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건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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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라쿤(Raccoon)이다. 내 본명은 따로 있지만 주군이 나를 그렇게 부른 이후로는, 아무도 나를 내 본명으로 불러주지 않았다. 그러니 내 본명은 있으나 마나다.
라쿤이라는 말은 이계어로 ‘너구리’라는 뜻이다. 내 생김도 그렇거니와 성격도 의뭉스럽고 뻔뻔스러운 면이 많아, 내가 생각하기에도 딱 맞는 이름(?)인 것 같다.
시종 신분인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주군의 가죽신을 품에 안고 겨울 새벽을 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아는가? 문고리 권력이라는 말을? 주군이 처음 내게 제의한 직책은 어느 기사의 종자(種子)가 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귀족이 되는 첫걸음마저도 단연코 거절했다.
이는 주군의 측근에 있어야 떡고물도 떨어지고, 내가 잘해, 눈에 띄면 띨수록 출세가 빠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군은 기침(起寢)하자마자 나부터 찾는다.
“라쿤, 게 있느냐?”
“네, 주군!”
내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부스스한 모습의 주군이 엉망인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뱉었다.
“신발!”
“넵, 여기 있습니다. 주군!”
한 시간 이상을 품속에 넣고 덥혀, 이 추운 날씨에도 따뜻한 신발을 발치 아래 놓았건만, 주군은 당연하다는 듯 칭찬 한마디 없이 대충 신고는 대뜸 호령부터 했다.
“말, 말 대령하라!”
“넵, 주군!”
대답과 동시에 내가 마구간을 향해 달려가자 뒤에서 주군의 욕설이 들려왔다.
“이, 자식들은 다 뭐하고, 너구리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게 만들어.”
이때서야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아! 어질어질하다. 나타난 자 분명 남자일진데, 화장을 한 어느 미소녀보다도 곱다. 그를 본 주군의 표정이 돌연 훈훈한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지며 미소를 띠고 물었다.
“벌써 세면을 마친 것이냐?”
“네, 주군!”
답하는 이 자 역시 나와 같은 직책의 시동이요, 동갑내기로 금년 16세였다.
“오늘은 어느 곳을 가볼까?”
“무너진 성곽의 보수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확인하러 가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주군!”
“좋아! 그곳으로 가보자! 그런데 라쿤 이놈은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이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라쿤이 두 마리의 말을 끌고 나타났다.
“빨리 빨리 동작 못 취해!”
억울했다. 어떻게 이 보다 빠를 수 있단 말인가! 바람 같이 달려왔건만. 한마디 한 주군은 아니 마왕(魔王), 그것도 루시퍼(Lucifer)라는 별명의 주군은, 훌쩍 말에 오르는가 싶더니 벌써 앞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너구리! 너도 따라와!”
“네, 주군!”
나는 비대한 몸통에 비해 너무나 짧은 체고의 팔다리로 죽음 힘을 다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팔자 좋은 어느 놈은 말을 타고 여유 있게 주군의 뒤를 쫓고 있었다. 아무튼 대마왕이 내성을 벗어날 무렵에는 호위기사장 및 기사 네 명 포함, 백 명의 경호군사가 열심히 영주의 뒤를 쫓아 줄달음치고 있었다.
그렇게 20여 분을 달려 내 숨이 턱에 찰 무렵에서야 일동의 달음박질은 멈출 수 있었다. 무너진 성곽 앞에 도착한 때문이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재빨리 무너진 성곽을 훑어보았다.
보름 전 확인 했을 때나 지금이나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즉 새로 축성된 곳이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라쿤은 대마왕이 들을 수 있을 정도 크기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러다 적이 이곳을 통해 기습이라도 하면 큰일인데.......”
이 말을 들은 대마왕의 눈이 희 번뜩였다. 때는 이때다 싶어 라쿤은 퍼뜩 대마왕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저라면 단 보름 만에 끝낼 수 있습니다. 주군!”
“뭐라고? 지금 장난 하냐? 보다시피 무너진 곳의 길이가 사백 미터는 된다. 따라서 이 상태로는 최소한 삼 개월 이상 걸릴 대공사다. 그런 데 단 보름 만에 끝낼 수 있다고?”
“넵, 주군!”
“못 하면?”
“소인의 목을 걸겠습니다. 단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농노의 숫자를 현재의 배로 늘려주시고 돈을 주십시오.”
“얼마?”
“이십오 골드면 됩니다.”
“하하하........!”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소를 터트린 대마왕이 자신의 목을 손으로 그어 보이며 물었다.
“그 기간 내에 못하면 알지?”“넵, 주군!”
“좋아! 지금부터 이곳 축성책임자는 라쿤이다. 따라서 너에게 농노 200명을 부릴 수 있는 권한을 줄 것이고, 집사에게 일러 농노 200명을 추가로 징집해놓으라 명해놓겠다. 됐냐?”
“넵, 주군! 단 그 시작일은 내일부터입니다. 주군!”
“알았어, 알았어! 흐흐흐........! 그런데 이것 잘못하면, 충복 하나만 골로 보내는 거 아니야?”
“절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군!”
“장담했다?”
“네, 주군!”
“좋았어! 이 시간 이후로는 당분간 너를 찾지 않겠다. 그러니 알아서 잘 해!”
“넵, 주군!”
“가자!”
말이 끝났을 때는 벌써 대마왕 혼자 저 만큼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혼자 남은 라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너무 욕심 부린 것 아닐까?”
“아니야! 나는 할 수 있어! 후후후........! 빨리 시동 신분을 벗어나 출세를 해야지.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혼자 중얼거린 라쿤은 처음의 의구심과 달리 급할 것 없다는 듯,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모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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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이 글은 제가 고등학교 때 읽었으나, 아직도 그 내용의 일부가 기억에 생생한 풍신수길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인, ‘풍운아’를 이계의 영지물로 패러디한 작품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고맙습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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