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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글장이

세상을 파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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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머니나
작품등록일 :
2015.03.20 13:48
최근연재일 :
2018.05.20 14:26
연재수 :
16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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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38
추천수 :
935
글자수 :
1,193,004

작성
18.05.10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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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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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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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11: 저주와 장미와 불꽃 (25)

DUMMY

루프가 이후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에라핌 사제들은 로즈를 단상 위로 끌고 올라가서 멋드러지게 대열해 섰다.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휘황찬란한 갑옷과 깃발을 위시하고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은 사뭇 장엄해 보였다.


“선량한 라이발드의 시민들이여! 오늘 이 광장에 잘들 오셨소!”


길죽한 신관모를 머리에 얹고, 오른손에 번쩍이는 금 홀을 쥔 노인이 그들의 앞에 나서며 소리쳤다. 쩌렁쩌렁한 음성이 그가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많은 연설들을 해 왔는지 증명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 노인의 곁에 나열해 있는 주교들 중에는 어젯밤 루프와 이리나드가 만났던 프레드도 서 있었다.


“마침내 오늘! 위대하신 에라핌님의 그대들을 위한 은총이 멸세의 마녀를 밧줄 아래 결박하였습니다. 세상에 저주를 가져온다는 붉은 눈의 마녀, 그 저주받은 존재마저 그 분의 위대하심 앞에 오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노인은 마치 자기네들이 정말 위대한 일이라도 이뤄 냈다는 듯이 목소리를 떨어가며 일장연설을 늘어 놓았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그냥 붉은 눈의 마녀가 라이발드에 나타났고, 에라핌님이 그 마녀를 잡아 주셨다, 이런 별 것도 없는 이야기를 반 시간 가까이나 늘어놓고 있었다. 그의 장황설은 그가 로즈를 향해 눈을 뜨고 고개를 들라는 주문을 하고 나서야 끝이 날 징조를 보였다.


“세상이 정말로 눈이 붉잖아!”

“잘 안 보여! 대가리 치우라고!”


팔이 뒤로 결박된 채 나무 기둥에 묶인 로즈는 군중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경악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루프의 고막을 괴롭혔다.


저 놈들은 로즈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눈동자 색만으로 저렇게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는가? 이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과연 정말로 죽어야만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애시당초 사람이 사람을 정죄하고 죽인다는 것이 가당키는 한 일인가!


“지금부터 마녀의 화형식을 시작하겠소!”


그 노인 주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순간, 루프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의 손이 검 손잡이로 다가갔다. 그의 머리 속에 휴바스에서 조이스를 구하겠다며 날뛰던 바로 그 순간이 떠올랐다.


“안 되지, 안 돼.”


그런 그의 손을 누군가가 잡았다. 루프는 깜짝 놀라면서도 그것이 당연히 라키안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는 또 자신은 이상하게 방해하는 그에게 한 소리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아주 잘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라키안이 아닌.


그는 너무나도 정갈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남성적인 선이 뚜렷하면서도 강인한 외모에 여성의 부드러움이 어우러진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으며,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검고 긴 머리카락은 눈부시게 빛이나 마치 별이 머리칼 사이에서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그 외모는 정말, 신성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얼굴을, 루프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얼굴이지만 물어봐야만 했다.


“너··· 누구야?”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그 남자였다. 그 꿈에서, 오라는 이리나드는 안 나오고, 갑자기 저 남자가 툭 튀어나와서 자신에게 이상한 질문을 던져대던 그 꿈에서 보았던 싸가지 없을 정도로 잘 생긴 얼굴이, 지금 이 현실에, 이 시간에 자신의 눈 앞에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마치 라키안의 그것 마냥,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차 있는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루프가 누구냐고 물어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선을 여전히 로즈에게 고정한 채, 루프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이렇게 대답했다.


“너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사는게 인생인건 아니지.”

“넌 누구야? 이거 안 놔?”

“자아, 소년아. 지켜 봐라. 세상에는 지켜봐야만 하는 비극이 있고, 비극 속에서 스러져야 하는 목숨도 있는 법.”

“이거 놓으라고!”


루프는 팔에 힘을 주며 남자의 손을 떨쳐 내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철덩이 사이에 끼인 느낌이 날 정도였다. 루프는 몇 번 힘을 써보다가 팔이 아무래도 움직이지 않자, 그냥 검에서 불길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이미 손은 검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상태였다.


‘불이··· 안 나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최근들어서는 진짜 나오랄 때 잘 나오던 불길이 어째서인지 이 순간은 또 나오질 않았다. 루프는 당황하여 검을 내려다 보았다. 검은 조용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것은 루프가 미숙한 것이 아니다. 마치 인과 그 자체가 검을 붙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의 뒤통수에 그 남자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물건은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쓰면 안 되지 않겠나?”


루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남자는 다정해 보이는 표정으로 루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루프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다. 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당신··· 뭐야? 진짜 뭐 하는 사람이야? 너 분명 그 사람 맞지? 내 꿈에 찾아왔던, 그 이상한 남자 맞지?”


남자는 대답 대신 씨익 웃었다.


“시작된다.”


그의 목소리는 같이 터져나온 군중의 짧은 탄성소리에 묻혔다. 루프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펴고 군중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군중들의 소리가 들리기 전에 들린 것은···


“로즈씨!”


루프가 안타까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단상 위의 로즈는 그녀의 둔부를 가린 천조가리 하나만 남긴 채 발가벗겨진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도 탐스럽게 드러난 여인의 가슴은 기괴한 마력으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수치와 인간성의 가운데에서 죽음이 태어나는, 그 현실이 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삼각형의 천을 뒤집어 쓴 거대한 덩치의 남자 두 명은 날카로운 뼛조각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채찍을 손에 들고 바닥에 두어 번 내리치고 있었다. 생각없는 에라핌의 광신도들은 그것이 곧 찢어발길 여인의 고운 살결을 바라보며 비정상적인 흥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이내 광장은 그들이 내지르는 고함소리로 씨끄러워졌다.


“이거 당장 풀어! 내 몸에 이상한 짓 한거 당장 풀으라고!”


루프는 고함을 내질렀지만 남자도, 자신의 몸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자, 지켜봐라. 그리고 배워라.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지랄말고 당장 풀라고! 으아악! 제발 풀어줘! 이대로 있으면 로즈씨가···”


조급함으로 물들어 있던 루프의 목소리가 청중의 고함을 가르며 날카롭게 고막을 울리는 그 잔혹한 소리에 끊어졌다. 그 소리는 식탁 위의 고기를 찢을 때와 같이 부드럽고, 포도주를 나눌 때 처럼 붉었다. 루프는 떨리는 고개를 들어 단상을 주목했다.


짝! 쩍! 듣기만 해도 끔찍한 소리가 울릴 때마다 로즈의 살점이 찢겨 날리고, 피가 공중으로 뿜어진다. 여인은 입술을 깨물어 피가 흐르기까지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았지만, 튀어오른 피는 거침없이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아··· 아아... “


루프의 눈동자가 미친듯이 흔들렸다.


“에이그··· 어쩌다 붉은 눈을 가지고 태어나가지고··· 진짜 마녀처럼 세상을 멸망시키지도 못할거면서.”

“그러게 말이다. 그나저나 마녀라고는 해도 진짜 끝내주는 몸매를 하고 있구만··· 크흐흐흐.”


이 와중에 루프의 앞에 서 있는 두 남자의 비인간적인 말이 루프의 뇌리를 횟칼처럼 파고들었다. 순간 이성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루프는 전력을 다해 남자의 힘을 뿌리쳤다. 남자는 루프를 놓아 주었지만, 그가 일부러 놓아 주었다는 것을, 이성이 날아간 루프는 깨닫지 못했다.


다만 남자는 루프의 뒤통수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절망하거라.”


절망. 압도적인 절망.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그것은 찾아왔다. 마치 마법, 아니 최면? 분노로 인해 눈 앞에 걸리적 거리는 것을 부숴버리겠다고 호기롭게 뛰쳐나가던 루프의 머리속을 순식간에 절망이 가득 채웠다. 손이 덜덜 떨리고 숨이 가빠져 온다. 다리는 무너져 내리고 식은땀이 이마를 적신다.


죽는다. 불탄다. 로즈는 이 곳에서 저렇게 피부가 찢겨지고 사지가 잘라지며 철저하게 늉욕당한 후 처참한 몰골의 말라붙어버린 해골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식용으로조차 쓸 수 없을 정도로 타버린 육체는 꼬챙이에 끼워져 광장에서 며칠간 전시된 후, 개밥으로 던져질 것이다. 몇몇 뼈조각은 그게 뭔지도 모르는 동네 꼬맹이들이 집어 던져지며 놀리게 되리라.


희망은 없다. 그것이 온전 유일한 미래이고, 이제 일어날 것이다.


절대적 절망. 그것이 루프를 휩쓴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결과는 이내 로즈와 이리나드를 연결시키고, 루프는 그 안에서 로즈와 똑같은 모습으로 처형되는 이리나드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아··· 아···”


루프는 단말마와도 같은 침음성을 삼키며 무릎을 꿇고 땅을 짚었다. 짜악 짜악 울리는 채찍소리가 보이지도 않는 핏방울을 눈 앞에서 현실감있게 튀겨댔다. 어느샌가 잠잠해진 좌중 사이로 실신하며 흘러나오는 로즈의 신음소리가 심장을 면도날처럼 파고든다.


“아쉬워 말거라. 애당초 네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절망은 몇 분 차이로 어차피 너를 덮쳐올 것, 미리 찾아왔을 뿐이라 생각해라.”

“아아··· 아아아··· 으아아아···”

“여기에서 네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지, 젊은 행상인.”


그 신원미상의 남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프의 곁에서 떠나갔다. 그러나 루프는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흐리멍텅한 동공을 정신병자처럼 떨어대며 땅을 향해 신음을 흘려대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루프를 눈치채고 ‘마녀의 저주가 내린다'며 너나 할 것 없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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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11: 저주와 장미와 불꽃 (28) 18.05.13 65 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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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11: 저주와 장미와 불꽃 (26) 18.05.11 67 2 9쪽
»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11: 저주와 장미와 불꽃 (25) 18.05.10 80 2 10쪽
157 세상을 파는 자 Chapter 11: 저주와 장미와 불꽃 (25) 18.05.09 92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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