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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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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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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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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DUMMY

날이 밝아옴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달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봐야 하는 일이다. 이에 차츰 익숙해지다 못해 이따금씩 하늘은 해가 뜰 자리가 아니라는 허상에 이끌리곤 한다. 해가 없는 곳에서 저 하늘은 어떻게 밝아지는 것일까. 자신의 지식으로는 절대 풀 수 없으리란 생각에 나나는 올려다보는 짓을 관두고 서점 안으로 들어왔다.

앞장서서 걸었던 도진의 뒤를 따라 나나는 서점 안을 마치 전시된 작품을 바라보듯이 거리감을 두며 둘러보았다. 서점 유리창 너머로 하늘을 바라봐도 될 일이지만 그러면 목이 너무 뻐근해지는 탓에 과감하게 시선을 이쪽으로 돌린 것이다. 혹시나 월계의 문인들도 세계의 문인들처럼 같은 사람이 같은 작품을 내고 있나 호기심에 이끌려 사방을 둘러싸고도 공간의 곳곳에 놓인 책장을 유심히 살폈지만, 그런 평행이론을 믿는 일은 어리석다는 것을 그녀는 곧 깨닫고 말았다. 죄다 낯선 이름 투성이였다.

저번에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서점의 사장을 붙잡고 이것저것 캐물을 줄 알았던 도진이 문제의 시집만을 달랑 챙겨서는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책장을 둘러보던 나나에게로 다가왔다.


“나가죠.”


그리고 나나의 귀에만 들리게 조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예상과 다르게 행동하자 의아한 기분과 기꺼운 감정이 서서히 교차했다. 어차피 목적은 시집이었다. 그리고 이 선생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정보를 우리에게 넘겨준 후다.

이번에도 그를 따라 밖으로 나온 나나가 잽싸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진에게 물었다. 비장했던 그의 언행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여러 권의 책을 더 집을 줄 알았으니 그녀 딴에는 몹시 궁금하기도 했던 것이다.


“시집 한 권이면 충분해?”

“한 권만 산 건 아니에요.”


도진이 제 손에 들린 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 권으로만 보였던 시집 뒤에는 같은 시집으로 두 권 더 숨겨져 있었다.


“왜 굳이 세 권이나 산 거야?”

“혹시 모르잖아요.”


도진은 우선 한 권을 나나에게로 아예 건넸다. 이를 집어든 나나가 책장을 훑는 동안에 그가 나머지 두 권을 다시 옆구리에 차고 그녀가 도로 대화에 돌아올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었다.


“모든 판본을 찾아다니고 있다고 하는데, 나중에 가서 혹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아예 이 시집 자체를 구할 수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서 여분을 쟁인 거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의 예방책이 기우로 보이기는 하여도 확실히 일리가 있었으므로 나나는 그의 선택을 인정하는 고갯짓을 보이며 지금 당장 시집을 읽을 것인지를 물었다.


“우선은 그래야 할 것 같군요. 교수님께서 아마 그 책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의문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백면에 대해서 믿지 않으실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이들은 하루 일과를 정해놓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대뜸 서점 옆의 유리창 너머로 나나를 애타게 반기는 눈빛의 남자가 문을 열고 그들의 앞으로 달려나왔다. 언젠가 나나에게 아무것도 없는 백지의 그림을 떳떳하게 판 화가였다.


“내 그림 좀 돌려 줘.”


난데없이 튀어나온 화가는 저번에 서점에서 마주쳤을 때까지만 해도 호기롭던 표정을 잃고 매우 다급하고 불안한 눈길로 나나의 어깨에 자신의 두 손을 얹었다. 그것을 하나씩 치워내며 나나가 한 걸음 물러나자 화가는 머리를 떨구며 낮고 우울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이 자세를 유지하며 자신이 튀어나와야 했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 그림을 판 뒤로 그림이 계속 그려지질 않아. 오늘은 도통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정신의 한계에 부딪힌 기분이야.”


이상하고도 옳아 보이는 언변으로 나나에게 캔버스를 팔던 유명 화가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아 불안지심으로 제 시야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청승맞은 그림꾼 한 명이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러시죠?”


놀라기는 도진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우선 백면과 관련된 일로 신경이 곤두선 도진이 그의 앞을 반쯤 가리며 화가에게 물었다.


“말 그대로야. 내가 그때 너한테 팔았던 그림을 다시 줬으면 해.”


화가는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거 저한테 파신 거잖아요.”


자신이 판 그림을 이제 와서 돌려달라고 하는 화가가 이 세상에 아주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도 그림을 그려봤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예술가의 반대편에 선 이들보다는 예술가의 옆에서 그의 편을 들려고 하는 편이다. 그것이 더 도덕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옳다고 생각했으며 무엇보다 나나 자신의 심적으로도 근심이 없어지는 길이었다. 아마도 그렇게라도 예술가의 근처에 다다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만은 조금 다르게 행동하고 싶었다. 우선은 말도 안 되는 그림을 거래하는 일이 황당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런 일에 홀라당 넘어가버린 자신의 자존심도 있기에 도저히 또 순전히 따를 수는 없는 문제였다. 게다가 무슨 연관성이 있다고 저 화가는 자신의 지지부진한 작업 속도에 대해서 자신을 원인으로 꼽는단 말인가. 애초에 그림쟁이에게 능화(能畫)란 불가능과 다를 바 없다.


“그래. 그러니까 돌려줘. 나한테 다시 돌려줬으면 해.”


화가는 자신이 왜 자신들 앞에 섰는지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설명하면서도 그 반복적인 문구의 목적이나 까닭은 아직까지도 밝히지 않았다.


“왜요? 그리고 어쨌든 작품이라고 파신 건데, 그렇게 돌려받으려고 하시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 아시죠?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그림인데 그게 무슨 연관이 있다고.”


나나가 굽히지 않고 맞서자 도진은 자신이 가리고 있던 시야를 돌려주기 위해 다시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는 동안에 화가는 제 머리를 감싸며 괴로운 심정을 겉으로 드러냈다. 그 모습을 정면으로 보고 있자니, 자신이 방금 뱉은 말이 너무했단 생각이 나나의 머릿속에 스쳤지만 그녀는 쉽게 뜻을 물리지 않았다. 이 오기는 실은 언젠가 한 번 그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릴 생각으로 이 며칠을 지내온 인내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문제인 거야.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그림을 팔아서 문제라고. 왜 몰랐을까?”


화가는 알 수 없는 말을 빠르게 중얼거렸다.


“잿소칠은 직접 하셨으니까 본인의 그림이 맞다면서요.”

“그래 맞아.”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는 나나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격하게 공감하면서 더욱이 괴로운 눈빛으로 들어올린 자신의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내가 그랬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그림에 그렇게 치명적인 단서를 남긴 거야. 그 범인이 바로 나라는 걸 말이야. 그래서 더욱 문제야.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그림이 나의 것이 된 이상 내가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어버린 거라고.”


화가는 나나에게로 몇 걸음 더 다가와서 시집이 들리지 않은 나나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붙잡고 애원했다. 분명하게도 서점 안에서 자신을 의미심장한 미소로 보던 화가의 눈은 정녕 없어졌으며 눈알은 붉고 불길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발 그 그림을 다시 나한테 줘. 그렇지 않고서는 나는 영영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 거야.”


그는 본론을 말하고도 자신의 불안을 누를 수 없었는지 여분의 말을 덧붙이고 다시 덧붙였다.


“내가 당장 먹고 살 돈이 없어서 이러는 것도 아니야. 나도 내 그림으로 벌 만큼 벌었고 그래도 부족하다면 예전부터 그려놓고 나 혼자만 감상하던 그림 몇 점을 더 팔아버리면 되는 일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내 그림은 더 비싸질 거라고.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하고 날 두렵게 하는 건 내가 앞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 거라는 거야. 그러니까 제발 그때 너한테 판 그림을 다시 갖다 줘. 최근에 내가 계속 괴로웠던 건 모두 그 그림 때문이었어. 넌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난 미치지 않았어. 내가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캔버스를 너한테 팔았던 것이고, 그래서 이제 난 미쳐버리기 직전이야.”


화가는 꼭 붙잡은 나나의 두 손보다도 더 아래를 향하며 다시 얼굴을 숙였다. 그가 흐느끼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는데,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했는지 이내 그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걸 돌려줘야 해. 돌려줄 거지? 제발 내 고통을 모르는 척 넘기지 마. 허무감을 이겨낼 만큼 대단한 인간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끝에 다다르자 화가의 부탁은 꼭 협박처럼 들리기도 했다. 정말로 눈물을 애써 참은 것인지 다시금 나나를 바라보는 화가의 두 눈은 붉은 기에 더해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저번부터 줄곧 단정했던 그의 머리도 오늘은 흐트러졌고 여러모로 제 불안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자태였다.

이때 화가가 이미 여러 차례 말하고도 아직도 모자른지, 했던 말을 또 꺼냈다.


“그 아무것도 없는 그림을 돌려줘. 아무것도 아닌 그림이지만, 무엇도 될 수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 제발. 난 그림을 그려야만 해.”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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