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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펭귄의 서재입니다.

천재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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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群青)
작품등록일 :
2020.12.28 17:09
최근연재일 :
2021.01.2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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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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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 - 디오게네스 (2)

DUMMY

갤러리와 계약했으니 정식 화가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작업실은 없었다.


여전히 내 아지트 역할을 하는 미술실에서 붓을 놀린다. 학교 서열 최상위에 위치한 교장의 허가하에 대부분의 수업을 째고 그림만 그린다.


방학까지 얼마 안 남았다지만 학생이 수업을 안 들어도 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 아닌가. 이러고도 개근상을 받을 수 있다니. 권력이란 달콤하디 달콤한 것이다.


부우웅-


스마트폰이 울린다. 손에는 유화 물감이 잔뜩 묻었기에 거북이처럼 고개만 내빼서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다.


[박정인 : 화구 챙겼어. 내일까진 도착할 거야]


AM 갤러리의 담당자 박정인의 메시지에 내 입꼬리는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찔끔찔끔 끌려 올라간다.


갤러리와의 계약은 상당한 이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내 작품의 판매 및 전시를 도와줌은 물론, 캔버스나 물감, 붓을 포함한 화구를 지원하는 것까지 있다.


박정인이 사준 스마트폰은 최신식 기능을 여럿 달고 있었다. 제멋대로 메시지를 씹어버리는 이전 구닥다리 깡통과는 달리 훌륭했다.


“알았다고 보내.”


[김도진 : 알았다]

[박정인 : ?]


가끔 반항하는 것만 빼면 말이다.



*



현존하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가 ‘제프 쿤스’는 이리 말했다. ‘내 작품의 시장가치는 내가 만든다.’


제프 쿤스는 두 번이나 ‘생존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비싼 작품’의 기록을 두 번이나 갱신한 작가다. 최소한 현재까지는 제프 쿤스보다 훌륭히 미술 시장을 장악한 예술가는 없다.


미술 시장에서 작품의 가치를 결정 짓는 요소는 한없이 많다. ‘전문가의 평가’, ‘대중의 선호도’, ‘미술사적 중요성’, ‘정치적 의미’······.


하다못해 어떤 붓을 사용했는지, 어떤 캔버스를, 물감을 사용했는지도 평가 요소다.


박정인이 아이스크림을 쭙쭙- 빨아먹으며 말했다.


“오백만 원이면 세계적으로 비교했을 때 그리 큰돈이 아니야. 현존 작가 작품 중 가장 비싼 제프 쿤스의 <토끼>는 9천 110만 달러지. 한화로 1,084억 정도야.”

“최고 작가랑 비교하면 어떡해요.”

“에이- 꿈은 커야지, 안 그래?”


박정인이 눈을 찡긋- 윙크했지만 30대 아저씨의 빌어먹을 애교는 절로 내 시선이 돌아가게 했다.


돌아간 시선 끝, 보육원 유리문 너머에서 어린 동생들이 불투명한 유리에 얼굴을 대고 있다. 보이지도 않을 텐데.


“최소한 제게 오백이면 감지덕지해요. 만 18세가 되면 보육원을 퇴소하는데, 자립금이 오백이거든요. 한 달에 90만 원씩 수당이 나오긴 하는데 여기 나간 형, 누나들 보면 시원찮은 것 같아요.”

“음-. 다음 작품은 아마 오백이 안 될 거야.”


박정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낭만>은 신진 작가치곤 비싼 가격에 낙찰됐지. 경매에 나온 너의 ‘첫 작품’이라는 의미가 달려있거든. 재능있는 작가···의 작품에 투자하는 거지.”

“그럼···?”

“다음 작품의 가격은 백만 원 안쪽에 형성될 가능성이 커. 그게 몇 번 반복되면 너는 두각도 드러내지 못하고 사라진 다른 작가들이랑 똑같아지지.”


안 된다. 드디어 하고 싶은 걸 하며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방법이 있을까요?”

“방법은 무수히 많아. 백 퍼센트 성공하는 건 없지만.”


박정인이 서류 가방에서 종이를 몇 장 꺼냈다. 읽어보니 전속 계약서다.


“일단 우리 갤러리에서···. 아니다. 더 위쪽에서 결재를 받고 널 기업 자본으로 무진장 푸시하는 거야. 스타 해봤지? 쇼미더머니 하는 거랑 비슷해.”


AM 갤러리 위쪽이라면 AM 그룹이 아니던가. 한국 3대 재벌 기업 중 하나다. 돈으로 후려친다는 말이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사기잖아요. 불공평해요.”

“세상은 원래 불공평해. 그리고 이건 나도 추천 안 할 거야. 뒷면 계약이거든. AM그룹이랑 전속 계약하는 거야. 종신으로. 목줄이 묶이는 거지.”


박정인은 겁을 주려는 건지 자기 손으로 목을 감고 켁켁대는 흉내를 냈다. 내가 한심하게 쳐다보자 크흠- 헛기침을 하곤 말을 이었다.


“전문가의 인정을 받는 방법도 있어. 너의 경우에는 여춘팔 작가가 공인했지. 삼국지 좋아해?”

“아뇨, 잘 몰라요.”

“이건 알잖아.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라!’ 조조가 허소를 졸졸졸 쫓아가서 이 말을 들은 것도 명사의 인정을 받으려고 한 거야. 아무리 여포처럼 사람 잘 썰고, 제갈량처럼 행정을 잘해도 이름이 퍼지지 않으면 모르거든.”


그럴듯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고흐처럼 한평생 그림 한 점 팔고 쓸쓸히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장 정석적인 방법은 특유의 화풍을 인정받는 거지.”

“화풍이요?”


박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네 작품이 대체적으로 인상주의 시대의 작품에 가깝다고 해. <낭만>도 반 고흐의 <신발 한 켤레>와 비슷하니까. 대중들이 생각하는 예술에 가장 가깝지만, 기술적으로 너에게 주목할 이유는 찾을 수 없다는 게 문제지. 이미 지난 트렌드야.”

“화풍······.”

“화풍은 현재의 네 손이 기억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일 거야. 솔직히 지금도 나름대로 나쁘진 않아. 네가 현재의 화풍 그대로 고전 미술로의 회귀를 주장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너의 아이덴티티가 될 수 있어.”

“무슨 히틀러나 할 짓을.”


난 질색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고전 예술을 신봉하고, 모더니즘 예술가들을 박해한 일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 때문에 ‘에곤 실레’와 ‘클림트’를 비롯한 많은 진취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이 퇴폐미술이라며 조롱당했지 않은가.


박정인은 오해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현대 미술에 있어선 이단에 가깝지만 틀린 건 아니야. 다른 거지. 그냥 주장하는 것과 폭력이 뒤따른 강압은 달라. 이게 너와 히틀러의 차이지.”

“사람을 히틀러랑 비교하지 마세요. 저는 고전 미술로의 회귀는 생각도 안 했으니까.”

“좋아. 하지만 귀는 열어 둬. 자기만의 틀에 갇히면 이해도 못 하면서 고개만 끄덕거리는 녀석들이랑 같아지거든.”


예술계에 정말로 그런 사람이 많은 걸까. 아무쪼록 내 살길이 급한 마당에 그런 방향으로 걱정할 여유도 없었다.


“화풍에 관해선 나중에 얘기해요. 전 아직 배울 게 많으니까. 다른 방법은 뭐가 있어요?”

“화구의 개선이지.”


그는 직접 공수해온 물감을 늘어놓았다. 눈이 어지러운 색들의 향연이다.


“네 <낭만> 분석 결과 물감은 몰라도, 캔버스는 싸구려에 젯소 마저 싸구려야. 직접 보니까 붓도 많이 망가졌더라.”

“돈이 없는걸요.”

“이젠 있지. 너에게 상품 가치가 있는 한 우리 갤러리는 전폭적인 지원을 해줄 거야.”


반대로 가치가 없어지면 뱉을 것이다. 그렇기에 난 내 가치를 입증해야만 한다.


내가 입맛을 다시는 동안 박정인은 물감을 몇 개 골라냈다.


“작품의 가치를 결정짓는 요소에 재료는 당연히 들어가. 비싼 게 비싼 값을 하거든.”


박정인이 양손에 진한 갈색의 물감 두 개를 손에 들었다.


“이 두 물감은 여기 적힌 대로 Bunrt umber. 즉, 탄 갈색이야. 네가 <낭만>에 사용한 건 이쪽.”


박정인은 계약서 위에 물감을 쭈욱- 짜냈다. 물감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내가 가져온 ‘쉬민케’ 제품.”


그는 이번에도 쭈욱- 물감을 짜냈다.


“붓을 안 대봐도 알겠어요. 쉬민케가 더 부드럽네요. 색감도 다르고.”

“쉬민케는 물감 시장에선 최고로 쳐주거든. 그만큼 비싸긴 하지만.”


다시 뚜껑을 닫으며 그가 말했다.


“물론 고급 제품이라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야. 중요한 건 네가 그리고 싶은 그림에 적합한 재료지. 이건 경험이 중요하지, 많이 써봐야 알아.”

“확실히······.”


회화(繪畵)는 회화(會話)다. 대통령이나 재벌 회장의 연설이 구수한 사투리로 전해지는 것 보다, 단단하고 힘 있는 어투의 표준어로 전해지는 것이 더 진정성이 있는 것처럼. 회화(繪畵)를 함에 있어 전달할 의미에 더 근접하고 효과적인 재료를 사용함은 중요하다.


나이지리아 태생의 작가 ‘크리스 오필리’는 영국의 작가이지만 아프리카계 흑인으로서의 뿌리에 강한 영감을 얻게 된다.

그의 작품 <성모 마리아>는 보통 백인으로 묘사되는 마리아를 흑인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코끼리 똥이라는 경악스런 재료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아프리카 흑인의 토테미즘적 성스러움을 작가 본인의 정체성과 더없이 근접시킨 선택이다.


비위는 상하지만 대단하다.


“작가라고 불리고 싶다면 네가 표현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야 해. 모든 작가는 독립적인 예술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걸 회화나 조각으로 표현하지.”


그의 말을 듣고 알아챘다. 순서가 반대되었다는 것을. 나는 내 가치관이 확립되기 이전에,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자각하기 이전에 작가가 되었다.


생각 없이 그린 지금까지의 그림들을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최소한 철학적‧개념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현대 미술에선 욕먹기 딱 좋은 짓이다.


“······전 너무 빨리 작가가 된 거네요.”

“왜 그렇게 생각해?”

“저는 아직 가진 것도 없고, 경험한 것도 없어요. 사람들은 그림 실력이 나쁘지 않다고 하지만···. 솔직히 그것뿐인 것 같아요. 저 정도의 실력은 시간이 지나면 가진다고 생각하거든요.”


박정인은 씨익 웃으며 우악스레 내 머리를 한껏 흩트렸다. 대충 무슨 심리로 그런 짓을 한 지는 알겠지만, 머리카락이 몇 가닥 꼬여서 뽑혔다. 갑작스런 고통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내가 고통에 본인을 저주하는 것도 모르는지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과연 너 정도의 실력이 시간으로 해결될까? 특히 현대에는 그래. 생각의 깊음, 기반 지식, 직감··· 많은 것이 요구되지 그림 실력은 그것 또한 포함하고 있어.”


그는 태블릿 화면에 한 인터넷 기사를 펼쳤다. 내 그림이 중앙에 박혀있다.


“너의 <낭만>을 볼까? 머저리 평론가들은 고흐의 <신발 한 켤레>의 모사라고 하지. 아무런 예술적 가치가 없대. 하지만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모사하는 건 후대의 인간들로서 당연한 사실이야. ‘매드사키’의 작품들이나 ‘살바도르 달리’의 <L.H.O.O.Q.>를 보면 알 수 있지.”

“하지만 그 사람들 작품처럼 극적인 요소는 없어요.”


박정인은 다시 예의 개구진 웃음을 보였다.


“내가 말했잖아! 귀를 열어. 생각을 여는 거야. 굳이 극적일 필요가 있을까? 너의 그림은 대체적으로 정돈되어있어. 몸을 뒤트는듯한 역동성도 나타낼 수 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지.”


그랬던가? 내 그림들을 다시 봐야겠다.


“너는 아마 차분한 상황을 좋아하겠지, 색깔 사용도 파란색이나 검정색을 많이 사용해. 무겁고, 차가운 색상. 하지만 가끔 <낭만>의 민들레처럼 따뜻한 색을 슬쩍 끼워 넣어.”


여춘팔의 견해와 비슷하다.


“회화에는 너만이 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요소는 분명히 있어. 그러니까 너의 그림이 팔렸고, 우리가, 세상이 너에게 기대하는 거야.”


나는 팔뚝을 문질렀다.


겨우 그림 몇 점으로 인간됨을 파악하는 것은 굉장히 소름 끼치는 경험이다.


“특색있는 그림이 그리고 싶다면······. 일단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러 가자. AM 갤러리에서 지금 전시회도 하고 있으니까.”


확실히 직접 작품을 보는 것은 좋은 경험일 것이다. 휴대폰 액정 너머와는 달리 마티에르 파악이나, 거대한 크기에서 오는 위압감을 경험할 수 있다.


얼빠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도록, 두근거리는 감각을 숨기며 말했다.


“···언제요?”

“당장.”

“······학교는요?”

“······.”


무단결석은 안 되나 보다.

토끼 (제프 쿤스).jpg

작중 언급된 제프 쿤스의 <토끼>입니다.

9천 110만 달러에 낙찰되었고, 한화로는 1,084억이네요.


크리스 오필리의 <성모 마리아>는 종교적, 성적 불쾌감을 선사할 수 있어 첨부하지 않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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