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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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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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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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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DUMMY

사실 도진은 깔끔했던 차림새를 잃고 말 정도로 피폐해진 화가를 바라보는 나나의 시선 속에서 이미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나나가 한숨을 푹 내쉬며 캔버스를 들고 나갈 때 조용히 따라나서며 곁으로 다가갔다.


“나 혼자 가도 된다니까.”

“그렇긴 하지만 혼자 행동하는 건 좋지 못하니까요.”


예전과 같은 핑곗거리에 나나는 불만을 가지면서도 토를 달지는 않았다. 차라리 이런 말을 거실에서 누워서 적당히 시간만 때우는 태강이 한다면 좋으련만, 그는 지금 낮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필히 그가 제 신변을 돌봐주었으면 한 적은 없었기에 아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결국엔 돌려주네요. 나나 씨가 언젠가 쓸 줄 알았는데.”


천으로 감싼 캔버스를 어깨에 이고 가는 모습에 도진이 두 손을 내밀었지만 그의 뜻을 나나는 단박에 거절했다. 그리고 그가 했던 말에 대해서는 내리 몰아쉬는 숨을 반복한 후에야 답할 수 있었다.


“그러게. 그래도 그렇게 애원하는데 어쩔 수 없잖아. 좀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긴 해요.”


도진의 의도는 여기에 숨어 있었다. 은근슬쩍 대화를 유도하면서 그림에 대한 나나의 생각을 파고들려는 것이다. 거의 서로를 대하며 나란히 걷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풍경은 넓지 못했으나 주제가 있었으므로 길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다.


“그런데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작품이라고 팔다니 그분도 배짱이 대단하네요.”

“그런가? 뻔뻔하기는 하지. 그런데 원래 예술은 그런 사람들이 하는 것 같아. 나는 결국에 그러질 못해서 평범한 일을 해야만 했던 거고.”


나나는 화가와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찼던 눈빛이 이리 금방 바뀔 줄을 누가 알았으랴. 그가 괘씸하다가도 측은해지는 까닭은 거기에 있었다.


“나나 씨는 예술가는 항상 당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녀의 동향을 살피며 도진이 물었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 투는 아니었다.


“그럴 리가. 하지만 왜, 그런 거 있잖아. 예술가라면 자유분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마치 모두가 갖고 있는 신념이나 인생관처럼 말이야.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같은 느낌이 있는 거지. 언제나 경건해서 평생을 모범적으로 살았을 것 같은 바흐도 오르간 연주자로 있었을 때 멋대로 행동했다고 하니까.”


자신이 월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낸 그녀는 급히 뒤에 미주를 붙였다.


“음악가야. 되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 월계에서는 전혀 아니겠지만.”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한 말을 토대로 결론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이르자 미간을 슬쩍 좁히며 잠시 침사묵고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내 생각엔 있지. 보통 사람도 대부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변덕을 갖고 있으니까, 예술가가 가지는 변덕은 오히려 예술이란 이름으로 조금 더 그럴듯하게 여겨진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냥 돌려주려고.”

“그러는 편에 이치에 맞다고 여기는 거군요.”

“이치랄 것까지야. 그래도 나도진 네 말이 그게 맞을 수도 있겠다. 세상엔 예술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아쉽게도 나나에게서 충분한 의견을 얻어내지는 못하였으나, 방향성을 얻는 데 꽤 도움을 얻은 것은 확실했다. 도진의 관심을 가져간 것은 실로 아무것도 없는 그림이 아니었으며, 제목이 없는 시였다. 만약 백면이 흑석과는 다른 면모로 예술가의 길을 걸었던 것이라면 어쨌든 그런 예술가의 심리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 요구되는 순서였다.

애초에 제목이 없지만 내용은 있는 시와, 제목도 내용도 없는 그림을 비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으나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목이 없는 것을 두고 이를 흉조로 여긴 누군가가 중간에 제목을 달은 것일까. 어쨌거나 제목이 달리 전해진 시 한 편이 문제작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니 이토록 자신이 간절하게 매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그는 여기며 작업실에 도착해 화가에게 캔버스를 건네주는 나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그런데 자신이 애타게 찾던 캔버스를 다시 이젤 위에 올려놓았을 때 환호성을 지르지는 못하더라도 화색을 하며 반길 줄 알았던 화가가 막상 이를 되찾으니 긍정적인 반응은 일절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매의 눈을 날카로이 뜨며 하얗고 공허한 천 위를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나나의 물음은 이때까지만 해도 도진에게만 들리는 것이었다.


“이제 가봐도 되죠? 그림은 돌려드렸잖아요.”


나나가 두 손을 공손히 뻗어 캔버스를 가리켰다. 상대가 애걸복걸하는 통에 굳이 발걸음을 돌리는 수고를 하면서 가져온 것이다. 그때까지도 따라올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들이 불편하게 이곳으로 오게끔 하는 화가의 방자한 방식에 그녀는 몰래 혀를 내둘렀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네?”


아무 미동도 없는 그를 보고 도진의 등을 살포시 치며 돌아갈 자세를 취하던 나나가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화가는 그림을 보다 말고 나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요?”


꼬투리를 잡기는커녕 나나는 순순히 그의 곁으로 갔다. 그러고는 그와 함께 빈 캔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젯소칠을 오래전에 끝낸 천은 채색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건 그림을 그리는 자의 착가일지도 모른다. 실은 캔버스는 저 자체로 두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그림을 판 화가가 후회하고 있다지만 어쨌든 그가 그것을 작품으로 팔았으니 온전하게 두어도 나쁠 것이 없다.

나나가 별의 별 잡념에 정신을 빼앗겨 캔버스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때 화가가 재차 그녀를 불렀다.


“이봐. 왜 이 그림을 사갔던 거지?”

“그쪽이 파셨잖아요.”

“그래. 그렇다면 내가 왜 이걸 팔려고 했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 그러니까 말해. 왜 이 그림을 샀던 거지?”


정말로 기억이 가물한 건지 그는 콧잔등에 주름을 그리며 인상을 썼다. 나나는 분명히 서점 안에서 자신의 친구에게 젓가락을 언급했던 적을 떠올렸다. 그새 잊어버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림쟁이의 기억력을 의심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친절히 털어놓았다.


“제가 그림을 사고 싶다고 했더니, 무슨 젓가락인지 뭔지를 그리기 싫다고요. 옆 서점에 있는 친구가 그걸 그려달라고 했다고. 그래서 핑곗거리가 필요하셨겠죠. 젓가락을 그리기 싫어서.”

“그래. 그 젓가락이었어!”


보아하니 젓가락을 그려달라고 했던 부탁까지는 기억하더라도 그 뒤에 자신과의 일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눈치다. 그는 외마디를 마저 지르더니 한 발자국 더 물러나서 캔버스를 감상했다. 여전히 무엇도 없는 그 그림을 말이다.


“이 씨의 젓가락이 문제였던 거야. 아니, 내 마음이 문제였던 건지도 모르지. 아무튼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야. 문제는 있었지만 이제는 없으니까. 내가 이제라도 다시 이 그림을 얻어서 정말 다행이야.”


안도하는 사이에도 그는 자신에게 직접 구매한 물건을 돌려주려고 온 나나 일행에 감사한 마음을 표하지는 않았다. 기가 찬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나나의 옆모습에, 뒤에서 지켜보던 도진은 아주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일만 괴로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 그림이 없는 일도 괴로운 것이었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작품이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바로 나의 실수였어.”


화가는 허리에 두 팔을 얹고 좌우로 돌아 한 번씩 제자리걸음을 하더니 곧 다시 캔버스를 마주보는 방향으로 멈추어서 나나에게 대답했다.


“그림이 없는 그림을 작품이라고 내놓다니, 아무리 반이성(反理性), 반예술(反藝術)을 표방하려고 해도 그것만큼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이었어. 무엇도 없는 그림은 이성에 반대하고 예술에 반대하는 게 아니야. 그건 그 자체로 이성이 없고 예술이 없는 세상이 될 뿐이지. 그동안에 내가 얼마나 끔찍한 나날들을 보냈는지 너는 모를 거야.”


마치 젓가락으로 국을 뜨려고 하는 것과 같을까. 그렇다고 하면 그의 설명은 말이 된다. 그가 평소에 어떤 예술철학을 갖고 그림을 그려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굳이 짐작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림이 없는 그림이 자신의 작품이 되었을 때의 고통은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이러한 절망적인 기분에 대한 묘한 반응으로 갑자기 제목 없는 시를 떠올린 나나가 흘깃 도진을 돌아보았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둘은 바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그러고 보니 말이야. 어제였던가?”

“예.”


화가가 어제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줄로 단번에 알아들은 도진이 뒤에서 떨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어제 너희가 이 씨 가게에 와서 그 무제의 시에 대해서 캐묻는 바람에 내가 감을 잡을 수 있거든. 그건 고맙게 생각하도록 하지.”


고맙단 인사는 마음을 표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여기겠다는 통보로 전해졌다. 황당하고 불쾌해야 하는데, 지금껏 화가가 고집에 따라 행동한 탓에 그것만이라도 감지덕지로 여겨야 하는 것은 아닌지 나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거만하고 성의 없는 인사에 아무도 반발하지 않자 화가는 그 정적이 낯선 기색을 잠깐 비치다가도 금세 표정을 본래의 당당한 것으로 바꾸어서 말을 이었다.


“그때 이후로 계속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서 원인을 도저히 모르고 있었거든. 원인이 뭔지 감을 잡을 수도 없었어. 그런데 거의 연속으로 그 무제의 시에 대해서 듣고 나니 드디어 감이 잡히는 거야. 그래서 너를 어제 그냥 보낸 걸 아주 후회했었지.”


화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나를 가리켰다. 그의 삿대질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으므로 나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아무튼 그림을 찾아서 정말 다행이야. 십년감수가 아니라 백년을 감수한 기분이라고. 그래도 되찾았으니 된 거야. 아무것도 없는 그림을 그림이라고 해야 하는 화가의 기분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나?”


나나에게만 묻는 것이 아니었는지 화가는 뒤돌아서 도진을 쳐다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눈치만 보며 먼저 대답할 사람이 상대방이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딱히 엮이고 싶지 않은 인물이라는 같은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대답이 꼭 필요하지 않았던 화가는 그대로 혼잣말을 계속했다.


“그 제목이 없는 시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속세에서는 「달」이라고 불린다던 그 시 말이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겠어. 만약 나중에 제목을 단 사람이 시인이고 내가 그 시인이었다면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는 일에 평생을 괴로워하면서 살았겠지.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한 일이야.”

“왜요? 제목이 없는 시는 그렇게 드문 게 아니잖아요. 일부러 작품에 제목을 달지 않는 시인들도 많을 텐데.”


나나는 자신이 지금까지 배운 것을 바탕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화가는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이 한 손의 검지를 메트로놈이 박자를 알릴 때와 같이 움직였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남들이 어떻든 자신이 제일 중요한 게 곧 예술이지. 이렇다 저렇다 예술에 대해 떠드는 건 비평이나 하는 사람들의 몫이지만 말이야. 이건 너무나도 당연해서 이걸 알지 않고는 예술가가 될 수 없기도 하지. 아무튼 정말로 다행이야. 이제야 그림을 그릴 수 있겠어. 아주 마음이 놓이는군.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모두 놓아버려서는 안 되지. 돌아갈 곳이 있는 방황만이 가치가 있는 거니까.”


그는 기지개를 폈다.


“이 씨에게도 미안하니까 이젠 정말로 젓가락을 그려줘야겠어. 비록 이 씨는 그 젓가락을 버렸을 테지만, 인간에게는 상상력이란 게 있으니까.”


그리고 나나와 도진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아예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곧 벽 뒤로 들어가버렸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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