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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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 줄 게 있어요.”
“또 있어?”
“이번엔 이상한 게 아니에요. 따라와요.”
이젠 성질을 낼 기운도 없는 나나가 허탈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도진이 쾌활하게 웃었다. 손을 내밀자 그녀가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나나와 도진은 지하 통로를 빠져 나와 다시 안뜰로 돌아왔다. 나나가 저의를 모르겠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자, 도진은 이번엔 손으로 가리키지 않고 자신이 먼저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월계의 밤도 세계의 밤만큼이나 어두웠다. 달은 아직도 하늘에 걸려 있었다. 그렇게 그대로 아침에 와도 걸려 있을 것처럼 하늘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월몰(月沒)과 월출(月出)을 볼 수 없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 나나가 하늘을 보며 물었다.
“달이 안 지네.”
“그럼요. 월계니까요.”
“어떻게 그래?”
“세계도 똑같지 않나요? 아침에는 해가 뜨고, 밤에는 달이 뜨고. 하늘에 항상 무언가가 걸려 있잖아요.”
정말 그랬다. 하늘에는 촘촘히 모여 무수하게 빛나는 별들도 있었지만 둥근 무언가가 항상 있었다. 언제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면 해가 반길 때도 있고 달이 반길 때도 있었다. 즉, 언제라도 하늘에는 둥글고 빛이 나는 무언가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반기고 있었다.
“세계는 항상 인간이 중심이 되기에 세계라 불리고 되었고, 항상 달이 중심이 되는 월계는 그 때문에 월계라 불리게 된 것. 사실 달이 중심이라는 건 거창한 게 아니에요. 아까 나나 씨가 미지화를 보며 이곳은 직관적이라고 그랬죠?”
“응.”
“맞아요. 월계란 이름도 그렇게 지어진 거예요. 세계와는 다르게 언제나 달이 하늘이 중심이기 때문에.”
도진이 맑은 웃음을 보이며 말을 잇는다.
“비밀 하나 알려줄까요?”
“뭔데?”
“나나 씨가 있는 세계의 달. 그 달은 월계의 달이 세계에 비추어진 것이에요.”
***
“헙-!”
꿈이 아니었다. 꿈만 같았는데 꿈이 아니었다. 창문 안으로 살짝 보이는 하늘을 바라봤다. 저렇게 맑고 파란 것으로 보아 아침, 아니 늦어도 낮이 분명하다. 그리고 달이 떠 있다. 이곳은 월계였다. 나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안을 둘러보았다.
정체 모를 골동품들이 벽 한쪽에 전시된 것을 제외하면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방이다. 어디를 봐도 사람의 흔적만이 남겨졌다. 성인 중 한 명의 방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아 정확히 누구의 방인지는 모르겠다. 베개 옆에 놓인 안경을 쓰며 그녀는 생각했다.
‘돌아갈 수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아직도 돌아가는 것에 대해 제대로 물어보지 않았다.
얼떨결에 끌려온 월계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고. 어제, 세계의 달이 원래 월계의 달이라는 도진의 말을 듣고 그녀는 그것만은 믿지 않겠다고 포고했다.
증거가 없는 이야기였다. 도진은 사실이라고, 지금까지 자신이 그녀에게 말한 것이 전부 다 사실이지 않았냐며 따지듯이 대답했고 그렇게 둘은 다시 언성을 높이며 제대로 된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피곤하니 쉬고 싶다고 한 나나의 말에 도진은 월영전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2층으로 안내했다.
그 뒤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방안의 침대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그곳에 몸을 맡겨 잠들었던 것 같다. 나나는 침대 아래에 놓인 양말 한 켤레와 운동화 하나를 발견했다. 아주 새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러자 나나는 어제 이곳저곳으로 다니느라 더러워진 자신의 발을 내려다 봤다. 발에서 냄새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으, 씻고 싶어.”
급한 대로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물병과 티슈 몇 장을 뽑아 침대에 걸터앉았다. 발을 씻기 위해서였다. 물병을 기울여 티슈를 적시고는 그대로 발을 닦아냈다. 하얬던 티슈는 금세 검은 얼룩에 더러워졌다. 대신 그녀의 발바닥은 본래 그녀의 살이 지니던 색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마른 티슈 한 장으로 두 발을 문지른 그녀는 그대로 양말을 신고 운동화를 신었다. 결혼식에 가던 중이라 정장을 입고 있었기에 꽤 어울리지 않는 패션이었지만 아무렴, 맨발보다는 나았기에 그녀는 이렇게 하면 나름 괜찮을 거라는 마음으로 입고 있는 재킷을 벗었다.
“흑석 말이···!”
“······.”
“······.”
그리고 그때 나나로서는 처음 보는 남자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흑석’이라는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을 부르며.
“누구···?”
“그러는 그쪽은 누구길래···.”
“아···! 실례.”
대뜸 자신에게 누구냐고 묻는 남자의 무례함에 나나가 얼굴을 구기자 남자는 자신 쪽에서 먼저 실례한 것을 그제야 알아챈 듯, 문을 닫으며 모습을 감췄다.
덜컥.
문이 다시 열렸다.
“죄송하지만 진짜 누구신지..”
이번에는 소심하게 얼굴을 반쯤 내밀며 남자가 물었다. 백면의 내생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외계인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녀는 월계인이 아니기에, 자신을 외계인으로 소개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게 된다. 분명 백나나는 백나나일 뿐인데, 이곳에서는 어쩐지 백나나를 백나나라고 말하는 게 어려워진다.
“백면의 일부예요.”
나나는 고민 끝에 겨우 대답했다.
“···아!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그럴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진심으로 미안한지 남자가 뒷머리를 매만지며 나나에게 다가왔다.
“반가워요, 나는 야담이에요.”
“그쪽도 성인이에요?”
“여기 사는 사람이니까 그렇겠죠?”
그가 내민 악수에 응하며 나나는 그를 관찰했다.
비록 하루밖에 머무르지 않았지만, 이곳에 와서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수더분하게 생긴 사람이다. 일단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 전부 인사예절은 기본으로 없는 것 같지만. 문득, 백면의 무덤이 나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죽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백면도 예의는 없었다고 여긴 나나가 야담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이름은 뜻이 뭐예요?”
“뜻이요? 그건 왜?”
“보니까 여기는 이름을 되게 직관적으로 짓더라고요. 궁금해서요.”
바다 위를 달리며 자신의 이름을 뽐내던 태강이 떠올랐다. 아무리 기적이라고는 하지만 좀 재수는 없었다.
“흠···. ‘밤이 맑다’라는 의미의 야담(夜淡)입니다만.”
“당신은 뭘 주관하죠?”
“별로 알고 싶지 않으실 텐데.”
그냥 알려달라고 그녀가 대답하려고 하자, 문밖으로 도진이 나타났다.
“나나 씨, 일어났군요. 어서 와서 밥 먹어요!”
“밥?”
밥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배가 고파진 나나였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어제부터 한 끼도 먹지 못했으니.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야담이 웃으며 그녀를 방 밖으로 데리고 나와 도진에게 넘겼다.
“난 그럼 이만.”
“아··· 저!”
도망가려는 야담을 붙잡으려는 그녀의 말소리가 도진의 한마디에 뚝 끊겼다.
“오늘은 속세(俗世)로 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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