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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다.

신석기 제사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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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작품등록일 :
2021.05.12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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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4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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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2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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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 부족의 신(4)

DUMMY

내가 제사를 주관해야 한다.


서슬바람에게 듣자하니, 제사자의 날은 서른 날 뒤란다.


나는 큰바위와 서슬바람에게 제사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한 후 큰버루산에서 내려왔다.


녀석들은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그냥 보내줬다.


"시발..."


말도 안되는 일이다. 나는 행사 같은 건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한다 치더라도 서슬바람의 말처럼 하루종일 춤을 출 체력이 안 된다. 우레가람의 몸이 아닌 상진의 몸이었다면 체력은 됐을지 몰랐다.


그러나 지금 내 몸은 고작 열두살짜리 꼬마의 몸일 뿐이다.


"젠장... 도대체..."


손톱을 미친듯이 잘근거리며 정처없이 큰버루 마을을 걸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제사자의 날... 제사를 제대로 치루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거지?'


서슬뱀은 제사도 못 치루는 주술사를 내버려 둘만큼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


'... 끝인가...'


어쩌면 제사자의 날 다음엔 어디 들판에 버려질지도 몰랐다.


잘게 다진 새밥이 되어서.


어느새 내 손톱은 거의 다 닳아서 없어졌고, 내 걸음은 족원 두명이 지키고 있는 천막 앞에 머물렀다.


마을 변두리의 천막은 허름했지만, 서슬뱀의 처소에도 없는 경비병이 둘이나 있었다.


'여기는... 주술사의 천막인가?'


내가 천막에 다가가자 경비 중 하나가 눈쌀을 찌푸리며 손짓을 했다.


"우레가람이냐, 저리 가라. 주술사는 돌림병에 걸렸기 때문에 치유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우레가람의 기억 속 주술사의 증상은 기껏해야 약간의 건망증과 알레르기, 노화로 인한 체력저하였다. 전염되는 병이 아니나 지금의 지식 수준으론 알 수 있을리가 없었다.


"할아버님을 보고 싶습니다. 제사자의 날 치루는 제례를 물어봐야 합니다."


"음, 제사자의 날은 확실히..."


경비가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콜록콜록.


천막 안에서 미약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 이 빌어먹을 귀신들린 꼬맹이가!"


짜악!


고개를 끄덕이던 경비가 갑자기 안색을 바꾸며 내 뺨을 후려쳤다.


"네놈 할아비가 악령을 부려 너를 이곳으로 데려왔구나! 할아비의 돌림병을 마을로 퍼뜨릴 셈이지!"


퍼억! 퍼억!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경비에게 걷어차여 나가떨어졌다. 다른 경비는 당황하며 내게 달려들려는 경비를 뜯어말렸고, 경비 둘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내 귓가로 힘은 없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서슬뱀의 꼬리가 붙었다. 버루산 밑 그믄굴로 가 디딤소리를 만나라.


"....!"


나는 얼어붙은 듯 자리에 앉아 천막 안을 쳐다보았다. 더 이상의 목소리는 없었다.


멍하니 경비에게 얻어맞은 뺨을 만지작 거릴 때, 아까부터 아닌 척 나를 따라오던 부족원이 경비들을 말리려 다가갔다가 오히려 흥분한 둘에게 잡혀 구타당했다.


나는 흥분해서 엎치락 뒤치락하는 셋을 뒤로하고 버루산 그믄굴로 걸음을 옮겼다.


* * *


그믄굴은 버루산 제 2의 귀신굴이었다. 귀신굴만큼 어두웠고, 귀신굴만큼 서늘했다. 귀신굴과의 차이점은 그믄굴에선 귀신굴같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뿐이었다.


'하나 더 있나.'


귀신굴을 주술사가 사용한다면, 그믄굴은 치료자가 사용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믄굴의 앞에 선 채로 어두컴컴한 동굴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믄굴의 입구는 통상적인 동굴의 입구보다는 차라리 절벽에 난 균열에 가까웠다.


귀신굴에서 서른 날 동안 갇혀 있던 우레가람의 기억 탓인지, 어두컴컴한 동굴 앞에서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X발... 굴 속이 아무리 무서워도 경계근무 서다가 술처먹은 연대장 만난 것보다 지랄맞겠냐."


군생활의 악몽으로 용기를 북돋으며 이를 악물고 굴 속으로 발을 딛었다. 몇 걸음을 걷자 삽시간에 빛이 없어졌다.


"괜찮아... 길은 알고 있어..."


우레가람은 예전 주술사와 함께 그믄굴에 온 적이 있었다. 한두번도 아니고 수 번이나 말이다.


그때의 위치를 떠올려 디딤소리가 일을 하는 곳으로 가면 그만이다.


사박, 사박.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굴을 걸었다.


본래 그믄굴의 최고 권위자는 대모였다. 하지만 대모가 귀신들렸단 명목으로 서슬뱀에게 죽고 난 후, 그믄굴은 서슬뱀에게 넘어갔다.


그믄굴에 있던 대부분의 치료자는 서슬뱀에게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반대파인 주술사 무리에게 이를 드러냈다.


한 마디로 지금 내가 다른 치료자들에게 들키면 엿 된단 것이다.


어두운 그믄굴 속에선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 씹는 소리, 약간의 신음 소리 등 다양한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나는 천천히 그믄굴 안으로 걸어들어가 왼쪽으로 꺾은 후 오른쪽으로 꺾었다.


그리고 마침내 디딤소리의 자리에 도착했다.


어둠 속, 디딤소리는 무언가를 찢고 섞는 중이었다. 알싸한 향이 주변에 퍼져있었다.


"디딤소리."


나는 작게 그를 불렀다.


그는 듣지 못했는지 반응이 없었다.


"디딤소리!"


내가 그를 조금 더 크게 부르자, 그제야 그가 나를 보았다.


"아..."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디딤소리가 아니다!'


디딤소리의 푸른 눈이 아닌 초록 눈의 사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넌 누구냐."


사내가 일어섰다. 디딤소리는 저렇게 크지 않았다.


"여긴 치유자들의 굴이다. 꼬마야, 부모님이 이곳은 오면 안 되는 곳이라 하지 않던?"


난 식은땀을 흘리며 도망칠 채비를 했다. 이 목소리는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누구보다 친 족장파인 억센잎이었다.


"그... 심부름을..."


"잠깐, 그 목소리... 어디서 들어봤는데..."


콰악!


억센잎이 내 어깨를 억세게 쥐었다.


"냄새... 냄새를 맡아보자꾸나. 큰버루의 아이들 냄새는 내가 전부 꾀었으니 너를 이리 가르친 부모가 누군지..."


어둠 속에서 억센잎의 숨소리가 다가온다. 억센잎의 코가 있는 위치를 짐작하며 주먹을 쥘 때였다.


퍼억!


무언가 둔탁한 것이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동시에 매콤한 냄새가 주변을 감쌌고, 누군가가 내 뒷목을 잡고 억센잎의 손에서 나를 빼냈다.


"이 멍청한 녀석, 거긴 내 자리가 아니라고 몇번을 말했냐?"

"으윽, 이게 무슨 냄새요!?"


"아, 미안하오 억센잎. 홧김에 매운열매를 담은 자루로 아들놈을 때렸소. 멍청한 아들놈이 아직까지 내 자리가 여기인 줄 알지 뭐요?"


"아, 디딤소리. 당신 아들이었구려."


디딤소리는 부끄럽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내 등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제 어미 심부름을 받고 온 것 같소. 용서해 주시구려, 못난 아들 덕에 피해를 끼쳤소."


"아니, 괜찮소. 빨리 가 주시구려. 냄새 때문에 어지럽소."


디딤소리는 미안하다는 둥 다음에 뭔가로 보답하겠다는 둥 좋은 말을 내뱉으며 들고있던 자루를 더욱 흔들었다.


주변으로 더욱 매콤한 냄새가 퍼졌고, 눈이 아프고 기침이 나는 지경이 되자 그는 나를 데리고 빠져나왔다.


"쿨럭쿨럭. 으윽..."


디딤소리를 따라 얼마를 걸었을까, 짐승 가죽이 깔린 넓은 자리에 도착했다. 디딤소리는 열매 껍질로 만든 잔에 물을 담아서 주었다. 달큰한 맛이 도는 물을 마시자 기침이 가라앉았다.


그제서야 나는 눈 앞의 디딤소리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허리춤에 온갖 자루를 주렁주렁 매단 디딤소리는 나를 차분하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디딤소리... 잠깐, 여기는..."


"그래, 대모가 쓰던 자리지."


바닥에 깔린 거죽을 보며 놀라자, 디딤소리가 쓰게 웃었다.


"난 남자라서 대모는 될 수 없지만, 서슬뱀 덕에 그 비슷한 위치는 되었다.


바꿔 말하면 서슬뱀이 아니면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셈이지.


그런데 그런 날 왜 찾아온 거냐?"


맞는 말이었다. 그믄굴에 올 일이 없어 디딤소리가 얼마나 출세했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대모의 사후 서슬뱀에게 가장 먼저 꼬리를 내린 이는 디딤소리였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가라고 하셨습니다."


"주술사께서? 경비 때문에 치료자나 족장 외에는 못 들어갈 텐데."


디딤소리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예. 대신 귓가의 목소리가 울렸죠."


"음...!"


무언가 떠오른 것이 있는지, 디딤소리는 짤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눈을 감아버렸다.


잠시 우리 사이에 침묵이 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디딤소리가 말문을 열었다.


"오늘 아침, 네가 귀신들려 발광할 때에 나는 주술사님께 약을 드리고 있었다.


그분은 약을 얌전히 마시던 중 갑자기 소리를 지르셨다."


디딤소리는 허리춤에 찬 주머니들 중 하나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미친 것처럼 발광하셨지. 하지만 그 때, 내 귓가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주술이었겠지. 그분은 네가 찾아왔을 때 이걸 주라고 하시더구나."


"이건..."


디딤소리가 꺼낸 것은 방울목걸이였다. 푸른색의 그 방울은 차가웠고, 썩 단단했다.


‘청동?’


질감이 나무나 돌은 아니었다.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시대인가?’


이 세계는 아무래도 신석기 후기 즈음인 듯했다.


안쪽에는 아무것도 없는지 흔들어도 소리는 나지 않았다.


"주술사님이 평소 걸고 다니는 제사도구다. 동쪽의 먼 부족에서 가져오셨다는데... 뭔지는 모르겠더구나. 받아두거라."


나는 목걸이를 받아 목에 걸었다.


디딤소리가 말했다.


"이것으로 주술사께 받은 명령은 다 했다. 뭔가 필요한게 있느냐? 서슬뱀이 너를 구타한다 싶으면 내게 말해라.


약초라도 발라주마."


"사실, 필요한 게 있습니다."


제사자의 날. 그리고 주술사가 행하는 수많은 행사 전반에 대해서.


나는 디딤소리에게 그것들을 물어봤다. 치료자의 역할은 주술사를 보조하는 것이기도 하니 잘 알고 있으리란 짐작이었다.


내 사정을 들은 디딤소리는 얼푼이풀을 조금 꺼내 씹으며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모르겠구나. 솔직히 주술사님은 주술에 관해서는 굉장히 말을 아끼시는 편이셨다.


주술사 후보생들에게도 몇몇 괴상한 동작을 가르치고는 끝이셨었지."


"그렇습니까..."


디딤소리조차 모른다 한다. 나는 제사자의 날 내가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 사실이냐 물었다. 그러나 디딤소리는 잔혹한 현실을 확인시켜줄 뿐이었다.


"혈통도, 자격도 딱히 콕 짚어 부족하다 할 만한 것이 없다. 능력이나 제대로 된 절차야, 오히려 네가 제대로 모르는 것이 서슬뱀에겐 더 이득이다.


그러니 주술사님이 그날 기운을 차리셔도, 서슬뱀은 너를 제사장으로 내세울 게다."


"능력도 절차도 춤사위도 제대로 모릅니다만. 서슬뱀에게 물어보면 당연히 안 가르쳐 주겠죠?"


"서슬뱀이라면 자기가 이상하게 가르쳐준 후, 너를 가장 큰 목소리로 비난할 게다."


디딤소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역시 한숨을 쉬었다.


잠시 얼푼이풀을 조금 더 꺼내 씹던 디딤소리가 입을 열었다.


"수가 없다. 일단 제대로는 모르지만, 그 동안 주술사님이 제사자의 날을 주관하셨던 절차와, 춤사위를 최대한 떠올려 알려주마. 제사자의 날은 서른 날 뒤이니, 매일 같이 찾아오거라. 하루 종일 추셨던 춤사위를 정확하진 못해도 대략은 알려주마. 네가 춤사위를 대략이라도 따라한다면 서슬뱀이 너를 못 죽일 명분은 어떻게든 만들 수 있다."


디딤소리의 양 손이 내 어깨를 짚었다.


"서슬뱀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


그 자의 성미로 볼 때 너와 주술사를 최대한 처리하려고 할 테야.


살고 싶다면, 사기극이라도 펼쳐야 한다.


위대한 영을 만들어 내서라도 살아남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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