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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펭귄의 서재입니다.

천재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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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群青)
작품등록일 :
2020.12.28 17:09
최근연재일 :
2021.01.28 07: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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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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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 - 그림을 그려도 될까요? (3)

DUMMY

국립 RM 미술관 지하. 강단을 중심으로 팥색 의자를 반원으로 배치했다. 가능한 뒤쪽에 자리 잡아 주위를 둘러본다.


흡사 21세기 노아의 방주에 탄 느낌이다.


교복을 입은 학생이나 성인들. 또 STAFF라는 단어가 적힌 옷을 입은 사람들. 각양각색의 사람을 구겨 넣은 방.


의자만이 아니라 계단에도 사람들이 앉아있다.


이렇게 미어터지니 저 거대한 카메라로 송출하는 걸까. 유명 방송국 로고가 적힌 카메라가 머리통 위에 있으니 살짝 불안하다.


···이거 떨어지진 않겠지?


곧 여춘팔 작가가 강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보았던 불교 산타클로스 노인. 여전히 덥수룩한 회색 수염에 회색 생활한복 차림이다.


‘혹시?’ 하고 생각하긴 했다. 미술관에서 처음 보는 사람의 감상평을 듣고 싶어 할 괴짜가 얼마나 될까.


“여러분 반갑습니다. 화가 여춘팔입니다.”


꾸벅 인사를 한 그가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학생들이 많네요. 이번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공모전을 했죠? 저는 심사위원이 아니지만, 슬쩍 보고 왔습니다. 과연 한국 예술계가 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쩌면 여러분이 저보다 그림을 잘 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기감이 느껴지더라고요. 저처럼 네모나 세모 그리는 것보다 여러분의 그림이 더 볼 게 많긴 하죠.”


몇몇 방청객이 웃음을 터뜨렸다.


“제 그림 보신 분 계신가요? 아, 제법 많네요. 고맙습니다. 손 내리세요. 여러분 덕분에 제가 먹고삽니다. 하하!”


여춘팔은 이후로도 몇 가지 농담을 던졌다.

피식 웃음을 흘릴만했지만, 머리 위 카메라에 혹시 영향을 줄까 옷깃 스치는 소리도 못 냈다. 카메라 감독의 정색한 표정이 무서운 걸 어떡하냐.


“제 그림이 일부에선 좋지 못한 평을 받는 건 알고 있습니다. 굳이 저만은 아니죠. 많은 추상 화가들, 현대 예술가들이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저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까 누가 그리 말하더라고요. 솔직히 이해합니다.”


“현대 예술은 그러한 면이 많죠. 이해하기 힘들다! 그걸 이해합니다. 이야기 하자면 저는 추억이나 혹은 경험을 선물하고 싶어서 그림을 그립니다. 오늘도 저는 저 위에 걸린 그림 하나로 좋은 추억을 얻었어요.”


여춘팔이 객석을 훑었다. 착각이겠지만 눈이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한 학생이 말하더라고요. ‘낭만적이다.’라고. 아, 얼마나 사랑스러워요. 뭣 모르는 비평가가 떠벌대는 것보다 훨씬 유익한 평가였어요. 어? 거기 웃지 마세요. 진심이니까.”


유명인의 입에서 나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 건 신선한 기분이었다. 애초에 유명인과 대화를 나눈 것도 제법 대단한 일 아닌가?



*



여춘팔 작가를 포함한 현역 작가들의 강연은 계속되었지만, 딱히 머리에 들어오진 않았다.

···재미없는 인터넷 강의 같은걸.


1시간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강연이 끝났다.


바글바글했던 사람이 속속들이 빠지기 시작했다. 타인과 몸을 부비는 것은 선호하지 않기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우, 다 돌았어. 저런 거 그려서 팔아먹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그쵸! 저거 그리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다 또라이 같아요. 뭔 점 하나 찍는 데 삼 개월씩 걸리고, 사는 것도 몇억씩 쓰고.”


등 뒤에서 시시덕대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는 카메라와 그걸 다루는 사람들 뿐이니 보나마나 방송국 사람일 것이 뻔했다.


“떠들지 말고 빨리 준비해. 공모전 심사하는 것도 찍어야 해.”

“중삐리, 고삐리들 그림 그린 거요? 그거 뭐 스펙이라도 되요?”

“몰라. 우리는 윗선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거지. 아, 그런 소문이 있긴 하더라. 공모전 참가한 애새끼 중에 정치인 아들이 있다고.”

“와, 죄다 양심이 없네. 예술이다 뭐다 하는데 내가 볼 땐 그냥 부동산처럼 투기하는 거야.”

“그러게, 후- 씨발. 세상 존나 불공평하네. 다 챙겼으면 가자.”


덜그럭거리는 소리. 신발 뚜벅이는 소리와 소음이 점점 줄었다.


몇몇의 미술관 스태프나 느릿한 사람들을 뒤로 나 또한 홀을 빠져나왔다.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생각 말이다.


체육은 인체의 한계에 도전하고, 국어, 수학, 영어를 포함한 교육 과정의 것들은 객관식 문제로 평가할 수 있다. 음악? 그건 듣고 있으면 즐겁잖은가.


반면에 현대 예술은 다르다.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준다는 소리가 절절히 공감된다.


그렇다고 절대적인 부정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입으로 읊어보자.


고흐, 밀레, 모네, 마네, 얀 반 에이크, 보티첼리, 드가, 고갱, 카라바조, 로트렉, 루벤스, 렘브란트, 르네 마그리트, 샤갈, 피카소···.


위대한 예술가.


우리의 짧은 생각과 알량한 말 한마디로 세상의 모든 선대 예술가들이 쌓아온 것들 또한 부정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예술인에게 있어 모욕일 것이다. 한국인에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을 모욕하는 것과 같다. 그리 생각한다.


그러니 예의를 차린다. 그뿐이다.



*



어스름하게 품었던 기대가 무색하게, 입선조차 못 하고 공모전에서 낙선했다.


기자들의 카메라 촬영음과 번쩍이는 플래시 사이에서 마음에도 없는 축하와 박수를 보내며 병풍이 되어준다.

내일 아침 인터넷 뉴스를 살펴보면 사진 구석에 찍혀있지 않을까.


그리 길지 않은 역할 놀이를 끝내고, 시장바닥처럼 펼쳐진 캔버스의 바다에서 내 그림을 집어 올린다.


“엄마!”


여성 특유의 고음이 울렸다. 몇 사람의 시선이 나와 함께 돌아갔다.


“엄마! 엄마! 나 사진 찍어줘 인스타에 올릴 거야.”

“알았어. 핸드폰 주고, 가서 서봐.”


여학생 하나가 본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수상작 옆에 섰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전시관 특유의 따뜻한 색 조명. 그 조명이 비추는 수상작은 제법 그럴듯했다. 과연 저 정도는 되어야 수상할 수 있는 건가.


툭-

투둑-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전시관 앞의 쓰레기장에 탈락자들이 그림을 가져다 버리고 있었다.


한여름이라 하늘은 푸르렀지만, 쓰레기장의 빗물받이 처마 밑에는 녹색 그림자가 져서 우중충했다.


캔버스를 버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그다지 분한 표정도 아니었다. 무표정했다. 탈락자 모두가 얼굴에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도리어 섬뜩함이 느껴졌다.


“무엇을 보고 있니?”

“······안녕하세요 작가님.”


갑작스레 나타난 여춘팔 작가는 여전한 미소를 한 채 날 바라봤다. 탈락자 앞이건만 태평해 보였다.


여춘팔 작가는 다시 물었다.


“무엇을 느꼈니?”


질문 참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어쩌면 대학교수를 하고 있지 않을까. 대학은 가본 적 없지만, 대학교든 고등학교든 중학교든 어디에나 학생의 재치 있는 답을 바라는 선생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마른 입술을 한번 훑었다. 그가 대학교수라면 이 정도의 장난은 받아줄 것 같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화>가 생각나네요.”

“하하하하! 재미있는 답변이구나. 생각보다 아는 것도 많고 말이야. 확실히 저 아이들이 가슴에 품은 감정을 상상하게 만드는구나. 보통은 슬픔이나 분노겠고 말이야.”

“작가님은 무엇을 느끼시나요.”


현역 예술가의 생각을 엿들을 수 있다면 어찌 되든 본전이라고 생각했다. 딱히 영양가 있지는 않았다.


“흠···. 누구처럼 멋들어진 표현은 못 하겠구나. 그래도 굳이 표현하자면 안타깝구나. 훌륭한 재능들이 실패하는 모습은 그다지 유쾌한 광경이 아니니까.”

“교과서적인 답변이네요.”

“하하! 그렇지.”


그는 푸석한 수염이 떨리도록 웃었다. 그리곤 손을 허리 뒤쪽으로 모아 뒷짐을 졌다.


“예술가에겐 언제나 실패와 좌절이 찾아온단다. 그림이나 조각을 하며 먹고 사는 건 제법 낭만 있는 삶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만큼 피폐한 삶도 없어.”

“······.”

“한 번의 실패, 두 번의 실패, 세 번의 실패가 쌓이고 쌓이면 사람들은 예술을 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지 비평가들의 말이 무섭고, 대중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 도전 정신이 사라져 언젠가 성공했던 작품을 복제하기도 하지.”

“그래도 성공한 삶이잖아요.”


배부른 소리. 아까 그의 강연에서 나온 이야기들로 미루어 보아 올해 여춘팔이 그림과 조각으로 올린 수익이 수십억에 달한다.


과연 현재의 성공한 그가 가정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빈곤함을 자랑하는 나와 비교할 수 있을까.

여춘팔이 일흔을 넘긴 나이이며, 20세기 한국의 대소사를 겪은 인물이더라도 과거를 ‘그땐 그랬지’라며 추억으로 치부하는 사람은 많다.


여춘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들이 보기엔 성공한 삶이겠지. 난 일반인들이 평생 일해도 못 벌 돈을 일 년만에, 몇 달만에 벌어들이니까. 하지만 행복의 기준은 돈이 아니란다.”


짜증이 치밀었다. 아무리 고상한 예술가라도 다른 꼰대들과 같았다.


돈은 진리다. 망할 철학적 대답은 똥이다!


여춘팔은 내가 속으로 그를 와구와구 씹는 것도 모르고 인자하게 물었다.


“애야, 예술가란 무엇일까?”

“···그림이나 조각으로 먹고사는 사람이요.”


주둥이에서 튀어나온 호의적이지 않은 말투에 내 자신도 당황했지만, 그냥 당당히 있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당당하면 그럴듯하다.


“내가 너의 그림을 볼 수 있을까?”

“안······. 여기요.”


‘안 돼요.’라고 할 이유가 없더라. 그래서 순순히 그에게 내어줬다. 여춘팔은 내 볼품없는 그림을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그림엔 많은 것이 담기지. 그 사람의 성향도 추구하는 바도. 행복한 사람인지, 불행한 사람인지. 이념이나 심지어 성벽이 담기기도 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갈매기 눈썹이 인상적인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은 그녀의 인생처럼 우울하고 꺼림칙한 그림을 그렸다.

‘에드가 드가’는 여성 혐오에 관해 여러 구설수가 있지만, 그의 작품에선 특유의 여성에 대한 집착이 드러난다.


여춘팔은 느릿하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쩌면 넌 굉장히 조심스럽고, 피로한 사람일지도 모르겠구나. 이 신발 그림에서 짙게 드러나. 혹시 주제가 아버지니?”

“테마는 고단함이에요.”


굳이 애비‧애미없는 고아라는 말은 안 했다.


여춘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단함이라. 확실히 알겠어. 공모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구나, 분명 좋은 그림이지만 말이야,”

“······.”

“그리고 여기 이 노란 민들레는 고단함이라는 테마와는 어울리지 않아. 어쩌면 여기에 너의 감정이 조각처럼 담긴 걸 수도 있겠구나. 그래, 내가 정의해보자면 밝은 미래에 대한 작은 희망일 수 있겠구나.”

“···민들레는 추억과 가정을 상징해요. 문 근처에서 피기에 ‘문-둘레’라고 불린 어원에서 따왔어요.”


굳이 그림의 과도한 칙칙함 때문에 넣었다는 이유를 덧붙이진 않았다. 현역 예술가에게 기술적인 부분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여춘팔은 피식 웃었다.


“역시 아는 게 많구나. 하지만 네가 그런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면 심사위원들이 알아줄까?”

“······.”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그런 부분을 생각 안 했을 리가 없지. 이건 너의 무의식적인 감정을 먹고 핀 꽃이야.”

“······.”

“성공···. 아니,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구나. 행복에 대한 갈망이 있다고 느껴져.”


그는 캔버스 가장자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마치 아기를 대하는 태도였다.


“난 예술가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단다. 작품에 자신을 담아내야 비로소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이 그림엔 너의 일부가 담겨있구나.”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그림을 팔렴.”


다소 뜬금없는 제안이였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화 (엘리자베타 시라니).jpg

작중 언급된 엘리자베타 시라니의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입니다.


무표정에 담긴 슬픔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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