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태극펭귄의 서재입니다.

천재 화가가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드라마

군청(群青)
작품등록일 :
2020.12.28 17:09
최근연재일 :
2021.01.28 07:05
연재수 :
33 회
조회수 :
54,449
추천수 :
1,707
글자수 :
179,402

작성
21.01.10 12:05
조회
1,420
추천
45
글자
10쪽

#3 - 공상의 영역 (4)

DUMMY

송아지처럼 반짝이는 커다란 눈망울이 끔뻑인다. 문제는 국산 한우가 아니라 저 멀리 시베리아 출신인 점이다. 덕분에 눈꺼풀 너머의 홍채도 사파이어처럼 파랗다.


“#$@#~”


뒤통수에 달린 금색 털 뭉치는 조랑말의 꼬랑지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염색이 아니라 자연산이겠지?


“$@&!#~”


머리통은 주먹만 해서, 선크림도 아껴 쓸 수 있겠다. 참 절약적인 안면이다.


“#@!$&#.”


러시아산 불청객은 드디어 이야기가 끝난 건지 조그마한 입술을 닫았다. 가만히 앉아있을 뿐인데 대장군마냥 위풍당당한 기세가 느껴졌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러시아인에게 느낄 단어는 아니지만, 첫인상이 그렇다.


그녀 옆의 러시아산 불청객2는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무어라 말했다. ‘쏘리’란 단어가 들어있으니 사과하는 말이겠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러시아어로 말한 것도 아니고 영어로 말했지만, ABCD만 끄적이던 한국 고등학생이 실전 영어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다행히 내게는 한국대 출신의 고학력 마법의 주둥이가 있다.


“뭐래요.”

“그림이랑··· 예술에 대해 뭐 어쩌고저쩌고···. 음···. 뭐라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박정인은 러시아산 불청객2처럼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정말 모르겠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애초에 본업이 통역사인 것도 아니니 너그러운 내가 이해해주자.


“이 사람이 누구라 했죠?”

“아나스타샤 이바노브나 메드베데바. 러시아 화가야. 제법 주목받고 있어. 보다시피 외모도 예쁘장하고, 재능도 있어서 어릴 적부터 개인전도 여러 번 열었고. 아, 그리고 뒷배가 장난 아니야. 무슨 재벌가라는데.”


러시아 작가면 러시아에 처박혀서 그림이나 그릴 것이지 왜 그 먼 거리를 넘어 지옥불의 한반도로 온 건가.


“근데 여긴 왜 왔대요.”

“<디오게네스> 보고 왔다는데. 그 뒤론 좀 중구난방으로 떠들어서 통역하기가 좀 그래.”

“대충 말해주세요.”


설마 욕이라도 했겠는가.


“그게······. 미술평론가에 대해 말하다가, 인물화에 대해 말하고, 그-. 음, 색깔 진짜 이상하게 쓴다는데?”

“예?”


초면인 사람에게 갑자기 색깔 이상하게 쓴다는 소리가 왜 나오는가.


“진짜야. 네가 색깔 이상하게 쓴대. <디오게네스>에서 보인다는데?”

“뭐가 보인다는데요?”

“풍부한 어둠의 표현에 검은색에다가 캔버스 바깥은 푸른색을 섞고, 인체에 가까운 쪽은 진갈색을 섞었대.”

“눈 좋네요.”

“맞아?”

“네.”

“오-. 그거 아무도 모르지? 평론가들이 말하는 건 못 봤는데.”

“아마 백현우 형? 그 형은 알겠죠. 작업하는 거 봤으니까.”


박정인이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감탄했지만 특이한 일은 아니다. 입체품인 등불의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사용한 잡기술일 뿐이니까.


극소량 사용한 걸 눈치챈 건 대단하지만, 그렇다 해서 에헴- 하고 어깨를 으쓱일 일도 아니다.


“됐으니까, 왜 만나자고 했는지 물어주세요.”


마법의 주둥이는 그제야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꾀꼬리처럼 지저귀는 러시아인의 말이 박정인의 입을 통해 딱딱한 어투로 번역됐다.


“그레고리 도브리긴의 호평을 받은 방법을 알고 싶어.”

“그레고리 도브리긴이 누구인데요.”

“러시아 미술평론가. 러시아 미술계에선 입김이 강한 사람이야.”

“저는 그런 사람을 모르는데 어떤 방법을 알려드려야 하죠?”

“#@$!”


뭐라 떠들곤 러시아산 불청객1은 과장된 액션으로 팔짱을 꼈다. 하나하나 제스쳐가 큰 사람이다.


마법의 주둥이가 또 휴업에 들어갔다.


“해석해줘요.”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으니까 같이 작업하자는데?”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싫다고 해줘요.”

“그래도 제법 좋은 경험 아닐까? 러시아 화가랑 작업하는 것도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던가?”

“깨달음이라니, 제 인생의 장르는 무협이 아니에요. 그냥 순순히 본심을 밝히시죠.”

“광고 효과가 좋잖아. 마케팅이야 마케팅.”


밀고 당기기도 없이 털어놓은 건 굉장히 자본주의적 관점의 판단이었다.


“이름 있는 사람과의 작업 장면을 촬영해서 올리면 SNS 팔로워를 모으기 좋고, 무엇보다 외모도 좋잖아. 선남, 선녀! 이건 팔리는 컨텐츠야. 심지어 저 사람은 비엔날레에 출품할 정도로 실력도 좋고, 인정도 받는 사람이니까. 명분도 챙기고 실리도 챙기자는 거지.”

“전 선남이 아니에요.”

“거기만 태클 거는 거야? 그냥 이렇게 생각해.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요즘 도랑물은 다 콘크리트로 덮었는데.


“저번엔 빨리 작업물을 채워서 포트폴리오라도 만드는 게 좋을 거라면서요.”

“그것도 결과적으로 네 몸값을 올리기 위한 일이잖아. 지금 저 사람이랑 작업해서 이득 볼 건 많아. 그리고 작품도 안 나오잖아. 맨날 스케치북만 끄적이고. 난 저번 것도 괜찮았는데.”

“저 요즘 추상화 그려요. 어쩔 수 없죠, 시간이 좀 걸리는 건-.”

“잘됐네! 아나스타샤 저 사람도 추상화가야. 이참에 아는 화가도 늘려놔. 좀 글로벌하게 노는 게 좋지 않겠어? 한국의 예술 시장은 러시아랑 비교하면 괴멸적이야. 저 사람을 이용하면 세계에 네 이름을 알릴 수도 있고, 무엇보다 네 그림 좋다고 국경을 넘어온 사람인데 그냥 보내는 것도 그렇잖아.”


미간이 찌푸려졌다.


인지도를 올리는 건 필요하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나 하나 보겠다고 하늘을 날아온 사람을 그냥 보내는 것도 예의에 맞지 않는다.


“음······.”


칸딘스키를 비롯한 내가 아는 추상화가도 옛날 사람이고, 가장 동시대에 근접한, 다른 시각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득과 실을 저울질하다가 말했다.


“좋아요.”



*



미니 캔버스를 들고 쭈그려 앉자, 시베리아산 가출 소녀가 다가와 말했다.


“@#&$?”


앵두 같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못 알아들을 소리. 나는 괴멸적인 영어 실력으로 말했다.


“슬로울리. 슬로울리. 마이 잉글리시 이즈 낫 굳.”


그녀는 불청객치고는 배려심이 있는 건지 간단한 어휘를 사용해 말하기 시작했다.


“Okay. 왜 그런 캔버스에 그림 그려?”

“안돼?”

“Um······.”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작업실 한쪽에 기대진 캔버스를 가리켰다. 박정인이 말하길 큰 그림은 값도 비싸다며 가져온 100호 캔버스. 나무틀에 씌우진 않았지만, 그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너무 커.”

“추상화는 저런 크기가 좋아.”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아나스타샤는 100호 캔버스를 들었다. 캔버스의 크기도 크기지만 그녀는 비율이 좋은 몸뚱이에 비해 내 턱에도 못 미치는 신장을 가지고 있어 끙끙대며 물건을 옮겼다. 하는 수 없이 반대편을 들고 그녀가 원하는 위치로 가져오자 그녀가 손을 탁 탁 털었다.


“이거로 하자.”

“이유를 말해줘. 왜 캔버스가 커야 해?”

“큰 게 좋잖아.”


더없이 심플하고, 고집스런 대답에 주둥이를 뻐끔거렸다. 박정인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 뒤돌아 노려보자 딴청을 부린다.

옆의 이리나라는 사람은 여전히 곤란한 미소였다.


내 곤란한 마음이 비치길 바라며,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크다고 좋은 건 이유가 될 수 없어. 꼭 큰 그림이 훌륭한 그림은 아니야. Less is more(간결한 것이 더 아름답다.)이란 말도 있어.”

“바우하우스? 언제적 이야기야. Less is bore(적을수록 지루하다.) 난 이게 좋은걸. 사실 더 큰 게 좋아.”

“······.”

“너 Abstract painting(추상화) 한 번도 안 해봤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고개를 마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추상화는 자신을 표현하는 거야. 사람에겐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역사가 있어. 당연히 많은 물감을 사용해야지. 그걸 고작 저 조그마한 캔버스에 그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너의 가치관은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나는 인간에게서 그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느끼지 못하겠어. 큰 캔버스가 많은 것을 표현하기에 좋지만 작은 것이라고 해서 많은 것을 표현하기 불가능한 건 아니야.”

“흠··· 너 디테일한 작업 좋아하지? 꼭 #$@&처럼.”

“프핳학핰핰핰!”


‘#$@&’가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웃음보를 닫지 못하는 박정인을 한껏 저주하고 눈앞의 말괄량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괄량이는 어여쁜 주둥아리로 꾀꼬리처럼 지저귀었다.


“할 수 있는 것을 담는 게 추상화야. 물감만 쓰는 것도 아니지. 필요하다면 색종이를 오려서 뿌리거나, 물건을 갖다 붙이고, 반짝이를 뿌리기도 해. 그렇기에 캔버스는 가능한 크게 사용해야 하지. 추상화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의 끝자락에서 탄생해야 해.”

“난 그런 거 못 해.”

“못 한다고? 안 해본 거겠지. 어려운 게 아니잖아.”

“하더라도 좋은 작품이 나올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별다른 주제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는 건 낭비야.”

“따분한 소리. 아이디어는 작업을 하는 중에 나오는 것도 있어.”


평행선을 달리는 입장에 양자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자라온 환경 때문일까. 만난 지 1시간도 안 되었지만, 여러모로 나랑 다른 것이 느껴진다.


조그마한 신장에도 불구하고 대장부의 모습을 보이고, 어깨와 등을 피고 당당히 걷는 모양새는 나랑 정반대다.


심지어 집안이 재벌에 어릴 적부터 개인전을 열어왔다고?


고아로 자라서 꿈을 포기하기 직전까지 갔던 누구와는 살아온 삶이 너무 차이 나서 비교하기도 미안할 지경이다.


기분 나쁜 사색은 머리 한구석에 구겨 넣으며 말했다.


“좋아. 하지만 이 큰 캔버스를 혼자 다 쓰는 것도 낭비야. 같이 쓰기로 해. 어차피 같이 작업하기로 했으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같이 작업하는 걸 뭐라고 생각한 거야.”


자신이 양보한다는 태도에 조금 욱했지만, 이름 있는 화가와 공동작업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는 뇌내 방어기제의 작동에 수긍했다.


“좋아, 해보자고.”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되세요.’라는 말이 적고 싶었는데 다시 생각하니 명령조라서 기분 나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이 행복하길 바랍니다.’라는 말도 생각해봤는데 타인의 기원에 행복해지는 것도 이상합니다.


그래서 ‘건강하세요.’라는 말이 하고싶습니다. 이것도 명령조지만, 사회적 상황과 비교해보면 건강한 건 다소 강압적이어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들 건강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천재 화가가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중 공지 +5 21.01.30 751 0 -
공지 군청입니다. +6 21.01.25 909 0 -
33 #6 - 닭과 달걀 (4) +3 21.01.28 1,246 49 13쪽
32 #6 - 닭과 달걀 (3) +7 21.01.27 1,160 41 11쪽
31 #6 - 닭과 달걀 (2) +11 21.01.26 1,225 48 13쪽
30 #6 - 닭과 달걀 +10 21.01.25 1,264 47 13쪽
29 #5 - 위치와 책임 (3) +10 21.01.22 1,308 50 13쪽
28 #5 - 위치와 책임 (2) +10 21.01.21 1,260 49 11쪽
27 #5 - 위치와 책임 +5 21.01.20 1,315 47 13쪽
26 #4 - 존재 증명 (4) +7 21.01.19 1,358 49 14쪽
25 #4 - 존재 증명 (3) +10 21.01.18 1,381 50 13쪽
24 #4 - 존재 증명 (2) +6 21.01.17 1,387 44 12쪽
23 #4 - 존재 증명 +4 21.01.16 1,389 49 12쪽
22 #3 - 공상의 영역 (9) +6 21.01.15 1,355 55 11쪽
21 #3 - 공상의 영역 (8) +9 21.01.14 1,373 54 11쪽
20 #3 - 공상의 영역 (7) +9 21.01.13 1,413 47 14쪽
19 #3 - 공상의 영역 (6) +9 21.01.12 1,411 44 13쪽
18 #3 - 공상의 영역 (5) +2 21.01.11 1,415 43 8쪽
» #3 - 공상의 영역 (4) +3 21.01.10 1,421 45 10쪽
16 #3 - 공상의 영역 (3) +6 21.01.09 1,484 42 11쪽
15 #3 - 공상의 영역 (2) +6 21.01.08 1,533 53 14쪽
14 #3 - 공상의 영역 +4 21.01.07 1,581 47 12쪽
13 #2 - 디오게네스 (8) +2 21.01.06 1,578 47 12쪽
12 #2 - 디오게네스 (7) +6 21.01.05 1,577 48 13쪽
11 #2 - 디오게네스 (6) +6 21.01.04 1,563 50 11쪽
10 #2 - 디오게네스 (5) +4 21.01.03 1,591 56 8쪽
9 #2 - 디오게네스 (4) +5 21.01.02 1,666 60 13쪽
8 #2 - 디오게네스 (3) +8 21.01.01 1,775 54 12쪽
7 #2 - 디오게네스 (2) +9 20.12.31 1,928 52 12쪽
6 #2 - 디오게네스 +6 20.12.31 1,996 59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