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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po 님의 서재입니다.

서쪽 땅 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Asapo
작품등록일 :
2018.06.28 18:46
최근연재일 :
2018.08.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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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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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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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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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2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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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잃어버리는 이야기의 시작

DUMMY

서쪽 왕국 우실론에 살면서 아라미스를 모르는 법은 없는 것이다. 가장 큰 물류도시, 그리고 대상인들의 집합장소. 하지만 동쪽 왕국 아레메나 사람들은 아라미스를, 크게는 우실론을 비웃었다. 그것은 이유 없는 적대감 따위가 아니었다.


벌써 아라미스에서만 26명이 '죽음' 에게 살해당했다.


사람들은 이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수없이 오랜 시간 추모했지만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마녀라 불리는 모든 과부를 불태워 죽여도 죽음이 사라지지는 않았고, 자연재해로 죽은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게 멍청한 행동이란 것을 깨닫는 데까지는 퍽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곳에, 아직도 모든 죽은 이에게 통곡하는 한 소년이 인파를 헤쳐 달려나가고 있다. 어지럽게 불어대는 서늘한 바람은 머리칼을 타고 흘렀고, 헐렁하게 걸친 누더기는 부드러운 그의 속살을 간지럽혔다. 가까스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온 소년은 재빨리 어둡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벽돌담 사이 허물어진 틈새에 몸을 숨겼다.


벽에는 쥐 오줌이 얼룩져있다. 소년은 그곳에서, 얼굴만 한 빵 덩어리 하나를 꼭 쥔 채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쇠 비린내를 틀어막고 숨을 죽였다. 곧바로 발걸음 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의 귀에는 커다란 발소리와 달콤한 음식을 들고 온 낯선 손님을 반기는 쥐새끼들의 찍찍대는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어느덧 발걸음 소리가 그치고 정적이 찾아왔다. 벽돌담 건너편에서는 기다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발걸음 소리가 들리려는 찰나, 쥐들의 굶주림이라고 불리는 인내심은 바닥이 났고, 커다란 쥐새끼 한 마리가 소년의 발 위로 기어올랐다. 잔뜩 몸을 긴장시키고 있던 소년은 깜짝 놀라 옆에 있던 부서진 벽돌에 발을 디뎠다. 덜컥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아주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불안감은 커다랗고 우락부락한 손이 되어 그를 덮쳤다.


"그런다고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더냐?"


손아귀에 끌려 나와 맞은편 벽면에 내던져진다. 험상궂게 생긴 남자는 소년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가뜩이나 어수선해서 장사도 안 되는데 말이다..."


남자는 얼굴을 잔뜩 찡그려 더욱 위협적인 얼굴을 내보였다. 답답하단 듯 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선 소년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너희 같은 부랑아들! 쥐새끼들은 얼마나 또 꼬이는지!"


그러고선 소년을 들어 올린 뒤 다시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쳤다. 소년의 손에 남아있던 온기는 한순간에 원래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험상궂은 남자, 빵집 주인은 불과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자신이 정성스레 빚었던 빵을 짓밟아 버렸다.


"이건 못 쓰는 거다. 먹여는 줄 테니 다시는 가게 주변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더러운 자식."


그리고 그는 쓰러진 소년을 뒤로한 채 다시 넓은 거리로 발걸음을 돌렸다. 빵집 주인이 사라진 골목에서, 소년은 웅크린 몸을 펴고 일어섰다. 안 그래도 '걸쳤다'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의 누더기는 군데군데 찢어져 더는 옷이라 부르기 힘들어 보였다. 소년은 떨어진 빵을 집어 들고선 이리저리 흙먼지를 털어내고 입에 쑤셔 넣으며 부질없는 옛 생각에 빠져들었다.




소년은 고아였다. 듣기에 따르면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아기일 때 바구니에 모포 한 장과 함께 거리에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인근 고아원 부부가 그를 주워다 키웠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이야기는 서장조차 채 시작하지 못할 뻔했다. 고아원의 형편이 썩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굶고 못 입을 정도로 어려웠던 것은 또 아니었다.


부부는 데려온 아기에게 세실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실은 특별한 병치레나 사고 없이 잘 자랐고, 사교성이 좋아 다른 아이들과도 잘 지냈다. 비록 고아라는 단어가 그를 가리켜도, 세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원장과 부인은 항상 웃는 얼굴로 그를 대해주었고, 그의 옆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세실은 고아원 부부를 친부모처럼 잘 따랐다.


그러나 그런 평화로운 나날은 그의 나이 13살 겨울 무렵, 부인이 원인 모를 병을 얻으면서 끝나게 되었다. 원장은 여러 차례 의사를 불러 병명과 원인을 물어보았으나 그 누구도 원인은 물론이고 병명 또한 알지 못했다.


부인의 병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손에는 뼈가 앙상했고, 얼굴은 살이 빠져 광대뼈가 두드러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작스러운 영주의 착취로 고아원의 살림은 계속해서 줄어만 갔다.


주린 배를 채워줬던 빵은 점점 줄어들었고. 방안을 따듯하게 덥히던 벽난로의 불은 약해지기 시작했으며 부인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무섭게 드리워져 갔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원장의 몸과 마음 또한 야위었다. 원장은 날마다 부인의 곁에서 기도했다.


"온 평생을 다 바쳐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밤하늘의 밝은 별이었던 그녀는 제게로 와 따뜻한 불씨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녀의 밝은 마음은 아이들에게 한 줄기의 빛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아내의 손을 꼭 쥔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장난을... 이제 그만둬 주십시오.“


그리고 다음 날 3월의 시작. 밤새 세실을 괴롭히던 차디찬 한기는 한층 물러갔지만, 세실이 깨어나서 듣고 본 것은 원장의 처절한 울부짖음과 싸늘한 부인의 시체였다.


사크라토르교의 신자인 부부였기에 부인의 장례는 예식에 따라 치러졌다. 곧은 인품과 존경받는 인망의 소유자였던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작은 마을의 사람들이 대부분 모여들었다. 그러나 원장은 조문객들을 맞이할 수 없었다. 깊은 절망에 빠져 고아원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그는, 세실이 존경해 왔던. 어디서든 당당했던 그의 마음가짐과 자세와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조문객 들이 원장에게 다가가 격려의 말을 한마디씩 건넸다. 그 말은 화살이 되어 다시 원장의 가슴에 꽂혔다, 그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는 아내를 지켜주지 못했단 책임감에 눌려 숨을 헐떡이고 있었을 것이다. 성직자가 기도를 외우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따라서 기도문을 읊조렸다. 짧은 기도가 끝나갈 때 즈음 그는 어젯밤 자신의 기도를 다시 생각해 냈다. 그는 좌절했다. 눈앞엔 아내의 관이 놓여있었다. 그는 자책했다. 그리고 어젯밤 기도를 신은 비웃었다. 그는 그토록 믿었던 신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이 세 가지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날뛰며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도가 끝났을 때, 그는 평생을 모두 바쳐 믿어온 신에게 버림받았음이 분명하다 생각했고 최후에는 신을 증오했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지 않게 되었다. 기도가 끝이 나고, 원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비틀거리는 발걸음과 창백한 표정으로 아내의 시체를 향해 단상을 올랐다.


그리고 세상의 한 면에 작은 발톱 자국을 내었다.


세실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 잠시 사이, 검고 커다란 무언가가 사람들을 덮쳤다. 비명을 선두로 실내가 북적이기 시작했다. 뒤에 서 있던 세실은 재빨리 아이들을 데리고 가장 먼 방으로 도망쳤다. 싸한 느낌이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방안에 들어가 아이들의 눈과 귀를 막았다. 밖에서 들리는 부서지는 소리와 끔찍한 외침, 그리고 건물의 울림은 부인의 장례식을 마무리해주는 장송곡 마냥 울려 퍼졌다. 귀와 눈을 막은 채 몇 분이 지났는지 그는 모른다. 밖은 언제부턴가 잠잠해졌다. 세실은 잠시 문을 열어 빼꼼히 밖을 내다보았다. 피 칠갑이 된 부서진 가구들의 중심에 커다랗고 검은 늑대가 웃으며 서 있었다. 세실은 아직도 그 웃음을 기억한다. 그곳엔 커다랗고 검은 늑대가 아주 비열하고, 잔인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가만히 웃고 있는 늑대를 보자 섬뜩함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주변 건물은 피 칠갑만이 되어있을 뿐 다른 신체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덕분에 사람이 있었 던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고아원은 검붉은 염료들과 늑대를 제외하면 되레 평범한 폐허 같아 보였다.


늑대는 웃고 있지만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혹여 움직이는 것이라도 있는지를 계속해서 찾는 중이었다. 몰래 빠져나가려다 되레 잡힌다면 자신도 고아원의 정문을 칠할 단 한줄기의 붉은색이 되고 말리란 것을 세실은 직감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숨을죽인 채 다시 방문을 조용히 닫았다. 같이 방에 들어온 사람은 자기 또래 아이 한 명과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동생들뿐이었다. 형, 누나, 어른들은 모두 기도를 끝내고 장송곡의 현이 되어 사라졌다.


"어떻게 된 일이야?"


같이 방 안에 들어온 또래 아이 한 명, 한스가 밖의 상황을 조용히 물어보았다. 그는 9살 때부터 고아원에서 같이 자란 아주 조금 독특한 아이였다. 그는 항상 허세와 겉치레로 가득 차있었고, 자신이 고아란 사실을 남들이 몰랐으면 하는 아이였지만 그런 거짓을 증명하기 위한 별다른 악행은 없었다.


자신이 고아가 아니라고, 곧 부모님께서 자신을 데리고 올거라 갖가지 악을 썼지만, 그는 친구를 원했다.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자신이 고아란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베푸는 그런 아이였을 것이다. 세상은 그런 한스를 미워하지 못했다. 세실은 한스의 성격을 좋아했고, 한스는 세실의 명랑함을 좋아했다. 둘은 곧잘 붙어 다녔다.


"어떻게 된 일이냐니깐?"


한스가 재차 세실에게 속삭였다.


"커다란 늑대가 웃고 있어. 사람들은... 다 죽은 것 같아."


세실이 대답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한스는 미간을 찌푸려 보이고는 문밖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을 내다본 한스는 주춤 몸을 떨더니 재빨리 세실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문밖에서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분명 짐승의 울음소리였지만, 사이사이에서는 여러 사람의 비명소리 또한 배어 나왔음을 방 안의 아이들은 딱히 귀 기울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겁먹은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공포라는 도화선에는 결국 불이 붙었고 다른 아이들도 따라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늑대를 부르는 연주가 시작되었다. 같은 간격의 진동이 방안의 벽들을 미미하게 흔들었다.


방 안에 숨을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도망칠 창문 또한 손에 닿지 않았다. 소리는 점점 커져만간다. 한스와 세실에게는 선택의 갈래도, 선택의 여지도, 선택할 권한 또한 없었다. 모든 선택의 길을 꼬고 비틀며 다가오는 잔혹한 죽음에 어린 양들은 몸을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둘은 공포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늑대의 발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이제 곧, 이곳에는 늑대만이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심장을 자극했다. 피 칠갑이 된 밖이 눈에 어른거렸다. 속이 울렁거려 토가 나올 것만 같던 그때였다.


“안돼. 모두 다 죽어버려서는 안 돼.”


한스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세실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우리가 죽는다면 우린 모두 잊혀질거야. 그래서는 안 돼. 난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아. 적어도...“


소음이 그의 말을 묻어버리려 했다. 한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날 기억해줄 사람 한 명은 필요해.”


이 말을 마지막으로 한스는, 문을 박차고 괴물을 향해 달려나갔다. 세실위 눈에서는 눈물이 터져 흘렀다. 마치 가슴 구멍에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느낌이었다.


뭣 모르는 아이들은 한스가 문을 박차고 나감과 동시에 그를 따라 뛰쳐나갔다. 계속되는 공포와 불안감에 울음을 터트리던 아이들은 무엇이 옳은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들이 평소 믿고 따랐던 한스가 문을 나서자 그들도 덩달아 뒤따라 나가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그도 아이들이 자신을 따라나오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스의 희생은 물거품이 되지 않았다. 자신과 아이들을 미끼로 삼아 내던지고, 그가 죽기 전에 생각한, 그의 친구만큼은 지켜냈다. 세실은 구석으로 기어들어가 아이들의 비명과 여기저기가 무너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들으며 울다 지쳐 잠들었다. 부끄럽게도 세실에겐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다가왔다 .




그가 왼팔의 통증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모든 게 악몽일 뿐이었다는 듯 낯선 천장에 핀 곰팡이가 눈에 아른거리고만 있었다.


"정신이 드니?"


낯선 천장, 낯선 방, 그러나 무엇보다 반가운 친근한 목소리.


"아직 정신이 들지 않은 모양이구나. 더 쉬도록 하렴. 물 좀 마실래? 내려가서 가져오마. 잠시 기다리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세실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흐릿했던 초점이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방안은 소박하고 미미한 곰팡내가 묻어 나왔다. 주변은 평온했다. 다시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방안에 들어왔다. 세실은 바짝 몸을 긴장시켰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부인이 다가왔다. 익숙한 얼굴에 그는 경계를 풀었다.


그녀의 이름은 조세핀. 부인을 따라 시장에 갔을 때 꽃집을 운영하는 그녀를 자주 보아왔다. 조세핀은 언제나 부인과 함께 있는 세실을 향해 웃음을 지어주었다.


세실은 그녀가 건네주는 물을 받아 마셨다. 바싹 마른 목이 촉촉하게 젖어왔다. 그제야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세핀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든 게냐?"


조세핀의 말에 다 마신 물컵을 탁자에 올려두고는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끔찍한 소리에 고아원에 가서 문을 열어보니 커다란 괴물과 피 웅덩이밖에 없었다. 깜짝 놀라 영주님께 달려가서 말씀드렸지만, 이 늙은이의 말은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더구나."


세실이 겪은 모든 것.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괴물이 있다는 걸 시종을 보내 확인하고 나서야 병사들을 보냈고, 괴물을 잡으러 들어갔지. 살려달라는 소리와 소름 끼치는 울부짖음이 계속됐어. 뭐, 결국 괴물 놈을 잡았다고는 들었다."


세실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조세핀은 말을 이었다.


“이틀. 이틀이란 시간이 걸려서야 그놈이 죽었어. 다른 사람은 모두 죽고, 단 한 명이 이틀 밤을 새워가며 그놈을 상대했지. 누군지는 아직도 모른다. 영주는 이미 도망친 뒤더구나.”


그녀는 세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든 게냐? 생존자는 너밖에 없어. 네가 유일한 단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세실은 되려 쾌활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고, 방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어색함에 이리저리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다시 타이르듯 상냥하게 질문을 건네왔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구나.”


조세핀에 대한 세실의 침묵은 고요함을 연속시켰다. 그리고 그 기나긴 고요함을 깨트린 건 다름 아닌 언제나 상냥했던 조세핀이었다. 그녀는 비명 지르듯 말했다.


"거짓말 말아라! 넌 거기에 있었잖니. 그리고 이렇게 살아나왔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말해다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마. 약속해. 정말로! 그래. 괴물이 허공에서 튀어나왔을 리는 없지 않으냐. 부인의 장례식에 간 내 아들은 어디로 갔지?"


세실의 눈동자가 외줄 타듯 떨렸다. 한스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다시한번 눈물이 앞 가렸고, 몸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목구멍에 걸린 목소리를 겨우겨우 내뱉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더는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조세핀도 세실을 따라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사람이, 사람이 그렇게 죽을 수는 없어. 분명 너는 봤을 거다. 모든 걸 봤을 거야... 모든 것... 모든 것을..."


그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해 1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세실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더는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멍하니 눈을 뜬 채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되고, 조세핀은 세실에게 저녁을 먹으러 내려오라 말했다. 그녀는 사건에 관해서는 이제 물어보지 않았다. 세실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녀는 말했다.


"내일 영주의 시종이 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볼 거다. 그리고 다른 마을에 수도회로 보내질 거야. 이곳에 있는 유일한 고아원은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날이 밝고 영주의 시종이 찾아와 세실에게 몇몇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자신의 이름만 알려준 뒤,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계속해서 얼버무렸다. 실랑이 끝에 시종은 결국 포기하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돌아갔다.


밖에는 세실이 탈 짐마차가 준비돼 있었다. 그리고 마차가 대도시 아라미스에 잠시 멈춰 섰을 때, 그는 몰래 마차에서 도망쳤다. 목적지까지는 짐마차를 타고 더 가야 했지만, 그는 운명에 이끌리듯 짐마차에서 뛰쳐나갔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세실은 이 골목 저 골목 떠돌아다니며 도둑질과 소매치기를 일삼았다. 하루하루 주린 배만 겨우 채워가며 살았다. 그는 이런 일에 재능이 없었다. 물건을 훔치다 걸리면 달리기가 느려 흠씬 두들겨 맞는 일이 허다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그렇게 4년을 길바닥에서 살아왔다.


남은 마지막 빵 부스러기를 입에 털어 넣었다. 목이 마르고 괜한 옛 생각에 고향이 그리웠다. 가족들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세실이 있던 자리는 없다. 이제는 그저 거대한 돌무덤이 되어 사라진 주인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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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99 대설
    작성일
    18.07.19 09:06
    No. 1

    우선 드는 생각하나만 드립니다. "죽음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문장을 보면서 아마 많은 분들이 그냥 나가버렸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혹시 그 뒤에 이 문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나 봐도 전 찾지 못했습니다. 작품 첫회에 도입부에 분명 글의 배경에 대한 중요한 말같은데 독자가 이해못할 말을 적어놓고 독자가 모이길 기대한다는게 좀 이상합니다. 아직 뒤를 읽지않아 더 말하기 그렇지만 너무 이상한 도입부였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 Asapo
    작성일
    18.07.19 12:40
    No. 2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프롤로그가 긴데 그 문장의 뜻은 다음화에 나오니 저만 아는 지식이 되어버렸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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