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이 뭐가 어쨌다고? 2
“얼굴이 너무 핼쑥해지신 것 같아...... 전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아닙니다! 감히 선배님에 대해 무지한 판단을 내린 저에게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응?
어?
핼쑥?
내 얼굴의 변화를 감지한 게 아니라 겨우......
한꺼번에 소진한 체력, 그리고 갑자기 광분한 것에 대한 무안함이 밀려와서 그런지 백은우는 선 자세 그대로 꼿꼿하게 소파 위로 쓰러졌다.
“선배님!”
부축하러 달려오는 최강자를 제지한 백은우.
식은땀이 흐르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 너를, 휴우우~ 가엽게 생각해 이곳까지 데려왔건만 고작 한다는 것이, 쿨럭!”
억지 기침을 하며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보는 백은우.
뭐든 다 저놈 탓이기에 뒤집어씌울 명분을 찾아야했다.
“쿨럭! 내 눈치나 보는 것이란 말이냐. 내 부덕의 소치로다, 다 내 탓이구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최강자가 연신 감읍하며 억울하단 표정만 지었다.
“이 모자란 놈이 지 주제도 모르고 선배님의 안위가 걱정되어 잠시나마 딴 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꾸짖어주시고 저를 탓해 주시옵소서!”
“아니다, 널 이 먼 곳까지 끌고 들어와 괜한 걱정을 안긴 내 잘못이지, 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연신 사과만 올리는 최강자를 보며 백은우가 자신의 재치에 감탄했다.
한마디면 꼼짝도 못하는 놈을 가지고 괜한 걱정을, 쯧!
“아닙니다, 다 제 탓입니다. 분수도 모르고 날뛴 죄, 달게 받겠습니다. 절 벌해 주시옵소서.”
“네놈의 마음은 다 알고 있으니 너무 과하게 굴지 마라.”
한결 부드러워진 백은우의 말투에 최강자의 읍소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크흑, 역시나 너그러우신 선배님의 말씀에 전 그저 감복할 따름이옵니다.”
눈물까지 글썽이는 최강자를 내려다 보며 백은우의 마음속엔 흡족함만이 떠올랐다.
이 얼마나 바라던 생이던가!
최강자를 요트로 돌려보내고 거울 앞에 앉은 백은우.
혹시나하는 마음에 얼굴 여기저기를 세세히 뜯어보고 있다.
“쓰잘머리 없는 소리를 해서 사람 신경 쓰이게, 쯧!”
아직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음에도 그 무지한 놈 한마디에 마음이 요동치다니.
백은우가 자신의 수양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느꼈다.
요상시런 세상에 적응하다보니 자꾸만 성격이 비뚤어진다는......
아니지.
내가 누군데?
얼굴하나로 세계통합을 이룬 자 아닌가!
더 이상 겸양을 부리는 것도 이상한거지.
맘만 먹으면 못해낼 것이 없는 존재 그 이상인데.
백은우가 날카롭게 뻗은 턱 선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으며 감상에 잠겼다.
벌써 이십일 째.
오일에 한번 씩 섬에 왔건만 최강자는 그날 이후 백은우를 만나지 못했다.
수련이 깊어져 나오지 못한다는 쪽지를 봤지만 영 불편한 최강자.
아무래도 자신의 탓이었다.
너무나 경솔하게 말을 꺼내다니......
아직 범접하기엔 너무나 먼 사람인데.
게다가 미천한 자기를 위해 손수 글까지 남겨주고......
최강자가 잡념을 버리듯 고개를 세차게 흔든 뒤 너른 백사장을 빠르게 뛰어가며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배워 며칠째 계속 불렀지만 아직까지 다 외우지 못한 그 노래를.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하아! 하아! 하아악!”
굵은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어둠속을 걸어 나오는 남자.
백은우다.
지칠 대로 지쳤는지 마치 좀비처럼 어기적거리며 드문드문 떨어진 핀 조명을 따라 거울 앞에 선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천천히 올리는 백은우.
유려한 턱 선과 자주 빛으로 반짝이는 입술이 들어나자 안도인지 긴장인지 모를 한숨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다시금 느릿하게 올라가는 머리카락 뒤로 감춰졌던 얼굴이 조금씩 들어난다.
매끈한 코와 형형한 눈빛!
털썩!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는지 꺾여버린 백은우의 두 무릎.
하지만 기운 충만한 웃음소리가 그의 나약한 몰골을 잊게 만들었다.
“크크큭, 됐다! 역시 괜한 기우였으!”
거울을 든 채 자신의 얼굴을 비추며 바닥을 뒹구는 백은우.
고풍스럽게 꾸며진 지하실엔 청량한 백은우의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아니, 거기보단 저기가 좋겠다. 그렇게 놓으니깐 좀 답답해 보이네.”
“저 자리는 아까, 넵! 알겠습니다.”
최강자는 백은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자리로 재빠르게 소파를 옮겼다.
자신의 몸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커다란 소파세트를.
“흐음, 네가 보기엔 어때?”
“헉헉, 괜찮은...... 거 같습니다.”
“그래? 좀 전 자리가 더 나은 거 같은데 그냥 원래대로 가자. 너무 딱 붙이진 말고.”
“...... 넵!”
힘들어 시뻘게진 얼굴로 다시 한 번 소파세트를 든 최강자가 휘청이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소파를 원위치 시켰다.
넓디넓은 거실의 가구들을 옮기기 시작한지 반나절.
그럼에도 백은우는 맘에 들지 않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연신 한손으론 바지춤을 올려 잡으며 든든하단 표정을 지으면서.
“힘든가 보네. 좀 쉬었다가 할까?”
“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다 죽어 가는데?”
“괜찮습니다, 전.”
“그래 다 수련이라 생각하고, 아 잠깐만.”
백은우가 반가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며 일어서자 그제야 한숨 돌린 최강자가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어이, 장대표! 님. 바로 연락 준다더니 왜 이리 늦었엉~”
시원한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썬배드에 누으며 백은우가 반가운 핀잔을 날렸다.
“어, 그렇지...... 여긴 뭐, 내일부터 열릴 파티 준비하느라 조금 바쁘지. 얘기한 건 다 준비됐지? 오늘 밤이라도 헬기로 보내라고. 괜찮아, 조종사가 힘들지 내가 힘들게 있나. 그나저나...... 뭐?”
급하게 놀란 표정으로 허리를 곧추세운 백은우.
“잠깐만.”
백은우가 근처에 있던 태블릿을 켜고 빠르게 ‘제니퍼 하젤’을 검색했다.
- 제니퍼 하젤, 이번엔 락스타와 열애?
- 캐러비안 해안에 위치한 별장에서 포착된 제니퍼와 그 연인.
- 제니퍼 손가락에 낀 반지의 정체는?
“이, 이런 잡것들을 봤나!”
백은우가 불타는 눈동자로 태블릿을 주시한 채 핸드폰의 스피커를 켰다.
“그래서 못 온다 이거야?”
“처음엔 일주일, 그다음엔 한 달 정도면 된다고 했는데...... 자꾸 기일이 늦어지니깐......”
정대표의 목소리가 자꾸만 기어들어갔다.
“그새를 못 참고 딴살림을 차렸다 이거지?”
“응?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아냐, 신경 쓰지 마!”
진즉에 알아봤어야 했다.
근본 없는 서양 오랑캐들 하는 짓이 다 그렇고 그렇지.
“됐고! 다른 여배우는?”
“다른 여배우라니? 누굴 말하는 건지?”
“그 왜 있잖아, 저번 오디션 때 본 그 누구냐...... 아프리카에서 왔다는 그 친구.”
“레알 케메론?”
“응! 갠 요즘 뭐하나?”
“촬영 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 잠깐만...... 맞네, 장편 드라마 찍느라 요르단에 들어 간지 벌써 한 달 째라는데.”
“드라마는 무슨 얼어 죽을, 다른 앤?”
백은우의 채근에 정대표의 목소리도 덩달아 빨라졌다.
“슐티 바찬드도 이번에 파파라치한테 걸렸네, 어우야~ 인도 1위의 재벌이랑 썸씽이라니......”
“또!”
“산드라 애는 뭐하나...... 저번 주부터 영화촬영 들어갔다...... 는데.”
“아니, 뭐 이런!”
벼락같은 백은우의 고함에 멀리서 누워있던 최강자까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아니 왜 나한테......”
“그럼 누구한테 따져? 지금 회사에 있는 거 맞아? 너 어디서 탱자탱자 놀고 있는 건 아니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정대표의 깊은 한숨소리.
“하아~ 아니 이 친구들 전부 다 탑스타중의 탑스타인데 스케쥴이 꽉 차 있는 건 당연한 거지. 최소 2, 3년치는 풀 부킹이라고.”
“그래서 내가 불러도 안 온다?”
“못 오는 거지.”
“그럼 저번엔 어떻게 오디션을 본 거지? 그렇게나 잘 나가시는 탑스타 분들이?”
“그건......”
우물쭈물거리는 정대표에게 백은우가 최대한 정제된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그냥 네가 일을 안 한 거잖아, 그치? 그때는 되고 지금은 안 된다는 게......”
“백은우씨!”
핸드폰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터진 정대표의 음성.
“말은 똑바로 하자고. 일정을 계속 미룬 게 누구지? 게다가 오디션이야 하루 이틀 정도면 끝나는 거라 백은우씨를 보기 위해서라도 잠깐은 시간 낼 수 있지. 하지만 거긴 남태평양, 그것도 완전 한 가운데잖아. 제 아무리 빨리 간다 해도 며칠은 걸린다고! 그리고 그냥 얼굴만 보고 말거야? 거기서 뭐할지 제대로 설명도 안 해줘놓곤 우리 보러 뭘 어쩌라고? 백은우가 부르니깐 무조건 와라? 수백억이 들어간 드라마, 영화 다 제쳐놓고?”
득달같이 쏟아내는 정대표의 음성에 백은우가 놀라 잠시 멈칫거렸다.
“여보...... 세요?”
“......”
“은우씨?”
“......”
“전화 끊겼나? 여보세요?”
“잘 들립니다, 정대표, 님.”
‘잘 들렸다, 이 쉑뀌야!’와 같은 백은우의 말투에도 정대표는 대꾸를 해줬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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