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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韓山) 님의 서재입니다.

1987 미안해 아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대체역사

한산(韓山)
작품등록일 :
2023.05.10 12:14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6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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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7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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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74,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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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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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2화 태풍 속으로(3)

DUMMY

“두 분이 말씀하셨던 진범은 김주혁 군의 증언대로..”



다시 시작된 성명서는 김승운 신부의 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한마디 한마디가 숨 가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 얼굴 없는 사건 수사, 범인 없는 현장검증, 이유 없는 재판 지연, 구속된 조 경위와 강 경사에 대한 격리와 차단, 변호인과 가족접견의 제한과 감시는 사건과 범인의 조작이 계속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마른 침을 삼켰고..



- 조 경위와 김 경사에 대한 재판은 공개되어야 하며, 모든 의문점이 철저히 밝혀지고, 두 사람에 대한 신변위협과 보복이 없어야 한다. -



곳곳에서 탄식과 분노의 한숨들이 새어 나왔다.



- 고문 범인들은 처벌돼야 하고 고문진상은 밝혀져야 한다.-



마땅한 것이 마땅하지 않았고.



- 사건의 조작을 담당하고 연출한 사람들은 고문치사 사건 직후 직위 해제되었다가 4월 8일 버젓이 복직한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장 정석린 경무관, 5과장 유정반경정, 5과 2계장 박원탁 경정과 역시 간부 홍승삼 경감 등이다. -



당연한 것도 당연하지 않았다.



- 강민철 전 치안본부장은 사건의 축소·은폐 및 범인 조작에의 개입이 확실하며, 전·현직 내무부장관, 이영천 현 치안본부장, 검찰 관계자의 개입 또는 묵인도 규명돼야 한다. -



박종천 군의 사망 경위는 물론, 사건의 축소, 은폐시도까지 모든 것이 그야말로 누가 만들어 낸 것처럼 치밀하고 철저했기 때문이다.



- 국회에서의 국정조사권 발동과 공개 재수사를 요구한다. -



내외신 기자들은 김승우 신부가 일부러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는 성명서를 받아 적기도 벅차보였다.



- 우리 사회가 진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 있다. -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자신들의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기자들의 눈치 게임이 시작됐다.



- 1987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회 -



성명을 발표하는 당사자의 명의가 하늘의 계명처럼 단상 아래로 떨어지자, 기자들의 양보 없는 질주가 시작됐다.


나는 내 옆의 기자에게 잽싸게 길을 비켜주며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목격했다.


성당 입구에서 미리 복사된 성명서가 그제야 배포되고 있었으나, 속기를 마친 기자들의 질주는 혹시 몰라 성명서를 낚아채면서도 멈출 줄을 몰랐다.



‘허.. 그 영화를 잘 만들긴 했구나. 하긴, 핸드폰이 없는 시대니, 당연히 공중전화 쟁탈전을 해야겠지. 쩝.. 이거 막상, 이 자릴 지켜보니 기분 참 이상하네..’



나는 나도 모르게 올라탔던 의자에서 내려오며 옷을 털었다.


순간, 내 앞의 그놈과 멀찍한 곳의 저 놈이 나를 향해 움직이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가장 먼 곳에 계시던 추기경님의 손짓도 거의 동시에 시야로 들어왔다.


추기경님은 곁에 있던 사제들을 무슨 이유에선지 만류하는 것 같았다.



‘그놈과 저놈이야 어떻게든 날 연행하려는 걸 테고. 근데, 추기경님은 왜..’



나는 오랜 도피 생활로 발달한 초감각적인 시야로 단숨에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저.. 중안 일보의 이대기 기자입니다. 잠시 인터뷰 좀..”


“동하 일봅니다! 김주혁씨? 한국대학교 2학년 맞습니까? 고문 사실도 확실하고요?”


“헤이, 미스터 킴! 마이 네임.. ”



녹슬었다. 아무리 사람들이 뒤엉켜 빠져 나오고 있어도, 이토록 가깝게 접근할 때까지 눈치를 못채다니.


정말 놀라운 직업정신에 경이로운 순발력이다.


물론 나는 전생의 기억으로 잠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지만 말이다.


외신 기자들을 포함한 예닐곱의 기자들이 쉴 새 없이 내게 질문을 쏟아냈다.


번쩍거리는 카메라 플래시에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답했다.


앞으로 내가 수도 없이 격어야 할 상황이고, 이 시대엔 제대로 개념조차 없을 테지만, 이미지는 정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그놈과 저놈이 보인다.


마지막까지 뭔가 석연치 않은 눈빛을 뚝뚝 흘리고 가는 놈들이다.


멀리, 나처럼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김승운 신부가 보이고, 더 뒤쪽으로 이제 막 돌아서는 추기경님이 보였다.


왠지 이 거리에서도 나를 보고 빙그레 웃으시는 것 같은 느낌이 진하다.



‘그나저나, 이놈의 인터뷰는 언제 끝나지?’



스테인 글라스로 둘러싸인 명동성당의 높은 천장이 아득하다.




***




얼마 후.


간신히 기자들의 등쌀에서 풀려난 나는 상계동 천막 농성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어이. 김주혁!”



에이 썅.. 정말 창의력 없고 식상한 놈들. 역시나 그냥 갈 리 없는 그 놈과 저놈이다.



“너야 그렇다 치고, 이렇게 대형 사고를 치고도 니네 할망구는 괜찮을까? 요정 집 기생 노릇하기도 바쁜 것 같은데..”



놈들. 그새 전화질로 내 뒷조사까지 끝냈다. 하지만.



‘이런 개호로 X노무 새끼들이 감히 어따 대고 할망구야, 할망구가! 그건 나만의 애칭이고, 그녀의 삶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담은, 후.. 가만. 그래도 내가 어른인데..’


“그냥, 가지. 괜히 처 맞고, 후회하지 말고.”



감출 게 없을 때의 나는 니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정도의 뜻은 전달이 됐을까? 했는데.



“하.. 나 요 새끼, 요거 말하는 싸가지 보소. 어린노무 새끼가 그냥 확!”



하.. 어린노무 새끼가 말하는 싸가지를 보니 못 알아들었다.


나는 녀석이 위협한답시고, 치켜든 손가락 ‘V’를 움켜쥐었다.


그리곤.



“짝!”



저놈.. 그러니까 40대 아저씨 되시겠다. 저 놈의 주둥이를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크억!”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몸 쓰는 현장 직은 절대 아닐 것 같은 저놈의 비명소리가 나의 짝 소리와 반 템포 차이를 두고 공명한다.


그러자 처음부터 이 자리를 원치 않았던 것 같았던 그놈.. 그러니까, 행동대장 놈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지금부터 잘 들어. 일단. 누군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려면, 최소한 니가 먼저 누군지 밝히는 게 순서야. 아까 형이 성당에서도 가르쳐 줬지?”



나는 보란 듯이 험악하게 내가 가진 모든 살기를 드러냈다.



‘우선,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놈들이 안기부인지, 보안사인지, 치안본분지 어디 한 번 확인부터 해볼까?’



나는 손가락이 꺾여 이도저도 못하는 저놈을 향해 씨익 웃어줬다.



“너.. 너 이 새끼 우리가 누군지 알아?”



아니다. 너무 뻔한 니 대사에 생각이 바뀌었다. 누군지는 알아서 뭐해? 어차피 이젠 니네 신문사 사장이 와도 못 막아.



“너네? 응. 알아. 여기 목에 걸려있네. 이거 기자증 아냐? 백전 일보. 나판수 기자. 여기 들어오시느라 총은 못 가져온 것 같고.. 자, 그럼 그냥 맞자.”



나는 놈의 목에 걸려 있는 기자증을 읽어주곤 던져버렸다.


놈의 눈이 놀라 다급히 그놈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미 나의 힘을 경험한 그놈은 그저 어쩔 줄 몰라 할 뿐, 꼼짝 조차 하지 못했다.



“어.. 야, 야! 그래! 너 이 새끼 어디 어른한테..”


‘에혀. 생각해 낸 게, 겨우..’



뻑 하면 어른이고, 불리하면 어른이지. 뭐, 그거야 나도 그러니까 이해는 한다만.



“네. 네. 그 어른이 우리 할머니 욕을 해대서, 요 패악하고 드러운 입술을 교육중입니다요.”


“짝! 짝! 짝! 짝!”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놈들이 대놓고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거나 프락치를 심었다는 것을 인정할 리 없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신분을 밝힐 상황이 돼도, 어차피 이곳에 있었던 사실은 없던 일이 될 거다.



“그러니까 닥치고 처 맞아. 아, 그리고 몸뚱어리 펄럭대지 말라고 고여 놓은 대가리가 아니면, 너희도 생각이라는 걸 좀 해봐.”



나는 놈의 입이 퉁퉁 부을 정도로 짝짝대곤, 다시 타격점을 바꾸기 위해 친절하게 놈의 목을 돌려 줬다.



“여기서 날 어쩌지 못하면 밖에 나가서 어쩔 수 있겠어? 니들 신분이 뭐건 여기 들어왔다는 게 밝혀지면 더 곤란해 질 텐데?”



역시 놈의 눈이 부정을 못한다.


그래. 그래서 슬프게도 눈물이 차오르는 거겠지.



“이.. 이 X얼 노미.. 너 내가 나가믄 저말..”



발음만 뭉개지는 걸 보면, 입술이 터지지 않게 잘 때렸다. 그럼 이제 좀 더 통증이 남는 곳을..



‘빡! 빡! 빡! 빡!..’


“컥! 아흑! 악! 악!..”


‘새끼. 더럽게 꽥꽥거리네.’



삼정의 이재훈처럼, 힘의 차이가 분명한 경우엔 이곳이 때리기 좋은 곳이다. 모멸감과 통증이 적당히 남는 부위지.


깡패도 나 정도의 프로 의식이 있는 놈이면 이렇게 운동과 무예 공부를 절대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게 곧 밑천이고, 생존법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나를 어떻게든 해 볼 생각이었으면, 더 진작 했어야지. 신부님들한테 그 지랄을 해서 주목까지 받은 놈들이 국내외로 사진 다 찍히고, 인터뷰까지 한 나를 어떻게 할라고?”



플러스. 말싸움은 나의 기질과 김주혁의 명석한 두뇌가 만들어낸 크로스 오버다.



“왜에? ‘아, 예. 저희가 대공부서 공무원인데요. 이 분이 간첩새끼라서 잡아가요. 그니까 죽이든 말든 신경 끄세요.’ 하면 사람들이..


‘아, 예. 그러시구나. 그럼 고생하세요.’ 할 것 같아? 정신 차리고 똑똑히 지켜봐. 이제 여길 떠난 진실이 어떤 태풍이 되는..”



내가 저놈에게 친절하게 앞날을 예언해주던 그 순간.



‘다다닥.. 퍽!’


‘어라. 그놈?’


‘쿵.. 털썩!’



그놈이 달려와 냅다 내게 태클을 했다. 그리곤, 내가 쓰러진 틈을 타 부리나케 저놈을 데리고 튄다.



‘얼씨구! 꼼짝도 못할 줄 알았더니, 그 정도 의리는 있어? 허!..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아직 어른 말씀도 안 끝났구만..’



나는 불의의 일격에 잠시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풉! 큭.. 큭큭큭큭. 아하하하하!”



개 같은 내 전생의 입장이 바뀐 탓일까?


무심코 터져 나오는 헛웃음에 속이 다 후련하다.


뭐, 못 다한 내 말이야 이제 지들이 직접 확인하면 될 테고, 어차피 개들이야 때가 되면 주인에게 돌아가는 법이니 구태여 쫓을 필요도 없다.


그래. 없는데.. 갑자기 내 깔끔한 수트 여기저기에 묻은 흙먼지가 대단히 신경 쓰인다.



‘에이, ㅆ.. 먼지.’



나는 이내 미친놈처럼 정색을 하며 짜증을 내다가, 신경질적으로 옷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누군가가 그런 내게 손을 내밀었다.




* 본 작품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모티브로 한 것이나, 등장 인물이나 단체의 이름, 역사적 사실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 된 픽션임을 밝힙니다.

* 공모전 참여 중입니다. 많은 관심과 추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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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32화 6월 항쟁 (7) 23.05.25 172 6 9쪽
32 31화 6월 항쟁 (6) 23.05.25 163 6 10쪽
31 30화 6월 항쟁 (5) 23.05.24 168 5 9쪽
30 29화 6월 항쟁 (4) +2 23.05.24 174 6 9쪽
29 28화 6월 항쟁 (3) +4 23.05.23 181 6 9쪽
28 27화 6월 항쟁 (2) 23.05.23 189 7 10쪽
27 26화 6월 항쟁 (1) +1 23.05.22 194 8 9쪽
26 25화 6월 10일 (5) 23.05.22 202 8 9쪽
25 24화 6월 10일 (4) 23.05.21 193 7 11쪽
24 23화 6월 10일 (3) +1 23.05.21 210 7 12쪽
23 22화 6월 10일 (2) 23.05.20 202 8 11쪽
22 21화 6월 10일 (1) 23.05.20 228 8 10쪽
21 20화 아! 이한율!!(6) +1 23.05.19 227 7 9쪽
20 19화 아! 이한율!!(5) +1 23.05.19 221 7 10쪽
19 18화 아! 이한율!!(4) +3 23.05.18 224 7 9쪽
18 17화 아! 이한율!!(3) +4 23.05.18 225 7 10쪽
17 16화 아! 이한율!!(2) +1 23.05.17 232 6 9쪽
16 15화 아! 이한율!! (1) +4 23.05.17 262 7 9쪽
15 14화 태풍 속으로 (5) +2 23.05.16 271 8 9쪽
14 13화 태풍 속으로(4) +3 23.05.16 271 9 9쪽
» 12화 태풍 속으로(3) +1 23.05.15 265 8 11쪽
12 11화 태풍 속으로(2) +1 23.05.15 273 9 9쪽
11 10화 태풍 속으로(1) +1 23.05.14 318 1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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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7화 시국사범 (3) +2 23.05.13 337 11 10쪽
7 6화 시국사범 (2) +1 23.05.12 356 10 11쪽
6 5화 시국사범 (1) +1 23.05.12 417 1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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