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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펭귄의 서재입니다.

천재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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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群青)
작품등록일 :
2020.12.28 17:09
최근연재일 :
2021.01.28 07:05
연재수 :
3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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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9,402

작성
21.01.0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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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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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글자
13쪽

#2 - 디오게네스 (4)

DUMMY

[인간 : 표면, 그 너머]에 출품할 작품.


사실상 여춘팔의 일탈로 세상에 공개된 <낭만>을 제외한다면 첫 작품이다. 지금껏 그린 그림들이 학교 사람들에 의해 인터넷에 몇 점 떠돌지만, 작품이라 하기엔 뭣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캔버스도, 붓도, 물감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지만, 현재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안 써본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지만, 남들 앞에 낼 작품이 나오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색색의 페인트통 사이에서 청색과 검정색을 따로 꺼낸다. 박정인이 말하길 내가 많이 사용하는 색.

실제로 알고 있는 사실이긴 했지만 그게 내 특색이 될 줄은 몰랐다.


고개를 돌려 수첩에 적은 글 뭉치를 본다.


- 정돈된 구도, 정적임?

- 청색, 검정색 -> 낮은 명도?

- 민들레··· 의외성?


사이비 스님이 명상을 하듯 자아성찰을 하는 느낌이다. 생각할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특색 찾기.


···절에 들어가면 답이 나올까.


작가 대부분은 그 작가의 작품이란 걸 대표하는 시그니쳐가 있다. 대표적으로 피카소의 큐비즘이 있고, 앤디 워홀의 팝 아트,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등이 있다.


보통은 기법의 형태로 나타나고 아니면 데이비드 호크니의 ‘물’처럼 소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지?”


조용히 중얼거려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아, 나는 얼마나 우유부단한 머저리인가. 평생을 그림 그리는 것만 바라보며 살아왔으면서, 숟가락이다 못해 주걱으로 떠먹여 주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을 수가 없다.


부아아아아앙--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벽을 뚫고 들려온다.


박정인이 말하길 방음이 상당하다지만 양옆, 위, 아래가 모두 작가들의 스튜디오라고 했다. 그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건네주던 귀마개가 생각난다.


[02:00]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에 떠오른 숫자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여기서 잔다고 하지 말걸.


전기톱 소리와 함께 상념이 모두 갈려 나갔다. 잘까 싶지만, 소리 때문에 못 자겠다.


어떡할지 끙끙대며, 볼펜으로 스케치북에 낙서한다. 시끄럽지만 손을 움직이니 그나마 편안한 기분···.


쾅! 쾅! 쾅!


“아저씨! 꼭두새벽에 뭐 하는 겁니까?!”


복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린다. 공격적이면서도 짜증 어린 말투.


방음벽을 뚫는 소리가 한둘이 아니다. 내 귀가 민감한 건지. 아니면 시공사의 문제인 건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싸움 구경.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것이 불구경과 싸움구경이라는 말이 있다.

불 멍이라는 말도 있고, 보육원 원장도 맨날 UFC 틀어놓고 있는 걸 보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살금살금 걸어가 현관문을 열었다. 빼꼼 얼굴을 내미니, ···나체의 남자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


쾅! 쾅! 쾅!


“아저씨! 문 좀 열어보라니까! 꼭두새벽에 톱질하는 사람이 어딨어!”


나도 말하고 싶다.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또 어디 있는가. 찌푸린 표정과 떡진 뽀글머리가 낯이 익었다.


“······백현우 ···형?”


작게 중얼거렸건만, 백만 불짜리 귀를 가진 백현우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어! 도진이! 너 여기 있었어?!”


백현우의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동시에 백현우가 두드리던 문이 열렸다. 보호 고글을 쓴 여성이 인상을 찌푸린 채 백현우를 노려봤다.


백현우는 반가운 표정을 순식간에 적대적으로 바꾸곤 여성에게 말했다.


“아, 아저씨.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요. 여기 사람들 다 같이 사는 공간인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사람들 사는 공간이긴. 다 숙소 따로 있지. 여기서 자는 사람이 바보잖아, 뭘 따지고 들어요.”

“아니-, 이 아저씨야. 다 같이 쓰는 공간인데, 낮이면 몰라 꼭두새벽에 전기톱 우와아아앙-! 말이 됩니까? 저기 봐요, 우리 도진이도 놀라서 눈만 빼꼼 보잖아.”


여성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딴지를 걸 생각도 안 난다. 전라의 남성이 앞에 있어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것이 대담하다기보단 정신 상태가 이상해 보인다.


뭐라 반응 못 한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동방예의지국의 주입식 교육은 무서운 것이다.


보호 고글 너머, 그녀의 삐뚜름하게 올라갔던 눈썹이 거두어졌다.


“···알았어요.”


그러곤 현관문을 잡은 백현우의 손을 탁! 쳐내며 문을 쾅! 닫았다.

백현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당하는 것이, 오락실 형들이 하던 격투 게임의 현란한 콤보 같았다.


“아니, 이 싸가지가.”


닫힌 문을 앞에 두고 주먹을 휘두르던 백현우는 다시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내 쪽으로 왔다.


솔직히 동물원에서 풀려난 오랑우탄이 다가오는 기분이라 문을 닫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감내할 수 있었다.


“야, 도진아. 반갑다. 야.”


백현우는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문을 열며 들어왔다. 그의 흉물스러운 민트색 팬티에서 시선을 돌렸다.


역시 예술가란 작자들은 하나씩 나사가 빠졌다.


“여기 여춘팔 교수님 작업실인데. 네가 먹었네?”

“······여춘팔 교수님··· 작가님이요?”

“엉. 원래 거의 안 오시긴 했어.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아예 안 쓰셨네. 보통은 다른 나라에 계시거든. 독일이나 프랑스, 미국··· 이런데. 세계적인 화가는 뭐가 달라도 달라.”


모르던 사실이다. <낭만>을 넘긴 이후로는 본 적도 없고, 연락도 못 했는걸. 작업실까지 넘겨줄 줄은 몰랐다.


먹잇감을 찾는 공룡처럼 두리번거리던 백현우가 소파에 몸을 던졌다. 애써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저는 몰랐어요. 여기가 작가님 작업실인 거.”

“그렇겠지. 교수님도 원래 좀 기분파긴 해. 추정가 1억 넘는 그림을 태워버리거나, 갑자기 안 팔거나. 흐미~ 아까버라. 그런 거 있잖아. 추상화가들은 그런 게 있어. ‘이건 안돼. 저건 돼.’하는 거. 구별도 안 되는데 말이야. 크크큭.”


관심 없다. 소파에 누워 쿠션을 끌어안은 모습. 아무래도 좋지만, 옷은 입어주면 안 될까.


“너 밤새우는 거 몸에 안 좋다. 키 안 커. 아, 키 몇이지?”

“182요.”

“···그만 커도 되겠다. 어, 뭐야, 벌써 단체전 출품할 작업 시작한 거야?”

“······아뇨.”

“스케치는 있네. 나 좀 봐도 되지?”

“네···. 근데, 형.”

“엉?”

“옷은 입어주시면 안 돼요?”



*



옷을 입은 백현우는 내 고민을 들어주었다. 현역 작가의 조언. 내 눈이 테러당한 것 치곤 괜찮은 거래다.


“시그니쳐라. 확실히 그런 거에 집착하는 애들이 있긴 해.”

“없는데 성공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특별한 사람이 성공해요.”

“음··· 아니야. 세상에 작가가 얼마나 많은데. 화풍이 겹치는 사람도 분명히 많아. 특별해지자는 생각은 잘못됐어. 우리는 미술학도야. 우리가 탐구하고 싶은 주제를 탐구하는 거지. 특별해지려고 하는 게 아니지.”


백현우는 자신의 태블릿을 보여주며 말했다. 전날에 보았던 <인간>을 포함해 다양한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이건 내 작품들이거든. 공통점이 보여?”

“전부 입체 작품이네요.”

“그거 말고는?”

“···흰색이 많아요.”

“또?”

“······털 달린 기계?”

“뭐? 프핳핳핳학-!”


백현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진심으로 이 이상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백현우의 작품은 석고상이나 사람 모양의 물건에 컴퓨터 부품을 끼워 넣은 것이 전부다.


“난 3D 프린터로 작업해. 솔직히 남자라면, 로봇! 기계! 로망이 있잖아.”

“그렇죠···?”

“3D 프린터는 매년 새로운 제품이 나와. 기술도 발달하지. 별의별 게 다 있어. 컴퓨터 부품 보면 매번 RTX다 GTX다 그거 숫자 몇 개 바뀌는 거에 사람들이 열광하잖아?”


학교 녀석들이 뭐라 떠들던 기억이 난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러미 리프킨에게 영향을 받은 건가요?”

“뭐? 그건 또 누구야? 너 내 작품 해석할 때도 좀 범상치 않았는데, 보통 사람들은 그런 거 몰라.”


아닌가 보다.


“아무튼, 나도 다른 사람들이 그런 거처럼 컴퓨터 좋아해. 거기서 시작된 게 지금의 스타일이지. 3D 프린터로 인쇄하고, 조합하고. 끝이야. 끝!”

“그럼 어제 <인간>은···.”

“네 과대망상이 만든 해석이지.”


맙소사. 입을 떡- 벌리자 백현우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현대 예술이 뭐라고 생각해? 존나 뭐 있을 거 같은 데 없고, 없는 거 같은 데 있는 게 그거야. 그게 현대 예술이라고.”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요즘 왜 이렇게 내 생각이 부정당하는 경우가 많은지···.

내 상식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이 사람들이 옷 벗고 돌아다니는 예술가라는 이름의 괴짜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나는 이 기괴한 감각이 좋아. 맨들맨들한 석고에 회로판의 조합. 인간과 기계를 접목한 게 SF스러운 느낌도 나고, B급 공포 영화 느낌도 나잖아.”


태블릿을 몇 번 터치한 그가 한 영상을 틀어줬다.


[기원전에서나 이야기하던 철학적 주제를 21세기의 발달한 과학, 의료적 지식과 결합한······]


내가 그의 작품을 해석하는 모습. 이게 뭐라고 인터넷에 떠돌 줄이야. 그보다 갤러리에서 촬영 금지일 텐데.


“해석은 관람자의 몫이야. 물론, 만들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긴 해. 네가 말했던 원소설이 그렇지. 나도 같은 생각 했어.”


그가 태블릿을 끄며 말했다.


“이게 내 스타일이야. 조금 무책임하게 만드는 거. 하지만 이게 나쁜 걸까?”


고개를 저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 ‘제프 쿤스’의 작품은 아무런 이념도 사상도 없다. 세련된 디자인만 있을 뿐.


“새로워지려 하는 게 네 생각을 옭아매고 있어. 너 그런 말 많이 듣지 않아? 딱딱하다, 고지식하다···. 뭐, 그런 거.”

“그런 건 몰라도 요즘 제 상식이 많이 부정당하긴 해요.”

“그럴 거 같아. 세상의 기준에 널 맞추지 마. 너의 기준에 세상을 맞추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 세상이 네게 맞추는 수밖에.”


제법 멋있게 말했지만···


“무책임하네요.”

“잘 이해했어. 그게 내 스타일이야.”


백현우가 씨익 웃었다.


“내 생각은 참고만 해. 그것도 네 생각을 옭아매는 거니까.”

“더 복잡해졌어요.”

“하하! 뭔가 미안해지네. 이것만 말해줄게.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하고 싶은 거.”


본래는 그림으로 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림이 무언가의 탐구 수단이 되는 것은 생각지 않았다.


끝이 없는 미궁에 빠진 기분이다.


여춘팔 작가는 그림에 뭔가를 담아내는 사람을 예술가로 정의한다고 했다. 반대로 백현우는 예술가로서 뭔가를 담기보다 관람객에게 요구한다.


여춘팔이 더 유명세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백현우가 틀렸다고 하지도 못한다. 비슷한 스타일로 제프 쿤스가 있으니. 당연히 제프 쿤스는 여춘팔보다 유명세가 있는 사람이고······.


“···어려워요.”


머리를 감싸고 쭈그려 앉았다. 답이 없는 문제다.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로 이어지는 회화의 역사는 마네로 시작해 모네, 폴 세잔, 앙리 마티스, 피카소로 이어진다고 이야기된다. 사이사이에 곁가지는 있을지언정 직선적이다.


하지만 잭슨 폴록이 물감을 흩뿌리고 예술이라고 하거나, 뒤샹이 전시회에 변기 갖다 놓은 것, 조셉 코수스가 의자 3개 갖다 놓고 개념 예술을 제창함에 시간 축이 뒤틀리고, 개념이 흔들리며, 온갖 것들이 예술이 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작품은 한때 사장되다가 다시 인정받지 않았던가. 엉망진창, 뒤죽박죽이다.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개념 예술···.


망할. 여전히 예술을 이해할 수 없다.


여춘팔이나 오현월, 박정인은 내 그림에서 대체 뭘 본 것인지 모르겠다.


그들은 내 그림에서 정확한 정의를 내려주지 않았다. 뭔가를 보았고, 기대를 품음은 확실하건만.


학교 시험문제가 아니다. 객관식도 아니고, 주관식이라기엔 오묘하다.

따지자면 ‘잘리지 않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의 형태······.


시야 구석, 태블릿에 비친 7세그먼트 디스플레이에서 3시를 알린다.


피로가 몰려온다. 짜증이 솟구친다.


내게 칼 한 자루 주지도 않고서, 사람들이 외친다.


‘넌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 수 있어!’


“씨발.”


방법이 없다. 방법이 없다고!


그럼 어쩌랴. 내 좆대로 해야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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