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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다.

신석기 제사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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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작품등록일 :
2021.05.12 20:32
최근연재일 :
2021.08.04 19:07
연재수 :
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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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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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63,058

작성
21.05.13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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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
추천
45
글자
14쪽

6. 부족의 신(6)

DUMMY

새벽의 찬 공기가 뺨을 때렸다.


제사자의 날이다.


"네가 죽는거 보긴 싫어서 어울려 주긴 했는데, 우리 아버지 너무 곤란하게 하진 마."


눈을 뜨니 서슬바람이 내 옆에 엎드려서 얼푼이풀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 알았으니까 그거 너무 많이 씹지 마.”


한국에서는 여자친구 때문에 싫어도 먹어야 했던 대마초였다. 어떤 부작용을 가졌는지는 빠삭했기에, 걱정도 된다.


"네가 뭔 상관인데?"


"그거 대마... 아니 됐다."


무슨 상관이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천막 밖으로 나섰다.


천막 밖에는 여러 부족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족장인 서슬뱀이 물소 가죽을 뒤집어쓰고 부족원들에게 주술적인 문양을 그려주고 있었고, 디딤소리가 약초 같은 것을 품에 가득 안고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디딤소리!"


"앗, 우레가람이구나. 미안하구나, 네게 충분히 가르쳐줄 게..."


"그런 건 됐어요. 일단 조금 이따가 주술사의 문양을 그려주세요."


"알겠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주술사님께 약 좀 드리고..."


디딤소리는 그렇게 말하곤 검은 꽃잎들을 잔뜩 들고 주술사의 천막으로 향했다.


"주술사라..."


서슬뱀은 경비까지 세워 치료자들 외에 주술사를 아무도 못 만나게 막아놓았다.


당연히 그 이유는 주술사의 영향력 때문이다. 현재 부족의 젊은 세대는 족장을 따른다지만, 그 젊은 세대를 낳은 기성세대는 주술사에 대한 신뢰가 지대하다.


'예순 여덟해를 살았다고 했던가?'


평균 수명이 30살 전후인 신석기에서 70살에 가깝게 살았다는 것 자체가 불가해긴 했다.


만약 오늘 일이 잘 풀려 내 생계가 걱정 없어지고, 서슬뱀의 권위가 실추된다면 주술사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해.‘



내가 이 신석기 시대에 떨어진 것은 분명 주술사의 주술과 관련이 있을 터다.

내 머릿속에 상진이라는 이상한 남자의 인생이 박힌 것은 할아버지와 관련됐을 거다.




나는 주술사가 내게 전하라 했던 청동 방울 목걸이를 만지작 거리며 족장을 쳐다보았다.


'오늘 일만 잘 풀리면...'


모든 게 해결될 거다.


"...그런데 왜 족장이 저런 걸 하는거지?"


서슬뱀은 하얀 가루를 손끝에 묻혀 부족원들의 얼굴에 일일이 문양을 그려주고 있었다.


우레가람의 기억 속에서 저런 것은 치료자나 주술사만이 하던 제례 중 하나였다.


단순히 주술사의 권위까지 차지해서 저런 걸 하는건가?


내가 잠시 고민을 할 때 디딤소리가 내게 달려와 자리에 앉히고 문양을 그려주었다.


디딤소리가 내 얼굴에 무언가를 칠하는 동안,


나는 눈을 감고 오늘 시행할 계획을 복기했다.


그렇게 아침해가 떠올랐다.


제사자의 날 제례는 아침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큰버루 부족의 모든 부족원들이 큰버루산을 올라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족장은 맨 앞에서 부족을 이끌고, 주술사는 맨 뒤에서 따라간다.


본래 대모가 중간에서 지친 사람들을 달래 줘야 하지만 그 일은 디딤소리가 맡게 되었다.


이 제례는 전통적으로 족장과 주술사, 대모 등 모든 고위직들도 예외가 없었고,


장애인이나 노인들도 타 족원의 등에 업혀서 참석해야 했다.


참여하지 않는 것은 병자들 뿐이었다.


"허억... 헉..."


나는 오늘의 제례를 치룰 제사장으로서, 특별히 물소의 머리뼈를 쓰고 올라가야 했다.


'무겁다 X발...'


상진의 몸이었다면 거뜬했겠지만 나는 지금 열 두살이다.


이차 성징도 제대로 안 온 몸이라 여자아이와 구분도 안 간다.


그런데 가뜩이나 무거운 물소의 두개골을 쓰고 변변찮은 지팡이도 없이 등산을 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큰버루산은 바위산이라 앞을 가리는 나무나 잡초가 많지 않았고,


산 자체도 아찔한 높이일 뿐 까마뜩한 높이는 아니란 것이었다!


'와우 X발! 히말라야 급 산은 아닌게 어디야!'


속으로 부족의 전통을 욕하며 기절하기 직전까지 걸음을 옮겼다.


슬슬 산소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쯤.


앞서 가던 부족원들이 걸음을 멈췄다.


아라라라라라-


서슬뱀이 저 위에서 창을 쳐들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 보였다.


아르르르르르-


디딤소리가 대모 대신 소리를 받는다.


서슬뱀이 맨 앞에서 오른쪽으로 비켜서고, 디딤소리가 중간에서 왼쪽으로 비켜선다.


수많은 부족원들이 일제히 서슬뱀과 디딤소리를 따라 양 옆으로 비켜섰다.


내 앞으로 수많은 인파가 갈려지며 길이 하나 생겨났다.


"후우..."


떨렸다.


'이제 시작이다.'


"...아로로로로로로!"


나 역시 디딤소리에게서 배운 절차를 떠올리며 기묘한 고함을 지르고, 인파의 길 사이로 발을 옮겼다.

저 앞 큰버루산의 정상 어림.

몇 십년전 주술사가 만들어놓았다는 제단이 보였다.


수많은 부족원들.

큰바위, 서슬바람, 디딤소리, 검은 바위, 서슬뱀을 지나.

마침내 제단 앞에 도착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티없이 맑았다.


쿵-


서슬뱀이 가지고 올라온 북을 세게 쳤다.


서슬뱀을 따르는 전사들이 각자 조악하게 만든 북을 들고 응답하듯 북채를 두들겼다.


둥둥둥둥-


북을 치는 부족원, 그리고 치료자들을 제외한 모든 부족원들이 자리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후우..."


이렇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둥둥둥둥둥-


북소리의 가운데에서, 들키지 않게 식은땀을 훔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참 맑았다.


"버, 버력미르께 바칠 공물을 가져와라!"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물소의 머리뼈를 더욱 눌러썼다.


치료자들이 서늘한 그믄굴에 보관하던 곡물 등을 제단 위로 옮겼다.


"그분이 오신다! 북소리를 높여라!"


북소리가 커졌지만 여전히 하늘은 맑다.


'젠장... 구름 좀 끼고 번개 좀 쳐주면 어디 덧나냐고...'


이래서야 사기를 쳐도 있어보이지가 않는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곡물이 쌓인 제단을 향해 느릿하게 걸어갔다.


수북히 쌓인 제단 앞에서, 나는 기도문을 읊으며 눈을 감았다.


한낱 사기극이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기극이든 아니든, 이제는 진짜가 되어야 한다.


기도문을 다 왼 후 제단 앞에 서 양팔을 벌렸다.


이제 신을 불러야 할 때였다.


"오오... 새해가 시작된다."


"저기, 해달별 귀신이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해가 어둠에 먹힌다.


일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제사자의 날이란, 일년에 한번씩 있는 일식에 주술사가 주관하는 제례였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행성이길래 매년 일식이 일어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건 알거 없고 이제 부족의 신, 내가 공표한 버력미르를 불러야 한다.


"아-"


마이크 테스트를 하듯, 짧게 낸 음성에 부족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디딤소리가 조용히 다가와 한 손에 어린이용 단창을, 한 손에 새의 깃털이 달린 막대기를 쥐여주었다.


"아아아아-"


기이한 곡조가 실린 음성을 내뱉으며 디딤소리에게 배운 동작을 시행했다.


춤사위가 이어진다.


북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그리고 다시금 부족원들이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잘 하는데?"


"지난 해에 주술사님이 하셨던 것과 비슷해."


"제사자의 날 제례는 최소한 해가 다시 밝아질 때까진 이어져야 하는데,


우레가람이 버틸 수 있을지."


"우레가람이 뭐야! 지금은 제사장이라고 불러야지."


"제사장은 무슨, 이미 족장한테 힘 다 뺏긴 건 다 아는 사실인데."


나는 물소의 머리뼈 뒤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작이다.


"저기..."


서슬바람에게 얼푼이풀로 매수된 아이 중 하나가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물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큰바위에게 매수된 아이가 다시 손가락을 들었다.


반응이 미미했다.


그리고, 큰바위가 하늘을 가리켰다.


세 명이 하늘을 가리키자, 부족의 관심이 급증했다.


하늘을 가리켰던 세 명은 술렁거리는 부족의 분위기에 숨어 모른 척 팔을 내렸다.


"아아아아-..."


마침 해가 완전히 가려져, 어느 정도 하늘이 어두워졌다.


'분위기가 좀 살겠어.'


곡조를 멈췄다.


춤사위를 멈췄다.


둥둥둥-


서슬뱀이 무언가 낌새를 눈치챘는지 북 두드리는 것을 멈췄다.


전사들이 일제히 북소리를 멈췄다.


나는 뒤를 돌아 부족원들을 쳐다보았다.


우리 집은 어려서부터 가난했다.


돈 되는 알바란 알바는 별의별 것을 다 해봤고, 인형극 알바도 하면서 아는 형한테 성대모사도 배웠다.


덕분에 군대에서 맞선임을 성대모사로 즐겁게 해주는 역할도 맡았다.


맞선임이 심심하면 성대모사를 요구했기에 지금까지도 요령이 기억난다.


"모두-"


특히 맞선임이 좋아하던 성대모사는, 여자 목소리로 본인의 욕망을 맞춰주던 것이었다.


"들어라!"


"무슨...!"


"목소리가!"


큰버루산 위로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퍼졌다.


부족이 술렁였다.


나는 눈알을 까뒤집고 단창과 깃털 막대기를 들어올렸다.


"나는 하늘의 버력미르. 이 제사장의 몸에 깃들어 신의 뜻을 전하러 왔노라!"


내가 생각해도 고혹적인 목소리가 내 목에서 튀어나왔다.


위대한 영은 부족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별로 알려진 것도 없었고, 아직 문명의 초창기라 신화니 전설이니 할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위대한 영들은 성별이 없었다.


그저 '위대한 영'일 뿐. 딱히 남성신이니 여성신이니 하는 인격적인 부분은 희박했다.


하지만 성별이 있는 신이 있었다.


모든 부족에서 존재를 인식한다는 [해달별 귀신].


용기와 풍요를 상징하는 [버력미르].


해달별 귀신은 남자이기도, 여자이기도 한 존재.


그리고 버력미르는 용기를 상징하는 것 덕택에 남자로도.

풍요를 상징하는 것 덕에 여자로도 알려져 있다.


주술파를 상징하는 신이 우짖는 새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최종적으로 버력미르의 소문을 퍼뜨린 이유였다.


난 지금 성대가 없어서 여성적인 목소리밖에 성대모사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레가람은 나의 뜻을 전하는 전령이요,

나를 보필하는 시종이자, 나의 대리인이다!"


제사자의 날은 분명 제사장이 본인의 신에게 제례를 바치는 날이다.


그러나 디딤소리의 말에 의하면, 위대한 영이 간혹 주술사의 입을 빌려 신탁을 내리기도 했다고 했다.


"우레가람을 해치는 자는 나의 진노를 받을 것이며-"


그리고 지금, 내 입을 통해 만들어진 신이 신탁을 내린다.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한 자, 나의 가호를 받지 못할 것임이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


부족이 술렁였다.


모든 부족원들의 얼굴이 나, 그리고 족장 서슬뱀을 향했다.


눈을 까뒤집은 내 시선과, 서슬뱀의 서슬퍼런 시선이 맞부딪혔다.


'피하면 안 된다.'


오늘은 제사자의 날, 이곳은 신을 맞이하는 제단.


평소라면 그가 나를 귀신들렸다며 패죽일 수 있지만, 오늘만은 다르다.


나는 결코 질 수 없고, 져서도 안 된다.


얼마간 기싸움이 진행되었을까. 서슬뱀이 눈을 감았다.


'됐나...!'


"큰버루의 족장, 서슬뱀은 신의 명을 받들 것이냐!"


나는 싸움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일갈했다.


그리고, 서슬뱀이 웃었다.


"하하하하하!"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이, 또는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낄낄거린다.


등허리를 죄여오는 이 느낌을, 나는 알고 있다.


귀신굴에서 나온 첫날 서슬뱀을 기만해보겠답시고 그의 권위를 인정했을 때.


당시 서슬뱀이 보였던 싸늘한 웃음과 같은 느낌이다.


"제사장 우레가람의 몸을 통하신 버력미르여, 큰버루의 족장. 나 서슬뱀이 인사 올립니다!"


서슬뱀은 살짝 목을 굽혔다.


그리고 큰버루산 아랫쪽 평야. 큰버루 마을 앞에 펼쳐진 들판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일었다.


'저건...'


우레가람의 기억 속에 있다.


살아있는 재앙. 생명의 공포. 막을 수 없는 힘.


"큰 버루 무리다!"


누군가가 소리쳤고,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큰 버루는 물소의 몸에 순록의 뿔, 그리고 코뿔소의 근육을 가진 흉폭한 무리생물이다.


한 마리의 덩치가 성인 장정 두어 명을 합친 듯한 그 녀석들은 가히 인간이 잡을 수 없는 자연의 산물이었다.


녀석들은 매년 발작하듯이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였고, 그 이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큰버루들의 질주가 자신들이 사는 곳을 향하지 않길 간절히 기도할 뿐.


저것들의 발에 짓밟힌 것은 그 어떤것도 형체를 남길 수 없으니 말이었다.


"아, 안돼!"


"으아아아아! 큰버루가, 큰버루를 향해..."


그리고, 현재 저것들은 큰버루 부족의 마을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당혹에 차서 아무 말도 못 할 때였다.


"버력미르시여! 우리의 위대한 영이여!"


서슬뱀이 소리친다.


"당신이 진정 우리의 신이라면, 우리에게 닥친 재앙을 막아주십시오!


우리의 삶의 터전을 지켜주십시오!"


나는 제단 앞에, 그리고 서슬뱀은 부족의 맨 앞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기에


나만이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어느때보다도 즐겁다는 듯.


'이, 이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우레가람의 기억 속에서 큰버루 무리는 막을 수도, 통제할 수도 없었다.


애당초 왜 질주하는지도 모르는데 어찌 그런 걸 할 수 있단 말인가!?


"버력미르시여! 대답하소서!"


서슬뱀의 목소리는 처절했다. 그의 등만을 본다면 그가 얼마나 부족을 생각하는 족장인지 느껴질 것 같았다.


"버력미르시여!"


"버력미르시여!"


서슬뱀의 선동꾼, 녀석의 꼬리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절을 했다.


군중심리가 생겨나고, 금세 무수한 부족원들이 내게 절을 하며 버력미르를 부른다.


"우리를 보우하소서!"


작가의말

*지구에선 일식이 매년 시간 딱딱 맞춰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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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9. 부족의 신(9) +7 21.05.15 1,244 52 16쪽
9 8. 부족의 신(8) +6 21.05.14 1,307 48 14쪽
8 7. 부족의 신(7) +5 21.05.14 1,327 53 12쪽
» 6. 부족의 신(6) +5 21.05.13 1,390 45 14쪽
6 5. 부족의 신(5) +3 21.05.12 1,544 48 17쪽
5 4. 부족의 신(4) +2 21.05.12 1,720 47 12쪽
4 3. 부족의 신(3) +3 21.05.12 1,953 53 10쪽
3 2. 부족의 신(2) +4 21.05.12 2,422 53 12쪽
2 1. 부족의 신(1) +5 21.05.12 3,481 72 10쪽
1 프롤로그 +12 21.05.12 4,776 96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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