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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펭귄의 서재입니다.

천재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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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群青)
작품등록일 :
2020.12.28 17:09
최근연재일 :
2021.01.28 07: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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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2.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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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1 - 그림을 그려도 될까요? (2)

DUMMY

방과 후 아무도 없는 미술실에 나무 이젤을 펴고 앉는다.


학교에서 가장 넓은 교실이 개미 한 마리 기는 소리가 안 날 정도로 평소보다 훨씬 적막하다. 맘에 들었다.


나는 원체 성격이 나쁜지라 무언가를 혼자 독차지한다는 상황을 굉장히 좋아했다.

어쩌면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캔버스 위는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니까.


꼬깃꼬깃한 공고문을 편다. 집이라 칭하는 보육원에 가져가서 몇 번 읽어봤다.


현역 작가와의 대담처럼 쓸데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시선이 닿은 곳은 공모 요강.


[작품주제 : 제한 없음]

[작품규격 : 30호 이내 캔버스]

[출품자격 : 대한민국 국적의 만 19세 이하

※ 개인별 접수, 2인 이상의 공동작업 접수 불가]


‘캔버스 사용’이라는 규칙이 있기에 유화나 아크릴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수채화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불편이 따른다. 유화는 마르기까지 일주일이 넘게 걸리니 남는 것은 당연히 아크릴이다.


이젤 위에 캔버스를 올린다. 젯소 작업은 이미 끝난 20호 사이즈. 아마 72×50cm 라던가? 평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캔버스다.


화가들이 굉장한 크기의 캔버스를 많이 사용한다지만, 크면 클수록 값도 더 들고, 면적이 크면 자연스레 소비되는 물감도 많아진다.


일주일 용돈이 만 원에 불과한 자신으로선 20호 캔버스도 감지덕지하게 사용한다.


“후우-.”


폐의 공기를 뽑아낸다. 갈비뼈가 모이는 감각이 좋다.


그릴 것은 정해 놓았다. 지금부터 그릴 것은 가죽 장화. 테마는 고단함.


이전부터 신발은 인생의 노고와 수고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소설이나 만화에서도 아버지의 낡은 구두를 닦아준다는 묘사가 있지 않은가.


팔레트 역할의 나뭇조각에 탄 갈색을 위시로 어두운색의 물감을 짜낸다.

아크릴은 금방 말라서 팔레트에 쓰지 않는다지만···. 내 속도라면 문제없다. 그림 그리는 속도 하나는 몇 안 되는 내 자랑거리다.


어두운색들은 중후함을 준다. 하지만 자칫 잘못 사용한다면 우울함을 준다. 이를 이용한 그림은 피카소의 청색 시대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 시기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우울증 환자가 그린 것 같은 음울함이 깊게 드러난다.


붓을 놀리니 밑그림만 있던 가죽 장화가 늙은 고목 나무색의 옷을 입는다. 너무 어둡다면 내가 표현하려는 바가 관람자를 피곤하게 만들 것이다.


그림에 의미를 담기 전에 기술을 뽐내야 한다. 수십, 수백 개의 그림을 보고 평가할 심사위원의 눈길을 잡아내야 한다.


과거 누군가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입시 미술을 하는 미술 학원 선생들은 어떻게든 한 획이라도 더 긋게 만들려고 한다고 한다.

자칫 너무 화려해져 눈을 피곤하게 만들 수 있지만. 기술을 뽐내기에는 심플하게 좋은 방식이라 생각한다.


가죽 장화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기술을 뽐낸다면 신발 끈이 아닐까.

버스 터미널에서 가끔 보는 군인의 군화를 떠올린다. 어지러이, 길게 묶인 끈은 적합한 대상이다.


갈색의 가죽 장화에 끈은 검은색이 어울리지 않을까. 검정 물감으로 선을 긋는다.


“후-.”


한숨 돌리며 잠시 목을 축인다. 전체적인 조형을 확인한다.


무광의 갈색 가죽 장화. 심플 그 자체다. 나름대로 신발 끈이 그 존재감을 발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분위기는 나지 않는다.


이 그림에 스토리를 부여해야 한다.


자신을 투영해 보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


천애 고아에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배배꼬인 학생. 돈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하다. 성격은 게으르기 그지없어 미래를 대비해 공부를 하든 알바를 하든 할 시간에 그림이나 그리고 있다.


바보, 천치, 머저리.


시선을 내렸다. 내가 입은 옷, 교복.

교복은 졸업한 선배의 것을 나눔 받아 자세히 보면 소매나 밑단이 헤져있다. 볼품없다.


“볼품없다···.”


괜히 입에 한 번 담아본다. 마음에 드는 키워드다.


볼품없는 가죽 장화는 어떤 것일까. 노동자의 작업화라는 가정하에 생각해본다면 퇴근 후에 벗은 장화는 때가 군데군데 껴 있고, 먼지를 뒤집어썼을 것이다.


“다음 날 다시 노동을 나갈 테니까.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거고···.”


대략적인 느낌이 잡힌다. 다시 붓을 놀린다.



*



“응, 제법 괜찮네.”


미술 선생의 평가에 한숨을 몰래 뱉는다. 누군가에게 평가될 그림을 그린 적은 거의 없기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듯하다.


“색감도 제법이고, 구도도 좋아. 너무 심플하지 않나 생각이 들지만 보기에 편해. 관람자를 배려한 거네.”


미술 선생은 그녀의 기다란 손가락을 그림 앞에서 휘적휘적 저었다. 신발의 목에선 동그랗게, 신발 코끝에선 각지게, 신발 끈에선 X자로.

내가 의도한 구도가 그림을 눈에 담은지 1분도 안 되어 그대로 들켰다.


가끔 그녀가 내 그림을 보며 툭툭 내뱉는 말들은 내 생각을 발가벗겨지게 만들어 부끄러웠다.

과연 최근까지 미대에 있던 사람이라 그런 걸까. 내 그림에서 트집만 잡던 이전 미술 선생들과는 달랐다.


미술 선생은 곧 안데르센의 동화 속 재단사처럼 내 의도를 하나, 둘 벗겨내 결국 날 벌거숭이 임금으로 만들었다.


무자비한 손놀림 끝에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자, 사진 찍자.”

“···사진이요?”

“1차는 사진 접수야. 원래 이렇게 많이 해. 하도 신청자가 많으니까.”


미술 선생은 곧 하얀 천을 벽에 펼치고선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조명 스탠드를 설치했다.


곧 캔버스를 하얀 천 가운데 가져다 놓고선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그 모습이 제법 태가 나서 멋있다.


몇 번인가 사진을 찍고 확인하길 반복하던 그녀가 허리를 찌뿌둥히 펼치며 말했다.


“자, 이제 도진이 너도 저기 가서 서봐.”


그림을 평가하는 데 굳이 창작자의 멍청한 얼굴이 함께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혹시 그림이 상하지 않을까 조심히 캔버스를 받쳐 들고선 카메라를 쳐다본다.


“자- 치즈!”


찰칵이는 소리가 나길 몇 번. 미술 선생이 뚱하니 스마트폰을 바라보다가 곤란스레 웃었다.


“도진아, 웃는 연습 좀 해야겠다.”



*



국립 RM 미술관.


광화문 앞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을 거쳐 이리저리 걸어가면 보이는 한국 최대의 미술관이다. 미술관이라 하면 조용하고 엄숙한 공간이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사람으로 북적였다.


처음 참가하는 공모전에서 비록 1차라지만 합격했다.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1차 접수자가 300명이 넘는다 들었는데.


고이 접어놓은 안내지를 품에서 꺼내 공모전 2차 접수처를 찾는다.


안내지의 지도와 팸플릿의 안내도를 비교하며 걸으니 곧 접수대를 찾을 수 있었다.


접수대 앞에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금붕어 똥 마냥 줄줄이 서 있어 나 또한 그 행렬에 참여했다.


앞선 학생들의 작품을 어깨 너머로 살펴본다.


종이나 천으로 감싸여 전혀 보이지 않는 그림도 있었지만, 공기 중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작품 또한 있었다.


감히 누군가의 작품을 평가할 깜냥은 안 되었기에 그냥 눈에 담을 뿐이었다. 나름 재미있다.


잠시 그들의 그림을 훔쳐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액자를 장식한 사람이 제법 있었다.


단순한 디자인도 있지만 화려한 황금색이나 고풍스러운 나무로 된 액자가 캔버스를 감싸고 있다.


액자 같은 사치품은 생각도 못 해봤다. 내 그림은 천으로 감싸여 있어 아무도 확인하지 못하지만, 그냥 캔버스를 꼭 끌어안았다. 조금 부끄러웠다.


행렬은 금세 줄어 접수대 앞에 설 수 있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김도진입니다.”


접수원은 키보드를 몇 번 두들기더니 말했다.


“여기 서류 작성해주세요. 앞서 공지한 대로 수상작의 소유권 및 저작권은 미술관이 소유함을 인지해주세요.”


접수원은 굉장히 사무적인 태도로 인적사항을 확인했다. 그가 묻는 말에 앵무새처럼 짹짹 대답하니, 금세 내 캔버스는 접수원의 뒤, 다른 출품작들 사이에 끼어 들어갔다.


싱거웠다. 심사위원이 아니라지만 접수원은 내 그림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긴장한 나 자신이 바보 같아졌다.


허무한 느낌을 삼키며 입구에서 주운 팸플릿을 살폈다.


현역 작가들과의 대담은 멀었고, 공모전 심사 결과도 3시는 되어야 나온다.


걸음을 옮겼다. 미술관에 왔으면 교양있는 사람인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3전시실이···.”



*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르겠다.


가로, 세로 1미터가 넘는 큰 캔버스에 고작 세모 하나를 그려 넣은 이유 말이다.


현대 미술의 난해함은 미천한 고등학생에겐 너무 어려운 주제다. 난이도로 따지면 밀레니엄 문제에 필적하지 않을까?


그림 옆에 개미 기어가듯 조막만 하게 적힌 작가의 이름과 제목을 본다.


[<무제> 여춘팔]


왜 작가들은 무언가 의미를 담아 그리고선 제목을 짓지 않는 걸까. 이것 또한 모르겠다.


남녀 한 쌍이 스쳐 지나며 중얼거렸다.


“이건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러게, 거참. 난 역시 예술은 이해 못 하겠다.”


솔직히 동감이다. 해설이라도 옆에 적어놓으면 이해하기 편할 텐데, 해설은커녕 제목도 없는 작품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본다.


미술 선생이 재잘재잘 떠들어 알려준 지식을 이용해보자면 삼각형은 안정적인 구도다.


고개를 90도 기울였다가 되돌린다. 밑의 수평선이 양쪽의 사선보다 길다.

사선은 불안정한 구도, 수평선은 안정감을 상징한다.

이를 토대로 해석하면 정삼각형보다 이 삼각형이 더 안정적이다.


그러고 보니 삼각형 하나로 삼각형 두 개를 만들었다. 스케치하듯 겉면만을 붓칠했기에 삼각형의 안쪽에 뚫린 구멍이 또 다른 삼각형을 만든다. ‘이 그림에 삼각형은 몇 개 있을까요?’ 하는 퀴즈같다.


삼각형이 두 개, 일정한 규칙성을 지닌 채 배치되었다 볼 수 있겠지.


그렇다면 이 작품은 극도의 안전성을 추구한 것일까?


아니, 여전히 모르겠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끙···.”

“무엇을 보고 있니?”

“···예?”


풍채 좋은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회색 생활한복에 말린 미역처럼 푸석푸석한 회색 수염이 인상적이다. 불교에 산타클로스가 있다면 이런 사람일까.


“아까부터 그림을 노려보기에 말이야.”


노인이 빙그레 웃음 지었다. 사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면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다.


웃는 얼굴엔 침도 못 뱉는다. 아량을 베풀어 친절히 대답했다.


“그냥, 잘 모르겠어서요.”

“하하! 그래, 어렵긴 하지.”


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이구나.”


그러며 그는 방금 지나간 남녀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들은 작품을 조금도 살펴보지 않고 그저 느릿하게 걷고 있었다. 꼭 일상적인 풍경처럼 여기는 것 같다.


이 할아버지는 내게 뭘 바라는 걸까.


나는 TV에 나오는 지식인처럼 똑똑한 대답은 못 한다. 그냥 주둥이가 벌려지는 대로 말했다.


“···그냥,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예의?”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잖아요. 이해하려는 노력이 최소한 작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노인은 기특하다는 듯이 얼굴에 푸근한 미소를 그렸다.


“그래? 친절하구나. 그럼 이해한 건? 아니, 아니지. 생각나는 건 있니? 아니면 느낀 점이라도.”


글쎄, 생각날 게 있을까. 현대 예술가, <대형 평면 배열>의 저작자 키스 타이슨은 색(色)과 형(形)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흐르는 대로 만든다고.


그게 현대 예술이 추구하는 방향 중 하나가 아닐까. 어쩌면 우연의 산물이라고 불러야 할 것.


내가 여춘팔 작가의 작품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의 이름 또한 오늘 처음 보는 것인데. 별다른 수가 있을까.


“그냥···.”

“그냥?”


기대가 잔뜩 묻은 되물음이 부담된다. 부담스럽다.

난 국어 성적도 좋지 않아, 훌륭한 미사여구를 붙일 능력이 없다. 그래도 이 사람 좋은 할아버지를 위해 부족한 어휘력을 최대한 발휘한다.


“······낭만적이네요.”

“낭만적이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상대방의 물음을 긍정하는 제스쳐는 호감을 사기 쉽다.


“여춘팔 화백님은 여기 삼각형처럼 단순한 도형에서 그··· 로망? 같은 걸 느낀 게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제법 낭만적이라고 생각해요.”


노인은 동그랗게 뜬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바꾸며 말했다.


“······그거 제법 낭만적인 말이구나.”

구두 한 켤레 (고흐).jpg

작중 주인공이 만든 작품의 모티브인 고흐의 <구두 한 켤레>입니다.


후에 두고두고 언급될 것이므로 이것과 비슷하다고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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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 그림을 그려도 될까요? +5 20.12.28 3,726 5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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