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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펭귄의 서재입니다.

천재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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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群青)
작품등록일 :
2020.12.28 17:09
최근연재일 :
2021.01.2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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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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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 - 디오게네스 (3)

DUMMY

방학을 맞이하여 서울에 올라왔다.


지방 소도시에선 그림을 관람하고 싶어도 관람할 곳이 없다. 갤러리 원장들이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니니. 갤러리 대부분은 당연히 유동 인구가 많은 서울에 자리 잡고 있다.


국립 RM 미술관 근처의 AM 갤러리. 모르고 있던 사실이지만 RM 미술관을 비롯해 많은 갤러리가 경복궁을 둘러싸고 있단다. 따로 갤러리 거리라는 것도 있을 지경이니까.


오늘 단체전이 오픈하는 AM 갤러리 앞에서 사진 몇 방 찍고, 안에서도 전시 중인 젊은 작가들과도 사진을 몇 방 찍는다. 이것도 홍보란다.


······웃는 표정 못 짓는다고 수차례 핀잔받은 건 웃지 못할 사실이다.

연기 교실이라도 다녀야 하나.


사실 지금까지 예술가라 하면 꼬장꼬장하고,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인상이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편견이더라.


최소한 오늘 만난 작가들은 차림새도 세련되고, 나이도 젊다.


“도진아, 이거 어때.”

“좋아요.”

“이쪽은, 이쪽은?”

“···좋아요.”


객관식 심리 테스트만큼 쓸모없는 평가가 무에 좋다고 꺄르륵 웃는 모습이 당혹스럽다.


내게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제법 있지만, 이 두 사람은 돌아올 것 없는 무한한 호의를 보이는 모습이 꼭 애완동물을 대하는 감각이라 기분이 묘하다.


문제는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에 제대로 작품 감상을 할 수 없다.


주위엔 날 도울 사람은커녕 아는 사람도 없기에, 그저 목줄 묶인 애완 개가 되어 그녀들의 손길에 갤러리 이곳저곳을 뽈뽈뽈- 싸돌아다닌다.


[인간:표면, 그 너머]라는 주제를 내건 단체전에 분명 흥미로운 작품은 많았다.


보육원 동생들이 보는 만화에나 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그림체지만, 사람의 머리 뚜껑을 열어 뇌수를 뽑아내는 그림이나, 바트 심슨 같은 만화 캐릭터를 그려 넣은 그림도 있다.


분명 흥미로운 점은 많지만······.


“이건 내가 그린 건데. 어때?”

“···좋아요.”


아무리 호의라도 계속되면 없던 반발심도 생긴다. 다만, 나는 나이도 어리고, 직업적 후배에 해당하는 데다, 호의를 주는 사람에게 핀잔을 줄 정도로 겁 없지 않다.


“야, 야. 애 좀 냅둬.”


드디어 구원자가 등장한 것인지 한 뽀글머리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이때다 싶어 얼굴 근육을 최대한 사용하여, 시골 개 특유의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얘가 뭘 안다고. 물어보긴 뭘 물어봐. 봐도 알지도 못할 텐데. 죄다 ‘좋다.’ ‘좋다.’ 이러잖아. 하여간-”


남자는 혀를 차며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구원자라기보단, 그가 날 싫어하는 사람의 한 부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딱히 상처받을 이유는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나는 그림 한 점으로 예술가 타이틀을 얻은 머저리다. 작품으로 증명하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머저리일 것이다.


“말을 왜 그렇게 해. 애 듣잖아.”


한 여성이 그를 말렸다. 문제는 그녀가 뽀글머리의 말을 부정한 것도 아니고, 단지 핀잔을 주었을 뿐.

그녀의 잠재의식 혹은 표면적인 생각에서도 나는 여춘팔 작가에 의해 떠오른 꼬맹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망할. 분명 자각하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미뤄놨던 방학 숙제처럼 코앞에 닥친 현실이 못내 불편하다.


내 어깨를 붙잡은 사람의 손길을 밀어낸다. 슬쩍 스치는 손가락에서 당황한 감각이 느껴지지만 날 변호할 사람은 나뿐이다.


아까 봐두었던 작품 한 점 앞으로 다가간다. 미술실에서 많이 봐 온 석고상이다. 얼굴을 뜯어냈지만, 뒤통수와 목선으로 보아 종류는 아그리파.


칼을 사용한 건지 거칠게 뜯어낸 흔적이 남아있고, 석고상 안의 텅 빈 공간에는 색색의 전선들을 꼬아서 채워 넣었다.


작품명 <인간>, 제작자는 백현우.


“후-.”


다시 말하지만, 날 변호할 사람은 나뿐이다.

내 해석이 창작자의 의도와 거리가 멀거나, 아예 틀린 해석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행동하지 않으면 난 어디까지나 특혜 의혹이 붙은 애새끼에, 예술도 모르는 원숭이, 바보, 천치, 머저리일 것이다.


호흡이 정돈되었다. 입을 연다.


“저는 이 작품이 좋아요. [인간 : 표면, 그 너머]라는 주제에 가장 걸맞다고 생각해요. 성경에선 사람의 몸이 진흙으로 빚어졌다고 되어 있고, 고대 철학자들은 물질의 구성 성분을 사상의 중심으로 삼기도 했어요. 탈레스는 만물이 물로 이루어졌다고 믿었고, 반대로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이 불을 근본으로 한다고 했죠, 파르메니데스는 만물이 환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석고상을 재료로 쓴 것도 좋아요. 이게 ‘아그리파’인 것도요. 저는 미술 학원에 가본 적이 없지만, 아그리파가 가장 기본적인 데생 대상인 건 알아요. 여기서 평균적인 인간을 표현하려 했음이 느껴지고, 얼굴을 거칠게 뜯어낸 모양새에서 고통이 느껴지기도 해요. 작가님의 냉소적인 태도도 엿보이고요.”


“안의 전선이 좋아요. 공부는 못 하지만, 생명 과학 시간에 선생님이 말씀하신 뉴런이 생각나서···. 인간의 뇌가 전기 신호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떠올라요.”


“석고상이라는 정적인 물체에 이리저리 꼬인 전선이 생동감을 줘요, 특히 전선의 색깔을 여러 가지로 한 것이 그래요. 석고상의 하얀 피부와 대비돼서 이게 석고상이 아닌, 인간을 표현함을··· 진정성을 알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기원전에서나 이야기하던 철학적 주제를 21세기의 발달한 과학, 의료적 지식과 결합한 느낌이 좋아요오···.”


후달리는 호흡에 숨을 고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갤러리 내의 작가들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관람객도 모여서 쳐다본다. 망할 카메라 렌즈는 왜 내 쪽으로 향하는지.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에 입술을 앙 물었다.


너무 나댔다. 적당히 할 것이지 주둥이로 나불대다 못해 탭댄스를 춰버렸다.


머릿속으로 과거의 나를 두들겨 패는 동안, 날 질책했던 뽀글머리 남자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가 움찔움찔 광대를 씰룩이며 말했다.


“···이건 어때?”



*



“아, 그러니까 비평가 새끼들은 아는 것도 없으면서 자꾸 이거 싫어, 저거 싫어, 뭐 따라 했어, 창의성이 없어. 이 씨발놈들 고등학생만도 못해. 아, 도진이 너 까는 거 아냐.”


백현우가 콜라캔을 휘두르며 푸념했다. 콜라에 알코올이 들어간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으며, 눈앞의 케밥에 집중한다. 두툼한 것이 입가에 소스가 왕창 묻을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먹는 거지.


“헤라클레이토스는 불! 탈레스는 물! 나는 뭐, 전선 비슷한 거! 오키? 오케이!”


아무 대답도 안 했건만 자기 혼자 납득한다. 옆 테이블의 사람들이 실실대며 웃는 것이 강 건너 불구경하는 태도다. 망할.


“그래, 석고상! 석고상도 재료 선정과 색깔 대비를 통한 그··· 뭐냐?”

“냉소적인 태도.”

“그래! 냉소적인 태도가 드러나지!”

“야, 너 그거 생각도 안 해봤던 거잖아.”

“아이지~ 아니야. 이것도 그, 뭐시냐. 잠재의식! 그래, 잠재의식에서 나온 거지. 안 그러냐 도진아?”

“······네.”

“것 봐! 맞다잖아! 도진아, 뭐 더 먹을래? 여기 불고기 들어간 게 맛있어. 이모!”


알바생을 부르는 것을 말린다. 아직 케밥도 한입밖에 못 먹었을뿐더러, 지금 먹고 있는 것도 불고기 케밥이다.


겨우 자기들 작품 칭찬 좀 했다고, 이렇게 극적인 태도 변화를 보일까.


대충 이유를 짐작해보자면 이 자리의 작가들은 대부분 대학 석사나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다. 그럼 대학원생인가?


그들의 입에서 음식 대신 와작와작 씹히는 사람 중에 비평가는 물론 교수의 이름도 언급되는데, 대학이란 곳이 그렇게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걸까?


내가 대학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동안 술 취한 아저씨들처럼 떠들던 작가 중 한 명이 말했다.


“도진이는 다음 작품 언제 낼 거야? 작업 중인 거 있어?”

“···예정엔 없어요.”


그리 쉬운 선택이 아니다.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시기적으로 내 예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이 될 수 있다.


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누군가 툭 내뱉었다.


“그럼, 이번 단체전에 하면 되겠네.”

“그거 좋네! 어차피 오늘 시작했고.”


백현우의 긍정. 곧 다른 작가들 또한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들떠서 뭐라 떠들든 케밥에 집중했다. 고작 작가 몇 명이 추천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



박정인이 자동차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다소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아, 너 그거 허가 났어.”

“뭘요?”

“전시 말이야. 단체전에 끼워 넣는 거.”

“···그게 말이 돼요?”


미심쩍음이 잔뜩 묻은 말투에 박정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안 될 이유도 없지.”

“많아요. 이미 시작한 전시회에 끼어드는 건 예의부터 어긋났어요. 전시 작가들이 뭐라 하겠어요.”

“그 작가들이 요청한 거잖아?”

“······이미 작품 배치도 끝났어요. 그사이에 끼어드는 건 전체적인 심미성을 어그러트려요.”

“큐레이터님이 괜찮대. 오히려 환영하지.”

“작품도 없는데요?”

“응.”

“······아직 논란이 많아요. 중간에 끼어드는 건 논란을 가중할 뿐이에요.”

“실력으로 증명해.”

“······말이 쉽지.”


내가 꿍얼꿍얼 욕하든 말든, 박정인은 웃음을 유지한 채 말했다.


“사실 네 작품이 들어가면 좋은 점이 많아. 모든 작가는 관심에 궁하거든. 한국 국민 중 미술 관람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한 5%?”

“오우- 너무 짜게 줬다. 10%야.”


문화생활을 즐기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주변만 둘러봐도 미술관에 갔다는 사람이 없는데.


“이 10%도 대부분 해외 유명 전시지. ‘피카소’나 ‘반 고흐’ 전시. 아니면 현대 작가 중 팔리는 사람들 그것도 외국인. 양극화가 극심해. 그래서 너지. 좋든 싫든 사람들의 주목이 있는 작가.”

“노이즈 마케팅이네요.”

“딱히 노이즈 마케팅은 아니고, 음··· 인터넷 봤어? 요즘 네 평가 좋아. 시간이 지나면 악플러는 사라지거든.”

“오늘 아침만 해도 쌍욕을 처먹었는데요.”

“······그냥 검색하지 마.”


평생 날 낳은 부모를 본 적도 없는데 패드립을 먹는 기분을 아는가. 학교 녀석들은 장난으로 말했다가도 금세 숙연해지는 분위긴데, 인터넷은 그런 것도 없더라.


헤드라인이 클릭 수를 유발한다지만, ‘영재’나 ‘천재’, ‘한국의 피카소’같은 쓸데없는 단어를 붙여넣은 기사들 때문에 내 이름을 검색하면 깜짝깜짝 놀란다.

박정인의 말대로 그냥 신경을 끄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아무튼, 네가 전시회에 참가하는 거로, 다른 작가들도 이득을 본다 이거지.”


······그 작가들. 그냥 순둥순둥한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 치밀할 줄이야.


“근데 그렇게 대충 가결해도 되는 거예요? 그거 작가들이 건의한 지 몇 시간 안 됐는데.”

“원래 사회생활이 다 그래.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 음- 군대 가면 알게 돼. 내가 말 했던가? 나 군대에서 산 하나를 삽질로······”


귀를 닫았다. 이유는 묻지 마라.


그의 군대라는 이름의 이세계 이야기가 워억워억- 우는 고라니 이야기로 넘어갈 즈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 왔다.”


자동차가 부드럽게 주차되었다.


제법 고풍스러운 건물 앞. 혹시 차에 무리가 갈까 살살 문을 닫았다. 박정인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캬! 서울에 작업실이라니. 너도 참 출세했다.”

“방학 동안만 대여한 거잖아요. 그리고, 예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말하네요.”

“나 정도면 오래 봤지.”

“한 달도 안 됐어요.”

“너 친구도 없잖아.”

“······.”

“······진짜 없어?”


입을 열면 지는 거다. 이건 그런 대화다.


"···들어가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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