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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펭귄의 서재입니다.

천재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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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群青)
작품등록일 :
2020.12.28 17:09
최근연재일 :
2021.01.28 07: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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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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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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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1 - 그림을 그려도 될까요?

DUMMY

언제나 예술은 어렵다.


예술이랍시고 점 하나 찍은 것도, 물감을 대충 흩뿌린 것도···. 모르겠다. 여기서 내가 어떤 미(美)를 탐구해야 하는가.


물론 작품을 세세히 파고들어 본다면, 이 모든 것이 예술가와 평론가, 사회의 역사, 가치관, 이념이 부딪히고, 얽히고설켜 만든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나 같은 일반인 관람자에게 무슨 상관일까.


도슨트가 시시콜콜한 예술의 역사와 예술가의 생애를 설명해주지 않는 이상 보통의 사람들은 그것들이 왜 유명한지 모른다.


그렇다면 가장 직관적이고 단순한. 마음에 와닿는 예술 평가 방식이 무엇인가 하면 단연코 ‘돈’이 아닐까.


뒤샹이 사인한 변기 <샘>은 36억원에 팔렸다.

피카소가 낡은 자전거를 재조합해 만든 <황소의 머리>는 293억원에 팔렸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가 가진 경제적 가치는 40조라던가.


아, 맙소사. 뒤샹도 피카소도 다빈치도 위대한 예술가다.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최종 낙찰 금액. 500만 원입니다.”


비교하자면 좁쌀만하지만···. 첫 작품이 이 정도면 역사적인 예술가들의 발치에는 다다르지 않았을까.



*



고등학교 미술실 오후의 동아리 시간.


미니캔버스를 사물함에서 꺼냈다.


잠을 못 자 슬픈 동물인 고등학생들을 위해 불을 켜진 않았지만, 여름의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그다지 어둡진 않았다.

굳이 불만이 있다면 햇살에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게 보인다는 점일까.


괜히 책상 위를 손으로 한번 쓸고선 캔버스를 올려놓는다. 주섬주섬 붓을 포함한 화구를 꺼내자 심심했던지 노트북 마우스를 딸깍이던 미술 선생이 다가온다.


“도진아. 이번엔 뭘 그리려고?”


권태로움의 저주에 걸린 주둥이가 잠시 뱉을 말을 고르는 동안, 눈을 또륵또륵 굴려 미술 선생이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을 찾는다.

사람을 상대함은 언제나 어려운 것이기에.


미술부원 대다수가 퍼질러져서 낮잠을 자거나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린다.

나를 대신해 미술 선생의 관심을 끌 만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살짝 실망감을 가진 채 미술 선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고양이요.”

“고양이?”


구구절절 주둥이를 놀리는 것은 효율이 좋지 않다. 스케치북을 꺼내어 미술 선생에게 건넸다.


스케치북에는 평소에 어떤 구도를 생각하고, 어떤 주제를 생각하며, 어디서 모티브를 따왔는지 적나라하게 적는다.


굳이 입을 놀려 설명하는 합리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미술 선생이 사락사락- 스케치를 살피는 사이 미리 생각해놓은 대로 캔버스에 펜을 놀렸다.


전문 미술인들처럼 멋들어지게 연필을 잡는 법은 모른다.

전문적인 학원이나 선생에게 배운 적도 없기에, 전문가들이 본다면 조악하다며 비웃음을 터뜨릴지 모르는 방식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림을 그리면 행복하지 않은가.


새끼 고양이의 똘망똘망한 눈동자부터 시작해 대체적인 틀을 잡는 동안 살짝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로 미술 선생이 말을 걸어왔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정의’라는 주제에서 고양이가 튀어나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얘.”


빙글- 미술 선생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보단 여기 이게 더 좋을 거 같은데? 잔 다르크. 독일? 아니, 프랑스 사람이던가. 구도도···.”


미술 선생이 가리키는 구도를 살폈다. 전쟁통에 깡통 로봇이 깃발을 흔든다. 삐죽 튀어나온 풍성한 머리카락이 그녀가 여성임을 확신시켜준다.


잔 다르크가 주제에 더 적합한 소재이긴 하지만 내 삐뚤어진 심성은 가당치 않은 변명으로 그녀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재미없잖아요.”

“재미없어?”


캔버스에 물감을 짜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흰색 물감이 뿌지직- 소리를 내며 살짝 튀었다. 미간이 뇌와 타협하지 않고 제멋대로 찌푸려졌다.


절대 미술 선생 때문에 기분 나쁜 게 아니다.


“사실에 입각한 주제 접근 방식은 너무 진부해요. 분명 잔 다르크는 가톨릭에서 인정한 성인이고 훌륭한 업적··· 기록을 가진 인물이지만 주제와의 일차적 연관성이 너무 뚜렷해서 재미없어요.”


물감을 섞는다. 스케치북을 건넬 때 생각했던 의도와는 달리 열심히 주둥이를 나불거린다.


“같은 의미에서 천칭과 검도 마찬가지죠. 정의의 여신상이 떠오르는 이미지니 배제하고···. 그러다가 여성이라는 이미지도 정의. 그보단 선(善)에 가까운 이미지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고대부터 천사는 여성형, 악마는 중성 혹은 남성형으로 그려진 게 많으니까.”


지나친 획일화라고 할 수 있지만 상관없다. 세 치 혀로 그림을 그릴 시간을 버는 것뿐이라 그냥 입이 벌어지는 대로 떠벌린다.


“그래서 성별이 떠오르는 건 배제했어요.”

“근데 고양이가 어떻게 나온 거야?”


당연하겠지만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미술 선생이 재차 물었다.

잠시 입을 꾹 다물곤 붓에 물감을 듬뿍 찍어 캔버스에 올렸다. 언제나 긴장되는 순간이다.


“······뒤집어봤어요. 정의와 잔 다르크. 정의와 정의의 여신상. 머리를 비우고 생각하면 정의와 직선으로 연결할 수 있는 단어죠.”


수학 선생이 매일 ‘이꼬르!’하고 외치는 부호(=)를 이용한다. ‘정의=잔 다르크’이고, ‘정의=정의의 여신상’이다.

뒤집어도 마찬가지. ‘잔다르크=정의’나 ‘정의의 여신상=정의’가 가능하다. 물론 의미나 연관성은 퇴색되지만 그리 크진 않다고 판단했다.


“그런 의미에서 정의=고양이가 아니지만, 고양이=정의죠. 좀 다르잖아요.”


······구구절절 내뱉고 보니 이상했다. ‘요는 특이한 거 그리고 싶었어요.’인데. 뭔가를 아는 척, 재는 척하는 사이에 이상해졌다.


하지만 현대 미술가들의 이해할 수 없는 작품만큼 이상하지는 않았기에 입을 꾹 다물곤 당당히 붓만 놀렸다. 태도가 당당하면 이상한 짓도 제법 정당해 보인다.


미술 선생은 ‘파하하!’ 웃더니 이래저래 이야기를 떠들었다. 자기가 다니던 대학의 교수가 좋아할 거라는 둥 내가 괴짜라는 둥 그녀 혼자 혀를 이리저리 꼬는 동안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그림을 완성해나갔다.


새끼 고양이의 말랑한 분홍빛 발바닥, 육구를 마지막으로 붓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술 선생이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다음 주에 공모전이 있어. 전국 중‧고등학생 대상으로 하는 건데 현역 화가들도 초청하는 제법 큰 대회야.”


조심히 받아 눈알을 도르륵 굴려봤다. ‘예술 인재 발굴전’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는 현역 화가들의 얼굴이 모아이 석상처럼 크게 프린트되어 있었다.


···인재 발굴전이라면서 왜 현역 화가들이 주인공인지. 수산 시장에서 스테이크를 파는 느낌이다.


떨떠름한 느낌을 감추지 않으며 물었다.


“···나가라고요?”

“아니, 아니. 꼭 그러라는 건 아닌데. 이것도 좋은 스펙이지. 수상하면 좋고. 꼭 상을 타진 못해도 자소서에 몇 줄 좋게 적을 수 있잖아. 여기 봐, 현역 작가들이랑 대담도 하는데.”


확실히 그녀의 기다란 손톱 끝이 가리키는 곳엔 그러한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전 미대 갈 게 아닌데요.”

“어머, 그렇게 즉단하는 건 좋지 않아. 세상일은 모르는 거야. 이것 봐. 이 고양이도 얼마나 잘 그렸는데.”


글쎄, 미술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다.


“저는 고아에요.”


새삼스러운 것도 없는 사실을 툭 내뱉자 그녀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내겐 정말 별거 아닌 일이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보육원을 나가야 해요. 집도 없는데. 대학을 가면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하고.”


온 세상 고등학생들이 대학을 향해 목숨을 걸고 내달리는데 내가 무에 잘났다고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미술은 미래가 불투명해요. 돈은 돈대로 들면서 과연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대학의 등록금은 만만치가 않다. 미대는 더욱 그렇다. 어찌 장학금을 타더라도 캔버스값, 물감값, 종이, 붓···. 그것들이 한두 푼이 아닌데······.


“학자금 대출은 살다 보면 갚는 거고. 선생님을 봐. 나도 미대 나왔지만 미술 교사로 먹고살잖아. 교사도 공무원이야. 철밥통이다.”


미술 선생은 손가락을 빙글 휘적이며 말을 이었다.


“미술이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 피카소도 백만장자로 살았는걸.”

“아무리 피카소라도 힘든 시기가 있었겠죠.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려 고양이가 물어온 음식을 나눠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니까.”

“음··· 글쎄.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피카소는 성공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 아흔두 살까지 장수한 인생 중에 70년이 넘게 유명인으로 살았으니까.”

“피카소는 12살에 신동 소리를 들었어요.”

“나도 지금 너보고 신동 소리 할 수 있는데. 와! 김도진! 미술 신동! 와!”

“······.”


미술 선생이 개구지게 웃었다. 조금. 아주 조금 아니꼬웠다. 어른이 애한테 한마디를 안 지려고 한다.


‘자신은 유명인도 아니며 더더욱이 20세기 최고의 화가와 비루한 고등학교 2학년 고아를 비교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미술 선생이 종이를 다시 가슴팍에 밀어붙이는 바람에 다시 못난 주둥이를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일단 도전해보는 게 중요해. 넌 아직 젊잖아? 아니, 아니지. 젊다기 보단 어리지. 큭큭큭- 큼, 아무튼, 아직 솜털도 안 빠진 꼬맹이 주제에 애늙은이처럼 굴지 마. 혹시 모르잖니? 네가 피카소처럼 유명한 화가가 될지.”

“하지만-”

“너 그림 진짜 잘 그려. 자학하는 건 그만해.”

“······.”


미술 선생은 내 코를 엘리베이터 버튼처럼 꾹 누르곤 고양이가 그려진 캔버스를 가져가 교실 뒤편에 장식했다.


코의 찡긋한 감각에 콧등을 살짝 어루만진다.


미술 학원 한 번 못 다녀본 고아에겐 지나치게 낙관적인 발언이다. 국‧영‧수 위주로 공부하고 생활기록부 관리하라는 담임 선생의 무책임한 말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그래,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 당장 그림으로 먹고살라는 게 아니다. 그림을 하나의 특기 혹은 취미라고 여기자.

프로필에 남들과 다른 글을 적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청년 실업 시대에 유의미한 무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말뿐인 특기는 의미가 없다. 당장 대회에 출전했다는 기록 정도는 남겨야 한다.


고개를 돌려 미술실 뒤편을 본다. 손바닥 크기의 미니캔버스 수십 개가 미술실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물함에는 어쭙잖은 손놀림으로 그린 소묘도 가득하다.


미술부원 몇몇이 방금 그린 고양이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한다.


······공모전에서 수상하겠다는 욕심은 없지만, 기대는 해봐도 되지 않을까.


미술 학원 한 번 가본 적 없는 꼬맹이가 손가락이 짓 물릴 정도로 매일같이 그림을 그려댔는데.


그래, 맞다. 이 정도 노력이라면 내게 기회 한 번 정도는 주어져도 되는 것 아닌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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