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대비(對備) - [5]
“...정치.”
독대가 끝난 후 배정받은 방에 앉아 품속에 지니고 있던 서책을 꺼내 지금까지 쓴 계획을 살펴본다.
백성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해야겠지.
하지만 껄끄러운 것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조정과 담을 쌓으며 외적들에게만 신경을 쓰던 나로서는 불편한 일이다.
‘미래를 바꿔도 큰 틀은 변하지 않는 것인가?’
전의 삶보다 빨리 벼슬길에 오른 것은 미래를 바꾼 일이지만 훗날 여진족의 침략과 왜구들의 수탈 그리고 8년 동안 일어나는 전쟁.
이 모든 것은 조정이 부패해서다.
태평성대라고 부르짖는 조정에서는 자신들의 머리를 맞대어 힘을 합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얻기 위해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벌이며 외적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어떤가? 나와 함께 하는 것이?’
군수의 말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나에겐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
국경에 있는 정예군.
파벌의 영향이 미미한 곳.
보금자리로 만들고 힘을 기르기에는 좋은 조건이다.
하지만 아직 보지 못한 군수의 윗줄인 목사는 만나지 못해 선택을 내리기가 애매하다.
‘진지하게 생각을 해봐야겠어.’
조선에 닥칠 피바람을 끝낼 수만 있다면 이 한목숨은 초개처럼 버리라.
* * *
다음날.
새벽에 깬 후 수련을 위해 방 밖으로 나와 연무장에 도착한다.
“후~우.”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백두산 덕분인지 머리가 맑아진다.
일단은 허리춤에 걸려있는 환도를 꺼내지 않고 천천히 신체를 움직인다.
‘박투’
모든 기술의 근간.
아직까지도 어색한 젊은 몸을 익숙해지기 위해 혈기를 억누르지 않고 폭발시키며 점점 움직임이 거칠어진다.
툭.
그 순간 나의 뒤통수에서 미세한 살기를 느껴 곧장 몸을 돌리며 그대로 발을 앞으로 뻗는다.
“봉사라고 했나? 제법이군.”
나의 발차기를 여유 있게 받아낸 이칠용은 두 손으로 잡고 있던 나의 다리를 놓자 얼른 목례를 하며
“제가 미숙하여 실수를 범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아닐세.”
그는 나의 인사를 받으며 손사래를 치며 뭔가 아리송한 웃음을 짓더니
“근데 자네가 봉사로 왔다고 하였지?”
“네, 그렇습니다.”
“어제 자네가 보여준 활솜씨와 지금의 박투를 보건데 부사맹으로 임관했어도 훌륭했을 터인데 봉사가 된 연유가 무엇인가?”
이칠용은 궁금한지 나에게 물어본다.
“훈련원 응시를 봤었고 봉사의 관직이 나왔을 뿐입니다.”
“쯧...”
그는 나의 말에 혀를 차며
“자네, 문관가문이지?”
“네, 맞습니다.”
“그것들 아직도 신진관리들을 자신의 파벌에 넣기 위해 헛 지랄을 하는구먼!”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나의 표정을 확인하며
“혹시 문관을 깐 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아닙니다. 비록 문관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나는 무관이 되고 싶습니다.”
“마음에 드는군. 이러니 어제 군수님이 독대를 요청했었나?”
마지막 말은 작게 말했지만 귀가 밝은 나는 전부 들었다.
‘알고 있었군.’
몰래 진행했다고 생각했지만 이곳에도 군수를 지켜보는 눈과 귀가 있네.
“나와 대련을 해볼 생각 있나?”
그는 나의 허리춤에 걸린 환도를 보며 눈을 빛낸다.
장수들은 다 똑같구나.
휘하에 있던 장수들도 전부 이칠용처럼 용맹하고 호승심이 많았었다.
“그럼 한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스으윽.
긴 환도를 비스듬히 빼어들고 그와 거리를 살짝 벌리자 그는 살짝 놀라며 화답을 하듯 마찬가지로 허리춤에 묶여 있던 환도를 빼어든다.
“진검으로 대련을 하자고 하는 봉사는 자네가 처음일세. 다치더라도 서로 탓하기 없다고 약조부터 받아야겠군.”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지만 눈빛만큼은 전장을 호령하는 장군처럼 매섭게 변한다.
“설령 대련 중에 생사를 오고갈 수 있는 치명상을 입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챙!
환도들 부딪치며 불똥이 튀기 시작한다.
그렇게 순수한 무인들은 대련을 겨루고 이윽고 승패가 결정된다.
“...내가졌네.”
예리한 환도의 예기가 자신의 목을 살짝 베며 걸쳐지자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패배를 시인한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목에 겨눴던 환도를 수거하며 그에게 예의를 갖춘다.
“봉사, 아니 이순신이라고 했던가? 대단한 무예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면 미리 귀띔을 해줬어야 할 것 아닌가?”
처음에는 어린 나를 얕잡아 봤던 그는 결국 수세에 몰려 지게 되었던 사실을 실토한다.
“저를 높이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변변찮은 실력이라고 소극적으로 나서면 이칠용의 자존심도 상할 터니 사실 그대로 얘기하는데
짝짝짝.
저 멀리서 박수를 치며 군수와 다른 무관들이 다가온다.
“산적같이 생겼어도 오랑캐들에게는 재앙 같은 장수였던 이칠용을 이기다니? 실력이 정말 대단했다네.”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넨다.
“자네가 더욱 탐이 나네. 그래, 어제 고민은 해보았는가?”
무관들 앞에서 대놓고 얘기하는 군수를 보는 이순신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린다.
‘전부 자신의 파벌이라는 건가? 조정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서 힘을 기르고 있었군.’
군수를 노쇠한 여우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정치적인 수완이 있는 것 같다.
“군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함께한다는 의사를 밝히기 전 그의 대의명분을 물어본다.
“대의명분... 나는 자네와 같네.”
담담하게 말을 하지만 대호 같은 기세가 나를 억누르는 것이 느껴진다.
“저와 같다는 말씀은?”
기세에 굴하지 않고 묻자 어두운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조정에 있는 문관들은 주상전하의 귀를 막고서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가 되었네.”
“군수님 그 말씀은 아직...!”
군수가 말하기 시작하자 뒤에 있던 무관 중 한명이 혼비백산이 되며 그의 말문을 닫으려고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역모로 몰려 죽는다고 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의 눈에는 핏발이 서며
“주상전하가 즉위를 했을 당시 어리다는 명분으로 문정왕후... 그 암탉이 수렴청정을 시작했지.”
그의 말에 듣고 있던 무관들의 표정이 얼어붙으며 입만 껌뻑거린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한가지의 단어가 새겨지고 있을 것이다.
역모.
“아무리 전장을 구르는 장수일지라도 성리학은 우리들의 기초적인 사상일세. 하지만 문정왕후는 성리학의 기본이념을 무시한 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도 모른 척 했지.”
하지만 문정왕후는 내가 과거로 돌아왔을 때 죽었지.
지금 말하는 것들은 역모의 해당이 된다는 것을 아는 군수가 굳이 그녀를 언급하는 저의가 무엇일까?
아무도 얘기하지 않고 군수의 음성만이 연무장을 울린다.
“그 바람에 조정의 관료들의 머릿속에는 오물이 가득해졌어. 바로 ‘문관’들 말일세. 특히 문정왕후 사후 이후로 사림파의 세력들이 기득권을 움켜쥐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지.”
사림파.
잘 알다마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라면 내년에 방계 출신이던 이연(李昖)이 즉위를 하며 사림파의 힘이 중앙정치를 주도하게 된다.
뿌드득.
나도 모르게 이를 갈자
“자네도 사림파에 대해서 아는가?”
“네, 잘 압니다.”
선조로 즉위를 한 뒤 득세하는 사림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화(士禍)를 당하고 역적 취급을 받았던 선비 전부를 사면했었으며, 그의 후손들 중 자신의 힘이 되어줄 인물들을 직접 뽑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사림파는 권력에 심취하여 변질된... 그래, 군수의 말대로 도적떼다.
“자네가 어찌... 아, 문관출신이었지. 자네의 출중한 무예실력에 잠시 잊었었네. 누가 봐도 자네는 무관가문이니까.”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사림파들은 국경을 지키는 우리들에게도 손을 뻗으려고 하고 있네. 내 평생을 오랑캐들을 잡겠다고 맹세를 했지만 그 맹세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드디어 군수의 속내가 나의 눈에 보인다.
“혹여 훈구파를 지원해 견제하실 생각이십니까?”
“훈구파? 풋...”
훈구파라는 소리에 그는 코웃음을 치며
“나는 어떤 문관들과도 손을 잡지 않을 걸세. 그저 만약을 대비해 그들의 만행이 멈추지 않으면 이 한 몸을 불살라 백성들을 지키고 싶을 뿐이야. 어떤가? 나의 대의명분을 들었으니 자네도 답을 해야지?”
결국 대의명분은 만행을 멈추지 않으면 그들을 치겠다는 거군.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청진 군수는 물론이고 여기에 있는 무관들의 얼굴이나 이름조차 모른다.
즉, 이들은 변질이 되었거나 모종의 사건을 당해 은폐가 되었다는 뜻.
눈을 살짝 감고서 미래를 그려보던 나는 이윽고 눈을 뜨고
“저는...”
- 작가의말
성종(宣宗) → 선조(宣祖)
광해군 9년 때 성종에서 선조로 묘호가 변경되었습니다.
하지만 독자님들이 알기 쉽게 선조로 표기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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