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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韓山) 님의 서재입니다.

1987 미안해 아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대체역사

한산(韓山)
작품등록일 :
2023.05.10 12:14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6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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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5
추천수 :
385
글자수 :
274,795

작성
23.05.14 08:30
조회
317
추천
9
글자
11쪽

9화 시국사범 (5)

DUMMY

형님의 두 눈이 불안하게 나와 입구 쪽을 오갔다.


내가 덩달아 시선을 옮기자, 이내 형님이 나를 향해 자세를 낮췄다.



“당신이 알고 있는 산악부라는 말과 지금 이 상황이 어울린다고 봅니까? 나는 당신의 말에 심정적인 동의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심정적인.. 뭐, 뭐요? 아.. 이해가 안돼서 못 믿겠다?’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다. 그동안 의지만큼은 정말 많이 회복한 것 같다.



“괜찮을 겁니다, 선배님. 그리고 저는 선배님 직속 후배. 국사학과 83학번 김주혁이라고 합니다. 현재 민민투(민족민주화 투쟁위원회) 위원장이고요.”



나는 소장실 입구를 바라보며 형님의 불안감을 다독였다. 그리곤 최대한 담백하게 내 소개를 했다.


솔직히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형님에게



‘뭐, 마음에 안 드시겠지만.. 이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죠. 네. 암요.’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이니 참기로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상황을 내가 심정적으로 동의..”



아, 근데 원래 이렇게 에둘러 말씀하시던 분이었나?


그때 나한텐 엄청 강하게 말씀하신 거였구나.



“부끄러운 얘기지만, 집에 돈이 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들의 시선을 피하는 덴 돈하고, 미국만 한 게 없으니까요.”



사실이다.



때문에 돈이야 없어서 못 썼지만, 콜라조차 미제의 똥물이라고 먹지 않던 운동권 학생들이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영어로 도배된 옷을 입고 다니고, 미국 잡지를 가슴에 안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설픈 미제국주의 코스프레 대신 미국차를 타고, 수백만 원을 떡값으로 질러줄 만큼 돈도 많은 지금의 내 모습은.. 그래. 심정적인 동의가 일어날 턱이 없지.


그래도 속은 후련하다. 하고 싶던 말을 그나마 비슷하게라도 내뱉었으니까.


씁쓸한 건, 이대로라면 돈 타령은 몇 십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 정도다.



“후.. 집에 돈이 있는 게 왜? 그 돈을 모은 방식이 부끄럽지 않으면 되고, 잘 쓰면 될 일.”



다행이다. 그나마 말이 짧아졌다. 대신 뜨끔할 정도로 날카롭다.


형님에겐 우리 할망구가 태원각 주인이라는 건 당분간 비밀이다.



“종천이 얘기를 들었네. 종천이도.. 종천이도 그랬을 거야. 위장엔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채로, 스산한 어둠과 미련한 물만 가득 채워져 있었겠지. 부검할 때, 주의 깊게 본 사람이라면 그걸 모를 리 없지. 그래서.. 그래서 기억되고, 기록 돼야 해."


"‘탁’하고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그걸 발표랍시고 내놓고, 같은 패거리에 불과한 검찰조사는 불필요하고 불명예스럽다고 주장하는, 저 인두겁을 뒤집어 쓴 뻔뻔스러운 것들을.

그리고.. 그 진실을 알리고 분노하는 모든 이들의 노력을 무자비하게 초전박살, 초동 진압 해버리는 저 폭력, 저 적대행위 앞에서! 한없이 외로워지고, 더러워지고, 추악해졌던 우리들을!"


"후.. 반드시 종천이의 억울한 죽음과 함께 기록해야 하네. 자네, 비참하고, 비루한 게 뭔지 아나? 생각할수록, 점점 선명하고 날카롭게 찔려오는 그건..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아있다는 생각일세. 이 염치없고 끈적끈적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죽지 않았구나.’ 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그래. 이런 나조차도 기록되고, 기억돼야 한단 말일세.”



형님이 운다.


철의 의지를 가진 민주주의자, 민주화 운동의 대부는 오간데 없고.


그저 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고 싶은 처절한 그의 속사람이 서럽게, 서럽게 운다.



“저도 살아있습니다. 비록 단 하루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도 살아서 여기 선배님 앞에 있습니다.”



나는 단지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사력을 다해 있는 힘껏 무심해져야지만 간신히 버틸 것 같은.. 그의 오열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형님은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단지 소망했다.


조금의 동질감과, 무력했던 서로에 대한 더 조금의 용서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지만, 선배님.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래서 저는 더욱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록도 기억도, 결코 살아 있는 사람이 끊임없이 밝혀 주장하는 것만은 못하니까요.”



나는 내 멋대로 형님의 동의를 얻은 것처럼 단언했다.



“자네도.. 자네도 살아나왔다?”



확인하고 싶으신 게 무얼까?



“네. 비록 하루였지만요. 고문의 흔적을 지워 종천이의 죽음을 덮기 위한 조치였나 봅니다.”



위로를 바라지 않는 나의 태도 때문일까? 아니면, 보시기에 나이답지 않게 시종일관 차분한 나의 말투 때문일까?



“그랬겠지. 이미 의혹들은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으니, 한 번이라도 보도지침을 어긴 신문들은 이제 멈출 수 없을 거야. 물러서면 갈 곳이 없으니까.”



어느새 마음을 진정시킨 형님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그래. 가끔씩 보이는 형님의 저 눈빛에 왠지 가슴이 뛰었었지.



“해서, 자네가 여기까지 나를 찾은 이유가 뭘까?”



다행이다. 김태근은 죽지 않았다.



“글쎄요..”



하지만, 나는 말끝을 흐렸다.


미친놈이 아닌 이상 죽기 전부터 보고 싶었다는 말은.. 또 왜 보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다는 말은 다시 죽어도 할 수 없으니까.


다만.



“희망은 무엇입니까?”



묻고 싶었다.


믿음, 소망, 사랑만큼이나 귀하고, 귀하게 여기던 그놈의 희망을.



“희망?”



형님의 미간이 구겨진다.


뜬금없겠지.


평생 그저 주인처럼만 살고 싶었던 개새끼에게 그 ‘희망’이라는 말과 함께 왜 김태근, 당신이 떠올랐는지.. 당신은 모를 테니까.



“훗. 나야말로 글쎄 군.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네. 자네가 생각하는 희망이 무엇이든. 그 희망은..”


“힘이 아주 세다는 얘기라면 사양하겠습니다.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대책 없는 희망은 고문일 뿐이라고.”



누군가가 누군지는 다 안다.


시대가 그렇게 말하고, 청년들이 그렇게 말하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았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형님은 당신의 말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처럼 잘라먹은 나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속내를 읽어낸 내가 오히려 대견하다는 듯이.


그래. 나도 저런 미소를 가진 사람이고 싶었다.


그 참혹한 일들을 겪고도 절대 개새끼로 전락하지 않는 긍지. 그걸 닮고 싶었다. 그래서..


닮기 위해서라도 꼭 한번은 형님을 다시 만나고 싶었나 보다. 어쩌면 나에게 희망이라는 것은 당신 자체였으니까.


그리고 이제 난, 하필이면 또 지독하게 당신을 닮은 김주혁 군에게도 의리를 다하려 한다.


쳇! 나 하나가 아니라, 모두가 주인으로 사는 세상? 그게 희망이고, 그게 된다고?


좋다! 까짓 거.. 어차피 그거야 꼭대기까지 가보면 알 수 있겠지. 그래! 어디 한번 가 보자!


단, 무조건 내 방식대로 간다.


미래를 아는 입장에서 두 번 다시 당신들이 그렇게 잊혀지고, 이용 되는 꼴은 못 보니까.



“정치를 할 겁니다. 도와주시죠.”


“정치?”


“선배님께서 늘 말씀하셨다시피. 익명의 다수가 마음속에 갖고 있는 민주주의와 평화, 평등에 대한 열망이 터져 나왔을 때, 세상이 바뀌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것을 더 폭발적으로 모아내고 유지할 수 있는 정당과 정치인이 필요합니다. 그 익명의 다수를 배신하지 않고, 더불어, 함께 주인으로 공존할 수 있는 정당과 정치인 말입니다.”


“하.. 지금은 그런 정당도 정치인도 없다?”


“있다고 해도 바뀔 겁니다. 그게 사람이니까요.”


“뭐?”


“그래서 제가 대책 없는 희망은 고문이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 희망이 사람이라면 재고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비단 정치인들뿐만이 아닙니다.”



마음을 정한 나는 언제나처럼 망설이지 않았다.


솔직히 결국은 각자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게 여론이고, 정치가 아닌가.


누가 내 집값 떨어지게 만드는 놈한테 표를 주며, 누가 세비 아껴가며 마르고 닳도록 국가에 헌신을 할까.


그렇다면 필요한 건 적어도 선을 넘지 않는 놈이다. 함께 쟁취한 주인의 자리를 공유할 수 있는 양심을 가진 놈.


그래. 그 정도면 내가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살아난 나에게 운명이 말하고 있다.


어차피 이 시기를 전후해서 대통령은 물론 수많은 대권 잠룡들이 민주화를 등에 없고 스타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김주혁의 경력을 그들에게 꿀리지 않고, 밀리지 않게 관리하며, 만들면 될 일.


아닌 척 호박씨나 까는 놈보단, 차라리 나처럼 대놓고 하고, 솔직하게 나누겠다는 놈이 낫다.



“동의 할 수 없네. 무엇보다.. 사람만이 희망이고, 그 희망은 힘이 세다는 게 나의 믿음이니까.”



역시나 우리 형님.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다. 하지만.



“네. 선배님 같은 분이시라면 희망이지요. 힘도 세고.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20여일을 넘게 고문 받으면서, 다른 이들을 위해 그 날짜와 시간, 내용까지 기억해뒀다가 증언하는 그런 거.. 이미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침없는 나의 말에 형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래서 자네가 하고자 하는 정치란 게 무엇인가?”



형님의 질문에 노기가 서린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보통사람들은 형님처럼 못 사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건, 조금은 보통사람들의 욕망에 충실한 정치를 해야겠다는 겁니다. 나머진 선배님이 가르쳐주시고, 도와주시죠.”



나는 할 말을 다했다. 남은 건 이제 나의 균형추가 되어 주실 형님의 대답이다. 대답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먼저 나는 정치에 뜻이 없고. 보다시피 지금은 그럴 능력도 상황도 되지 않네. 더더욱 자네 생각과는 달리 재야의 정치인들 중엔 꽤 믿을 만한 분들이 여럿 계시네. 먼저 그 분들을 만나보게.”



죄송하지만 영 시원치 않다. 아니, 외람되게 그리 말 할 수는 없으니 갑갑하다고 해야 하나?



“좋습니다. 그럼 확인 하십시오.종천이의 죽음과 별개로 지금의 재야 정치권은 신국민주당을 중심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정황상 분명히 군부는 이에 대한 대책을 내놓을 것이고, 그건 종천이의 고문치사 사건과 맞물려 거대한 국민적 저항에 부딪칠 겁니다. 그러면 결국 직선제는 쟁취할 테지만, 그걸로 끝이 날까요?"


"우선 선배님이 말씀하신 그 믿을만한 재야 정치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보십시오. 앞으로도 주구장창! 그 많은 운동권 출신들이 저들도 그저 얄팍한 인간일 뿐임을 확인시켜주겠지만! 그전에 아마도 YS와 DJ가 먼저 나서서 확인 시켜줄 겁니다.”




* 본 작품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모티브로 한 것이나, 등장 인물이나 단체의 이름, 역사적 사실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 된 픽션임을 밝힙니다.

* 공모전 참여 중입니다. 많은 관심과 추천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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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34화 설계된 엔딩 (2) 23.05.26 151 5 9쪽
34 33화 설계된 엔딩 (1) 23.05.26 164 5 9쪽
33 32화 6월 항쟁 (7) 23.05.25 172 6 9쪽
32 31화 6월 항쟁 (6) 23.05.25 163 6 10쪽
31 30화 6월 항쟁 (5) 23.05.24 168 5 9쪽
30 29화 6월 항쟁 (4) +2 23.05.24 174 6 9쪽
29 28화 6월 항쟁 (3) +4 23.05.23 181 6 9쪽
28 27화 6월 항쟁 (2) 23.05.23 189 7 10쪽
27 26화 6월 항쟁 (1) +1 23.05.22 194 8 9쪽
26 25화 6월 10일 (5) 23.05.22 202 8 9쪽
25 24화 6월 10일 (4) 23.05.21 193 7 11쪽
24 23화 6월 10일 (3) +1 23.05.21 210 7 12쪽
23 22화 6월 10일 (2) 23.05.20 202 8 11쪽
22 21화 6월 10일 (1) 23.05.20 228 8 10쪽
21 20화 아! 이한율!!(6) +1 23.05.19 227 7 9쪽
20 19화 아! 이한율!!(5) +1 23.05.19 220 7 10쪽
19 18화 아! 이한율!!(4) +3 23.05.18 224 7 9쪽
18 17화 아! 이한율!!(3) +4 23.05.18 225 7 10쪽
17 16화 아! 이한율!!(2) +1 23.05.17 232 6 9쪽
16 15화 아! 이한율!! (1) +4 23.05.17 262 7 9쪽
15 14화 태풍 속으로 (5) +2 23.05.16 271 8 9쪽
14 13화 태풍 속으로(4) +3 23.05.16 271 9 9쪽
13 12화 태풍 속으로(3) +1 23.05.15 264 8 11쪽
12 11화 태풍 속으로(2) +1 23.05.15 273 9 9쪽
11 10화 태풍 속으로(1) +1 23.05.14 318 10 11쪽
» 9화 시국사범 (5) +3 23.05.14 318 9 11쪽
9 8화 시국사범 (4) +1 23.05.13 323 8 10쪽
8 7화 시국사범 (3) +2 23.05.13 337 1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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