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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님의 서재입니다.

달이 만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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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리
작품등록일 :
2020.06.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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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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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DUMMY

식탁에 대석하여 서로를 바라보던 나나와 도진은 저 너머에서 들리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다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는 두 사람 모두 함구하여 저쪽의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잡다한 소음은 암묵적으로 불허한 시기였다. 차츰 마무리되어가는 네 사람의 대화가 짧아지거나 길어지지 않도록 도진의 낮춘 목소리가 나나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나나 씨는 시 읽는 걸 좋아해요?”


엿듣고 있던 대화와 관련된 말을 던질 줄 알고 있던 나나는 당황스러운 눈초리로 식탁 가운데에 놓인 화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근래 스킨답서스니 레위시아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못했는데, 이 집에서 누군가가 꾸준히 관리하는 모양이다. 도진과 조이 둘 중에 한 명임이 틀림없다.


“아니. 별로. 난 소설을 더 좋아해.”


도진은 그녀의 표정으로부터 그 말이 진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째서요?”

“굳이 따져서 말하자면, 난 철학에는 좀 관심이 있긴 했거든. 그림을 그리는 일에도 생각 그 이상의 철학이 필요하더라고. 그 정도의 사고력을 내가 지니지 못해서 겉핥기식이 전부였지만. 그런데 철학 관련 책은 전부 산문이잖아. 운문은 너무 어렵고, 딱히 철학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아. 그리고 빠르고 간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좀 마음에 걸리고.”


정녕 문학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대답해도 되는지 몰라 초조해지니 나나는 뒷목이 조금 불편해지는 낌새를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질문이 가리키는 방향을 반대로 겨누었다.


“그런데 나도진 너도 문학 쪽은 전혀 안 읽는다며. 왜 그런 거야?”


한 차례 조이와 마주보고 앉았던 그 자리에 도진이 앉아 있으니 나나는 문득 비밀에 부치고 싶은 도진의 신상 정보를 떠올렸다. 그를 계속해서 동갑내기 혹은 그 이하로 대하고 있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또 무엇보다 상대방도 큰 불만을 느끼는 것 같지 않기에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지만 불편한 진실이 찾아올 때면 갑자기 그 진실이 하늘을 뒤엎어 모든 게 잘못된 것 같은 불편한 감각을 가지게 된다.


“애매모호해서요. 어떻게 보면 나나 씨랑 비슷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거네요. 많은 진실이 작품 안에 담겼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보고 싶은 것만을 쓸 뿐이잖아요.”


자신이 진실에 대해서 생각할 때 도진이 그것을 그대로 언급하자 마치 양심을 찔린 사람처럼 두 볼의 근육이 어색하게 굳은 나나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반응에 잠자코 있다가 보니 자연스레 도진의 말을 곱씹게 되었는데, 이때 나나의 머릿속에 다시 백면이 떠올랐다.


“보고 싶은 것만 쓰면,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은 거네?”

“그런가요? 저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하는 거였는데 거울을 보는 것도 포함될 수 있겠군요.”

“그게 아니야. 보고 싶은 것만 보는데 보여지는 걸 보는 거랑 조금 다르잖아. 그러니까 거울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까? 이게 혹시 『거울 나라』에 대한 또다른 해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대단한 발견을 했다는 생각에 신이 난 나나가 아까와는 다른 기쁨으로 아랫입술을 앞니로 지그시 눌렀다.


“그렇지만 거울을 본다고 해서 왜 보고 싶은 것만 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거울 앞에 서는 게 반드시 의지에 의해서만은 아니잖아요. 나나 씨도 우연의 계기로 인해서 거울을 본 때가 있을 거예요.”


곧바로 나나는 흡족한 표정을 무너뜨리며 곤란한 눈초리로 깊은 고심에 잠겼다. 바로 이 점이 자신에게 철학인지 뭔지 하는 학문이 너무 어렵게 다가오는 이유였다. 기발한 아이디어에 기대어 영감이 밝히는 곳에 붓이나 손이 닿으면 되는 일이 전부였던 그녀에게, 손이 닿는다고 해서 길이 보이지 않는 사색의 영역은 미지의 세계와 같았다.

게다가 월계로 넘어오기 전에 택시 안에서 꾼 꿈만 해도 도진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자신의 의견의 허점을 노리는 사례였다. 비록 꿈이기는 했으나 온통 거울로 휩싸인 그 공간에 자신이 제 발로 들어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렵네 정말.”


나나가 아쉬움에 종알거리자 고민스레 궁리하던 도진이 병 주고 약 주는 식으로 그녀에게 아직 여망(餘望)이 있음을 알렸다.


“하지만 거울 속에서 뭘 볼 건지 결정하는 쪽은 보는 사람이니까 어떻게 보면 나나 씨의 말이 맞아요. 교수님을 뵙기 전에 이런 주제의 연구가 이미 선행되었는지 내일 찾아봐야겠군요.”

“그냥 교수님한테 가서 물어보면 되는 일 아닐까?”

“그럴 순 없어요. 뭔가를 질문할 땐 내가 뭘 알고 뭘 모르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거든요.”


차라리 전부 모르는 것으로 여기고 전문가에게 다양한 견해에 대해서 묻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 아닐까 싶었지만, 나나는 그런대로 도진의 뜻에 수긍했다.

원하는 이를 만날 수 없는 하루였으나 그 발자취를 따라 시선은 빠르게 지나치고 시간은 더디게 흘러간 날이었다. 내일이 된다고 해서 정안수를 곧 만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밖에서 저들끼리 사라진 성인들을 찾아 궁리하는 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 우리가 금방 찾지 못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일까. 아니면 그래서는 안 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이곳에서의 생활이 점점 익숙해지고, 이런 미궁 속에서 길을 찾으려고 하는지 이제는 자신의 의지마저 자신의 것이 아니란 생각에 나나는 밤을 끝으로 하루를 놓아주었다.


***


“애를 쓰는군.”


천일나무 밑으로 땅에 두 손바닥을 내리고 있던 주화의 등뒤에서 영월의 저성(低聲)이 영령히 들려왔다. 밤이 깊은 탓에 돌아보아도 쉽게 그의 외형을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화는 그의 말을 무시하는 데에 죄책감을 갖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쩌면 그의 목소리가 자신에게 닿지 않았다는 핑계로 대기에 밤이 너무 어두운 점도 이롭게 느껴졌다.


“살아날 수는 없을 거다. 때를 기다려야 하지.”


나무가 썩어가는 속도가 조금이나마 늦어졌다는 것은 희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절망에 다다르는 희망은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 그것을 모르지 않고 한밤중에 나온 것이 아니었기에 주화는 맥이 빠질 소리에는 이전보다 더욱 무심하게 대했다.


“그렇다고 해서 너의 노력을 탓하려는 건 아니야. 이유가 무엇이든 심연도를 떠나는 것도 떠나지 않는 것도 너의 자유니까.”

“모두 모여야 한다고 할 땐 언제고. 그나저나 왜 숨긴 거예요? 천규 때는 그렇게 부탁까지 하러 왔으면서 황호를 만나는 일과 그 뒤의 일들은 혼자서만 해결하려고 하네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미 말을 뱉은 뒤였기에 소용은 없었다. 영월의 발걸음이 가까워지더니 이내 그녀의 손 근처에서 터벅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그녀가 반응을 보이자마자 이를 빌미로 다가온 것이다.


“떠난 건 황호와 녹순데, 너희들은 꼭 내가 떠난 것처럼 대하는군.”

“그런 건 아니에요.”


이에 그를 올려다보지도 않고 주화는 묵묵하게 대응했다. 희미하게 보이는 제 손에 시선을 고정하며 제 아래의 땅을 응시했다.


“야담이 언젠가 말했을 거다. 아직은 이르다고 말이야. 정말로 아직은 일러.”

“뭐가 이르다는 거예요? 야담은 자신이 알아낸 것을 모두가 다 알기에는 이르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는데, 영월은 꼭 다른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네요.”


영월은 무릎을 굽힌다거나 허리를 구부려서라도 주화의 시야에 자신을 보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는지 그대로 서서 그녀의 언질을 들었다.


“그래. 결이 다른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지. 알아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하는 경고다.”

“경고라고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행동을 해놓고 경고를 한다고요?”

“너희는 백면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지?”


갑작스레 주화의 말문이 막혔다. 그가 부랑자 혹은 반항아처럼 살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외에는? 자신할 수 없다. 그녀는 스스로 입을 다문 것에 대해 치욕스러우면서도 어쩐지 그런 자신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우리 중에 백면이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어도,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드러운 어조로 다가오는 영월의 말이 귀에 날카롭게 꽂혔다.


“그걸 알아내기에 적합한 때가 오면 나도 야담처럼 너희에게 말할 수 있겠지.”


그는 말을 마치더니 곧 왔던 길로 돌아가기 위한 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주화가 아쉽지 않도록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때까지 천일나무 곁을 네가 지키는 것도 좋겠군. 무슨 존재든 외로움에는 취약한 법일 테니.”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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