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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펭귄의 서재입니다.

천재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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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群青)
작품등록일 :
2020.12.28 17:09
최근연재일 :
2021.01.2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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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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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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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4 - 존재 증명

DUMMY

추상화를 완성하며 경험한 감각은 별개로 알게 된 것이 있다.


인생은 내 멋대로 조종할 수가 없다는 것.


<낭만>의 경우, 공모전에서 입선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심심한 작품이었다.

심사위원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 인터넷 찌라시로 돌아다니는 정치인 자녀 수상 의혹이 사실이든 아니든, 공모전 입상이라는 본래의 목적에 도달하기엔 실패한 작품이라는 거다.

하지만 그 작품 하나로 인생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누가 이런 현상을 예측하겠는가.


<디오게네스>의 경우도 그렇다. 내 이름만 검색하면 나오는 온갖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목적으로도 어느정도 성공했지만, 그 뒤에 따르는 영향들은 예측할 수 없었다.

광고 촬영이나 디자인 콜라보레이션, 예능 섭외, 심지어 저 멀리 러시아에서 날아온 슬라브계 추상화가까지.


아나스타샤의 말이 맞다. 작업 도중에 떠오르는 것도 있다. 그리고 작업 후에 떠오르는 것도 있다.


인생이라는 작품을 작업 중인데 다음 붓칠이 두려워 손을 움직이지 않는 것도 세상 멍청한 일이다.


그냥 저질러버리자.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채 활동하는 건 아직 무리지만, 벌벌 떨더라도 작품을 내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실패하면 그 뒤의 내가 잉잉- 울면 되는 거지.


“작품 낼게요.”


뜬금없지만, 결연한 말에 박정인이 익살맞게 대답했다.


“오, 좋아.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네. 나 팀장님한테 하루에 수십 번씩 욕먹은 거 알아?”

“그랬어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아주 닦달을 하더라. 근데 그러면 그럴수록 작업 안 되는 거 우린 다 알거든.”

“······고마워요. 이제 꾸준히 활동할게요.”

“좋아. 근데 너 좀 있으면 개학인데 그전까지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요. 그림 빠르게 그리는 거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야, 좀 답지 않게 과감하다. 조금 있으면 기획전 하는 곳이 있으니까. 거기 꼽사리 껴달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또 꼽사리 끼는 건 죄책감이 들지만, 언제까지고 미룰 수는 없다. 그의 말마따나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지. 사실 지금도 조금 늦었는걸.


박정인이 어깨를 뻐근하게 돌렸다. 그가 손에 쥔 걸레는 온갖 물감을 빨아들여 까맣게 변했다.


그가 바닥과 벽에 아직 처리하지 못한 물감 흔적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이거 치우기 귀찮아져서 그러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영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긍정하면 폼이 안 난다.


“너 그래도 작업 다 하고서 도망가는 거 아니다. 아무리 좀 있으면 개학이라 해도 저질러 놓고 도망가지 마.”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참혹한 심정에 목소리도 떨렸다.


“······청소 업체 부르면 안 될까요?”

“그것도 다 돈이야. 이 정도에 지원 요청하면 욕먹어.”


작업실 대여랑 물감과 붓을 포함한 화구에 숙소는 제공해주면서 이런 건 왜 안 해주는 걸까. 이상한 데서 쪼잔하다.


“그럼 다음부터는 비닐이라도 깔고 작업하죠.”

“그래야겠네. 작업할 때마다 치울 수는 없으니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박정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박정인이 까맣게 변한 걸레를 내팽개쳤다. 허리를 펴면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나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육아 비슷한 것도 하는데 좀 잘 챙겨줘야겠다.


박정인이 스마트폰을 두들기며 말했다.


“이번 거는 어떻게 할래? 미리미리 설명할 거리를 만들어 둬야 큐레이터한테 욕 안 먹어. 주제는 정해두고 하는 거지?”

“네.”


여춘팔과의 대화 이후로 줄곧 생각했다. 인정받고 싶으면 해야 할 일. 당연히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그래도 좀 더 나아가보자. 인정받는다는 건 이전의 멍청하고 비루한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과 같다.


뱀이 허물을 벗듯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고아인 고등학교 2학년과 화가인 김도진은 같지만, 다른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주제 정했어요.”



*



화가들이 주제를 선택하는 조건이 뭐냐고 한다면 단순히 ‘흥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화가를 축복받은 족속들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다.


학교에서 나눠주는 설문지에 아이들이 적은 취미/특기 항목을 보면 대다수가 무엇인지 아는가? ‘독서’, ‘게임’, ‘영화 감상’이다.


꿈도 낭만도 없는 참으로 엑스트라스러운 답변이다.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그 사람의 머리 뚜껑을 열어봐야만 알 수 있겠지.


현실은 가혹하다. 좋아하는 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힘들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의 설문조사에 ‘화가’를 적어 넣자 담임 선생은 거기에 빗금을 치고는 할 수 있는 것을 적으라 했다.


중‧고등학생 때도 담임들이 학생들을 불러다 설렁설렁하는 진로상담에서도 나는 화가의 ‘화’자도 못 꺼냈다.

그 ‘화’자를 꺼내더라도 대부분의 선생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현실’이란 것을 들먹이며 다른 것으로 바꿔 적었다.


이를테면 공무원이라던가.


그래서 화가가 축복받은 족속들이라 생각하는 거다.

화가 중에는 그림을 그리는 게 좋아서 화가가 된 작자들이 대부분이겠지.

그리고 탐구 주제도 제멋대로 정해서 사람들 앞에 내놓으면 ‘오-. 예술적이네요.’ 소리를 듣는다. 예술이 대체 뭐길래.


“뭐 하는 거야?”


쓸데없는 사색을 유창한 ABCD가 가로질렀다.


고개를 돌렸다. 슬라브계 소녀가 소파에 앉아 그 짧은 다리 몽댕이를 물장구치듯 퍼덕거렸다.


저 다리는 젓가락처럼 얇아서 가끔 ‘차면 부러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찰 일은 없겠지만.


상념을 떨쳐내며 말했다.


“캔버스 고르고 있어.”

“큰 거 해. 큰 거.”


북쪽에 사는 사람치고는 저주받은 신장이라서 그런 걸까.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큰 캔버스를 고집한다.

그녀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저번 100호보다 더 큰 160호 캔버스가 있었다.


“난 지금까지 큰 거로 작업한 적이 없어. 저번 100호도 반만 썼지만, 솔직히 너무 컸어. 안 익숙해.”

“<디오게네스>도 60호였잖아. 하다 보면 익숙해져.”

“이번엔 사양할게. 항상 크다고 좋은 건 아니니까. 이번엔 주제에 맞게 하고 싶어.”

“주제가 뭔데?”

“나.”

“너?”


갸웃거리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철학적인 의문과 생물학적인 정의를 통합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람에 대한 탐구는 계속해서 이루어진다.


“정확히는 ‘존재 증명’이야. 나라는 인간을 증명하고 싶어. 나라는 인간에게 충분한 가치가 있고, 충분한 자격을 지녔음을 표현하는 거지.”

“그거 <디오게네스> 아냐?”

“결은 비슷해. 하지만 <디오게네스>는 당시의 사회에 대한 일종의 비난이고, 지금 거는 예술가로서의 의지 표명에 가깝지.”

“······모르겠어.”

“외부적 자극에 의해 만든 게 <디오게네스>고, ‘존재 증명’은 반대로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에 만드는 작품인 거지.”

“······아?”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긴 한국어에서 영어로 그리고 러시아어로 번역할 텐데. 이 귀찮은 과정을 거치면 의미는 전달되기 어렵다. 지금껏 대화가 통한 것도 신기할 지경인데.


하는 수 없이 짧으면서 경박하게 표현했다.


“<디오게네스>는 맞고 때리는 거. ‘존재 증명’은 선빵치는 거.”

“아하. 진작에 쉽게 말하지 그랬어.”


그녀는 손쉽게 긍정했다. 왠지 가슴팍이 허한 느낌이다.


일단은 눈앞의 캔버스에 집중하자.


일단은 가장 나 다운 크기를 고르고 싶다. 가장 많이 사용한 캔버스라고 하면 손바닥만 한 미니캔버스다. 인터넷에서 묶음으로 싸게 파는 것. 10×10cm가 4개 묶음에 4,000원이다. 더 작게 하면 더 싸지고.


미니캔버스를 손에 들었다.


“음······.”


너무 작다. 가장 나 다운 캔버스라 생각했는데. 너무 제한을 두는 느낌이다. 팔아도 비싸게 안 팔릴 것 같고.


그러고 보면 큰 캔버스를 사용하는 건 내게 일종의 로망이었다. 100호나 200호에 달하는 크기는 아니어도 20호, 30호만 되어도 제법 가오가 살지 않는가.


좋은 생각이 났다.


미니캔버스를 모아 큰 캔버스를 만들자. 실제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고, 캔버스 하나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를 사용하는 것과 작은 캔버스 여러 개를 엮는 것. 이것들은 통나무 하나를 통째로 조각하는 것과 작은 나뭇가지를 엮어 조각하는 것만큼 차이가 크다.

심지어 미술에서는 조각만의 형태적 차별성뿐만이 아니라, 시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기에 더욱 많은 다양성을 내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했다. 사람 간의 관계성에 따라 우리는 자식이 되고, 제자가 되고, 부모가 된다. 인간을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점에 주목하자.


나는 하나이지만, 동시에 나는 다양하다. 라는 모순적인 정의가 성립된다.


미니캔버스를 얼기설기 엮었다. 이것은 하나의 캔버스이지만 동시에 여러 개의 캔버스이기도 하다.


미니캔버스들의 크기가 제각각이라 테두리가 울퉁불퉁하지만, 그게 더 감각적이다. 예술은 딱히 효율을 따지는 문화가 아니니까.


“어떡하게?”


어느샌가 곁에 쭈그려 앉은 아나스타샤의 말에 답했다.


“이 캔버스마다 다양하게 그릴 거야. 입체주의적 관점에서 하는 게 좋겠지.”

“콜라주?”

“그것도 좋겠네.”

“뭘 콜라주 할 건데?”

“자화상이지.”


작가 본인을 가장 잘 나타내는 종류의 회화는 자화상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본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기록하는 것.


“어우-.”


아나스타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너 이게 몇 개야. Один, Два, Три, Четыре······. 이걸 다 따로 그린다고?”

“그래야 다양성이 크겠지. 물감도 다르게, 재료도 다르게. 사진을 붙이는 것도 좋고, 내 기사가 실린 신문을 오려 붙이는 것도 방법이지. 그것 또한 나를 정의하는 수단이니까.”


아나스타샤가 턱을 괴었다, 얼굴 가죽이 밀려 올라갔다.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해? <디오게네스>도 그렇고, 이번 것도 그렇고. 정보가 너무 많고, 규칙성이 심해. 난 추상화, <무제> 쪽이 좋아. 혹시 평론가들 눈치 보는 거야?”


그리고리인지 그레고리인지 하는 평론가 때문일까? 그녀는 은근하게 평론가나 대중의 의향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무제>도 이번 전시에 같이 내보일 거야. 그리고, 사람들의 니즈에 맞추는 게 화가 같은 걸까?”

“아니.”

“맞아. 내가 너를 위한 작품을 만든다면 모를까 지금은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하는 거잖아. 이건 내가 그림을 그리며 도달한 답변이야. 이해할 수 있는 작품. 억지로 대중성 같은 걸 노리는 게 아니야.”

“알았어.”

“생각보다 순순히 납득하네?”


순순한 긍정에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공동작업을 하며 고집을 부리던 때와는 조금 달랐다.


아나스타샤는 금색 머리칼을 배배 꼬며 새침하게 말했다.


“사람은 제각각이니까. 남을 억지로 조종하려 하는 건 폭력이야.”

“저번에는?”

“의견의 대립과 융화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 아닐까? 나도 이제 그렇게 고집부리는 건 안 할 거야. 저번 공동작업의 결과물처럼 더 좋은 방법이 있기도 하니까.”


맞다. 우리는 살아가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시궁창에 처박힌 지난 17년과는 달랐다. 지금 내 주위에는 훌륭한 사람이 많고, 그들이 날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이제 작업해야겠어. 전시까지 시간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채 묻지 못한 것이 있다. 이 인간은 왜 여기 있는 걸까. 물감 냄새만 나는 곳인데.


“근데 내 작업실엔 왜 온 거야?”

“오면 안 돼?”

“여기서 할 것도 없잖아.”

“호텔에도 할 거 없어. TV 틀면 다 한국어야.”

“밖에 관광 다녀.”

“밖은 너무 더워. 이제 말할 것도 없으니까 다물어 #$#@아.”

“······.”


그냥 작업이나 하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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