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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펭귄의 서재입니다.

천재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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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群青)
작품등록일 :
2020.12.28 17:09
최근연재일 :
2021.01.28 07: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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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9,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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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7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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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3 - 공상의 영역

DUMMY

작품 <디오게네스>의 추정가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숫자가 요동치지만, 추정가가 오천만 원이었던 순간보단 안심된다.


포트폴리오는커녕, 겨우 작품 두 개로 제2의 피카소 같은 불공정한 타이틀을 획득하는 건 이쪽이 사양하겠다.


“추정가는 결국 추정가지. 결국엔 유찰될 수도 있어. 물론, 네가 경매에 내놓는다면 말이야.”


탁상에는 박정인이 꺼낸 명함과 서류가 정돈되어 펼쳐졌다.


“전부 <디오게네스>의 구입 의사를 물은 사람들이야. 아트딜러도 있고, 그냥 미술품애호가도 있고, 일반인도 있지. 대부분은 아트딜러지만.”

“이 사람들이 제시한 액수가 어떻게 돼요?”

“천차만별이야. 원래 이런 건 작가랑 갤러리 사이에서 미리 정해놓거든. 그런데 넌 작품 완성하고 바로 자버렸으니까. 내 판단으로 일단 전시한 거지만, 운이 좋았네.”


박정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걸까.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다.


고개를 마주 끄덕인 박정인이 한 명함을 찢으며 말했다. 슬쩍 보니 영어로 적힌 이름.


“그냥 달라는 사람들도 있었지.”

“예?”

“미친놈 하나, AM에서 하나, 문체부에서 하나.”


미친놈은 몰라도 AM에서 달라는 걸 용케 안 줬다. 사회생활은 안 해봤어도 제법 힘든 상황 아니었을까. 문체부면··· 정계에 잘 보일 기회이고.


박정인이 서류를 탁 소리 나게 정리하며 말했다.


“너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여. 계약도 안 된 작품 건드릴 정도로 우리 갤러리는 쓰레기가 아니야. 그리고, 사람들 눈치 좀 보지 마. 볼품없다.”

“이게 저인걸요.”

“그게 너긴 하지. 그래도 일단 셀럽? 비슷한 거니까. 당당하게 행동해.”


셀럽은 무슨. 아이돌도 아니고, 인터넷에 이름 좀 퍼졌다고.

겨우 그림 몇 점 그리고서 으스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직도 부족해요. 개인전 한 번 안 해보고 작가를 자처할 생각은 없어요.”

“너 점점 기준이 빡세진다?”

“뭐가요.”

“너 처음엔 지금껏 그린 그림들은 작품이 아니에요~ 이러고, <낭만>은 부족한 그림이에요~ 이러고, 저는 전시 한 번 안 해 봤어요~, 단체전 하는 거 염치없어요~, 이제는 개인전은 해야 작가에요~. 무슨 게임 난이도 올리는 것도 아니고.”


거북이처럼 목을 내빼고 하관을 달랑달랑 흔드는 모습에 마음속 깊이 짜증이 피어오른다.


복식호흡으로 내면의 안정을 취하자.


“넌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어. 애처럼 굴어. 와! 성공했어! 나 쩔어!”

“그건 애 같은 게 아니라 머저리같은 거에요. 그리고, 요즘 애들 말하는 거 모르죠?”

“······에휴-. 세대 차이란.”


박정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또래들의 그 오색찬란하게 욕을 섞고, 말을 줄이는 특이한 언어 사용에 박정인은 한참 모자른 게 사실이다.


“아무튼, 넌 너에 대해 더 관대해져야 해. 대체 어떤 작가가 겨우 작품 두 점 만에 온 국민이 이름을 알게 되냐.”

“과연 모두가 알까요.”

“또 빈정대네. 네가 그리 좋아하는 객관적인 지표로 보여줘? 신인 작가 작품의 가격은 십만 원에서 이십만 원 사이로 평균이 나지. 중견 작가도 오십만 원에서 육십만 원 정도이고.”


그러며 박정인은 종이에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100,000~ 200,000

500,000~ 600,000

50,000,000


그는 마지막 숫자를 진하게 적으며 밑줄을 쭉쭉 쳤다.


“자, 보이냐? 너 잘났어.”

“···아직 가격은 결정 안 났어요.”


이번에는 대꾸도 안 하고 고개를 저었다. 사람 무안해지게······.


박정인은 한 서류를 끄집어 밀었다.


“사인해. <디오게네스> 취급 서류야.”


읽어도 모를 것이니 읽는 시늉만 하고 사인한다. 작품 대여와 보관, 판매에 관한 권한. 떨어지는 수수료를 챙기는 AM 갤러리 입장에서도 비싸게 팔려고 할 테고, 추후에 갱신을 요청할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내게 이익이 많은 계약이다.


박정인은 사인한 서류를 곱게 정리하곤, 나머지 명함과 연락처가 적힌 종이들을 쓸어담았다.


“좋아. 그럼 다음 건으로 넘어가자.”

“또 뭐 있어요?”

“많지. 아아아아-주 많아.”


빈 탁자에 다시 서류가 쌓인다. 많이, 아주 많이.


“······저는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나도 그림 다루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 현실은 서류와 매일 싸우는 거더라.”


역시 현실은 모질다. 다시 한번 그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깨달으며, 모든 서류를 한방에 정리해줄 마법의 주둥이를 쳐다보았다.


“일단 이건 광고 촬영 건이야.”


내가 뭐라고 광고를 촬영하나. 난 아이돌도 뭣도 아니다. 단호하게 말했다.


“안 할래요.”

“돈 많이 줘. 이것 봐라.”

“······.”


그의 손가락이 서류에 적힌 숫자들을 쓸었다. 0과 쉼표의 향연. 그의 손가락을 따라 내 눈동자가 조종당했다.


어깨 위 천사가 속삭인다. ‘저걸 하는 게 좋겠어!’ 반대편의 악마 또한 속삭인다. ‘당장 저걸 받아!’

망할 자식들. 역시 돈은 진리다.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입을 앙다물자 박정인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는 나를 다루는 방법을 너무 잘 알았다. 만난 지 한 달도 안 되었건만, 내가 그리 읽히기 쉬운 사람이었던가.


“······이게 다 광고 촬영은 아니죠?”

“물론 아니지. 인터넷 방송 출연 요청도 있고, 예능프로그램 출연 요청도 있고, 작품 전시 관련해서 다른 미술관이랑 갤러리에서 온 것도 있지.”


잘 모르겠다. 일단 수익 활동은 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작가로서 나를 증명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럴 땐 마법의 주둥이가 제격이다.


“추천해주시는 거 있어요?”

“글쎄, 이런 건 직접 읽어보는 게 좋아. 돈은 상관하지 말고 네 구미에 당기는 걸 골라. 지금 네 이름값이 있으니까 광고 효과를 노리고 그냥 찔러보는 게 반일 거고, 무엇보다 일은 즐겁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돈보단 실리를 노리자는 건가. 합리적이다. 하나하나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이거 천천히 결정해도 상관없는 거죠?”

“물론이지. 아, 근데 이분은 기다리게 하면 미안한데.”

“누구요?”

“여춘팔 교수님.”

“······에?”



*



한국대학교 미술관


대학이라 하면 일종의 환상이 있었다. 인간이 학생으로서 가는 마지막 종착역이기도 하고, ‘고등’을 넘어 ‘대’라는 글자가 붙을 정도로 최첨단이라는 느낌이 있지 않은가. 아니라면 미안하다.


한국대라 하면 한국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학교이건만, 세련됨의 ‘세’자도 보이지 않는 칙칙한 회색 빛깔의 건물에 첨단이라는 느낌보단 교도소란 느낌이 든다.


“이 건물에도 미술관이라는 말이 붙으니까 뭔가 있을 줄 알았어요.”

“허허, 실망시켜서 미안하구나.”


여춘팔 작가가 초탈하게 웃었다. 설마 그가 디자인한 건물이라거나 하진 않겠지. 그러면 미안해질 테니 모른척하자.


“내가 왜 대학교로 초대했는지 알겠니?”

“아뇨, 전혀요.”


아무 설명 없이 불렀지만 당장에 달려감이 옳았다. 그는 똥통에 처박힌 인생의 구원자인 것을. 내게는 그가 자신을 신이라 부르라 해도 그렇게 부름이 옳았다.

···이건 좀 사이비같은가?


여춘팔은 여전한 회색 한복을 펄럭이며 걸었다. 저거 좀 시원해 보인다.


“대학은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곳이야. 굉장히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곳이지. 학기 중에 부르지 못한 게 아쉽구나.”

“학기 중이요?”

“지금은 여름 방학이니까. 학생들이 많이 없지. 물론 열정 넘치는 아이들이 있지만. 학기 중과는 비교할 수 없어. 가끔 한 곳에 주저앉아, 캔버스와 화구를 들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거기서 넘치는 생명의 아우라를 느끼게 된단다.”

“그런가요?”

“그럼!”


백현우에게 들었던 것과 이야기가 다르다. 하루하루가 지옥이라고 들었는데. 넘쳐나는 과제에 살인 충동이 들고, 무거운 화구에 캔버스를 낑낑대며 옮기고, 늘어가는 다크 서클에, 유화 기름 냄새에 여학생들한테 기피당한다고.


현실은 보통 고통스러운 것이 맞지만.

······뭐, 사람들의 인식은 저마다 다르지 않겠나.


땡볕을 피해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작품이 보인다. 복도를 따라 늘어선 회화 작품들.


“흥미가 있니? 모두 재학생들의 작품이란다. 세상에 미술관의 수는 적고 예술가의 작품은 넘쳐난단다. 갈 곳 없는 외로운 작품들은 어딘가 걸어주는 것이 좋지.”

“새삼 또 감사하게 되네요. 제 그림을 전시할 수 있게 해주셨으니.”

“하하! 말은 고맙지만. 난 사람들에게 권유한 거야. ‘이건 어때?’ 하고. 감사받을 일이 아니지.”

“그래도 감사해요. 작업실도 양보해주시고.”


다종다양한 회화의 복도를 걸었다. 흥미롭고 창의적인, 또 기술적인 회화들의 향연에 느릿느릿하게 걸었다. 감사하게도 여춘팔은 수십 번을 걸은 복도이겠지만, 날 위해 걸음의 속도를 늦춰줬다.


“자, 저길 한 번 보겠니? 조용히 말이야.”


여춘팔은 한 문 앞에 멈춰 서며 문에 달린 자그마한 창문을 가리켰다.


조그마한 창을 넘어 보이는 건 한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작업하는 과정이다.


“달래란다. 진달래.”

“네?”

“이름이 진달래야.”

“아, 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자 주름진 손이 작업실 벽면에 세워진 작품들을 가리켰다.


“어떤 느낌이니?”

“엄···. 기괴하네요.”


작품들은 하나같이 기괴했다. 서로의 내장을 파헤치는 사람들, 몽달귀신처럼 표정 없는 얼굴에 웃고 있는 입. 벽 모서리에 쭈그려 앉은 벌거벗은 남자.


20세기 그로테스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림들. 사실적이진 않지만, 몽환적이면서도··· 계속 보면 구역질이 치밀 것만 같다.


“달래는 회화만이 아니라, 심리학을 복수전공했단다. 그 때문인지 사람의 심리를 살짝살짝 건드리는 표현이 가능하지.”

“알 것 같아요.”


백현우가 말한 ‘주제를 탐구하는 미술학도’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인간 심리의 한구석을 저런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복도에 저벅이는 발걸음이 울려퍼졌다. 기분 나쁜 그림을 봐서 그런지 복도의 기온이 살짝 내려간 느낌이 든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심리학 같은 건 가르치지 않아, 국어, 영어, 수학 같은 필수적이지만 지루한 것들을 가르치지.”

“생활을 위해서라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해요. 어느 정도의 지식만 있어도 생활 이곳저곳에서 사용할 수 있으니까.”

“맞아. 하지만 그것들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있어. 시간은 중요한 거야. 내가 70이 넘는 세월을 그림과 조각에 바쳤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단다. 젊음은 소중한 거야. 더욱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

“하지만 한국대 교수시잖아요.”


한국대는 한국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학교다. 당연히 이런 학교에 입학하려면 미술 실력뿐만 아니라 많은 시간을 공부에 쏟아부어야 한다. 그런 학교의 교수를 하는 사람이 현 교육체계를 비난할 수 있을까.


여춘팔은 허허 웃었다.


“한 마디에 온갖 가시를 쏟아 담는구나. 과연 <디오게네스>의 작가다워.”

“빈정대는 소리는 아니에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안단다. 넌 겁이 아주 많은 아이니까. 남에게 미움받는 것도 싫고, 도전도 두려워하고. 그래서 내가 오현월이를 보낸 거야. 그 친구라면 거칠게 말해서 일깨워줬을 테니.”


과연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겨우 몇 시간 본 꼬마를. 그 사이에 그만큼이나 파악하다니. 하지만 난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의 상황 또한 요행에 요행을 거듭해 도달한 곳이 아닐까.


“······현실적이라고 해주세요.”

“그 현실이 진짜 현실일까? 어쩌면 너만 느끼는 현실일 수 있지 않을까? 네가 인식하지 못한 현실은 생각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일지도 몰라.”


망할 또 수수께끼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오늘 널 한국대학교로 부른 이유는 먼저 대학교에 오라는 소리를 하고 싶었단다. 한국대라면 많이 좋고. 아니라도 좋아. 대학은 많은 걸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곳이니까.”

“그리고요?”

“그리고······.”


작가의말

작중 언급된 진달래 캐릭터는 현역 예술가인 연여인 작가님에게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아쉽게도 후에 등장할 가능성은 많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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