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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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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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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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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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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DUMMY

나나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려는 몸짓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어요? 네?”


그럼에도 건네는 질문은 아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아가씨······! 괜찮아요?”


나나는 안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에게서 시집을 빼앗아 들었다. 혹시 몰라서 책장을 스르륵 펼쳐보았으나 그녀가 기대했던 혹은 염려했던 무언가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도 아직은 이르다는 판단하에 나나는 책을 반대로 뒤집어 한번 더 이 행동을 반복하고 나서야 자신 앞에 있는 어른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을 왜 가지고 있으신 거예요?”


때 이른 심문이 시작되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이 책은 훔쳐온 것도 아니고, 나 개인의 소유입니다. 사유재산이란 말이죠.”

“아······ 하긴. 그렇겠죠? 죄송해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


책의 표지도 깨끗했다. 틀림없이 개인이 소장하는 시집에 불과했다. 섣부른 판단이 부른 충동적 반응은 두 사람에게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잠시 멍하니 나나가 허공을 응시하다가 책을 도로 안수에게 건넸다.


“제가 아는 책인 줄 알아서요. 그런데 이 책을 왜 들고 다니시는 거예요?”

“이번 연구 주제입니다. 관심이 있나요?”


돌려받은 책에 이상이 없는지 습관적으로 안을 살펴보던 안수는 이마에 주름을 그리며 선뜻 나나에게 물었다.


“아뇨, 제가 공부에는 소질이 딱히 없어서.”


혹여라도 그가 이상한 쪽으로 자신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나는 선을 그었다. 이때까지 해도 나나는 이 정안수라는 자가 또 다른 백면의 내생일 것임을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나나에게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의지에 의한 하루가 아닌 운명에 의한 하루가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까지 말이다.

안수는 나나가 정색하며 하는 말에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보이며 시집 아래에 있던 책을 들어 보였다. 아직 나나의 안중에는 들어오지 않는 사소한 동작이었다.


“사실 공부는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건 맞지요. 아가씨는 꽤 훌륭한 사람이군요.”

“네? 공부에 소질이 없다니까 그게 어떻게 훌륭한 사람이에요?”


앞에 붙은 부사 ‘꽤’가 걸리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쨌든 내버려 두고 나나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힐문했다.


“소질이 없는 것에 욕심을 내지 않으니까요. 사람의 인생은 자신에게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잃게 되는 여정인데 자신이 처음부터 어떤 것을 잃어버렸는지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더 엄밀하게 따지자면, 훌륭한 사람이 되는 첫걸음을 뗐다고 설명하는 게 명확하겠습니다.”

“······그런가요?”


언변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늘 약한 면모를 보이는 나나는 다시금 쉽게 설득당하고 말았다. 어쨌거나 자신이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것은 상대가 자신을 깎아내리기 위해 한 말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것은 사실이었기에 이렇게 포장된 칭찬을 듣는 것을 나쁜 게 아니라고 합리적으로 자신을 이해시킨 것이다.


“아가씨가 이 시집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럼 이 책을 같이 읽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제야 나나는 시집이 아닌 다른 책을 발견했다. 불필요한 교양을 권하는 학자에게는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책은 천천히 눈여겨보았다. 표지에는 도서관 바코드가 부착되어 있엇고 상당히 고급져 보이는 서적으로 제목 또한 심상치 않았다. 미간을 찌푸려가며 책의 겉모습을 살펴보던 나나가 입을 열었다.


“허무에 대하여? 이 책을 같이 읽으면 도움이 된다고요? 아니지, 그전에 저는 이 시집을 읽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이 시집을 그냥 좀 알게 된 거거든요.”

“이 시집을 그냥 좀 알게 되었다고요? 호오, 그것 참 흥미로운 이야기군. 괜찮다면 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나요? 아가씨에게 딴 의도를 갖고 말을 붙이는 것이 아니고, 연구자로서 호기심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니 이해 부탁합니다.”

“네? 그런데 저 지금 가야 할 곳이 있는데······.”


우연히 만난 나나에게 가볍게 인사하던 안수는 그녀의 이야기가 자신의 연구에 어떠한 빛줄기가 되어줄지 모른다는 직감에 나나의 앞을 막아섰다. 처음부터 그녀가 이 거리를 벗어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이 방향으로 걸어온 것처럼.


“마침 확인할 게 있어서 이곳에 온 겁니다. 괜찮다면 저 건너편에 있던 서점까지 잠시 동행해도 괜찮겠지요?”

“서점이요?”


나나는 안수의 말에 따라 뒤돌아 서점을 찾았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화가의 작업실 옆에 바로 위치했으니까. 화가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덧 문은 열려 있었는데, 분명히 저 거대한 벽 뒤에서 저번처럼 붓을 씻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나의 찰나를 메꾸었다.


“이 작자 미상 시집의 원본을 찾았단 연락을 어제 받았습니다. 이보다 더 귀중한 연구 자료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를 따라나서지 않으려던 나나는 예전에 야담이 이 시집을 두고 녹수가 찾고 있는 것이라 언급한 기억이 떠올라 군말을 더하지 않고 앞장서서 걷는 안수의 뒤를 따라갔다. 안수가 문을 여는 순간에는 무의식적으로 옆쪽으로 눈이 돌아갔는데, 그때까지도 그 안에서 사람의 형태는 보이지 않았다.


“아! 교수님 오셨군요.”

“이 선생, 잘 지냈겠지요?”

“그럼요, 그럼요. 들어오세요. 그렇지 않아도 얼른 오시지 않아서 애를 먹던 참이었습니다.”


서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안수를 극진히 반겼다. 손짓으로 안을 가리킨 그는 안수의 뒤로 보이는 나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또 다시 숙여 인사를 한 뒤에는 안수를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보니 두 번씩이나 우연찮게 만난 아가씬데 그래서 말을 걸었거든, 그러다가 보니 이 시집에 대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잠시 동행을 청했지요. 그나저나 애를 먹었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이 선생?”

“그러시군요.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나나에게도 똑같이 안에 들어올 것을 권한 서점 주인은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 뒤쪽에 있는 아카시아 원목의 스툴 둘을 꺼내 거리감을 둔 채 바깥에 두었다. 안수가 먼저 왼쪽에 앉자 나나는 쭈뼛거리며 그 옆에 앉았다. 왠지 두 명의 손님이 이곳에 상담을 받으러 온 것만 같은 풍경이 그려졌다.


“그게 말이지요.”


모두가 착석하자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안수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정 교수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이 시집 연구를 하시기 때문에 저 역시 교수님을 존경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거울 나라』의 원본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야 이 선생의 노력은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다마다. 이외에도 정말 이 선생이 정말로 많은 수고를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수님께서 과찬을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게 아니고요, 그래서 최대한으로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게 이 원본을 입수했다는 것을 저는 결백하게 교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오늘 한 남정네가 와서 그 원본에 대해 묻는 게 아니겠습니까?”


불청객처럼 사이에 껴서 오고가는 대화의 갈피를 잡기 위해 눈을 요리조리 굴리던 나나는 문득 서점 주인의 말에 자신이 뜨끔거리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까닭에 자신까지 영문을 모르게 된 아리송한 기분이다.


“혹시 그분도 『거울나라』를 연구하시는 게 아닐지요?”


안수는 제법 자신의 추리를 토대로 좋은 방향의 해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선생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책장수 생활이 몇 년인데 제가 그런 것도 못 알아볼까 봐요? 척 보면 척입니다. 그런 사내로 보이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더 애를 먹었단 말입니다.”

“어째서죠?”


교수가 이유를 묻자 책장수는 아주 긴 숨을 가늘게 내쉬더니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의 상황이 아직도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다.


“원본을 내놓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저를 겁주는 것 아닙니까? 워낙에 사납게 생긴 얼굴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괜히 그런 말도 안 되는 으름장까지 진심처럼 들리더군요. 아무튼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교수님. 제가 원본은 잘 보관해뒀으니까요.”

“흉한 일을 겪었군요. 정말로 애 많이 썼습니다, 이 선생.”


안수가 격려의 의미로 깍지를 끼며 위로의 눈빛을 보내자 주인은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얼굴을 끄덕거렸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카운터 아래의 서랍을 펼쳤다.


“교수님이 오시기 거의 바로 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겪은 지 얼마 안 된 일입니다. 강도가 든 것 같이 소름끼치고 두려운 일이었죠. 어떻게 알았을까요? 게다가 이 원본을 공수하기까지······ 어라?”


주인은 책장수로서의 자존심을 잃은, 확연히 어두워진 안색으로 허리를 더 숙이며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두 팔이 바쁘게 서랍 안을 휘젓고 다니고 있는 광경을 앞의 두 사람도 침묵으로 불안하게 지켜보았으나 결과는 더 끔찍했다.


“교수님. 채, 책이 없어졌습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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