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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다.

신석기 제사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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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작품등록일 :
2021.05.12 20:32
최근연재일 :
2021.08.04 19:07
연재수 :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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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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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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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0. 부족의 신(10)

DUMMY

귀신굴 밖으로 나오자, 수많은 큰버루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고요하다.


왼손에는 사부가 가장 즐겨쓰던 주술품인 청동 방울이, 오른손엔 제사장의 권위를 증명하는 제사자의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나는 사부의 유품인 제사자의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선대가 잠드셨다! 귀신굴을 달랜다!"


귀신굴의 왼편에선 치료자들이, 오른편에선 전사들이 저마다 북을 두드리며 함성을 질렀다.


그가 죽으며 귀신굴을 넘어 본래 세계로 갔으니, 제례를 통해 영적 입구를 막아둬야 한다.


나는 물소의 두개골로 얼굴을 가리고 제례를 주관했다.


전사와 치료자, 부족원과 주술사의 노래가 큰버루산 아래로 내리깔린다.


물소의 두개골 탓인지, 칙칙한 노래 탓인지 발이 무겁다.


* * *


제례가 끝났다.


하늘엔 달이 떴고, 나는 내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6년 전과 달리, 내 천막은 부족 내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세워졌다.


가장 크고 가장 높으며 가장 화려한 천막이었다.


"휴, 힘들군."


천막에 들어와 제사 도구를 정리하고 다리를 주물렀다. 하루 종일 춤을 춰댔더니 다리가 빠개질 것 같았다.


"사부는 독초 때문에 일찍 간 게 아니라 저딴 제례를 계속해서 일찍 간 거겠지. 휴..."


"아무렴, 이거 좀 마셔."


"고마..."


자연스럽게 약초즙을 받아들곤 흠칫했다.


"언제 들어온 거야!"


어느새 내 옆에는 검은 머리칼의 늘씬한 미녀가 앉아있었다.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놀래켜 줄려고 미리 들어와 있었지."


"...소슬바람."


서슬바람은 몇 해 전 정식 치료자로 인정받으며 새 이름을 받았다.


쓰던 이름을 계속 써도 문제는 없었지만, 그녀 스스로 서슬뱀의 흔적을 지우고픈 듯했다.


"그래, 놀랐으니까 집 가서 잠이나 자라."


"놀라는 거 조금만 더 보여주지. 재밌었는데."


소슬바람은 예전처럼 킥킥대며 과일껍질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본인 천막으로 돌아갈 생각은 않는 듯 하다.


"왜 무겁게 아직도 물소 뼈 쓰고 있는거야?"


"좀 가라."


"얼굴 안 본 지가 서른날이나 된 거 같아. 그 동안 우레노을님 돌보느라 못 봤고, 오늘은 제례 치루느라 못 봤고.


오랜만에 어떻게 생겼나 확인이나 해야겠어."


저 이상한 호기심은 여전하다. 6년 전부터 지금까지.


서슬뱀이 쫓겨가고 내가 제사장이 된 날부터, 소슬바람은 이상하게 내 얼굴을 주시했다.


"오늘은 피곤해서 그래. 혼자 좀 있자."


"주술사가 피곤하니까 치료자가 온 거잖아. 얼굴 좀 보자. 아픈데 있나 보게."


"내 얼굴 안 보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냐?"

"... 혹시 내가 한눈 판 사이에... 확 사람이 바뀌었을 수도 있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결국 내 물소탈은 소슬바람의 손길에 벗겨졌다.


"울었네?"

"어."


감출 것도 없다. 제례 때 내 목소리를 들은 부족원이라면 다 알 테니까.


하지만 막상 소금기 맺힌 얼굴을 보여주려니 낯이 뜨거워진다.


"6년 내내 할아버지하곤 무뚝뚝한 모습만 보여주더니."

"...그러게."


우레가람의 기억 탓인지, 아니면 6년 새에 나도 모르게 정이라도 들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왜 울었지?"


어차피 리바이어던은 죽지 않았다. 본래 세계로 갔을 뿐이다. 다시는 못 볼 뿐.


그래, 아마 우레가람의 기억 속 친절한 할아버지의 모습 탓일 거다.


내가 그리 울었던 건.


아마 그랬을 것이다.


소슬바람은 나를 안아주었다.


"이유는 몰라도 돼."

"......"

"원래 아플땐 울 수밖에 없는거야."


그 말에 또다시 뭔가가 울컥한다.


"그리고 아픈 걸 치료하는게 내 일이고."


그 나긋한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앞이 흐려진다.


"소슬바람..."


그래, 사실 네가 있어서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거야.


그 말을 하려고, 눈물을 닦고 그녀를 껴안으려 할 때였다.


움찔.


소슬바람이 당황하며 약간 뒤로 물러났다.


"아, 그게... 사실 이거 주러왔어."


소슬바람이 등 뒤에 있던 구운 얌을 끌어오며 보여주었다.


"오늘... 잘 자. 난 가볼게."


뭔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소슬바람은 황급히 천막을 나가버렸다.


"...하아..."

나는 한숨을 쉬며 토기에 든 얌 조각을 씹었다.


우레노을을 보낸 슬픔은 가라앉았지만, 어쩐지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그대로 눈을 붙였다.


* * *


눈을 뜨자 내 천막이었다. 소슬바람이 놓고 간 토기가 눈앞에 남아있었다.


어젯밤 녀석에게 허겁지겁 매달렸던 것을 생각하니 어쩐지 귀가 달아올랐다.


"나중에 엄청 놀리겠네."


그래도 덕분에 나도 몰랐던 슬픔이 많이 씻긴 기분이다.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었다.


머리가 맑아지니, 사부가 가기 전 했던 말들을 되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서슬뱀은, 최대한 고통없이 보내다오.


"...서슬뱀을 '고통없이 보내달라' 라..."


우레노을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서슬뱀이, 살아있단 소리군."


고통없이 보내달라는 말뜻은,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반증이다.


"후우..."


자리에서 일어나 제사 도구를 가지고 천막을 나갔다.


조용히 큰버루산으로 올라가 제단 위에서 자리를 잡고 숨을 들이쉬었다.


천천히 영력을 쌓기 시작했다.


우레노을의 영력을 일부 흡수했지만, 아직 내 영력은 진정한 제사장이라 하기에 부족하다.


영력이 일정치를 넘어설 때, 서슬뱀을 찾아낼 작정이었다.


'그때가 된다면, 서슬뱀은...'


​서슬뱀을 떠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우레노을의 죽음 이후,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주, 주술사님!"


큰버루산 위로 큰버루 부족원 하나가 헉헉거리며 올라왔다. 예전 서슬뱀의 꼬리였던 녀석이다.


"뭐냐."


나는 자연스럽게 하대를 했고, 녀석도 당연하다는 듯 머리를 숙였다.


​"그, 그것이 즈믄 평원으로 사냥을 나갔던 전사가, 먼 곳에서 온 듯한 이방인을 만났습니다."


"그럼 큰바위한테 말해야지, 왜 나를 찾았지?"


​큰버루는 제정 분리사회다. 부족의 일은 얼마 후 족장이 될 예정인 큰바위가, 자연재해나 영적인 일은 주술사인 내가 맡는다.


물론 주술사의 힘이면 제정을 일치시키고 족장이자 제사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큰바위에게 맡기기로 했다. 6년 전처럼 생존이 위태로운 것도 아닌데 굳이 권력을 쥐려고 아둥바둥하기는 귀찮았다.


그래서 나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영적인 문제나 자연재해를 피하게 해달라 비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 전사의 말이, 그것이..."


말을 더듬던 녀석은 숨을 고르더니 결국 핵심을 내뱉는데에 성공했다.


"그 이방 전사가, 서슬뱀 같다고 합니다."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또 그 자가..."


두두두두두-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인다. 큰버루 무리다.


벼락을 날려 쫓아버릴 수 있었지만, 나는 그보다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것들을 지켜보았다.


"버루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고 하는데..."


큰버루 무리 가장 앞쪽. 가장 덩치가 크고 뿔이 긴 놈이 앞서 달리고 있다.


"무슨 조화를 부린 건지, 그 큰버루들이 일사분란하게...말을 듣더라 합니다."


아마도 대장 버루일 것이 분명한 녀석의 등 위.


그곳에 한 남자가 올라타 있었다.


"...이봐."


"예, 예!"


"예비 족장은 뭘 하고 있지?"


"지금 마을에서 회의를..."


"족장, 전사, 치료자, 마을 아낙과 아이들까지 전부 마을 앞으로 모이라 이르거라."


오늘은 어쩐지 날이 맑지 않다. 금세라도 비가 오고 천둥이 칠 것 같이 먹장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낙뢰를 떨어뜨리기 쉬운 날이다.


"큰버루를 찾은 나그네를 맞이해야겠구나."


* * *


두두두두두-


큰버루 마을 앞으로, 흙먼지와 큰버루들의 발소리가 웅장하게 울렸다.


그 흙먼지 앞에서 큰버루 부족원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들 앞을 지키는 큰바위를 바라보았다.


두두두두두...


이윽고 큰버루 무리의 발소리는 잦아들고,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그들의 앞에 보인 것은 무수한 큰버루 떼.


그리고 그 큰버루를 통솔하는 우두머리 버루와, 그 위에 올라탄 한 사내였다.


"야이하이-!"


사내가 외쳤다.


큰버루 무리 저 뒷쪽에서 비스무리한 외침이 들렸다.


예비 족장, 큰바위는 눈쌀을 찌푸렸다. 얼마간 큰버루를 관리하며 저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웃 부족인 넓적머리 부족에게서 간혹 듣는 말이었다.


"우두버루, 앉아라!"


사내가 우두머리 버루의 머리를 탁탁 때리자, 버루는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큰바위와 사내의 눈높이가 어느정도 비슷해졌다.


"보아하니, 물소가죽을 쓰게 된 듯하구나."


사내는 흡족한 듯 웃으며 그를 불렀다.


"큰바위."


"서슬뱀."


큰바위는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신은 큰버루에서 추방당한 몸이오. 왜 돌아온 거지?"


"나를 쫓아낸 건 제사장이다. 굳이 족장에게 말해야하나?"


"......"


큰바위는 서슬뱀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내 목소리가 부족원들을 재치고 울렸다.


"알다시피, 우리 큰버루는 제사장의 권위와 족장의 권위, 그리고 대모의 권위 아래 지혜롭게 이끌어진다.

대모야 야만스러운 네놈이 죽여버렸으니 얼마 지나야 뽑을 수 있지만, 족장과 제사장은 기본적으로 동등하다."


내 앞의 인파가 갈라졌다.


나는 물소 머리뼈를 눌러쓰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서슬뱀, 너는 제사장의 명을 무시하고 큰버루로 돌아온 것도 모자라, 나와 동등한 족장의 권위를 무시하였다.

이는 우리 큰버루를 무시한 것이 아니더냐?"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 큰바위를 넘어서 녀석의 앞까지 도착했다.


"무슨일로 이 버루 무리를 이끌고 부족으로 와 부족원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드느냐, 서슬뱀."


털썩!


서슬뱀이 그제야 큰버루의 등에서 내려 내 앞에 섰다. 흙먼지가 인다.


먼지가 걷히며, 그동안 많이 달라진 서슬뱀의 모습이 드러났다.


육년 전과는 달리 물소가죽 대신 버루가죽을 쓰고 있었고, 버루의 뼈로 만든 창을 들고 있었다.


몸은 전체적으로 왜소해졌지만 근육은 더욱 단단해진 것 같았다.


단단해진 근육 사이사이로는 몇몇 흉터와, 흉측해 보이는 문신들이 눈에 띄었다.


팔다리에 새겨진 그 시커먼 문신들은 어쩐지 주술적인 냄새를 풍겼다.


"우레노을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 영을 잠시 뵈러 왔소."


"그런 소식은 어디서 들었지?"


"우레노을께서 쉰 날쯤 전 내 귓가로 주술을 보내 속삭이셨소."


"......"


짐작이야 했으나, 확인이 되자 약간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우레노을은 정말로 서슬뱀을 아꼈던 것이다.


"원래 주술은 안 믿지 않았나?"


내 질문에, 서슬뱀의 얼굴에 쓴웃음이 피었다.


"주술을 진심으로 거짓이라 믿은 적은 없소.

사실일거라 생각은 했지. 진정한 신의 힘은 알지 못했어도..."


"...왜 돌아온 거냐."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말했듯, 우레노을의 흔적을 뵈러 왔소. 그리고 데리고 온 버루들은 큰버루 부족에 전부 공헌하겠소. 이들을 길들이는 방법부터 어떻게 타는지, 다루는지, 같이 살 수 있는지."


"큰버루 부족에 어마어마한 공헌을 하려 하시는군."


우레노을이 서슬뱀에게 메세지를 보냈다면,


"제사장께선 나를 용서하시오?"


"...물론."


서슬뱀이 이곳으로 찾아올 것을, 우레노을이 몰랐을까?


"나는 용서한다."


번쩍!


그리고, 내가 찾아올 서슬뱀을 어찌할지, 우레노을은 몰랐을까?


하늘에 낀 먹장구름 속에서 푸른 빛이 연달아 번뜩인다.


"하지만 신께선 용서하실까?"


쿠릉, 쿠릉, 쿠르릉!


천둥이 뒤이어 들려온다.


서슬뱀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큰버루 무리를 쉰 무리 더 데려와도 상관없다. 그것을 공헌이 아닌 전쟁에 사용해서 이곳으로 쳐들어와도 상관없다.


큰버루 부족에는, 신(神)이 있다.


"오랫만에 만나서 즐거웠다 서슬뱀."


가슴속에서 은근한 희열이 솟아오른다. 이 다음 장면이 눈 앞에 스친다.


번개의 창에 꼬챙이가 된 서슬뱀, 튀김이 된 서슬뱀, 잘 익은 과육처럼 터져나가는 서슬뱀 등.


"신께 빌거라."


번쩍!


푸른 빛이 땅으로 떨어졌다.


작가의말

나는 용서하마. 하지만 이 녀석이 용서할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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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부족의 신(10) +5 21.05.15 1,108 47 12쪽
10 9. 부족의 신(9) +7 21.05.15 1,237 52 16쪽
9 8. 부족의 신(8) +6 21.05.14 1,301 48 14쪽
8 7. 부족의 신(7) +5 21.05.14 1,321 53 12쪽
7 6. 부족의 신(6) +5 21.05.13 1,383 45 14쪽
6 5. 부족의 신(5) +3 21.05.12 1,537 48 17쪽
5 4. 부족의 신(4) +2 21.05.12 1,711 47 12쪽
4 3. 부족의 신(3) +3 21.05.12 1,944 53 10쪽
3 2. 부족의 신(2) +4 21.05.12 2,412 53 12쪽
2 1. 부족의 신(1) +5 21.05.12 3,470 72 10쪽
1 프롤로그 +12 21.05.12 4,747 96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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