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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韓山) 님의 서재입니다.

1987 미안해 아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대체역사

한산(韓山)
작품등록일 :
2023.05.10 12:14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6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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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3
추천수 :
385
글자수 :
274,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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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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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7화 시국사범 (3)

DUMMY

녀석이 얼굴을 붉혔다. 나는 물끄러미 그것들을 바라봤다.


하나는 두껍긴 해도 평범한 스프링 노트에 직접 적은 것 같았고, 다른 하나는 네모반듯하게 꼬아 접은 메모였다.



“고맙다. 쉽지 않았을 텐데.”



그래. 쉽지 않았을 거다.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경찰들을 피해 이걸 숨겼다는 건, 가슴이 콩닥거리고, 입술이 바짝 마르는 일이었을 테니까.


나는 녀석이 건네주는 노트와 메모를 받으며, 녀석의 눈을 향해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곤 돌아앉아 꼬아놓은 메모부터 풀었다.


녀석과의 남은 얘기는 천천히 해도 될 일이었지만, 왠지 이것들만큼은 지금 당장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녀석은 잠시 나를 살피다가, 눈치껏 방문을 닫고 물러섰다.


나는 멀어져 가는 녀석의 발소리를 들으며, 메모를 펼쳤다.



- JC 하산. 산악부 당분간 산개 후 대기요망. 새 부원 입부 시까지, 점으로 연락. JH -



언뜻 이해하기 힘든 문장.. 한 번에 읽히지 않는 글이다.


나는 갸우뚱하며 절로 기울어지는 고개를 세워, 무심코 다음 노트를 폈다.


일기다.


김주혁의 일기. 그런데..


내가 일기를 펼쳐 읽기 시작하자, 동시에 전혀 새로운 기억들이 빛의 속도로 쏟아져 들어온다.


마치 빛바랜 사진들이 선명해지듯, 내가 생각해서 써내려간 기억들이 눈에 선하다.


더불어 그 많은 기억들을 가능케 했던 온갖 서적과 배경지식들, 감각과 정서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불처럼 되살아난다.


나는 순식간에 그 일기를 독파하곤, 무언가에 홀린 듯 그의 가난한 공간을 뒤졌다.


그리곤 이내 이곳에 들어왔을 때 언뜻 본 것 같았던 물건.


청암정의 내 서재에 있던 것과 똑같은 솜씨로 정리해둔 그의 신문 스크랩을 들어 펼쳤다.



‘설마..’



85년 7월.. 86년, 87년..


미친 듯이 훑어 넘기는 곳마다 어렵지 않게 원하는 기사를 찾아냈다.


심지어 몇몇 기사는 날짜마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어 시선을 돌린 그의 책장에도 외울 수도 있을 것 같은 수많은 책들이 위치까지 정확하게 기억난다.


남영동의 수사관들이 개판으로 어지럽힌 이 방을 손톱 깎기, 이쑤시개 하나까지 제자리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먼저 읽은 메모의 내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JH는 박종훈. 한국대학교 민주화 추진 위원회의 재건을 준비하며, 수배 중인 시국사범이다.


JC는 안타깝게 숨진 박종천 군. 박종훈의 후배이자, 자신의 집을 찾은 그로부터 조직 재건을 위한 연락책 임무를 전달받았다.


산악부는 그들의 조직을 뜻하는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새 부원은 새로운 연락책이다.


하산은 경찰에 연행되는 것.


점으로 연락한다는 것은 개별적이고 은밀한 접선을 말하고..


박종훈의 경우, 조직의 책임자이므로 자신이 직접 접촉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그 메모를 김주혁이 가지고 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얘들하고 한 식구였다? 심지어 얘들 조직의 분과장이고? 근데, 뭐? 직함이.. 반제국주의, 반파쇼.. 민족, 민주화 투쟁 위원회, 위원장? 염병.. 물에 빠진 위원장 동지 구하려다가 지레 죽겄네. 지레 죽겠어. 하.. 지랄이다. 이걸 어쩐다..’


나는 전생의 내 조직과는 다르지만, 다시 돌아온 조직 생활에 눈살을 찌푸렸다.


새파랗게 젊은 청춘들이 자신들의 목숨과 미래를 걸고 싸우는 빌어먹을 희망의 전장이다.


하지만.



‘이봐. 김주혁 군. 자네가 뭘 선택했는지는 잘 봤어. 봤는데.. 미안하지만, 나는 결코 자네들처럼 싸울 생각은 없어. 왜냐하면..’



적어도 싸움에 있어서만큼은 난, 나만의 방식이 있으니까.


우드득 이를 악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은혜건 원수건 빚이 있으면 반드시 갚아야한다.


그건 유치원에서도 배우는 것이고, 나 같은 깡패새끼도 알고 있는 최소한의 도리니까.


나는 하숙집을 나서다 말고 안주머니에서 100만 원짜리 묶음 하나를 꺼냈다.



“아줌마 드려. 죄송하다고 꼭 말씀드리고, 가끔 우리 고기나 구워 먹자고 해.”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조심스럽게 나를 따라 나오던 녀석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데요. 이거 받으면 엄마한테 혼나요. 저.”



당황한 녀석이 손사래를 치곤 부리나케 손을 숨긴다.


요새 애들 같으면 당당하게 수수료를 요구할 텐데, 괜히 순수하게 배웅 나오던 마음이 미안해진다.



“받아. 알다시피 내가 맨날 이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녀석의 손을 찾아 꾸역꾸역 돈다발을 쥐어줬다.


그리곤 반대쪽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자. 이건, 니 꺼. 이거면 너 갖고 싶다던 일제까진 못 사도, 삼정 거는 될 거야. 그래도 한국 사람인데, 한국 거 써야지.”


기억한다. 녀석은 평생의 소원처럼 일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아이야’를 가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에게도 분명한 선이 있다.


지금 내가 건넨 이 10만 원이면, 일제는 못 사도 삼정전자의 ‘내 내’ 정도는 충분할 거다.


이 시대면 그 정도도 훌륭하고, 언제나 넘치는 건 부족함만 못하니까.


더더욱 김주혁의 일기와 메모를 지켜준 대가라지만, 어느 날 갑자기 생긴 돈은 조심하는 게 좋다.


나처럼 충분히 각오를 했더라도 말이다.



“쌤.. 근데, 어디 가시는 거 아니죠? 와 꼭 안 볼 사람처럼..”



녀석의 손이 슬그머니 용돈을 받고 사라진다. 훗. 깜찍한 녀석.



“가긴 어딜 가? 너 과외 시켜서 대학 보내고, 하숙비 벌어야 하는데.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준 과제나 또박또박 해놔. 다음 주에도 시험 칠거니까.”



앞으로 벌어질 일은 생각조차 못한 채, 나는 녀석에게 너무 당연한 일상을 얘기했다.



“아니 뭐, 전 그냥.. 근데, 쌤. 이정도면 쌤 과외 같은 거, 안 해도 되지 않아여?”



녀석의 허리 뒤에서 내가 건넨 돈다발이 팔랑거렸다.



‘그렇지. 솔직히 김주혁이면 몰라도 나는 하기도 싫고. 하지만..’


“아니, 해야 돼. 세상 모든 일을 돈 때문에 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녀석에게 대수롭지 않게 답을 하곤 다시 길을 나섰다.



“아, 맞다! 쌤, 그럼 저 이번에도 쪽지 시험 잘 치면, 영화 보여줄 거에여? 저는 쌤하고 둘이 ‘미쑌’ 보다는 ‘아웃오브 동아프리카’ 보고 싶은데.. 거서 로버트 래드포터하고 매립 스트릴이 연인으로 나오는 데여, 실재로는 띠 동갑이 넘는 데여...”



녀석이 배웅이랍시고, 내 뒤를 따라 나오며 참새마냥 짹짹거렸다.



‘속이 빤하다, 깜찍아. 그래도..’


“아웃오브 동아프리카는 안 돼. 우선 미성년자 관람불가고, 내가 너랑 로맨스를 보는 건 범죄니까.”



나는 녀석에게 최대한 건조하게 답을 했다.


문 밖까지 따라 나온 녀석의 표정이 순식간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이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미쑌이면 생각해 보자. 음악도 그렇고, 거룩하니 아주 좋을 것 같네. 그럼.. 쌤, 간다.”



나는 녀석의 기대에 절반만 호응을 하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녀석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환해졌다.


영화 때문인지, 돈 때문인지.


어느새 다시 돈을 꺼내서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세고 있는 녀석을 뒤로 하고, 나는 하숙집 골목을 벗어났다.




***




대로변으로 가기 전, 이어진 골목에 아무렇게나 세워둔 내 차가 보인다.



‘역시나.. 이상 없다. 쳇. 이런 건 또 편하네.”



하긴, 시내 중심가가 아니면 아직까진 대로변에 그냥 주차를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이다.



“덜컥. 탁!”



나는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랐다. 그런데..



“달칵. 탁!”



거의 동시에 누군가가 뒷좌석으로 몸을 던진다.



‘뭐지? 누가..’



나는 소리 이전에 느낀 기척에 시선만 들어 룸미러를 봤다.


상대가 모르는 상태에서 몸을 돌리는 행위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내가 칼 맞는 순간일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물론, 그건 불시에 공격을 당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사람에 한해서지만.



“...”



앞자리의 시트 뒤로 바짝 몸을 숨겼는지 놈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미세하게 숨소리가 들린다. 적의가 없는 숨소리..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무언가에 쫓기는 소리가 분명하다.



“뭡니까? 왜 남의 차에 맘대로..”


“야, 이런 생각을 어떻게 했냐? 일단 빨리, 빨리 차부터 가자.”



나의 당연한 항변은 다급하고 은밀한 목소리에 잘려나갔다.


좋다. 다 좋은데..



‘이게 뒤질라고 언제 봤다고 반말지거리를..’



나는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놈의 모가지를 비틀고 싶었지만.


우선은 놈의 말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참자.. 일단 뭐하는 놈인지, 어떤 사인지 모르니까. 내가 참지. 응, 그래. 참을 수 있어.’



나는 골목을 마저 빠져 나오면서 분을 삭였다.


그런데 반사적으로 확인한 룸미러에, 차 밖으로 놈이 아닌 다른 것들이 보였다.


마치 지금 내 차에 탄 놈을 미행하다가 놓친 것처럼.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창의력 없게 남의 집 입간판을 걷어차는 머저리들이.



‘뭐야? 이 익숙한 그림은..’



나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차를 몰았다.


누구나 모르는 상황에선 긴장하기 마련이고, 긴장은 결정적인 빈틈이 되니까.


어쨌든, 차는 이윽고 대로에 올라 안정적인 주행을 보였다.



“그만 나오지. 다음부턴 미행을 떼려고 타지 말고, 뗀 다음에 타고.”



내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게 누구든 이런 경우엔 기선 제압이 우선이다.



“야, 넌 임마, 아무리 사석이라도 어디 형한테 반말지거리를..”



놈이 대단한 고비라도 넘긴 듯,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나는 룸 밀러를 통해 놈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염병. JH, 박종훈이다.


내 기억에 놈이 나보다 2년 선배였다.



“반말지거리는 그 쪽이 먼저..”



나는 무심히 전방을 주시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다시 룸미러를 통해 놈의 용모를 살폈다. 그런데.



‘이 새끼,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김주혁의 기억이 아니었다.




* 본 작품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모티브로 한 것이나, 등장 인물이나 단체의 이름, 역사적 사실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 된 픽션임을 밝힙니다.

* 공모전 참여 중입니다. 많은 관심과 추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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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3화 설계된 엔딩 (1) 23.05.26 164 5 9쪽
33 32화 6월 항쟁 (7) 23.05.25 172 6 9쪽
32 31화 6월 항쟁 (6) 23.05.25 163 6 10쪽
31 30화 6월 항쟁 (5) 23.05.24 168 5 9쪽
30 29화 6월 항쟁 (4) +2 23.05.24 174 6 9쪽
29 28화 6월 항쟁 (3) +4 23.05.23 181 6 9쪽
28 27화 6월 항쟁 (2) 23.05.23 188 7 10쪽
27 26화 6월 항쟁 (1) +1 23.05.22 194 8 9쪽
26 25화 6월 10일 (5) 23.05.22 202 8 9쪽
25 24화 6월 10일 (4) 23.05.21 193 7 11쪽
24 23화 6월 10일 (3) +1 23.05.21 210 7 12쪽
23 22화 6월 10일 (2) 23.05.20 202 8 11쪽
22 21화 6월 10일 (1) 23.05.20 228 8 10쪽
21 20화 아! 이한율!!(6) +1 23.05.19 227 7 9쪽
20 19화 아! 이한율!!(5) +1 23.05.19 220 7 10쪽
19 18화 아! 이한율!!(4) +3 23.05.18 224 7 9쪽
18 17화 아! 이한율!!(3) +4 23.05.18 225 7 10쪽
17 16화 아! 이한율!!(2) +1 23.05.17 232 6 9쪽
16 15화 아! 이한율!! (1) +4 23.05.17 262 7 9쪽
15 14화 태풍 속으로 (5) +2 23.05.16 271 8 9쪽
14 13화 태풍 속으로(4) +3 23.05.16 271 9 9쪽
13 12화 태풍 속으로(3) +1 23.05.15 264 8 11쪽
12 11화 태풍 속으로(2) +1 23.05.15 273 9 9쪽
11 10화 태풍 속으로(1) +1 23.05.14 318 10 11쪽
10 9화 시국사범 (5) +3 23.05.14 317 9 11쪽
9 8화 시국사범 (4) +1 23.05.13 323 8 10쪽
» 7화 시국사범 (3) +2 23.05.13 337 1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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