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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공장 님의 서재입니다.

격동의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창작공장
작품등록일 :
2021.11.22 10:37
최근연재일 :
2022.03.23 10:50
연재수 :
191 회
조회수 :
334,345
추천수 :
6,818
글자수 :
988,619

작성
21.12.0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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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2
추천
79
글자
11쪽

격동의 시대 시즌1 - 14화

DUMMY

여운형이 되물었으나 강철수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모든 걸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몽양 선생에게서 신임을 얻을 수 없게 된다.’


강철수는 자신이 의준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와, 몽양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강철수의 이야기는 마치 다른 이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간결했으나 그 안에 담긴 것들은 무게를 측정할 수 없었다.

한참 이어진 대화가 끝났을 때, 창밖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입을 연 사람은 강철수가 아닌 여운형이었다.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될 것이네.”


*


끼익.


“왔구나. 저녁은 먹었지?”


벽난로 앞에 앉아 있던 김인국이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강철수에게 말을 건넸다. 김인국의 목소리에는 이렇다 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인사였다.


“네. 선생님께서는요?”

“박 씨가 오랜만에 다녀갔다. 네 안부를 묻더구나.”


타닥, 타닥.


“불꽃을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저벅, 저벅.


강철수는 김인국의 뒤에 서서 타오르는 불꽃을 함께 바라보았다. 벽난로 안의 불꽃은 집 안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김인국은 잠깐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저것은 스스로의 수명을 알까. 언제쯤 불이 꺼질지 알고 있을까. 이런 생각 말이다.”

“때로는, 정말 때로는 모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강철수는 등 뒤에 불을 두고 김인국의 맞은편에 앉았다. 강철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몽양 선생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문은 허락받았습니다. 일이 생기기 전 몇 번 더 찾아간다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몽양의 목숨을 구할 의무가 있습니다.”


김인국이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우리에게 기회를 줬을 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몽양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 아느냐?”

“···.”

“해방 전에도 그를 죽이려는 자들은 많았다.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까지 살아 있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줄 아느냐.”


타닥, 타닥.

툭.


위태롭게 서 있던 큰 장작이 불꽃 속으로 넘어졌다. 강철수의 등 뒤에서 붉은빛이 몸집을 키우며 일렁였다. 선이 짙은 얼굴에 더욱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보이고, 들려 오는 모든 것들을 이미 보았고, 들었다는 뜻이다. 몽양은 그렇게 살아온 자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는 일은 조금 다를 것입니다. 그것도 생전 처음 본 이에게 말입니다.”


강철수는 시종일관 그림자처럼 여운형의 곁에 붙어 있던 사내를 떠올렸다. 키는 크지 않았으나 무기질적인 시선에 숨긴 눈빛이 매섭고, 옷 속에 감춰진 기운이 흉포한 우진학이라는 남자. 강철수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알렉스의 옆에서.


*


쿵, 쿵!


“선생님, 의준입니다!”


철컹!


여운형이 직접 대문을 열어 주며 강철수를 반겼다. 강철수는 그 후 매일 여운형의 집을 찾았다.


“오늘도 와 주었군.”

“선생님 혼자 계시는 겁니까? 사형들은 어디로 가고요?”

“일이 그렇게 되었어. 눈 때문에 언덕 올라오느라 애 좀 먹었겠는데. 얼른 들어가지.”


탁, 탁.


여운형이 강철수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털었다. 강철수는 여운형이 털어 주는 반대편 어깨에 쌓인 눈을 손으로 털어냈다. 두 사람은 다정한 부자(父子)처럼 보였다.


“전부터 궁금했습니다. 이 집은 선생님께서 직접 고르신 겁니까?”


강철수는 눈발이 얼어붙은 빨간 벽돌을 보며 물었다. 여운형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은 내가 직접 칠했네. 운 좋게 마음에 드는 도료를 구할 수 있었지. 그만큼 이 집에 정이 많이 들었어. 떠나야 한다니 많이 아쉽군.”

“새로운 집에서도 금방 정을 붙이실 수 있을 겁니다.”

“하하! 하긴. 나라만 있다면 집은 어디든 상관없지.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강철수는 호탕하게 웃는 여운형을 따라 이제는 익숙해진 집 안으로 들어섰다. 강철수는 여운형과 점심을 먹고, 늘 그랬듯이 책에 대해 토론했다.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니, 그들이 인기척을 숨기지 않기 시작한 것이라 보는 게 맞았다.


끄덕.


강철수가 여운형을 바라보자 여운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콰앙!

와장창!


곧이어 까만 복면을 뒤집어쓴 사내 다섯이 거실 창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여운형!”


멋대로 쳐들어온 남자의 입에서 커다란 호명이 이어졌다. 혼란스러운 반응도, 이렇다 할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집 안을 재빨리 훑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대화 소리가 들렸는데, 거실에는 책 몇 권만이 남아 있었다. 우두머리가 소리쳤다.


“뭐 해! 얼른 찾아라!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타닥!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쾅!


“여운형!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몽양! 또 비굴하게 목숨을 연명하려 하는 것이냐!”


누군가는 방문을 부수고, 누군가는 위층으로, 누군가는 다시 밖으로 향했다.

집 안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


강철수는 여운형과 함께 김인국의 집으로 향했다. 여운형의 수족들은 전부 보이지 않았다. 차 안의 공기는 여운형의 집에서 보인 둘의 모습들이 전부 없던 일인 것처럼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침묵 끝에 강철수가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자네의 말이 어느 정도는 진실인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이 몽양이 할 일이지.”


‘정말 그자의 정체를 모르고 계셨습니까?’


강철수는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오늘 여운형이 자택에 혼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강철수와 우진학뿐이었다. 강철수는 여운형을 처음 찾아갔던 날을 떠올렸다.


‘선생님의 수족은 미군정의 첩자입니다. 이승만의 첩자라고 보는 것이 맞겠군요. 저는 부끄럽게도 그의 얼굴을 압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김의준으로 살게 된 이유입니다.’


끼익.


“도착했습니다.”


김인국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김인국과 여운형은 차갑게 식은 손으로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김 선생의 이야기는 나도 들은 게 많소. 만나자마자 신세를 졌다는 말부터 하게 되는군.”

“이번 일은 전부 의준의 덕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아들을 두었소.”


아들. 그 말에 강철수가 당혹감을 드러냈지만 금방 평정을 찾았다. 강철수는 여운형에게 줄곧 꺼내고 싶었던 본심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남로당을 이용해야 합니다.”


세 남자는 벽난로 앞에서 오래도록 밀담을 나누었다. 이날의 대화는 추후 ‘근로인민당’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가 되었다.


김인국은 자신의 안방을 여운형에게 내주었다. 김인국이 머무는 안방은 이 집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었다. 여운형은 아늑한 방의 앞에서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이거 원. 처음부터 신세만 집니다.”

“아닙니다. 몽양 선생의 안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때가 아닙니까. 그럼 오늘만이라도 푹 쉬십시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오늘 밤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덜컹.


절대로 나무 문에서는 날 수가 없는 소리였다. 김인국은 몽양이 문을 닫고 나서야 몸을 물렸다. 강철수는 김인국의 뒤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김인국이 강철수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우리도 이만 쉬자. 의준이 너는 종일 고생하지 않았느냐. 피곤할 텐데 얼른 올라가 쉬도록 해라.”

“··· 알겠습니다.”


강철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으로 향했다. 강철수는 벽난로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의 눈에서 내내 깊은 회한을 보았다. 그것은 조국을 잃은 자의 눈빛이었다. 강철수는 그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쿵, 쿵.


기척 없이 나무계단을 오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어렸을 때의 장면들은 뚜렷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은 줄 알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철수야. 아버지께 인사해야지.’


어린 강철수에게 인사는 언제나 아버지를 보낼 때 하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가 떠나실 때마다 그렇게 이야기했고, 그때마다 강철수는 대답했다.

마지막 딱 한 번을 제외하고 늘 그렇게 이야기했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왜 불현듯 이 기억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강철수는 고개를 틀고, 몸을 틀었다. 아직 김인국이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강철수가 자신을 다시 부를 줄 알았다는 듯이.


“선생님.”

“그래.”

“어째서 저였습니까?”


매번 도로 삼켰으나 줄곧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어째서.


화악!


벽난로의 불길이 거칠게 날뛰었다. 김인국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가, 빛이 들었다. 김인국은 강철수가 아닌 광염에 시선을 두고 입을 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이념은 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의준이 네가, 철수 네가 어떻게 불리든 내 아들인 것이지.”


강철수는 생각했다. 불꽃과 화마는 왜 다른 것인가.

강철수는 아직도 자신이 마지막으로 건넨 인사말을 종종 후회했다.


‘잘 도착하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잘 다녀오시라고 했다면, 아버지는 돌아오실 수 있었을까? 만주에서, 상해에서, 다시 경성으로. 경성이 서울이 되기 전에 돌아오셨을까?


강철수는 어느새 자신을 보고 있는 김인국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나는 네 아비를 알고 있다.”


*


겨울이라 일출의 속도가 느렸다. 저 멀리서 해가 머리를 들고 있었다. 강철수는 창가에서 서서 새벽 어스름이 피어오르는 밖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강철수 자신이 이 이념을 가지게 된 것도, 형이 그런 현실에 화를 내는 것도.


‘네 아비는 알려지지 않은 ’임정‘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아니,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임정‘의 모두가 애쓰던 인물이었지.’


모르던 사실이었다. 어머니도 마지막까지 알려 주지 않았던 사실.

강철수는 손톱에 손바닥이 패이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형님들은 알고 있었을까? 아니, 모르셨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 순간이었다.


똑, 똑.


“의준 자네, 혹시 자고 있나? 몽양일세.”

“아닙니다.”


강철수는 큰 보폭으로 순식간에 문 앞에 섰다. 강철수가 문을 열기 전까지 몽양은 그저 여닫을 수 있는 벽 뒤에 서 있을 뿐이었다.


“잠시 얘기를 나눴으면 해서 찾아왔네. 늙으니까 아침잠이 없어져, 하하.”


여운형은 인자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강철수는 여운형과 정원으로 향했다. 강철수와 여운형은 어슴푸레한 햇빛을 받으면서 거닐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이 시간에 눈을 뜨고 있었나?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게지.”


강철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나저나 정원이 참으로 잘 정돈돼 있군.”

“전부 저희 선생님께서 손수 가꾸신 것들입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정원의 나무들은 모두 상태가 좋았다. 잘 조경된 정원을 볼 때마다 강태수와 살던 집이 떠올랐다. 강철수는 솔잎에 쌓인 눈을 털어내는 여운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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