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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펭귄의 서재입니다.

천재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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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群青)
작품등록일 :
2020.12.28 17:09
최근연재일 :
2021.01.28 07: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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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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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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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2 - 디오게네스

DUMMY

고등학교 미술실.


본래 있던 책상들이 밀어내지고, 온갖 기재들이 들어섰다. 기자와 카메라로 와글거리는 시장통. 일단, 이 공간을 만들어낸 학생들에게 경의를 표하자.


교장의 따분하고 지루하며 영양가없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던 기자가 내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C-옥션에서 작품 <낭만>이 판매되었습니다. 신진작가 치고는 굉장히 높은 가격에 판매되었다는데. 감상이 어떠신가요.”

“좋아요.”

“······.”


마이크를 들이민 기자가 인상을 찡그리지만 뭘 어쩌랴. 난 내 그림이 팔린 걸 겨우 몇 시간 전에 알았는걸.


“구체적으로 어떠신가요?”


말할 것도 없는데 자꾸 물어본다. 대체 무슨 답을 해야 할까.

인상이 점점 찡그려지자 카메라 너머, 미술선생이 본인의 입 끝자락을 손가락으로 당겨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인상 피라는 거겠지.


“솔직히 속은 기분이네요. 여춘팔 작가님이 그림을 팔라고 하셨지만, 경매장에 팔 줄은 몰랐어요.”

“여춘팔 작가가 경매장에 올릴 것을 말하지 않았나요?”

“네.”


단답이 마음에 안 드는지 기자들이 인상을 찌푸린다.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세상은 불공평하다. 나는 인상 한번 못 찌푸리는데, 저 망할 기자들은 내게 인상 팍팍 쓴다.


“작품이 오백만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받은 돈은 어떻게 사용하실 예정인가요.”

“저금해야죠.”

“······.”


또, 또, 또. 인상 찌푸리는 거 봐라. 정석적인 대답 아닌가.

오백만 원을 누구 코에 붙이라고. 심지어 이 오백만 원도 온전한 오백만 원이 아니고 온갖 수수료랑 세금을 떼어낸다. 게다가 아직 내 손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니 방송에 출연하면 출연료 주는 거 아닌가. 나한테 돈도 안 주면서 자꾸 대답을 강요하는 저들이야말로 도둑놈 심보다.


한 남성이 손을 들고 말했다.


“고아원에서 생활하시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보육원이요.”

“아, 네. 부모가 없는 것이 작품 활동에 영향을 끼쳤나요?”


몇몇 기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이 보기에도 이건 인신공격성 발언이 아닌가. 하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고, 내 못난 주둥이만 쳐다본다. 그럼 어쩌랴 대답하는 수밖에.


“부모가 없는 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 저는 작품 활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정확히는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저는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 그렸고.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낭만>이 작품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여러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작품이 아니라는 뜻이네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요.”


말을 왜 이렇게 꼬는 것인지 모르겠다. 알아들은 기색인데. 말실수를 노리는 걸까.


영양가 없는 질문과 영양가 없는 대답이 체육시간의 배드민턴 콕처럼 느릿하게 오가길 끝나고, 기자들은 다른 먹잇감을 찾아 흩어졌다.

평소엔 내 이름도 기억 못 하던 교사들 말이다.


그중 그나마 영양가 있는 대답을 할 미술선생의 인터뷰 장면을 따라가 지켜보았다. 그녀는 평소에 날 놀려먹던 기술을 한껏 발휘해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냈다.


“도진이는 대단하죠. 미술실에 걸린 그림들이 전부 도진이 그림이에요.”


그러며 그녀는 주위에 걸린 미니 캔버스들을 가리켰다. 손짓을 따라 카메라가 빙- 돌았다.


“학교에 부임하고 처음엔 많이 실망했어요. 학교에 그림에 관심 있는 학생이 도진이뿐이었거든요. 미술선생으로서 보람감을 느끼기 힘들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도진이가 회화에 가지는 열정이 엄청났어요.”

“어떤 종류의 열정인가요?”

“그림과 관련되면 사실상 모든 종류죠. 처음엔 연필을 쥐는 방법을 물었어요. 며칠 뒤에는 붓을 구분하는 방법을 묻더라구요. 그렇게 몇 주 지나니까 바로크 시대 작품의 특징에 대해 저랑 토론을 하려고 해요.”


미술선생은 해맑게 웃었다. 내 속이 타는 것도 모르고!


내 멍청함이 온 세계에 알려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기사의 헤드라인이 상상된다.

{<낭만>의 작가는 연필 잡는 방법도 모르는 바보 멍청이!}


미술선생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내 얼굴이 붉어졌지만, 기자들은 달콤한 꿀을 찾은 벌처럼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김도진 작가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많이 뛰어나네요.”

“네! 그럼요. 어느 날은 손에 셀로판 테이프를 감고 있더라구요. 왜 그런지 물어보니까 쭈뼛거리다가 대답하는 게 손이 아파서래요.”

“테이프를 감은 상태로 그림을 그린 건가요?”

“네! 엄청 놀랐죠. 그림이 뭐라고, 아픈 것도 참으면서 그리는 거예요. 바로 병원으로 데려가서 진단받으니까 왜 이제 왔냐 더라고요. 테이프를 감고 그림을 그린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거죠.”


이젠 안 하는 짓거리까지 밝힌다. 당장 저 입을 막고 싶었지만 내겐 그럴 힘이 없었다.


몇몇 기자가 유턴해서 내게 왔다. 카메라를 들이밀며 손을 내놓으란다. 내겐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거무튀튀한 카메라가 돋보기로 개미를 쬐듯 내 손을 쬐었다.


이제 내 못난 손이 전 국민의 눈에 새겨질 것이다. 망할!



*



가끔 메시지나 통화를 씹어버리는 고철덩이의 액정을 두들긴다. 내 이름 석 자를 검색해서 나온 기사들은 호의적인 것과 쌍욕을 퍼붓는 것까지 다채로웠다.


{18살 미술학도, 작가가 되다}

{미술평론가 문태범, 김도진 사태 경각심을 가져야}

{한국의 미술천재? 아니, 노력이 낳은 천재}

{예술계의 비리, 김도진 특혜 의혹}


내게 호의적인 기사들은 대부분 미술선생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발휘되었다.


{어린 예술가 김도진. 열정이 낳은 손}


클릭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안에는 낯부끄러운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적혀있을 것이다.

이에 한탄하고 있자, 미술실의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며 한 남성이 들어왔다. 미리 연락해온 갤러리 관계자.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도진아. 내가 AM 갤러리에서 온 박정인이야.”

“안녕하세요.”


박정인은 웃으며 내 앞에 앉았다. 이번이 7번째던가 전속 작가로 계약하자며 찾아온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정장을 입은 사람이 조그마한 학교 책상에 앉는 모습도 처음에나 웃겼지 이젠 입꼬리도 안 올라간다.


“일단, 우리 AM 갤러리가 네게 제안하고 싶은 건 갤러리 전속 계약이야.”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전광석화로 말했다.


“안 해요.”

“···어우- 대답이 많이 빠르네.”


박정인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가능한 한 많이 싸가지없게 대답했는데도.

이게 프로인가.


“뭐, 좋아. 솔직히 반쯤 예상했어. 그래도 이유 좀 알려줄래?”

“오현월 아저씨가 말하길, 갤러리랑 전속 계약하면 거기서만 전시할 수 있대요.”

“오현월 아저씨? 아-, 아. C-옥션의 오현월?”

“네, 가끔 통화해요.”

“···음. 옥션과 친하게 지내는 건 좋지.”


그의 기세가 줄어들었다. 오현월이 이 바닥에선 입김이 강한가 보다. 선생들 앞에서 교장 이야기를 꺼낼 때만큼 효과적이다.


박정인은 나의 밀어내기에도 굴하지 않고 한 서류를 가방에서 꺼냈다.


“그럼 이건 어때.”


그가 꺼낸 건 내가 지금껏 본 다른 계약서와 비슷했다.

비참하게도 나는 이런 계약서를 구분하는 방법을 몰랐다. (갑), (을)로 어지러이 적힌 문장이 수십 개인데 이걸 어찌 알아보나.


“설명해주세요.”

“물론이지. 설명하자면 이것도 작가 계약서야. 근데 갤러리 전속 계약은 아니지.”

“······계속해주세요.”

“예술가가 갤러리나 미술관과 계약하는 건 거기에 많은 이득이 있기 때문이야. 먼저 갤러리에 작품을 맡길 때 우리가 전문적인 인력을 써서 보관하고, 전시하고, 판매해주지. 대리인의 개념이야.”

“대신 판매 수수료도 있다고 했어요.”

“판매 수수료는 어느 갤러리에 맡기든 있어. 대신, 전속 계약을 하면 수수료를 많이 깎아줘, 세금 관련한 것도 해결해주고.”


박정인은 서류를 촤르륵 넘기곤 정갈한 텍스트에 손을 짚었다.


“경매 수수료도 어느 정도 부담해주고, 작품 소유권 분쟁에 대해서도 우리가 도움을 주지. 저작권에 대해서도, 모델을 섭외하는 것도 도와줘.”

“모델이요?”

“응. 정물화를 그리는 것도 인물화를 그리는 것도 보고 그릴 것이 필요하잖아. 그려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누드화를 위한 모델도 우리가 고용해줘.”


예술에서 누드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지만 18세 고등학생의 영혼은 얼굴을 붉혔다.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리고 건축물 제작에 관한 것도 있어.”

“전 그림만 그리는데요.”

“벽화에는 관심 없어? 이런 것도 관련 사항이 있어.”

“······조금 관심이 생겼어요.”


순순히 긍정하자 박정인이 웃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아, 나란 인간은 왜 이리 나약한 것인가. 벽화의 유혹에 순식간에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미지로의 도전은 언제나 흥미로운 것이다.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선 말했다.


“하지만 다른 갤러리에 전시를 못하잖아요.”

“다른 갤러리에 못 올리지만, 훌륭한 작품을 많이, 빠르게 만들어내는 작가가 아닌 이상, 한 곳과 계약해서 안정적으로 개인전을 치르는 게 좋아.”


한 갤러리랑만 작업하면 손해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일리가 있었다.

유명세가 있는 작가의 작품은 직접 발품을 팔아서 모셔오겠지.

그리고 난 그런 대단한 작가가 아니다.


박정인은 이번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말했다.


“근데 이 계약서는 좀 달라. AM 갤러리뿐만 아니라 다른 갤러리와도 협업할 수 있게 해놨어.”

“예?”

“말 그대로야. 우린 일종의 매니지먼트 사업을 제안하는 거야.”

“그럼 많이 손해 보지 않아요?”


그가 지금껏 읊은 것만 해도 판매 수수료, 경매 수수료, 세금, 모델, 소유권‧저작권 분쟁, 건축물···. 과연 저들이 계약해서 이득을 보긴 하는 걸까.


“그렇게 손해를 보지 않아. 그냥 평균적인 전속 계약서를 비튼 거지. 우리가 계약하는 작가가 너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너와 계약함으로써 네 이름을 우리가 사용할 수도 있지. 아! 물론, 네게 손해가 되는 활동은 하지 않아.”


박정인은 계약서를 덮으며 앞면에 박힌 마크를 가리켰다. AM.


“이미 알겠지만, 우리는 AM 그룹에서 운영하는 화랑이야. 너랑 계약해서 자회사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쳐. 특히 AM의 핵심가치 중에는 ‘인재등용’과 ‘최고지향’이 있지.”

“브랜드 이미지 개선···.”

“맞아. 세간의 너에 대한 인식은 노력가라는 거야. 그 손 이야기만 봐도 그렇지. 우리 브랜드가 추구하는 이미지랑 같아.”

“너무 낙관적이에요. 저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사람들 인식도 무조건 좋지만은 않아요.”


내 이름을 검색하면 호평만 나오는 것도 아니다. 논란에 관해서 온갖 쌍욕을 먹는데.


하지만 AM 갤러리의 대리인은 개의치 않았다.


“음, 글쎄. 리스크 없는 투자는 없어. 네가 짊어진 그 인식은 우리 갤러리에서 보기엔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너와 계약하려는 건 네 그림 실력 때문이지. 지금껏 이야기 한 건 모두 부가적인 거야. 우린 화가인 너에게 기대하고 있어.”

“······.”

“어때?”


다른 건 몰라도. 화가인 나에게 기대한다는 건 제법 마음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좋아요.”

“잘 부탁-.”

“아, 잠시만요.”


악수를 청하는 박정인을 잠시 내비두고, 깡통을 두들겨 오현월에게 전화를 걸었다.


- 뭐야? 나 바빠.

“저 계약하려는데 좀 봐주세요.

- 엉?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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