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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펭귄의 서재입니다.

천재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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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群青)
작품등록일 :
2020.12.28 17:09
최근연재일 :
2021.01.28 07:05
연재수 :
3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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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9,402

작성
20.12.3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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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1 - 그림을 그려도 될까요? (5)

DUMMY

고등학교 교무실


내가 뭔가 저질렀던가. 평소엔 본체만체하던 교사들이 오늘따라 살갑게 군다. 푹신한 소파가 오늘따라 불편하다.


“여기 초콜릿 먹어. 캄보디아에서 산 거야. 망고 들어간 거. 망고 좋아하지?”

“미경쌤이 그러던데, 그림 독학했다면서? 대단하다-.”

“이야- 도진이가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 줄 알았으면 자화상이나 그려달라고 할걸.”

“에이구- 자화상이 아니라 초상화 이 사람아.”


똥개한테 잔반을 주듯 응접용 간식들이 내 앞에 쌓여 올라갔다. 안 받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서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었다.


입에 제주도 감귤 초콜릿과 캄보디아 망고 초콜릿을 동시에 집어넣고 우물거리자, 교장 선생이 미술 선생을 대동한 채 나타났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주위의 선생들이 밀려나고, 교장이 다가왔다. 어정쩡하게 일어나려 하자 교장이 손짓하며 앉게 했다.


교장은 두툼한 볼살을 밀어 올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학교에 이런 인재가 나올 줄은 몰랐네. 안 그래, 이미경 선생?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면 좀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미술 선생이 송구스럽다는 듯 손을 저었다. 교장은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프다.


“그래, 도진이. 학교생활 불편한 건 없고?”

“···네, 불편한 건 없습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해. 내가 사비를 털어서라도 도울 테니.”


영문 모를 호의에도 왜 이러는지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우유부단하고 말재주 없는 나로선 이 학교 카스트 제도 최상단에 위치한 사람에게 대항할 힘이 없다.


교장은 서열 최상위에 위치한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줬다. 두툼한 팥죽색 입술로 무언가를 뱉어낼 때마다 주위 선생들은 예능프로그램 방청객처럼 자지러지게 웃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나는 그의 말에 ‘네’ 혹은 ‘아니요’라고 답하며, 어깨나 등을 두들기는 손길에 복싱 챔피언이 두들기는 샌드백처럼 춤출 수밖에 없었다.


교장의 세 번째 ‘편히 있어 편히-.’라는 말이 내 달팽이관을 울릴 무렵, 인간 따위엔 굴복하지 않는 디지털 종소리가 울렸다.


기말고사가 끝나서 수업도 안 하면서, 선생 대부분이 각자의 교재를 들고 흩어졌다.

나 또한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교장의 푸짐한 엉덩이는 도무지 들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 도진아. 이번 일은 정말 좋았어. 그래도 다음부터는 선생님이랑 상의할 수 있을까? 학교에서도 따로 언론 보도를 해야 하고 말이야. 이런 건 시스템이 조금 복잡하거든.”

“···언론이요?”


심상치 않은 단어의 등장에 머리에서 붉은 경고등이 켜졌다.


“그래. 아직 학생이라 잘 모를 수도 있지만, 학교 운영에 있어서도 대응하기 힘들거든. 나는 이렇게 생각해. 학교 사람들은 다 가족이고, 가족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 입으로 듣는 건 좀 그렇지?”

“아뇨, 그 언론이라뇨?”


교장은 그제야 미술 선생에게 손짓했다. 미술 선생은 재빠르게 스마트폰을 두들겨 한 인터넷 뉴스를 내게 보여줬다.


{전대미문! 고등학생의 그림이 500만 원에 낙찰!}


내용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야 기사 중앙의 사진에 내 그림을 든 남자가 헤벌쭉 웃고 있는 장면이 있는 걸 보면 그리 판단할 수밖에 없지 않나.


미술 선생의 조심스런 말이 들렸다.


“그- 몰랐니?”

“······.”


따로 긍정의 표현을 하진 않았지만, 이 자리의 모두는 침묵이 곧 긍정임을 잘 알았다.


“경매사 사람이 오기로 했어. 방송사에서도 취재 요청이 들어와서···.”


그제야 학교에 일어난 이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교생이 아침 댓바람부터 대청소하는 것도, 평소엔 내 이름도 몰랐을 교사들이 살갑게 군 것도.


머리가 잘 안 돌아갔지만 이건 분명했다. 내 손을 벗어난 그림 때문에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



*



자신을 경매회사 대표라고 소개하는, 대머리가 찾아왔다.

교장의 곁에 앉아 그들이 하하호호 떠드는 것을 지켜봤다.


교장이 존재하지도 않는 내 무용담을 늘어놓는 거에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


이차함수는 곧 나와 단둘이 이야기하겠다는 확실한 의사표명을 하며 교장을 교장실 밖으로 내쫓았다.


“반갑다. 다시 소개할게. C-옥션 대표 오현월이라고 해.”

“···안녕하세요.”

“그렇게 노려보지 마. 아까부터 똥 씹은 표정인데 너희 교장이 전전긍긍하는 거 못 봤어?”

“제 의사도 없이 그림이 팔려나가고, 인터넷에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평생 먹을 욕을 다 들어먹고 있는데, 이 정도면 양호하지 않을까요.”


오현월은 저주받은 두피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경매 전에 확인 절차 밟으려 했어.”

“그럼 왜 안 그러셨어요?”

“전화를 안 받는걸.”


변명이랍시고 하는 건지 그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뒤틀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부디 화난 모습으로 비치길 바란다.


“모르는 전화는 안 받아요.”

“그래. 근데 까놓고 말하자. 너한테도 좋지 않아? 네 앞길이 탄탄대로야! 네가 그리는 그림이 아마 수백만 원에 팔릴걸? 어쩌면 여춘팔 화백처럼 수천, 수억을 호가할지도 모르지.”

“거짓말하지 마세요.”

“······생각보다 삐뚤어졌네.”


그는 다시 그 저주받은 두피를 긁적였다. 그의 손길 뒤엔 붉은 선이 남았다.


그 광경 때문에 불만이 가라앉아갔지만 애써 토해냈다.


“고등학생이라고 너무 바보 취급하지 마세요. 지금 사람들이 뭐라 하는지도 대충 확인했으니까.”


현대 예술도 온갖 논란이 있는 판에 비루한 고등학생의 볼품없는 그림이 오백만 원에 팔렸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호로록-

오현월은 태연히 식은 커피를 마시곤 말했다.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야. 예술가 대부분은 논란 한 두 개 정돈 우습게 있어. 봐, 피카소는 여자관계가 7명을 넘고, 폴 고갱도 고흐의 귀를 잘랐다는 음모론이 있지.”

“······.”

“탈렌트도 뽕 맞고 텔레비전 나와서 춤추고, 정치인은 룸싸롱 가서 좆질하는데. 그런 거에 비하면 예술가는 아무것도 아니지.”


7명이 넘는 여성 편력과 친구의 귀를 잘랐다는 음모론을 생각하면 그다지 다를 것도 없어 보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저는 예술가가 아니에요.”

“아니, 넌 예술가가 맞아.”


단호한 대답에 어안이 벙벙했다.


“제가 왜 예술가에요.”

“여춘팔. 그 양반이 찍었잖아.”

“그건 이유가 될 수 없어요.”


그는 팍-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럼 반대로 해보자. 네가 말해 봐. 네가 왜 예술가가 아니야.”

“저는 작품이라 할 만한 그림을 그린 적이 없어요.”

“<낭만>은 훌륭한 작품이야. 누가 오백만 원이나 주고 그림을 사겠어. 졸부도 그 짓은 안 해. 물론 네 그림을 산 건 아트딜러긴 해. 그림 팔아먹는 녀석들.”


누가 샀는지는 관심 없다. 문제는 내가 인터넷의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이다.


“여춘팔 작가가 소개했잖아요. 특혜랑 뭐가 달라요.”

“그렇게 볼 수 있지. 근데 사실적으로 특혜가 아니잖아. 여춘팔 작가나 내가 돈을 받았나? 아니지. 연줄이 있나? 아니야. 심지어 너랑 나는 지금 처음 만났어. 우린 단순히 재능있는 사람의 그림을 갖다 판 거야.”


오현월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TV에서 정치인 자녀 특혜 의혹이 뜨면 그렇게 물어뜯고, 나도 열불이 터지는데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 말한다.


가능한 논리적으로 말해야 한다.


“······현대에서 예술은 기록으로 확인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작가의 생애나 가치관, 이념, 작품 세계를 알아야 비로소 그 작품이 예술임을 알 수 있어요. 옛날의 도전적인 전위예술과는 그 방향성이 달라요. 겨우 경매장에 올린 그림 하나로 판단할 게 아니에요.”

“맞아. 말 잘했어!”


오현월은 넙대대한 손바닥을 책상에 쾅! 내리쳤다. 깜짝 놀랐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에 왔을 것 같아? 자교 학생이 한국 미술품 경매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는데 학교에서 어떻게 볼까? ‘와, 대단해!’가 아냐 ‘오, 좋았어!’지. 분명 보도자료 만들고 홍보 존나 돌릴 거야. 다 지들 업적이 되거든. 그런 상황에 내가 너네 학교에 전화를 걸어. 그럼 네 생활기록부, 교우관계를 알려 주고 필요하면 네 간이고 쓸개고 다 떼 줘.”


오도도도 말을 쏟아내며 오현월의 얼굴이 붉어졌다.


“난 지금 네 성적이 평균 2.5등급인 거에, 체육엔 영 잼병이고, 햇님보육원에 사는 것도 알아. 키, 몸무게는 물론 혈액형이 AB인 것도 알지.”

“······.”

“내가 네 작품 세계를 모른다고? 미술실에 걸린 그림들 내가 안 봤을 거 같아? 네 미술 선생이 버튼 하나 눌러서 뿅! 짜잔! 이미 내 폰에 잔뜩 있어!”


그는 콧김을 훅- 뿜었다.


“맞아, 처음에 네 그림을 경매에 올린 건 반쯤 사고야. 여춘팔 그 양반을 말릴 수가 없었거든. 근데 다시 생각해보자고 그림 하나 경매에 올리는 게 큰 잘못인가? 미술 경매는 원래 그림 파는 데야.”


오현월은 뭉툭한 손을 저었다.


“내가 이 바닥에서 30년 넘게 일했어. 저놈의 예술가들이 개똥폼 잡으면서 말하는 예술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뜰 놈이랑 안 뜰 놈은 구분이 가. 그중에 넌 뜰 놈이고, 뜨고 싶은 놈이고, 띄워줄 수 있는 놈이야.”


손가락을 접으며 그리 말한 오현월의 부리부리한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이제 말 해봐. 네가 예술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냐?”


나는 나의 상식적 올바름을 입증해야 했다.


평소엔 잘만 나불대던 주둥이를 열었다. 하지만 튀어나오는 말은 아기의 옹알이와 같았다. 젠장.


“···저는 실력이 부족해요.”

“지랄.”

“······학력도 부족해요.”

“상관없어.”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내리깔았다.


“바보같이 굴지 마. 그림 그리고 싶잖아. 네 손가락만 봐도 알아. 난 세상에 손 아프다고 테이프 감고 그림 그리는 새끼는 처음 본다. 아프면 쉬어야지 무슨-.”


손을 탁상 밑으로 숨기며 말했다.


“···미술 선생님이 그것도 말했어요?”

“그래. 네가 그림에 미쳐 산다고 말하더라. 이런 독종은 처음 본다고.”

“······.”

“고등학생 작품이 오백만 원에 팔렸어. 네 문제는 이것뿐이야. 게다가 여춘팔 그 노인네가 인터뷰한 내용도 있지. ‘그 고등학생은 자기 그림 경매장에 올리는 것도 모를 거다.’ 아, 이제 문제없네. 뭐가 문제야.”

“······.”


오현월은 또 한숨을 쉬었다.


“하- 솔직히 알 것 같아. 네가 이렇게 갑갑하게 구는 거 말이야. 네 프로필만 봐도···. 쯧! 18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인생이 굴곡진 것도-.”

“누구나 인생은 전쟁이에요. 딱히 제가 특별히 불행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꿈을 포기하는 사람은 우리 주위에도 많으니까.”

“그럼?”

“당황스러웠던 것 같아요. 제 자신에 대한 의심도 있고···.”


가슴에 헬륨 가스를 퍼부은 듯 벅차오르는 감각.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맞아요. 인정이 필요했어요. 내가 지금껏 그림을 그리며 쏟아부은 인생과 열정이 이런 찰나의 행운에 걸 정도로 가치가 있는지. 잘한다, 잘한다, 하지만, 미술 선생님이나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밥 빌어먹게 해주진 않으니까.”

“그게 현실이지. 전업 작가 100명 중 80명은 한 달에 백만 원도 못 벌어.”


언제나 현실은 모졌다. 꿈은 꿈이기에 꿈이라고 부르는 것 아닌가.


나라에 헌신하기 위해 공무원이 되는가?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다. 기업의 사장이 되기 위해 회사원이 되는가?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다. 대학교는 왜 다니는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돈은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다. 하지만 그림을 그려서는 돈을 벌 수 없다.


그림은 내 꿈이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길을 걷기 위해서도 그 끝자락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돈이 없었다. 진리가 결부된 삶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있는가? 이 순간의 행운에 내 인생을 베팅할 수 있는가?


온몸에서 오한과 열기가 부딪히고, 입술이 덜덜덜- 떨린다. 붕 뜨는 감각에 입안의 살을 짓씹었다. 피가 났다. 아릿한 혈향이 현실임을 알려준다.


지금 난 현실을 산다!


마약을 한 듯 강렬한 정신 상태. 그와는 거리가 먼, 아기의 옹알이처럼 서투르게 발음했다.


“제가··· 그림을 그려도 될까요?”

“물론이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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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 그림을 그려도 될까요? +5 20.12.28 3,726 5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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