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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루 님의 서재입니다.

덜떨어진 용과 멸룡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고속도루
작품등록일 :
2018.10.12 14:09
최근연재일 :
2018.11.09 00:56
연재수 :
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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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592

작성
18.11.03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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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1쪽

1-8

DUMMY

메블로프가 함정에 빠진 직후 여의가 알키에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움직이지 말아다오.]


선수를 빼앗긴 알키에가 움찔했다. 메블로프가 구덩이에 빠지고, 날아온 화살이 그의 열구리를 꿰뚫었다. 어머니가 유린당하고 있다. 이 산의 지배자이자 강대하고 고귀한 드래곤이 몇몇 인간에게 둘러싸여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만약 여의가 주의를 흩뜨리지 않았다면 반사적으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알키에의 귀로 여의의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말거라. 이리 보여도 우리 애들은 메블로프를 죽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 하지만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면 주저 없이 살수를 쓸 거다. 네가 괜히 끼어들면 도리어 너와 메블로프가 위험해.]


알키에는 여의를 노려보았다. 여의는 그녀보다도 반 발짝 앞선 곳에서 저 싸움을 관찰하고 있었다. 알키에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어머니를 가만히 내버려두세요."

[왜? 이미 죽어가는 몸이니까? 수면기에도 들지 못하고 넝마가 된 드래곤하트라서? 넌 어머니에게 마지막 순간이나마 안식을 선사해주고 싶었니?]


알키에는 움찔했다. 그 짧은 순간 여의는 무엇을 본 것일까. 순식간에 분지 깊숙이 침입했던 이들은 어느새 알키에의 마음속까지 들어온 듯했다.

알키에의 침묵을 예상했다는 듯 여의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메블로프에게 제안한 건 그녀의 삶이다. 하지만 메블로프가 그걸 거절했어. 15년간 수면기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죽어갔던 메블로프는 이번에도 죽기를 택했다.]


여의는 몸을 빙글 돌렸다. 망토가 나팔꽃처럼 펼쳐지고 꽃다운 소녀의 얼굴이 알키에를 마주보았다. 소녀의 표정에는 거대한 환희가 떠올라있었다. 소녀는 한없이 순수하고 깨끗한 애정을 담고 태양처럼 웃었다.


[왜일 것 같아?]


여의가 물음으로 답했다. 순진한 얼굴에 떠오른 장난스러운 미소는 마치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지만, 검은 눈동자 안에 담긴 세월은 알키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생각하렴. 왜일까? 왜 네 어머니는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에게 싸움을 건 걸까?]

"모르겠..."

[청소년기 아이들이 솔직하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이해해. 나도 말 지지리 안 듣는 자식을 둔 몸이었거든.]


알키에는 꼼짝하지 못했다. 아까와는 달랐다. 늪 속에 빠진 듯한 무력감이 아니라, 조금만 움직여도 무언가 날카로운 게 그녀를 헤집을 것 같은 공포가 그녀를 잡아챘다. 여의에게는 바위틈에 스며드는 물처럼 알키에의 속까지 파고드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제대로 된 수면도 취하지 못하고 붕괴하는 몸을 가진 어머니. 침입자가 와도 넌 그런 어머니를 깨우는 대신 그들을 받아들이기를 택했지. 왜 그런 거야? 침입자라면, 메블로프는 몰라도 너는 위험해. 연약한 해츨링 따위는 무엇이로든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도 넌 침입자를 받아들였지.]


여의가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알키에보다 한 뼘 정도 작은 키의 소녀가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속삭였다. 활짝 웃으면서.


[머리로는 모르겠지만, 가슴으로는 느끼고 있구나? 하하, 너나 메블로프나 참으로... 눈부시구나. 마치 인간처럼.]


알키에의 표정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들은 누구일까. 누구이기에 오늘 처음 봤음에도 우리의 안으로 이토록 깊숙이 파고든 걸까.

여의가 알키에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여의가 두 손을 차분히 깍지를 낄 때까지 알키에는 아무런 대응도 취할 수 없었다. 알키에를 붙잡은 것처럼 밀착한 여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알키에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지만 넌 아직 모르고 있어. 메블로프가 하려는 건 고작 그 정도가 아니야.]


그때였다. 세상이 변한 건.


[********]


한 마디의 말이 세상을 흔들었다. 누가 분지에 대고 바닷물을 붓는 것처럼 무형의 기운이 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피부가 따끔따끔했다. 적의가 바늘처럼 살갗을 찌르고 격렬한 힘을 느낀 몸이 본능적으로 경고를 보내왔다. 알키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나비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본 적 없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인간의 것을 본따 만들어진 드래곤하트가 외치고 있었다. 저건 말로 빚어진 힘, 용언을 통한 권능이라고.


"권능...!"


저건 안 된다. 드래곤의 힘이 세상에 노출되었다. 저 거대한 말을 '그'가 놓칠 리가 없다. 그가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선사할 것이다.

이제 남은 가능성이 없다.

여의가 황홀한 듯 홀린 표정을 지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풀린 동공과 가쁜 숨으로 메블로프의 권능을 바라보았다. 죽음의 선고가 시작된 가운데 여의는 숨 가쁘게 기뻐하며 말했다.


[다시 태어날 시간이야, 어린 공주님.]

--------------------------------------------------


유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에 따라 신비롭게 반짝이는 녹색 머리카락이 서서히 숨을 죽였다. 그녀를 보듬던 덩굴과 이파리가 서서히 물러났고 사방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나뭇잎과 풀잎들이 다시 바람을 따라 제멋대로 흐드러졌다.

유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꼬았다. 탄력 있는 녹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에 얽혔다. 본래 단풍이 들기 시작해야 할 머릿결은 상록수처럼 푸르렀다. 유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작은 세계수를 쓰면 머릿단풍 주기가 망가지는데... 에잇,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유하와 지반을 약하게 만들면 야켄이 땅을 무너뜨리고 거기에 빠진 드래곤에게 로기탄이 일격을 날리는 작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작전은 대성공했다. 뱀은 온몸의 근육으로 전신을 밀기 때문에 빠른 순간속도를 가지고 있다, 대신 장거리 이동에 적합하지 않으며 무거운 만큼 흙이 무너져 내릴 경우 대응할 도리가 없다. 합리적인 작전이었고 그 결과가 이것, 메블로프는 화살에 꿰인 채 구덩이 안에서 처박혀있다.


"이 정도면 저 드래곤도 머리가 좀 식었겠지."


마나를 전달할 수 있는 망치, 투석기만큼이나 무거운 돌을 쏘아낼 수 있는 활, 나무를 다루는 권능의 석장... 지금은 인간이 되어버렸지만 어떤 모습으로든 변하는 검까지. 하나같이 세상을 진동시킬 만한 무기다. 메블로프도 알았으리라. 권능이라도 쓰지 않는 한 절대 승산이 없다는 걸.

상처를 조금 입혀버렸지만 유하는 딱히 괘념치 않았다. 아직 폴리모프가 있다. 드래곤하트만 멀쩡하다면 저 정도 상처는 폴리모프로 새로운 몸을 만들 때 사라진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에게 공격을?"


여유가 생기니 생각이 뻗어나갔다. 유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케이텐이 공격받아서 생각할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제압하기는 했지만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케이텐의 방법은 메블로프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둘이 생사결을 한다고 치면 메블로프가 케이텐을 죽이던, 케이텐이 메블로프를 죽이던, 둘 중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면 결과가 어찌 되든 메블로프는 죽는다. 남은 건 메블로프의 딸뿐...


"어?"


순간적으로 번쩍인 생각에 유하가 무의식적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번쩍임은 등장만큼이나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유하가 그 실마리를 잡으려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였다. 피처럼 붉은 나비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한 마리를 시작으로 수많은 나비가 뒤를 따라 팔락거렸다. 마치 붉은 눈이 거꾸로 오르는 것 같은 그 아름답고도 기이한 모습에 모두들 할 말을 잃었다. 불나방이 이런 모습일까. 나비의 색은 피처럼 붉었으며 연약한 날개로도 지치지도 않고 미친 듯이 날아다녔다. 산에 붉은 나비로 된 노을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유하의 다른 감각이 극도의 경종을 울렸다. 나뭇가지가 비명을 지르고 풀잎들이 공포에 몸을 떨었다. 저 나비는 꽃의 오랜 벗이 아니다. 탄생의 전도사가 아닌, 모든 걸 불태우는 파괴의 화신이다. 유하는 꽃의 감각으로 그걸 알아차렸다. 유하는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고 소리쳤다.


"나비를 조심해요!"


유하의 목소리가 나무를 타고 온 세상에 울렸다.


"말 안해도 그 정도는 안다고!"


바르톨이 투덜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정체 모를 것에 섣불리 다가갈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나비는 빠르고 어지러웠지만 불규칙하게 날아다녔고 그 덕에 쉽사리 가까워지지 못했다. 바르톨과 케이텐은 충분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케이텐이 중얼거렸다.


"불이다."

"불?"

"저건 불의 재앙이야. 아마도 불티, 바람을 타고 산불을 퍼뜨리는 화마의 권능일 거다. 그걸 자신의 본질인 나비에 담았군. 그러니 유하가 공포에 질릴 만도 해. 나무의 천적이니까."

"아니, 이심전심은 굉장한데, 대책은? 대책은 없고?"


아주 잠깐 케이텐이 머뭇거렸다. 그러나 주저는 짧았다.


"열쇠다, 바르톨."


의미 모를 말이었다. 허나 그 말을 들은 바르톨이 드물게 심각한 얼굴을 했다.


"...진짜냐. 괜찮은 거지?"


케이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짐을 맡겨서 미안해."

"그 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녀석에게 듣고 싶지 않거든. 거기다 나는 별 상관도 없다고."


바르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케이텐은 무표정으로 그를 보다 다시 메블로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로기탄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나비를 보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장 이 웃기는 짓거리를 그만 둬라, 뱀! 멸룡자가 온다!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므루낙의 맛을 보여주마!"


나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당장 그만두지 않았기에 로기탄은 선언했던 대로 곧장 망치를 내려쳤다. 아까보다도 더욱 파괴적인 마나가 땅을 타고 흘렀다. 대지가 흔들리며 마나의 폭풍이 땅을 타고 휘몰아쳤다.

로기탄의 안색이 굳었다. 지맥을 타고 흘러야할 마나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나를 전달해야 할 지맥이 잘게 부서진 탓이다.

지맥이 아무런 전조 없이 부서지다니,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곳은 이미 불가능이 실현된 세계. 로기탄은 이 산에 처음 왔을 때 유하가 한 말을 떠올렸다. 이 산의 풍수는 불가능하다고. 풍수지리 자체를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어야 만들 수 있다고. 그리고 풍수지리에는 땅과 지맥도 포함되어 있다.

드래곤은 땅을 움직일 수 있다.

공격수단을 잃은 로기탄이 드래곤을 향해 노호했다.


"로기탄 님! 검을! 마나를 담아주십시오!"


케이텐이 로기탄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로기탄은 머뭇거리지 않고 재빨리 배낭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지맥이 꼬여버린 이상 공격을 맡기는 불가능. 그는 할 수 있는 일과 해야하는 일을 정확히 구분했다.


"울어라, 므루낙!"


로기탄은 므루낙을 들고 곧장 검에다 내리쳤다. 보통 대장장이라면 기겁할 행위지만 로기탄은 보통 대장장이가 아니다. 검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격렬하게 진동했다. 하지만 로기탄은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손잡이, 코등이, 검몸, 검신을 연타로 두들긴 뒤 끝 부분을 스치듯 내려쳤다. 금속을 두들기는 소리가 음악처럼 울려 퍼졌다. 그리고 강철이 웅웅거리며 푸른 마나와 공명했다.

므루낙으로 마나를 부여하고 드워프제 철검과 공명시켜서 파괴력을 극대화시키는 기술. 끝나면 철검은 부서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유효하다. 로기탄은 푸른 마나를 두른 검을 케이텐에게 건넸다.


"5분이다, 케이텐!"

"충분합니다. 저와 함께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로기탄이 망치를 붕붕 휘두르며 투쟁심 가득한 눈빛으로 드래곤을 보았다. 메블로프는 날개로 땅을 짚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수많은 불나비가 뱀을 축복하듯 군무를 추었다. 회오리치는 나비를 거느린 채 함정에서 빠져나온 메블로프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케이텐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너무 많은 생각이 뒤엉켜 무심해보이기까지 하는 눈빛.

서로 말을 나누지 않았다. 케이텐은 검을 들었고 메블로프는 나비를 다스렸다.

나비떼가 쇄도했다. 케이텐은 몰려오는 나비떼를 향해 검을 크게 휘둘렀다. 허공을 가득 메우며 날아오는 나비들에 한 획이 그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칼날이 덧씌워진 것처럼 나비가 떼로 베여 땅에 떨어졌다. 케이텐은 나비를 맞이해서 춤을 추었다. 검이 곡선을 그릴 때마다 그 궤도에 걸린 수많은 나비가 반토막 나 떨어졌다.

그렇지만 아무리 잘 대응한다고 해도 상대는 나비 무리였다. 케이텐은 수많은 나비떼에 점점 밀려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메블로프의 무기는 불나비뿐만이 아니다. 메블로프의 거대한 동체가 땅을 타고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리고 거대한 꼬리가 케이텐을 습격했다.

케이텐은 재빨리 옆으로 뛰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튕겨 이어지는 2차, 3차 공격을 피했다. 그러고 허공에서 채찍처럼 팔을 휘둘러 나비와 함께 메블로프의 동체를 살짝 베었다. 마나를 두른 검은 폭풍처럼 나비를 헤치고는 메블로프의 몸을 갈랐다. 하지만 그 정도로 메블로프를 막을 수 없었다.

로기탄이 노호를 내지르며 달려들었지만 그의 앞을 불나비가 막았다. 로기탄이 거칠게 불나비를 헤쳤다. 그의 손아귀에 붙잡힌 불나비가 파직거리며 불타오르고, 미처 잡지 못한 불나비가 그의 몸에 붙어 스스로를 불태운다. 폭발이 폭발을 낳고 드워프의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드워프의 기세는 조금도 죽지 않았다.


"미지근하다, 뱀!"


땅을 부모로, 불을 악우로, 철을 자식으로 대하는 드워프들에게 기껏해야 산불 정도의 열기는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했다. 로기탄이 터프하게 나비를 헤치며 나아갔다. 메블로프는 다가오는 그를 날개로 대충 떨쳐내려고 했다.


"흥! 아까 좀 아팠던 모양이군!"


그의 접근을 막고 있다, 그걸 읽은 로기탄이 육중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으로 땅을 굴러 날개를 피했다. 그 기세 그대로 앞으로 뛰며 므루낙을 한 손으로 잡고는 온몸에 힘을 줬다. 그의 몸은 한순간 거대한 망치자루가 되었다. 로기탄은 망치를 잡은 팔을 크게 휘둘렀다, 메블로프의 동체에 므루낙을 꽂아버리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순간 발밑이 푹하고 꺼졌다. 디딤발을 잃은 몸은 곧장 앞으로 넘어지고 로기탄과 므루낙이 땅에 처박혔다. 얼굴을 흙더미에 뭉갠 로기탄은 메블로프가 무슨 짓을 했는지 곧장 알아차렸다. 아까 그들이 메블로프에게 했던 짓을 드래곤의 권능으로 재현한 것이다. 땅꺼짐이 일어나고, 아래로 흘러내리는 흙이 로기탄을 붙잡고 늘어졌다.

지맥을 뒤틀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쉬운 땅꺼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로기탄은 그 사실을 미리 생각해내지 못한 그 자신을 저주하며 반사적으로 므루낙을 위로 휘둘렀다. 만약 메블로프가 마무리하려고 그를 공격한다면 짓눌리기 전 한 방은 먹여주겠다는 의도였다.

기우였다. 땅의 진동으로 드래곤이 멀어지는 걸 느껴졌다. 그를 무시하고 케이텐에게 향한 것이다. 분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로기탄은 흙속에서 헤엄치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을 바둥거렸다.


유하가 나무뿌리를 뻗었지만 길고 매끄러운 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시덩굴을 만들어 앞길을 막았지만 불나비들은 앞길을 가로막는 수풀에 몸을 들이박았다.

폭발이 일어났다. 공기가 급격하게 팽창하고 폭풍이 몰아쳤다. 공기와 먼지로 급조된 나무는 불에 닿는 순간 폭탄처럼 터져나갔다. 유하가 아무리 많은 덩굴을 만들어내도 초목이 자라는 속도는 산불이 번지는 속도보다 빠르지 못했다. 메블로프는 산불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불의 궤적을 만들어내며 케이텐에게로 돌진했다. 그 거체와 맞닥뜨린 케이텐은- 찰나의 고민 끝에 맞대결을 택했다.

케이텐이 검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유하가 비명인지 모를 말을 내뱉으며 양손을 펼쳤다. 급속도로 자라난 덤불이 케이텐을 지키려는 것처럼 그의 몸을 둘러쌌다. 나뭇가지는 뼈대가 되었고 덩굴이 그의 몸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케이텐의 몸이 삽시간에 두 배로 불었다. 나뭇가지 갑옷을 입은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검을 양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온몸을 쥐어짜내며 검을 휘둘렀다.

푸른 불꽃이 담긴 검이 빛을 번쩍인다. 불꽃을 허공에 남기고 떨어진듯한 검이 그대로 메블로프의 콧등에 틀어박혔다.

쩡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철과 강철이 부딪혔다. 푸른 기운을 담은 검은 비늘과 살을 베고 짓뭉개며 나아가다 메블로프의 두개골에 걸렸다. 검에 베인 뼈가 비명을 지르고, 뼈에 걸려 휘어진 칼이 신음을 흘렸다. 그 후 메블로프의 육중한 몸이 파도처럼 케이텐을 휩쓸었다. 케이텐이 기합을 내질렀다.


"흐아아아압!"


아무리 드래곤블러드가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강인한 몸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체급의 자릿수가 다르다. 케이텐이 땅을 끌며 사정없이 뒤로 밀려났다. 그를 지지하던 나무덩굴은 가닥가닥 끊기고 땅에는 풀과 흙으로 된 두 개의 자국이 길게 늘어졌다. 그곳에서 피어오르려던 먼지는 기세를 타기도 전 메블로프의 배 아래로 삼켜졌다. 케이텐은 드래곤에게 치여 밀려났다.

하지만 케이텐은 그 와중에도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발목에, 허리에, 팔에, 손에 받는 모든 충격을 감내하며 올곧게 자세를 유지했다. 드래곤을 홀로 막으려는 그 모습은 마치 산사태를 막으려고 팔을 벌리는 사람처럼 무모해보였다. 하지만 케이텐은 드래곤에 딸려가면서도 강철과도 같은 힘으로 버텼다.


"그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제 비명인지 기합인지 구분되지 않는 소리를 내지르며 케이텐은 전신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곧 결판이 났다.

끼기긱.

결코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던 드래곤의 거체가 천천히 느려졌다.

지독한 농담 같았다. 마차 열 대는 연결한 것 같은 드래곤을 한 사람의 완력으로 멈춰 세우는 중이었다. 천 년 묵은 고목이라도 부숴버릴 법한 충격이었으나 케이텐은 그 모든 걸 자신의 몸으로 버티며 드래곤을 물고 늘어졌다.

케이텐은 얼굴을 들었다. 손아귀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발에서는 연기인지 흙먼지인지 모를 게 자욱이 피어오르고 관절 마디마디에 핏줄이 터졌다.

만신창이였다. 하지만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드래곤의 거대한 몸이 이내 멈췄다.

야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늘바라기를 하늘로 쳐들고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그리고 곧장 활을 내려 메블로프를 겨눴다. 이 일련의 동작이 눈 깜짝할 사이, 메블로프가 눈을 돌린 사이 일어났다.

할라피의 신물 하늘바라기는 아래쪽을 겨냥하자 무서울 정도로 당겨졌다. 바위가 고무줄처럼 비틀어지고, 활줄이 돌화살을 파고든다. 골무를 끼고 있음에도 손가락이 썰려나갈 것 같다. 돌화살의 무게가 어마어마해서 화살을 받치는 왼팔이 부르르 떨린다.

야켄은 어마어마한 힘을 버티는 와중에도 제대로 드래곤을 겨냥하고 나서야 시위를 놓았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힘을 담긴 무언가가 풀려났다. 야켄의 전신에 반동이 가해졌다. 그의 가볍고 탄력있는 몸이 뒤로 퉁 튕겨나갔다. 야켄은 원래 위치보다 다섯 발자국은 떨어진 곳에서야 간신히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돌화살은 바람을 타지 않는다. 나선으로 돌아 올라가는 돌화살이 바람을 타는 대신 찢고 날아간다. 불나비와 흙먼지에도 아랑곳 않고 일직선으로 날아간 돌화살은 메블로프의 몸통을 향했다. 돌화살이 지척에 다가오고 와서야 메블로프는 자신이 케이텐에게 정신이 팔려 궁수를 경계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대응하기는 늦다. 화살이 맞는 건 확정되었다. 할 수 있는 건 '어떻게' 맞느냐 선택하는 것뿐. 그 와중 메블로프는 어떻게 맞을지 결정했다.

메블로프는 몸을 쭉 늘였다.

이완된 근육이 화살을 붙잡지 않았다. 돌화살은 너무나도 쉽게 메블로프의 몸을 관통했다. 하지만 너무나 뛰어난 관통력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 너무 충실했다. 말 그대로 통과한 할라피의 신물은 동전만한 구멍밖에 내지 못하고 지나가듯 드래곤의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야켄은 상대방의 판단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해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피하지 못해서 몸을 통과시키다니, 보통 하지 못할 생각이다. 그래서 야켄은 전통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한 발 늦게 알아차렸다.


"아차, 화살!"


화살이 다 떨어졌다. 야켄은 곧장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돌부스러기를 꺼내 뿌렸다. 할라피가 신성시 여기는 태양나무는 아득히 먼 옛날 떨어진 별의 조각이다. 하늘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별의 조각은 성질 급한 씨앗처럼 돌을 먹고 자라 하늘을 향한다. 돌부스러기가 흙과 바위를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며 자라기 시작했다. 이 정도 크기의 부스러기면 다 자랐을 때 크게는 허리까지, 작게는 무릎까지 오는 태양나무가 되며 야켄의 화살로 사용된다.

야켄은 태양나무가 자라기만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분지에 땅거미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야켄은 퍼뜩 서쪽을 보았다. 하늘은 아직 푸르렀으나 태양은 평소보다 한참은 이르게 서산에 걸쳐있었다. 산의 이른 밤이 찾아온 것이다.

좋지 않다. 어둠은 드래곤에게 유리하다. 뱀에게는 눈 말고도 코와 혓바닥으로 사람을 탐색할 수 있고, 거기다 드래곤은 본능적으로 생명을 느낀다. 가능한 빨리 처리해야한다... 소녀의 어머니를. 야켄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태양나무를 뿌리부터 꺾었다.

케이텐이 죽게 할 수는 없다. 인간을 위협하는 나비 날개 달린 드래곤과 케이텐, 선택의 여지조차 없다. 케이텐은 그의 누나의 남편이 된 자를 구했고 할라피의 은인이었다. 할라피의 활에는 빚을 달지 않는다. 상대가 그 누구든 보은을 해야 하며, 여건을 살피며 행하는 건 보은이 아니다. 그는 드래곤을 적대할지언정 케이텐을 도와야했다.

비록 그 드래곤이 소녀의 어머니라고 하더라도.

구해준다고 말한 건 소녀뿐. 인간을 미친 듯이 습격하는 괴물 나비는 토벌 대상이다. 야켄은 그렇게 되뇌이며 다시 하늘바라기를 들어올렸다.

그러던 도중 야켄의 시야에 드래곤에게 달려가는 알키에가 들어왔다. 야켄은 입을 다문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알키에의 어머니를 눈앞에서 쏴죽이고 '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야켄의 손에 망설임이 깃들었다.

그러느라 태양궁수는 땅거미를 타고 드래곤에게로 질주하는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봤더라도 무언가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드래곤의 몸이 둔해졌다. 화살을 아예 관통시키자는 메블로프의 판단은 최선이었고, 화살의 절륜한 위력에 비해 상처는 경미했다. 하지만 경미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위력에 비해'서였다. 나선을 그리며 뾰족해지는 화살은 회전하면서 메블로프의 몸을 헤집었고, 몸속이 맷돌에 갈린 것처럼 곤죽이 되어버렸다. 망가진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가장 최선의 결과가 중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위력이었다.

케이텐의 검에 베인 상처 역시 치명적이었다. 마나가 담긴 검은 강력한 육체에 어그러짐을 만들었다. 핏물이 눈에 고였고 두개골에 가해진 충격에 정신이 혼미했다. 몸은 이미 만신창이. 흙으로 지저분해져있고 비늘은 성한 것이 없었으며 구멍도 몇 개 생겼다. 걸레짝이 된 나비 날개가 갈라진 수초같이 허공에서 나풀거렸다.

비참한 꼴이다. 허나 아직 죽지 않았다. 메블로프는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몸을 움직였다.


"재고할 수 없습니까?"


케이텐은 망가진 몸을 억지로 움직이면서 메블로프 앞에 섰다. 그의 몸 상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힘을 정면에서 받아낸 대가로 몸이 좀먹은 나무로 만든 인형처럼 삐걱거렸다. 유하가 수호해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가 드래곤블러드가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사지가 뽑혀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충격이었다.

하지만 동료들의 전력이 건재한 만큼, 케이텐이 훨씬 우위에 있다는 건 변함이 없다. 그건 케이텐을 포함한 이곳의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케이텐의 표정은 어울리지 않게 간절했다.


"당신의 판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죽을 바에야, 아주 티끌만큼의 가능성이지만 하나라도 살 수 있다면 그 방법을 택한다. 타당한 결정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폴리모프는 당신에게 분명한 삶을 약속합니다. 그럼에도 왜 굳이,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도박에 거는 겁니까?"


메블로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텐은 그녀를 향해 말을 이어갔다.


"모성애입니까? 하지만 고대의 존재인 당신이라면 알 것입니다. 모성애든 뭐든 전부 삶을 위한 것입니다. 죽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의 심장을 먹인다고 해도 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설사 산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삶은 사라집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당신이라는 존재가 의미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케이텐. 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나?]


메블로프는 케이텐의 말을 끊으며 영문모를 질문을 던졌다. 케이텐은 순간 말을 멈췄다. 거의 반사적으로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 모범답안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하지만 그 질문은 갑자기 들이닥친 도둑처럼 너무 갑작스럽고 뜬금없었다. 의도를 가늠하지 못한 케이텐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메블로프는 먼 곳을 바라보며 이어 물었다.


[왜 꽃은 아름다울까 생각해본 적이 있나?]


생각해본 적도 없고, 질문 받은 적도 없는 내용이었다. 케이텐이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채 가만히 서있는데, 메블로프는 그의 대답 따위는 애초에 필요 없는 것처럼 잇달아 말했다.


[나비는 꽃을 찾아 난다. 이유는 필요치 않으며 의미는 무의미하다. 나비가 찾아 나는 것 앞에서 다른 모든 건 부차적인 것이다. 그게 설령 불꽃이라 자신의 몸을 태울지언정 나비는 여전히 날아간다.]

"무슨 말을..."


케이텐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말이 오가지 않아도 감정은 통했다.

메블로프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케이텐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진정으로 재고의 여지는 없습니까?"


메블로프는 아주 조금 고개를 돌려 후방을 보았다. 그곳에는 그녀의 딸이 분지를 가로질려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싸움을 멈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달려오는 알키에를, 메블로프는 그녀의 모든 감각으로 느꼈다. 다급한 표정이, 햇빛에 반짝이는 은발이, 바람에 나풀거리는 옷과 그 안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메블로프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나도 꽃을 찾았다.]


케이텐이 질끈 눈을 감았다.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자 그의 몸이 한층 편해졌다. 알키에도, 메블로프도 없는 어둠은 이대로 빠져들고 싶을 정도로 아늑했다.

하지만 눈을 돌릴 수는 없다. 이 앞의 일은 모두 그가 감내해야 할 일이다. 케이텐은 눈을 떴다. 상처투성이의 드래곤과 불타오르는 초목들, 잿더미와 불길만이 보이는 비참한 현실이 펼쳐졌다. 그 와중에 어두운 그림자가 시야에서 아른거렸다. 케이텐은 온힘을 쥐어짜내는 것처럼 말했다.


"...부탁해, 바르톨."


푸욱.

살이 파이는 소리와 함께 메블로프의 동체가 크게 흔들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메블로프는 목 근처에서 이물감을 느꼈다. 목에 뼈가 갑작스레 한 개 늘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메블로프는 날개를 움직이려고 했으나 몸은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메블로프는 간신히 목을 돌려 그녀의 몸을 살폈다.

그녀의 목에서는 나뭇잎과 풀로 위장한 바르톨이 검을 찔러넣고 있었다.


["아."]


낮은 탄성이 겹쳐들렸다. 넓적한 검신을 가진 검이 정확히 메블로프의 드래곤하트를 양단하고 있었다. 메블로프의 몸이 경직되고, 마나가 피처럼 울컥이며 상처 틈으로 새어나왔다.

근원을 관통당한 메블로프는 존재할 힘을 잃었다.

메블로프의 거대한 머리가 천천히 떨어졌다. 뱀의 머리가 공처럼 바닥에 한 번 튕겨 올랐다가 다시 떨어졌다. 길쭉한 뱀의 머리가 힘없이 널브러졌다. 몸이 뻣뻣해지고, 꼿꼿이 선 비늘이 땅과 부딪히며 부서졌다. 생명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메블로프가 힘겹게 입을 떼었다.


[역시, 그것도 드라고아...]

"그래. 열쇠검이라고. 마나로 된 것이라면 무조건 꿰뚫어 열 수 있는 검이야. 시동거는데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는 게 단점이지만."


바르톨이 검을 움켜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가 길게 호흡을 들이쉼과 동시에 희미했던 기척이 다시 선명해졌다.

호흡하지 않으면 생명은 살아갈 수 없다. 생사를 확인하는 방법은 호흡을 확인하는 것이다. 즉 호흡과 생명은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렇다면 호흡을 조절하는 것으로 생명을 조절할 수 있다. 생명을 희박하게 하는 것으로 기척을 죽이는 것도 가능하다. 생명 자체를 느끼는 드래곤에게는 특히 유효한 은신술이었다.

또한 드래곤의 몸은 물질이 아니라 마나로 이루어진 영육. 열쇠검은 인간에게는 그저 좀 특이하게 생긴 대검이지만, 드래곤에게는 결코 막을 수 없는 무기다.

드래곤의 감각을 속일 수 있으며 마나로 된 육체를 무조건 벨 수 있는 존재.

바르톨은 드래곤을 상대하기 위한 암살자다.


"뭐, 나도 내가 나설 일이 없으면 했어. 하지만 이럴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


바르톨이 그렇게 말하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푸슛, 하고 김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피가 울컥이고, 생명이 눈에 보이게 사그라졌다. 메블로프의 몸이 무기질적으로 툭 떨어졌다.

메블로프의 시야가 점점 어두워졌다. 본질을 꿰뚫린 그녀에게 더 이상 형태를 유지할 힘이 없었다. 초가을, 해질녘의 냉기가 아무런 저항 없이 피부를 꿰뚫고 들어온다. 자신과 외부를 나누는 경계가 희미해졌다.

그 마지막 순간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알키에를 보았다. 알키에는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담고 있었다. 알키에의 큰 눈망울에 쓰러진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칼에 찔려 죽어가고 있는 거대한 나비 같은 뱀의 모습이.

웃고 싶었지만 얼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사고부터 이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웃는지, 표정을 지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녀의 입에서 뜻 모를 소리가 새어나왔다.


[...꽃을...]


그걸 끝으로 메블로프의 생명이 꺼졌다.




비정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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