의 용언이 닿는 범위는 마력으로 구성된 것들. 그녀는 여전히 신성력을 몸에 두른 상태다.


“잠시 그만 두시오.”


에이미는 한쪽 어깨를 피로 적시면서도 마족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달싹이는 입술은 여전히 신을 찬송하고 내딛는 걸음걸음마저 신에게 바치는 행동이다. 시선은 올곧게 마족만을 바라본다. 이마의 균열이 벌써 턱까지 당도했는데도.

루히는 한숨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표정을 희미하게 만들곤 신발에 힘을 실었다.


‘인족은 말을 듣지 않지.’


탕 하는 소리와 함께 풀쩍 뛰어 에이미의 뒤에 당도했다. 신성력의 기운이 여름철 뙤약볕같이 전해져 익숙한 듯 하면서도 꺼림칙하여 애매모호한 기분을 선사한다.

그의 근본을 들쑤셔 그가 무엇인지를 상기시키는 기운에 한쪽 눈썹을 끌어내렸다.

눈에 보이진 않으나 마법이 계속 지속되기 위하여 마력의 끈을 달아놓는 것 마냥 신성력도 확실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힘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했다. 넘치는 기운에 버티지 못할 정도라면 이미 의식조차 날아가 버렸음을 의미했다.

그녀를 움직이는 건, 탑을 쌓아올릴 주춧돌처럼 견고한 의지.

그러나 온전히 그녀의 것만은 아니리라.


‘신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같이 광신자의 얼굴을 숨겼다더니.’


루히는 손을 내밀어 에이미의 한쪽 어깨를 잡았다.

치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손바닥이 타들어간다. 열기를 품은 신성력이 닿는 것 모두를 멸하려 든다.


“게르젤, 그만두시오. 이만 하면 되었소.”


말과 함께 후두부를 세게 내리쳤다. 퍼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주변에 퍼진다.

가감 없이 세게 내리친 까닭인지, 아니면 게르젤이 그의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에이미의 몸을 좀먹으며 그릇을 깨부수던 힘이 물러난다.

풀썩 쓰러지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루히는 이제 좀 진정된다는 표정을 만들었다.

가린샤는 언제라도 다가오는 것을 할퀼 수 있을 정도로 잔뜩 경계하는 시선을 보냈다.

용들은 자기 본위로 행동하기에 에이미를 한 방에 때려눕힌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는 거침없음이야 말로 그가 용임을 나타냈다.


‘좋지 않아.’


일이 완전 틀어졌다. 용이 개입함으로써 그녀가 떠올렸던 대책이 지금 막 무용지물이 되었다.

루히는 고개를 돌려 한쪽 귀퉁이에서 옹기종기모여 마도구의 방어 마법에 의지하는 마법사들의 모습과 숨을 달래며 튀어나가야 할 순간을 망설이는 기사를 보았다.


“난 당신들을 구하러 오지 않았소. 그러니 늦었다고 원망하지 마시오.”


가끔 분에 넘치는 행운을 얻었음에도 그것에 만족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딱 잘라 말한다.

말귀를 제대로 알아먹지 못하는 자들 투성이지만 시작부터 한 마디 해 놓으면 나중에라도 가장 먼저 떠올리겠지 생각하며.

기사와 마법사들의 멍청한 표정에서 이해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으나 그건 그들이 고뇌할 몫. 루히는 이 기나긴 하루를 어서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마족. 제안을 하나 하겠소. 이대로 물러날 순 없겠소?”


답은 이미 알았지만 일단 물어본다. 그는 구원자가 아니듯 학살자 또한 아니다.

바라는 건 그저 조용한 밤. 밤은 이미 성큼 다가왔으니 필요한 건 조용함이다.

마족은 하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오히려 내가 할 말이다. 이건 너희의 일이 아니야. 괜히 끼어들지 마.”

“그럴 순 없소. 하지만 굳이 서로 피를 흘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오.”


진심을 담아 말했고 마족은 그 진심에 욕지기가 올라온단 표정을 지었다.


루히는 마족이 무얼 획책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나 주변을 파괴하여 자신의 힘을 충분히 증명한 마족이 도시에 몰래 숨어들 정도라면 단순한 일은 아닐 거라 판단했다.

햄튼. 루히에겐 너무 커서 절반 정도는 없어져도 될 것 같다 여기는 도시지만 전체적으로 놓고 봤을 땐 자그마한 도시였다. 재해가 발생할 정도로 마나가 넘치는 장소도 멀었기에 얼마든지 개척 가능한 땅을 품었다. 그 말은 즉, 인근은 제법 평화로운 장소라는 거다.

굳이 마족이 숨어들 필요가 없었다. 힘으로 빼앗으면 그만이니까.


“이대로 물러난다면 더 큰 수고를 들여야 한다는 건 이해하오. 방비도 든든히 할 것이고 대책도 세워두겠지. 그냥 깔끔히 포기해준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 정돈 해 주겠소.”


마족의 눈이 쌜쭉하게 변했다. 루히의 말이 진심인지 파악하려는 모양이지만 거짓을 일삼는 그녀조차 그 자취를 읽을 순 없었다. 마치 그녀의 권능을 역으로 당하는 듯하다.

루히는 마족이 이대로 물러나 준다면 자신의 일이 끝난다 생각했다. 상응하는 보답은 배낭 안에 얼마든지 있었고 자신의 여행에 무리가 되지 않는 선이라면 도울 의향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족이 물러서지 않으리란 것 또한 내심 알았다.


“햄튼은 포기할 수 없어.”


목소리의 단단함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린다. 비릿한 피 냄새를 찌르도록 흩뿌려 놓고도 살의를 내비치지 않는 태도에서 단순한 여흥이 아닌 명백한 목적이 있음을 암시한다.

루히는 손아귀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한 생각의 실타래를 더듬어가며 여러 가지 것들을 연관시킨다. 사고의 찌를 이미 던진 모양새. 그가 이미 아는 것들이 머릿속에 뒤죽박죽으로 놓여 있어 모종의 연관점이 있음을 넌지시 알린다.


‘햄튼, 검은 안개.’


확신이 부족하여 만족스럽지 않다.


‘햄튼. 스프러스. 인족의 문제가 아니었나?’


하나의 물음을 건져냈다.


“햄튼엔 언제부터 있었소?”


뜬금없는 물음에 마족마저 의중을 읽지 못하여 눈살을 찌푸린다.

용은, 어깨 위를 짓누르는 밤의 어둠에 형체가 뿌옇게 잠겨들어 갈림길의 악마처럼 보인다. 하나의 정답과 하나의 해답을 가졌으며 혼 하나에 단 한 번의 대답을 들려주는. 어느 쪽에 해당하는 진 겪어봐야 할 일.

마족은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루히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입은 터무니없이 많았다.

활력을 담은 눈빛을 싸늘하게 발하는 기사를 향해 묻는다.


“저 마족은 햄튼에 언제부터 있었소?”

“···오 년.”


이제 루히의 시선은 마법사들에게 향한다. 그들은 품속에서 꺼낸 마력 등불을 만지작거려 도깨비불 같이 푸르스름한 빛을 밝혔다.


“저 마족은 햄튼에 언제부터 있었소?”


똑같은 물음.


“사 년이지.”

“엥? 칠 년이잖아.”

“···약 삼 년입니다.”


마법사들이 중구난방으로 답한다.


“그러니까, 전임 도시장의 장례식도 초대해 놓곤, 다음엔 결혼을 한다고 불러 짜증을 냈던 기억이······.”

“뭔 소리야? 내 쉰 일곱 번째 생일이 끝난 이후잖아? 그때 왜, ‘투명체 탐지’의 마법을 익혔으니 투명한 몬스터를 구해 오라고 마탑주가 억지 부리던.”

“아뇨, 제가 드디어 중급의 단계를 밟았던 때입니다. 축하한다는 선물도 받았다고요. 나중에 찾아봤는데 없어졌긴 하지만.”


서로 기억을 대조해보지만 맞물리지 않는다. 다들 혼란스런 목소리를 내나 루히는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케네디를 보았다.


“···햄튼에 머무르는 일은 잦지 않았으나 과거를 곱씹을 시간은 많았네. 적어도 나와 동료들이 햄튼에서 출발할 즈음까진 없었네. 그게 약 삼 년. 오차가 크진 않을 걸세. 친구에게도 기간의 확인은 했으니.”


루히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투명한, 보석 같은 눈에 등불의 불빛이 아로새겨진다.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경고.


“당신들. 더 멀찌감치 떨어지시오. 조종당해 날 공격한다면 죽이겠소.”


서로 자기의 말이 맞다고 우기던 마법사들이 열심히 머리를 굴려 답을 내렸다.

태양빛이 아직 세상에 머물러 있을 때 봤던 기괴한 광경에 한 차례 떠올렸던 가설. 루히의 말은 마족의 정신적인 공격이 단발성 마법이 아니라 이미 다들 그 영향을 받았음을 나타냈다.

그건 당분간 마탑에 틀어박혀 자기 자신에 대해 고찰하고 또 서로의 실험대상이 되는 나날이 기다렸음을 의미했다.

바닥에 흩뿌려 놓은 보호의 마도구를 주섬주섬 집어 들고 지팡이를 챙겨든다. 일대가 쑥대밭이 되어 전망이 훤하니 카날라의 소서러가 다음에 취할 행동은 여전히 관찰할 수 있을 거다.

벨트리온은 혼란의 손길이 마음껏 버무리고 간 표정을 만들었다. 부하인 레이가르트가 손쉽게 당한 까닭은 독과 같이 침식한 마법이었으며 그것이 자신에게도 남아 있었으니까.

마족이 선심 쓰듯 뱉던 진담이 생각 외로 모욕적이라 다시 투쟁심의 불꽃이 사르르 피어난다.

기억을 믿을 수 없다는 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성격은, 사소한 행동에서의 선택은 과거의 경험에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하룻밤 사이에 성을 쌓아 올릴 수 없듯 생은 시간의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결과물이니까.

고작 인식정도에서 그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과연 시밀튼 가의 핏줄을 가진 건지. 당장엔 스스로에 대해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기에 어금니를 꽉 깨문다.

허나 루히는 허리를 굽혀 옆얼굴을 바닥에 처박은 에이미의 몸을 한 손으로 들어올린다. 뒷덜미를 붙잡고 집어 올려 목둘레선이 죄어드는, 일점의 배려라곤 없는 거친 취급이지만 적어도 나름의 신경을 써주곤 있었다.


“고민은 나중에 하시오. 나는 나. 과거의 나가 어찌 되었건 지금의 자신을 다른 말로 부르는 방법은 없소.”


그 말과 함께 벨트리온 쪽을 향해 에이미의 축 늘어진 신체를 던졌다.

한 손으로 던지는 것이지만 몸이 쭉쭉 뻗어나간다.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면 당분간 사제의 신세를 질 정도로.

그러나 다행인건 그녀가 신관이었으니 다른 이를 번거롭게 만들 필욘 없으리라.

벨트리온은 얼떨결에 움직여 여신관의 몸을 받아냈다.


“자, 이제 지켜야 할 것이 생겼으니, 소임을 다하시오. 기사.”

“···시발.”


욕설이 어둠을 훑어낸다.

그러나 어디 얼마나 하는지 보자 하는 시선을 남기며 뒤로 물러선다. 아직 남은 마도구를 계산하고 휴식으로 얼마만큼 힘을 끌어낼 수 있는가를 가늠하며.

기사. 그의 직함은 남아 있었다. 그건 그가 아직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는 기사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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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대면 23.01.01 39 0 22쪽
40 조우 (2) 23.01.01 40 0 33쪽
39 조우 (1) 22.12.31 50 0 22쪽
38 햄튼을 뒤로 하며 22.12.31 48 1 18쪽
37 필연 혹은 우연 (9) 20.07.04 80 1 17쪽
36 필연 혹은 우연 (8) 20.06.30 56 0 16쪽
» 필연 혹은 우연 (7) 20.05.12 65 0 17쪽
34 필연 혹은 우연 (6) 20.05.06 80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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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햄튼 (1) 20.03.16 130 1 16쪽
21 검은 안개 (8) +1 20.03.14 130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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