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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펭귄의 서재입니다.

천재 화가가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드라마

군청(群青)
작품등록일 :
2020.12.28 17:09
최근연재일 :
2021.01.28 07: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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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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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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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3 - 공상의 영역 (8)

DUMMY

“자.”


아침부터 찾아온 아나스타샤가 건네주는 물건을 받았다. 제법 묵직한 네모난 사각기둥의 상자에 겉에 적힌 건······.


“마산드라?”

“Massandra.”

“마쏸-드라?”


발음이 맞아서 그런 건지, 가당찮은 발음에 포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찬찬히 살펴봐도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다. 고풍스런 금박으로 테두리를 박아넣은 이 물건에 내가 뭐라 반응해야 하는가.


“이거 뭐야?”

“선물.”

“무슨 선물?”

“Um···. 집들이 선물?”


자기가 말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이 왜 주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심지어 집들이 선물을 주기에는 하루 늦지 않았나.


“······일단 들어와.”


여전히 물감으로 엉망이 된 작업실. 한 명의 러시아인을 소파에 앉히고, 마산드라인지 마싼드라인지 하는 물건을 뜯었다.


······와인이다. 러시아에선 미성년자도 술을 마시나 보다.


나의 미심쩍은 눈길에도 아나스타샤는 태연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성인이라지만, 술을 대접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기에 백현우가 쟁여놓은 간식거리나 꺼내며 말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작업 안 해?”

“해야지. 작업하는 거 보려고 온 거야?”

“아니, 같이 작업하려고 왔지. 아직 네 추상화를 보지도 못했는데.”


당당히 말하는 모양새에 잠깐 ‘그런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분명 공동작업으로 추상화를 그리지 않았던가.


“어제 그렸잖아.”

“아니야. 어제 그린 건 너의 추상화가 아니잖아. 내 추상표현을 네가 꾸민 거지.”

“음···.”


하지만 추상화에 관한 관심은 많이 사라졌다. 여춘팔 작가가 당장 추상화를 완성해서 가져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며칠간 조막만한 뇌를 혹사하니 그냥 간단한 그림이나 그리며 편해지고 싶다.


“추상화엔 관심 없어.”

“······왜?”


언뜻 불쌍하게 보일 정도로 그녀의 표정이 수그러들었다.


아차 싶어 다시 생각하니, 추상화가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황급히 변명을 뱉어냈다.


“추상화가 싫은 게 아니야. 내가 지금 화가로서 제 몫을 해야 하는 처지라서 그래.”

“무슨 소리야?”

“내가 화가로 데뷔하고 이제 한 달이야. 하지만 사람들에게 선보인 작품은 겨우 두 개밖에 안 돼. 내가 계속해서 화가이려면 하루빨리 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해.”

“작품 전시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양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릴 적부터 개인전을 열어온 예술 금수저라 내가 처한 상황과는 정반대라 이해하기 힘들겠지.


“나는 여러모로 자격이 부족해. 대학교는커녕 미술 학원도 못 가본 사람이 화가가 됐잖아.”

“나도 어릴 때 데뷔했어. 세상에는 독학으로 화가가 된 사람도 많아.”

“나는 고등학생이야. 어릴 때 두각을 드러낸 것도 아니고, 충분히 교육받은 만큼 나이가 충분하지도 않아. 그런 상황에 부족한 작품을 내보이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어. 최소한 한국에서는 말이야.”

“그렇게 기술이 좋은데?”

“기술만으로는 현대 미술에서 인정받을 수 없어.”

“어제 한 거랑 <디오게네스>도 작품이 좋은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리 없잖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그림이지만 사람들이 그 그림을 보며 박수를 치진 않아, 피카소의 <게르니카>도, 반 고흐의 <해바라기>도 마찬가지지. 미술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사람들의 작품도 이런 취급인데 내 작품이 어떻겠어?”

“난 네 그림 좋아해.”


그녀의 고집스런 칭찬은 고맙지만, 한숨만 나왔다.


“너의 그런 허울만 있는 판단 하나로 내 처우가 결정되진 않아. 겨우 작품 두 개로 화가 인생을 지속할 수는 없어.”


아나스타샤는 본인의 턱을 쓰다듬곤 또박또박 말했다.


“넌 물감 쓰는 법을 알아.”

“물감? 누구나 쓸 줄 알잖아.”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물감 쓰는 법을 몰라. 하지만 너는 알잖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디오게네스>를 보면 알아. 물감을 정성껏 사용해. 다른 사람들은 못 해.”


나야말로 그녀처럼 색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이 날 더 비참하게 만든다는 건 알고 있는 걸까?


그녀의 입에서 조목조목 쏟아지는 알파벳은 초등학교 영어 교사의 발음처럼 또박또박 들렸다.


“<디오게네스>는 그 깐깐한 그레고리가 찬사할 정도로 지적이고, 어제 처음 본 내 그림을 더 좋게 만들 정도로 너는 기발한 창의력을 가지고 있어.”

“내가 아니었어도 네가 언젠간 했을-.”

“난 매일 어제 같은 그림을 그렸어. 거의 20년을 그런 그림만 그렸지. 맘대로 섞고, 바르고, 뿌리고, 쏟아내는 그림.”

“그게 너의 색깔이지. 세상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귀족적인 강렬함.”

“그걸 20년을 했어.”


짧은 한마디지만 묵직하게 나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내 뒤통수가 얼얼해진 이유를 깨닫기도 전에 그녀의 입에서 담담하게 나온 말들이 내 가슴을 찔렀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 재벌인 부모의 등에 업혀, 세상 무서운줄 모르고 설치는 아가씨래. 발전이 없는 그림, 창의성 없는 그림, 해석할 가치가 없는 그림.”

“······.”

“난 그래도 계속 그림을 그릴 거야. 난 화가니까.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게 좋으니까. 내 그림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

“20년을 이렇게 살았어도 난 화가야. 넌 이제 시작했잖아.”


부끄러워졌다. 예술 금수저? 정반대의 입장? 이 망할 머저리! 오만과 기만으로 똘똘 뭉친 주둥이를 꿰매버리고 싶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조곤조곤한 말에 가슴이 아팠다.


“왜 세상 모두에게 사랑받으려고 해?”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네가 말하는 건 그렇잖아. 넌 성공과 실패를 말하고 있지만, 모든 화가는 성공만 하지 않아, 모든 화가는 실패를 해. 수백, 수천 번의 실패. 너는 내 20년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거야?”

“아니야.”


반사적으로 뱉었다. 턱 막힌 목소리였지만 비명처럼 느껴졌다.


모든 화가가 모든 평론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도 않고, 그건 다 빈치나 피카소, 고흐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저평가하는 평론가는 그들이 사는 시대에도 그렇고 지금도 무수히 많다.


이 간단한 법칙을 왜 이제야 깨닫는 건가.


“완벽한 사람은 없어.”

“······.”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게 화가가 아니야.”

“······.”

“좀 더 하고 싶은 대로 해. 넌 화가니까.”


뭐라 답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목에서 꺽꺽대는 소리만 나올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타인의 인정을 바라면서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걸 세상 탓으로 돌리면서.


내가 무슨 표정일지 몰라 얼굴을 덮은 손으로 눈두덩을, 볼살을 조물락거렸다. 그 사이에 유리잔을 들고 온 아나스타샤가 와인의 코르크를 땄다.


유리잔에 그 적색 액체를 콸콸콸- 쏟아부은 그녀가 내게 건넸다.


“마셔.”

“······킁.”


미성년자라고 뭐라 하기에는 눈치 없는 짓이다.


주도를 몰라 그냥 양손으로 공손히 받아, 꿀떡 삼켰다.


목구멍 너머에서 시큼하면서도 달달한 향이 피어올랐다. 포도 주스랑 과학실 알코올램프를 섞은 느낌이다.


향기는 농밀한 안개의 형태가 되어, 교태로운 혓바닥의 움직임으로 야릇하게 코와 뇌를 희롱했다.


“······원샷은 안 되는데.”


아나스타샤의 얼떨떨한 목소리에 집중할 수 없었다.


반고리관이 파업을 선언했는지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눈을 감았다. 여전히 어지럽다.


“괜찮아?”

“어······.”


벌린 입에서 달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어지러워.”


세상이 일그러졌다.


시야에는 아직 정돈되지 않은 작업실의 광경이 담겼다.

온갖 곳에 뿌려진 물감. 저 망할 물감들이 매장 앞 풍선인형처럼 경박한 춤을 추는 것만 같다.


문득, 여춘팔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현실이 진짜 현실일까? 어쩌면 너만 느끼는 현실일 수 있지 않을까?’


눈이 빙빙 도는 순간에도 나는 언제나의 고리타분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보는 광경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저 경박한 춤을 추는 파란 물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


경험적으로 파란 물감은 파란색이다. 하지만 현재의 내 눈에는 파란색이면서 하늘색이기도 하고, 하얀색이기도 했다. 아니, 실재적으로 따지자면 난 파란 물감이 무엇인지 감각할 수 없으니 난 저것이 무슨 색인지 알 수 없다.


오, 씨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저 인간이 내게 마약을 먹인 건가?


아나이스 닌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대로 본다.”


중얼거리며 자연스레 벌어진 입에선 달큼한 향이 올라왔다. 내가 침을 흘렸나?


침만이 아니다. 머리 뚜껑이 열리고 생각이 쏟아져 내린다.


뇌를 포도 주스에 담그고 쭈글쭈글한 주름을 폈다, 접었다, 폈다, 접었다-.


꼬인 혓바닥이 닫힌 입술을 두들겨 주둥이를 열어제꼈다.


“캔버스를 가져다줘.”


그녀가 뭐라 대답했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이, 어느새 내 손에는 적당한 크기의 캔버스와 붓이 들려 있었다.


흔들리는 시야, 떨리는 손, 길게 이어지지 못하는 생각.


두근두근- 심장 소리. 심장이 머리에 달린 듯 머리통이 주기적으로 작은 흔들림을 일으키며 고개를 까딱거리게 만들었다.


내가 갖고 있던 장점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침착할 수 없다. 정교해질 수 없다.


하지만 그 어떤 화가가 이 광경을 포기할 수 있을까.


칸딘스키가 보았던 광경, 추상화를 그리게 된 원인의 광경이 이랬을까?


따지자면 반 고흐가 압생트를 마시고 본 광경이 이랬을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던 사물들이 물감이 번지듯 흐르고, 뭉개지고, 퍼져나갔다.


고흐의 시선이 이랬던 건가. <별이 빛나는 밤>이 떠올랐다.

눈에 담기는 색이 소용돌이치면서 수면 위의 파문처럼 흔들렸다. 파도처럼 부딪히고, 으스러지고, 합쳐지고, 떨어져나갔다.


많은 예술가가 술에 중독된 것이 이해 간다. 이런 게 보이면 술이 제 삶을 파괴해도 어쩔 수 없지.


붓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거리 감각이 애매하다. 차라리 손가락을 쓰자.


물감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서 이지러졌다.


누군가의 혀를 잡고 장난을 치는 기분. 당장 움켜쥘 수 있지만, 그와 함께 부스러질 것만 같아 무섭다.


하지만 그 잔인한 짓을 벌이고 싶다. 뭉개버리고 싶다.


꾸욱-


꽉 쥔 주먹 안, 물감의 감촉은 말랑말랑하면서, 촉촉하고, 오싹오싹했다.


전능감이 느껴진다.


작가의말

내일은 6시 5분에 올라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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