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환생(10)
<사건발생 당일 음력 6월 27일>
한민권은 숟가락을 들고 있던 정순왕후의 손을 잡았다.
“주..주..주상!”
정순왕후는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하마터면 쓰러질 뻔 했던 것이다. 한민권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비마마,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시옵니까?”
“주..주상...어허.”
정순왕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경옥고는 몸에 좋은 보약인데 이걸 대비마마께서도 들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민권은 탕약 사발을 들어 정순왕후에게 들이 밀었다.
“주상.. 그게...”
정순왕후는 귀신을 본 듯 완전히 말을 잃었다.
“게 있느냐?”
“네, 전하!”
“지금 즉시 대비마마를 수정전으로 모셔라. 수정전에 그 누구도 들여보내서는 아니된다. 또한 저 밖에 있는 이시수를 포박하라.”
“주상, 내 말을 들어보시오. 주상!”
“대비마마, 정녕 험한 꼴을 보고 싶으셔서 그러하십니까? 어의! 저 탕약과 은수저를 갖고 오시오.”
강명길이 탕약과 은수저를 갖고 와 은수저를 탕약에 넣었다. 그러자 은수저가 검은 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어서 한민권은 명령했다.
“박 상궁! 자네는 대비마마의 몸을 수색하라!”
그 말에 정순왕후가 소리쳤다.
“주상! 지금 뭣 하는 짓이오?”
“대비마마께서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면 수색을 받으셔야 함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뭣들 하느냐 어서 수색하지 않고.”
정조의 노호성에 박 상궁을 정순왕후의 몸을 수색했다. 정순왕후의 얼굴은 칠흑같이 굳어졌으나, 눈빛 만큼은 복수에 차 있었다.
결국 정순왕후의 몸에서 아까 정조의 탕약에 넣었던 봉지가 나왔다. 한민권이 눈짓을 하자 어의가 그 봉지를 갖고 와 냄새를 맡았다.
“전하, 비..상 같사옵니다.”
정순왕후가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다. 강녕전에 있던 장용영 군사들이 이시수를 포박했고 바로 한민권은 바로 김조순을 불렀다.
“장용사는 즉시 관련자를 모두 잡아들이시오.”
“네, 전하!”
경신옥사(庚申獄事)라고 불리우는 이번 사건은 엄청난 후폭풍을 낳았다.
우의정 이시수를 비롯하여 전 이조판서 이만수, 전 병조판서 조진관, 호조판서 조진관(趙鎭寬), 이조참판 이서구(李書九), 형조참판 이익운(李益運)가 투옥되었다.
영의정 이병모(李秉模)는 옥사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직했다.
정순왕후는 수정전(정순왕후의 기거하는 궁전)에 감금되었으나, 연일 사약을 내리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대전으로 좌의정 심환지가 들었다.
“어서 오세요 대감.”
“전하, 신 사직 인사드리러 왔나이다.”
“대감. 대감까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옵니다. 신이 사직하여야 노론에 의한 독당이 끝이 나옵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남게 되면 반드시 노론들은 다시 반란을 꿈꿀 것이옵니다. 때문에 제가 사직해야 이 싸움이 끝날 수 있사옵니다. 사직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심환지의 간곡한 청에 한민권은 어쩔 수 없이 사직을 윤허했다.
“전하, 그리고 죄를 청하나이다.”
“아니 또 무슨 말이오. 대감.”
심환지는 옆에 보자기로 싸고 있던 상자 하나를 정조에게 올렸다.
“이게 무엇이오. 대감.”
한민권은 보자기를 풀어 상자를 열어봤다. 상자 안에는 편지가 가득했다.
“전하, 알아보시겠습니까. 이건 전하께서 소신에게 내린 밀지이옵니다. 지난 달 내린 밀지까지 전부 299개 이옵니다.”
한민권은 밀지를 보고 사뭇 놀랐다. 정조가 밀지를 내린 것은 대충 알고 있었는데, 이리도 많은 밀지를 심환지 대감에게 내렸다는 것이 너무도 놀라웠다.
“전하, 전하께서는 밀지를 모두 불타워버리라 명하셨으나 소신은 이를 버리지 못하였나이다. 그래서 그 죄를 청하나이다.”
“그런데 어찌 이것을 돌려주는 것이오.”
“그 밀지는 신에게 보내신 것이기는 하오나, 엄밀히 말하면 주상전하의 고민과 정치 철학이 담긴 것이옵니다. 부디 그 초심을 잃으시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돌려드리는 것이옵고, 다른 이유는 소신 스스로 그 밀지를 버리기에 너무나도 감당하기 힘든 내용들이 많아 돌려드리는 것이옵니다.”
“어찌 이런 것으로 대감을 벌한다 할 것이오. 내 이것을 잘 처리하겠소이다.”
정조의 밀지 299통. 실제 이 밀지는 2009년 2월 심환지의 무덤에서 발견되면서 세상에 들어나게 된다.
정조는 중요한 의사결정이 있을 경우 이 밀지를 보내 심환지와 각본을 짜기도 했고, 몸이 아프거나 고민이 있을 때도 심환지에게 밀지를 보내 자신의 상태를 알리기도 했다.
정조의 밀지는 신하로 하여금 일종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들기도 했지만, 이런 밀지를 보냈다는 것 자체가 심환지를 신뢰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대감. 과인이 하나 물어볼 것이 있소.”
“말씀하시옵소서.”
“왜, 과인을 도운 것이오. 그대의 노론이 몰락할 수도 있었음에도 말이오.”
한민권은 이 질문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어쩌면 진짜 정조가 이미 물어봤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하, 소신은 전하의 일성록을 보았나이다. 그 일성록에는 전하께서 하루 3번 반성하고, 하루 3번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대로 들어 있었나이다. 소신 그것을 보고 너무 감명을 받았고, 지난 날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 보게 되었나이다.
돌아보면 우리 노론은 나라를 위한다고 하지만 당파를 만들어 그 잇속을 챙겼고, 심심찮게 왕권에 도전하였나이다. 결국 그것으로 인해 장현세자께서 돌아가셨지요.
소신 선비로서 그리고 선비의 양심으로 돌아가 많은 고민을 하였고, 전하의 뜻을 따라 당파를 떠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것이 진정한 조선을 위함임을 깨달았나이다. 허나 우리 노론이 있는 한 이는 불가능한 일이는 것은 전하께옵서도 잘 아실 것이옵니다. 금번 오회연교의 교지를 받들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유일하였고, 지난 날의 소신의 과오를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심환지 대감은 계속해서 설명을 했다. 그 심환지 대감의 눈빛은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눈빛이었다. 설명을 다 들은 한민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이다. 과인은 그대의 충심을 잊지 않으리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부디 강령하시고, 이 나라의 성군과 진정한 개혁군주가 되시어 조선을 부국강병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심환지는 그렇게 사직을 올리고 궁을 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노론의 독재정치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한민권은 창덕궁을 거닐며 이런 저런 생각에 빠졌다.
‘과연 내가 이 조선을 잘 이끌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진정한 개혁군주. 그건 무엇일까’
그렇게 음력 6월 30일의 마지막이 저물고 있었다. 그것은 동시에 새로운 조선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 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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