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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펭귄의 서재입니다.

천재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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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群青)
작품등록일 :
2020.12.28 17:09
최근연재일 :
2021.01.28 07:05
연재수 :
3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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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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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9,402

작성
20.12.2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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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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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글자
13쪽

#1 - 그림을 그려도 될까요? (4)

DUMMY

얼떨떨한 느낌이다. 내가 그에게 그림을 팔 이유가 있을까. 아니, 그가 내 그림을 살 이유가 있을까. 공모전에서 입선조차 하지 못한 그림을.


“어쩌겠니?”

“이유를 말해주세요.”

“무얼?”

“그림을 살 이유 말이에요.”

“그만한 가치가 있는걸.”


당연하다는 말투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팔게요.”


보기 마땅한 이유는 필요 없었다. 어차피 창고 같은 곳에 처박힐 그림이다. 물감값과 교통비를 생각하면 파는 것이 이득일 게 뻔했다.


“헌데··· 내가 지금 지갑이 없어서 말이야. 연락처 좀 적어주겠니?”


그림을 산다면서 돈이 없다고 말하는 넉살 좋은 모습에 얼이 빠진다.


돈을 떼먹히는··· 아니, 그림을 떼먹히는 광경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 그림에 가치 따윈 없다는 사실에 선뜻 그림을 건넬 수 있었다.


“그냥 가지세요.”

“아니, 그럴 수야 있나.”

“괜찮아요.”

“아니, 내가 안 괜찮아. 연락처 좀 주겠니?”


하는 수 없이 수첩을 찢어 연락처를 적어주자 그가 희희낙락 웃으며 말했다.


“김도진. 좋은 이름이구나. 아, 이 작품의 이름은 뭐니?”

“없어요. 그런 거.”

“그럼 내가 지어도 되겠니?”

“이제 작가님 건데요.”


뚱하니 말하자 여춘팔은 두루뭉술한 미소만 지었다.


“그래, <낭만>이 좋겠구나.”



*



“교수님 너무 하셨습니다.”

“내가 무얼?”

“전부요!”


C-옥션 대표 오현월이 빼액 외쳤다.


“경매 당일까지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도 모자라 지각이라니요! 지금 몇 시인지 아십니까?!”

“아, 거참. 귀청 떨어지겠네 이 친구야. 나 아직 귀 안 먹었어. 그리고 아직 경매까진 30분이나 남았지 않은가?”

“교수님! 경매 시작 30분 전에 작품을 가져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확인 작업도 들어가야 하는데. 저기 미술품 전문가들 놀리는 것도 다 돈입니다! 돈!”


전문가는 괜히 전문가가 아니다. 돈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기에 전문가라 하는 거다.


추가 수당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에 오현월은 쌓인 울분을 토해냈다.


“계약 사항에 분명 옥션 산하 갤러리에 전시하기로 명시되어 있잖습니까. 경매품 프리뷰 전시도 안 하고! 경매 당일까지 다른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도 다 양보했는데···!”

“씁-. 내 말 좀 들어봐.”


여춘팔의 장난스러운 한마디에 오현월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오현월이 국내 예술품 경매 회사 중 세 손가락에 꼽히는 회사의 대표라고 한들, 눈앞의 인물은 한국 미술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자네, 이 그림 어떻게 생각하나?”


여춘팔이 줄곧 들고 있던 캔버스를 빙글 돌려 오현월에게 보였다. 그 순간 오현월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장사꾼인 그로선 머릿속의 주판을 튕기기 바쁜 것이다.


‘정물화···. 추상화가인 여춘팔이 마지막으로 정물화를 그린 게··· 40년 전이던가? 40년이면 그 세월을 생각해서라도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데···.’


열심히 짱구를 굴리던 오현월을 보며 여춘팔은 초 치는 발언을 했다.


“아, 물론 내 그림이 아니네.”

“예? 아니, 그럼 누구 작품입니까? 요즘은 이런 그림 그리는 사람이 없는데.”


현대 예술가들이 두리뭉술한 것들을 작품이라 내놓는다지만, 그래도 트렌드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그림은 트렌드에서 많이 벗어났다.


“아니, 이거 혹시 어디 대학생 작품입니까?”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

“고등학생치곤 제법이네요. 아니, 잠시만요···.”


트렌드에서만 벗어난 것이 아니다. 많이 평범하면서도, 시선이 갔다.

미술 전공자가 아닌 오현월이 보기에도 무언가 기술이 들어갔다.


“특이하군요. 거무칙칙한데 보기 편해요. 시선 배치를 고려한 걸까요.”

“그래서 어떤가.”

“좋은 그림이네요.”


오현월은 심드렁히 대답했다. 국내에서 움직이는 경매품의 반은 C-옥션의 손을 거친다. 아무리 잘 그렸어도 이름 없는 고등학생의 작품이 그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장사꾼이니까.


여춘팔이 쯧쯧 혀를 찼다.


“자네, 그 자리에 앉더니 속물이 다 됐군. 이 회화에 담긴 철학을 몰라보다니. 옛날 같았으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했을 텐데 말이야.”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한 30년 전?”

“전 그때 말단이었습니다. 작가 앞에선 당연히 칭찬해야죠. 하다못해 춘화 보면서 혀도 낼름거려봤습니다.”


젊은 날의 부끄러운 기억을 머리 한구석에 집어넣으며, 오현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느 그림이든 훌륭한 그림은 있어도 입이 떡 벌어지는 그림은 없습니다. 무슨 만화도 아니고.”


오현월이 손을 저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각설하죠. 그 그림은 뭡니까?”

“이번에 문체부에서 공모전을 하지 않았나?”

“네- 잘 알죠. 그쪽에서 교수님 작품을 빼갔으니까. 아오! 예술하던 양반이 정치판 들어갔다고 그 짓 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어허~ 그렇게 삐뚤어지게 보지 말게. 어쨌든, 이건 공모전에서 낙선한 작품이야.”

“그걸 왜 갖고 계십니까. 혹시 버린 거 주우신 겁니까?”

“버린 건 아니고. 학생이 팔기로 했네.”

“그 학생은 땡 잡았네요. 그래서, 얼마 주셨습니까?”

“그건 이제부터 알아야지.”

“예?”


여춘팔은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에 따라 오현월의 가슴엔 불안한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이 그림을 경매에 올릴 거네.”



*



“1억 5천만 원. 1억 5천만 원. 1억 5천만 원. 낙찰되었습니다.”


탕!


경매사의 매정한 망치질에 아트딜러 타나카 쥰은 짜증 어린 손길로 경매품 도록을 접었다.


“망할, 중국놈들 통화 입찰하는 놈들이 무슨 억대로 넘어가고 있어.”

“여춘팔의 나이도 나이니까. 작품의 가격이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지.”

“경매 추정가가 7천이었는데···. 젠장, 건진 것도 없어.”


친구의 투정에 니혼예술대학 교수 우에시로 신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술품이 투기성을 띠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도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노인의 최신작은 더욱 그렇다. 몸이 불편하다는 소문도 있고, 유작이 될 수 있기에 프리미엄이 붙는다.


“어쩔래? 이제부턴 미술품이 아닌데. 나머지도 보고 갈까? 너 아까 바이올린 하나 봤잖아.”

“됐어. 그거 추정가가 10억이야. 내가 돈이 어디 있다고.”


여춘팔의 <무제>를 마지막으로 미술품 경매사가 자리를 정리한다. 다음으로 악기 전문 경매사가 올라와야 하지만 무대에는 회색 생활한복의 노인이 올라왔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던 두 일본인은 경매장에 일어난 이변에 조용히 착석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춘팔입니다.”


경매장에 작은 박수가 일었다. 일본인 통역사는 투철한 직업 정신으로 통역을 이어나갔다.


“저는 오늘 경매에 예정되어있지 않던 작품을 판매하고자 합니다.”


타나카 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지!”

“음···. 난 C-옥션의 정신상태가 의심되는데.”


우에시로 신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경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여춘팔의 작품을 돌발적으로 추가했다. 기본적으로 매너 위반이다.

게다가 시중에 공개되었던 작품이 아니라면 방금 낙찰된 <무제>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행위다. 직접적으로 유작 프리미엄에 대해 언급하진 않겠지만 경매 참여인들에게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실제로 방금 여춘팔의 <무제>를 낙찰받은 대리 응찰자의 표정이 와락 구겨져 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인물이 소리라도 지르는 거겠지.


곧 스크린에 작품의 정보가 떠올랐다.



<Romance>

[acrylic on canvas]

[72×50.5cm]

[₩0]

[$0]



“로맨스? 추정가 0원은 처음 보네.”


심지어 빔프로젝터가 비추는 스크린에는 경매품을 비추지 않았다.

C-옥션 메이저 미술품 경매 역사상 처음 보는 광경에 많은 경매 참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소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여춘팔의 작품이 0원에서 시작하는 광경은 그들에게 낯선 장면이다.


여춘팔이 손짓하자 하얀 장갑을 낀 경매사가 조심히 캔버스를 옮겼다.


경매 참여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세간에 알려진 여춘팔의 작품은 대부분 추상화다. 그가 그린 정물화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않고,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지 않고 있지만 수십 년을 넘어 그린 작품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무시하며 여춘팔은 자신의 페이스대로 말했다.


“눈치채셨겠지만 제 작품이 아닙니다. 한 고등학생의 작품이죠. 작품명은 <낭만>입니다. 제가 붙였어요.”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분위기임에도 여춘팔은 시시덕 웃었다.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 작품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지기엔 안타까운걸요.”


여춘팔은 정중히 손을 모으며 말했다.


“억지로 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따로 개념예술적인 행위라고 생각하지도 말아 주세요. 그냥 알아주세요. 우리 사회엔 이렇게 훌륭한 꼬마 예술가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여춘팔은 간단한 말을 끝으로 마이크를 경매사에게 건넸다.


“경매 시작하겠습니다. 시작가는 0원입니다.”



*



경매 담당자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오현월에게 물었다.


“대표님. 정말 괜찮겠죠?”

“큼-. 그-으럼, 그럼, 내가 그 정도 계산도 안 했을까.”


부하 직원에게 당당한 태도를 보이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주체할 수 없는 식은땀이 오현월을 괴롭혔다.


수천, 수억이 오가는 국내 최고의 경매장에 고작 고등학생의 작품을 경매에 올리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일어났다.


어쩌면 오늘 9시 뉴스의 메인에 오현월 자신의 얼굴이 효수당한 적장의 대가리처럼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큼지막하게 박힐 문구에는 ‘국제적 망신’이란 글자가 들어있지 않을까. 어쩌면 ‘특혜 의혹’이란 말이 붙을지도 모른다. ‘예술계 비리’라는 말이 붙으면 최악이다.


“···내가 벌인 일 아냐 전부 저 노친네가 한 거야···.”


불안감에 오현월은 중얼거리며 자기합리화를 했다. 입 밖으로 뱉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괜찮아···. 전례가 없을 뿐 불가능한 건 아니야. ······아오! 진짜!”


오현월의 타는 마음을 무시하고, 경매사의 신호에 몇 아트딜러들이 패들을 들었다.



*



이름 모를 고등학생의 작품은 만원 단위로 숫자가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저걸 왜 사는 거지?”


타나카 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보 아트딜러인 타나카 쥰으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여춘팔의 작품이라면 적당한 타이밍에 끼어듦이 옳았다. 하지만 이름도 모르는 한국 고등학생의 회화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우에시로 신고는 타나카 쥰의 생각과는 반대로 큰 고민 없이 패들을 반복적으로 들어 올렸다.


타나카 쥰이 화들짝 놀라 말렸다.


“야, 뭐해? 고등학생의 작품이야. 심지어 못 박았잖아, 개념예술이 아니라고. 여춘팔은 정말 저 그림을 경매에 올리고 싶었을 뿐이야. 저 인간 성격을 생각하면 정말 그럴 거라고.”

“아니, 그게 아니야. 저 회화의 가치는 그렇게 따지는 게 아니야.”

“뭐?”


사지 않을 이유는 많았다. 이름도 모르는 고등학생의 작품이라는 것, 프리뷰 전시에도 올라오지 않은 작품이라는 것.

어쩌면 여춘팔은 이 경매를 통해 뭣도 모르고 사들이는 자칭 미술애호가들을 비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일 뉴스에 나오고 싶어? 아니, 아니지. 당장 오늘 한국 뉴스에 올라오겠지. 희대의 멍청이로 놀림 받을 거라고.”

“현대 예술에서 유명인의 인정이 중요하다고···.”

“아- 제발. 신고! 논문은 네 연구실 가서 써. 한국에 와서까지 그 얘기를 해야 해?”

“당연하지! 이건 우리 예술가들의 숙명이라고! 현대 예술의 거품을 걷어내고 예술을 정의하는 데 경매에 올라온 작품은 유의미한 증거야!”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저 그림은 거품이 존나 꼈고, 여춘팔은 노망이 났으며, C-옥션은 개새끼다?”


타나카 쥰의 비꼼에 우에시로 신고는 고개를 저었다.


“반대야. 회화는 회화 그대로의 가치를 봐야 할 필요가 있어. 지금 모두가 너처럼 생각하고 있지. 여춘팔에 주목하고 있다고! 여춘팔이 한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우린 꼬마 예술가의 작품을 봐야 해.”

“······.”


타나카 쥰은 침음을 흘렸다. 그는 예술가도 아니지만 우에시로 신고의 당당한 태도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가 꼭 자신을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트딜러가 미술품을 예술이 아니라 돈 장사의 수단으로 하기에 맞는 말이지만.’


타나카 쥰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다시 보니 제법 괜찮은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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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 그림을 그려도 될까요? +5 20.12.28 3,726 5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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