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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루 님의 서재입니다.

덜떨어진 용과 멸룡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두명드래곤
작품등록일 :
2018.10.12 14:09
최근연재일 :
2018.11.09 00:56
연재수 :
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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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09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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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1-10

DUMMY

야켄은 알키에를 안고 오두막을 향해 걸었다. 품이 낙낙한 옷에 가려진 알키에의 몸은 생각보다 작았으며 훨씬 가벼웠다. 덧없이 초연한 외모에, 사람 같지 않은 존재감에 야켄은 잠깐 그녀가 잘 빚어진 인형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코언저리에서 들썩이는 가쁜 숨과 손닿은 부분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는 그 생각을 부정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눈물을 흘리며 어미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녀는 분명한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의 모습을 한 드래곤이지.'


야켄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버리고는 밭을 지났다. 모래 속에 묻혀있던 금이 반쯤 씻긴 것처럼, 저녁놀을 받은 밀밭은 서서히 황금빛 광채를 드러내고 있었다. 결코 넓지는 않지만 알 굵은 이삭을 보니 한 사람이 내년 수확철까지 지내기에 충분해보였다. 밀을 키우지 않는 땅에는 콩과 클로버가 고개를 내밀고, 물고랑에는 언제든 쓸 수 있도록 물이 들어찼다. 야켄은 잘 관리된 땅을 지나 오두막으로 향했다.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집이었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흙을 발라 만든 아담한 집은 마치 요정이 인간의 집을 본 따 만든 것 같았다. 단 한 사람을 위한 작은 굴뚝을, 소담한 문을, 소박한 마당을 낮은 울타리가 둘러싸고 있었고, 겁먹은 양들이 싸움을 피해 집 뒤편의 축사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다만 왜인지 나무로 된 창문만은 사람도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의아했지만 야켄의 예리한 눈은 집 주변 땅을 둘러싸듯 동그랗게 나 있는 자국을 살폈다. 그 흔적에는 비늘자국이 나있었다.

야켄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 작은 집을 수호하듯 똬리를 튼 거대한 드래곤이, 가끔 거대한 창문을 통해 집안에 머리를 들이미는 광경을. 소녀는 그런 식으로 어머니의 거체와 마주하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며, 소녀와 드래곤은 이렇게 십 수 년의 세월을 살았을 것이다.

가슴이 아파왔다. 야켄은 죄책감을 느끼며 소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만큼 꽉 들어찬 집이었다. 선반에는 그릇과 수저, 바늘과 실, 코바늘과 같은 집기들이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수납되어 있었으며, 야켄의 신장으로도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낮게 있었다. 야켄은 몸을 움츠려 선반을 피하고 발로 의자와 책상을 치우는 등 갖은 노력을 해가며 알키에를 침대까지 옮겼다.


"으윽..."


알키에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몸을 들썩였다. 햇빛에 그을린 갈색 피부에서도 붉은 색이 보일 정도였으며, 땀을 흠뻑 빨아들인 옷은 알키에의 몸에 착 달라붙었다. 야켄은 시선을 피하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머릿속으로 상대가 드래곤이라는 걸 되뇌면서.


"어머니..."


그러는 중 알키에의 신음이 들려왔다. 슬픔과 괴로움으로 범벅된 목소리를 들은 야켄은 죄를 지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드래곤이면 어떠한가. 그 이전에 알키에는 어머니를 잃고 슬퍼하는 한 명의 소녀다.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알키에를 내려다보던 야켄은 케이텐에게서 받은 드래곤하트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주머니를 뒤져 드래곤하트를 찾아냈다. 타고 남은 불씨처럼 아지랑이 같은 빛을 내는 심장이 야켄의 두 손 안에 가득 들어왔다. 야켄은 그걸 알키에의 손에 쥐어주었다.

근거 없는 행동이었으나 효과가 있었다. 알키에는 야켄의 손과 함께 어머니의 심장을 꽉 잡았다. 놀란 야켄이 움찔했으나 꽉 잡힌 손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했다.

알키에는 손 안에 잡힌 온기를 더듬었다. 고통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으나 단지 무언가를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을 얻었다. 알키에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드래곤하트를 발견했다. 어머니의 냄새를 가졌으나 생전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근원. 알키에는 다시 한 번 오열했다.


"거짓말... 구해준다고 했으면서, 도우러 왔다고 했으면서..."


여러 말을 할 수 있었다. 먼저 공격한 건 그쪽이 아니었냐고, 자신이 구해준다고 말한 건 메블로프가 아니라 알키에였다고. 이전에 그가 했던 말은 지금 알키에의 손처럼 그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야켄은 한 가지를 골라 느릿하게 답했다.


"죄송해요. 제 능력이 부족했어요."


알키에는 야켄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원망스러웠다. 체념한 순간에 나타나서 희망을 줘놓고는, 그녀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던 어머니를 죽였다. 차라리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한껏 들떠서 기대했는데 얻은 건 더 오랜 추락뿐이었다.

야켄은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살 수 있어요. 케이텐 님의 비술을 이용하면..."

"...필요, 없어."


알키에는 조각 난 원망을 띄엄띄엄 쏟았다. 누구도 향하지 않는 비난이 의미 없이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냥 어머니랑, 단 둘이...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았으면... 손을 잡고 담담히 최후를 맞이했으면... 좋았어요. 어차피 죽음밖에 없는 삶. 기대 따위 없이, 동요 없이, 그대로 죽었다면..."


멸룡자가 있는 이상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이 찾아올 운명이다. 자신의 삶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자식을 낳는 생물은 없다. 어차피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러나 메블로프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알키에를 키우기 위해 바쳤다. 드래곤을 품기에는 너무나 좁은 이 분지에서, 유폐된 상태에서 무언가를 건네주기만 하는 삶을 살았다. 자랄수록, 그들의 앞에 있는 절망적인 운명에 가까워질수록 알키에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메블로프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알키에를 위해 쓰고 있다는 걸.


"차라리, 당신들이 드래곤 헌터였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가 포기하는 건 점점 많아졌다. 잠을 자야하는데도 자지 않고 사방을 경계했다. 예전에는 가끔 양이라도 잡아먹었지만, 양의 수가 뚝 떨어진 어느 시점부터는 그마저도 끊었다. 그녀가 일주일에 한 번 기절하듯 잠들고, 한입 거리도 안 되는 쥐와 토끼를 먹으며 연명하는 동안 알키에는 나날이 건강해졌다. 그러나 마음은 몸과는 다르게 점점 메말라갔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 한 발 먼저 찾아와서, 어머니가 남은 삶을 온전히 자신을 위해 살았다면. 그래서 침입자를 막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오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기에. 설사 그게 죽음이라도.


"내가 죽고, 어머니를 자유롭게 해드렸을 텐데..."

"그런 말은 마세요!"


야켄이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메블로프도 당신이 먼저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거예요! 세상 그 어떤 부모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기를 원하나요? 장담하건대 메블로프는 어떻게서든 당신이 더 오래 살아남기를 바랐을 거예요!"


그러나 알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분지에서 나갈 수 없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지나가듯 말하는 장래는 그녀에게 재미없는 농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희망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던 그와는 다르게 알키에에게는 애초부터 희망이 없었다. 알키에의 눈이 불타올랐다. 알키에는 고통으로 경련하는 와중에도 말 안 듣는 몸을 일으켰다.


"장담? 그쪽이 어머니의 뭘 안다고 장담하는 거예요?! 우리는 결과가 정해져있어요. 여기서 아무리 숨어봤자 언젠가 멸룡자는 찾아오고, 저랑 어머니는 같은 장소에 죽어 묻혀요. 살아남아요? 아뇨, 단지 유예된 죽음일 뿐이에요! 그럴 바에는!"


붉게 충혈된 눈에서 핏기 섞인 눈물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목소리는 울음으로 떨리는 건지 경련 때문에 떨려 들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가슴에는 격통이 차오르고 허파는 헛숨을 들이켰다. 지옥이나 다름없는 고통 속에서 알키에는 15년간 엉겨 붙은 가래와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제가 없는 편이 어머니께 더 편했을 거예요."



야켄은 인정할 수 없었다. 드래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느꼈던 바람은 알키에의 말을 부정하고 있었다.

집념이 느껴지던 풍수와, 침입자가 쳐들어오자 살기를 풀풀 풍기며 다가왔던 거대한 드래곤. 사람 하나를 키우기 위해 모든 걸 구비해둔 분지. 그리고 오두막 주변으로 나있는 자국까지.

산으로 둘러싸인 이 작은 마을에는 자식을 키우고자 하는 어미의 사랑이 흙 한 줌에까지 스며들어있다. 야켄은 이곳에 흐르는 바람에서 분지를 전부 채우는 거대한 모성애를 느꼈다.

그런 메블로프가 알키에를 짐이라고 생각했을 리가 없다. 야켄은 격렬한 아쉬움으로 생긴 분노를 느꼈다. 왜 모르는 걸까. 이 정도의 사랑을 받았으면서 어째서 그 말을 들을 부모의 슬픔을 모를까.


"그렇다면 물어봐요! 물어보면 되잖아요, 직접!"


야켄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작은 오두막에 생긴 반향이 되돌아올 무렵 야켄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야켄은 지금 죽은 드래곤에게 물어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 깊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지만 동시에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알키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 드래곤하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 광경이 스쳐지나갔다. 케이텐은 여의를 변신시켜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의는 그의 아버지의 드래곤하트였다.

그렇다면 만약 알키에가 그녀의 어머니의 드래곤하트를 변신시킨다면.

생각이 이어진 순간 알키에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드래곤하트를 한 번 쓸어내리고 평평한 부분에 글자를 음각했다. 선이 어지러이 얽혔다. 획이 글자를 장식하고 점이 빈틈을 메웠다. 알키에는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룬 문자를 써내려갔다.

야켄은 경탄을 속으로 억누르며 알키에가 써내려가는 모습을 감상했다. 아무리 언어를 알면 문자를 더 쉽게 익힌다고는 하지만, 룬 문자는 말만 문자지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에 가깝다. 심지어 케이텐의 필체는 그중에서도 독특한 편이다. 그걸 단번에 보고 써내는 알키에의 기억력은 상당히 놀라웠으며, 무엇보다 그녀가 그리는 문자에 담긴 감정은 야켄이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집중하게 만들었다.

글자를 써내려갈 때마다 드래곤하트는 눈에 띄게 변화했다. 동그라미가 맺어진 순간 심장은 맥동했고, 획이 그어지자 크게 떨었다. 이윽고 글쓰기를 마친 알키에가 방점을 찍자 드래곤하트는 우뚝 멈추더니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크게 울었다.

그때부터였다. 드래곤하트가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처럼 쭉쭉 자라난 몸체가 팔다리로 변하고, 끄트머리가 해수초처럼 갈라지더니 머리카락이 되었다. 눈, 코, 입, 귀가 마치 밀랍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서서히 선명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드래곤하트는 경계를 넘고 인간이 되었다.

여의와 닮은 소녀였다. 케이텐이 그린 것과 같은 문자인 탓이다. 그러나 세부적인 부분은 달랐다. 여의가 회색을 섞이기 전으로 분리한 듯한 검은 머리에 흰 피부를 가졌다면, 메블로프는 조금 덜 분리된 듯한 은발의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알키에와 비슷하게.

당연하게도 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에 야켄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알키에는 고통조차 잊고 자기 품속의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떨리는 입술이 감격에 겨운 목소리를 빚어냈다.


"어머니?"


알키에가 소녀가 되어버린 어머니를 불렀다. 메블로프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마치 눈을 뜨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눈썹만 들어 올리는 등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렇게 된 걸 보니 성공했나보군.]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알키에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생사의 경계를 넘어 만난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어머..."

[어리광부리지 마라, 어리석은 것.]


차가운 목소리가 알키에의 몸을 옭아맸다. 단 한 마디로 재회의 기쁨을 끝낸 메블로프는 상체를 일으켰다. 알키에는 움찔거리며 침대 한구석으로 물러났다. 메블로프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다.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서 말을 해주지 못했는데, 짧은 시간이나마 마저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잘 들어라, 알키에. 케이텐을 따라가라. 드래곤을 인간으로 변신시키는 방법을 알았다면, 분명 인간이 된 드래곤을 숨겨주기 위한 방법도 강구했을 것이다. 내가 네게 살기 위한 여러 기술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사정을 아는 자랑 같이 있는 편이 여러모로 안전하겠지.]

"어머니, 저는..."

[내 말 끝나지 않았다. 들어라. 멸룡자의 수명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나, 그가 죽거나 사라질 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멸룡자를 피했으면서 괜히 사고가 일어나면 정말 개죽음이나 다름없다. 네 몸은 영육이니 병마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상처를 통해 기생충이 들어가는 건 조심해라. 예로부터 곤충은 인간을 죽이는 암살자였다.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피하고, 일어날 것 같으면 도망쳐라. 정 어쩔 수 없을 땐 싸우되, 승산이 없다면 곧바로 항복해라. 만약 항복했다면 가장 지위가 높은 자에게 접근해라. 외모는 괜찮은 여자의 몸으로 만들었으니 어지간히 나쁘게 돌아가는 상황이 아니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메블로프는 숨조차 아까가며 끊임없이 조언했다. 고개를 돌린 채 대화만 듣던 야켄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차가운 목소리로 상당히 어두운 조언을 하고 있지만, 말하는 면면을 들어보면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아이에게 팔불출 부모가 해주는 우려 담긴 조언과 비슷했다.

그런 감상을 느낀 사람이 야켄 혼자라는 건 분명했다. 둘은 평범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 이건 아주 안 좋은 경우의 일이다. 이들의 힘은 드래곤조차도 넘볼 수준이고 케이텐은 영리하기 그지없다. 그들의 곁에 있으면 안전은 보장할 수 있...]

"그 사람은 어머니를 죽였어요!"


알키에가 버럭 외쳤다. 메블로프가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알키에는 겁먹거나 움츠리는 대신, 처음으로 어머니 상대로 언성을 높이며 다가갔다.


"이들은 어머니를 공격하고, 심장을 찌르고, 가슴을 갈라 꺼낸 심장을 제게 먹였다고요! 제가 어떻게 이들을 따라가겠어요? 그들은..."

[그래서 안 된다는 거다!]


알키에의 항변은 메블로프의 노호에 촛불처럼 사그라졌다. 육체는 달라도 같은 존재라는 건지 메블로프는 드래곤이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기백으로 외쳤다.


[언제나 생존만을 염두에 두어라! 내 심장?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냐! 살기 위해서라면 나머지 반쪽이라도 먹어! 아무리 극악무도한 자라도 널 살려준다면 따라가! 아무리 비굴하더라도, 몸을 팔고 뒹구는 일이 있더라도, 견딜 수 없게 치욕스럽고 고통스럽더라도 살아 내일을 본다면 승리하는 거다! 승리하는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다. 살아남아야 승리하는 거다! 내가 무엇을 위해 네게 심장을 먹였다고 생각하는 거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오두막을 울렸다. 어찌나 컸는지 선반 위의 집기 중 몇 개가 떨어졌다. 한차례 폭풍이 몰아친 뒤 광활한 적막이 흘렀다. 멍멍한 귀로 서로의 호흡만이 들리는 가운데에서 알키에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심장을, 먹여요?"

[그래. 케이텐이 네게 억지로 심장을 먹인 건 내 뜻이었다. 네가 내 심장까지 먹어 저주받는다면 이제 용언을 쓸 수 없겠지. 용언을 쓰지 못하는 드래곤은 짐승이랑 다름없다. 그렇지만 나약한 네 스스로는 할 수 없을까봐 고심했고, 마침 온 케이텐은 기꺼이 악역을 떠맡았지. 생각해보면 그의 방문은 굉장히 운이 좋았군. 네 나약한 심성으로는 무리였을지도 모르니까.]


알키에는 말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침묵했다. 메블로프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야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흑심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으로 둘을 힐끔힐끔 보고 있던 야켄은 메블로프와 눈이 마주치자 홱 고개를 돌렸다. 인간을 겪어본 메블로프는 야켄을 이해했으나 그 심정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할라피의 궁수여, 그대와 그대의 일행에게 감사를 표한다. 더 깊은 감사를 표하지 못해 아쉽군. 보상이 될까 모르겠지만, 호숫가 바닥에 보석과 보물을 모아둔 상자가 있다. 그대들이라면 적절한 곳에 쓰겠지.]


갑작스럽게 대화의 장으로 끌려나온 야켄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알몸의, 그리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소녀를 보며 평상심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아니, 그, 괜찮습니다. 저희가 한 것도 없는데 그런 걸 받을 수는 없어요."

[어차피 버려질 물건이다. 그럴 바에야 너희들이 쓰는 편이 낫겠지. 그리고 장담하건대, 내가 평생 모은 보물들은 그런 걸로 치부될 정도로 가볍지 않다.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생각해보니 애초에 받고 안 받고를 결정하는 건 케이텐이었다. 야켄은 케이텐에게 말해보겠다고 말하며 비스듬히 메블로프를 보았다. 그 순간 야켄은 지금까지 했던 것도 잊고 눈을 부릅뜨고 메블로프의 몸을 응시했다. 결코 그가 짧은 시간동안 뻔뻔함을 통해 이득 보는 법을 터득해서가 아니다. 메블로프의 몸에 도저히 눈을 떼기 힘든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야켄이 비명처럼 외쳤다.


"잠깐, 메블로프! 몸이!"

[슬슬 시간이 되었나.]


그가 메블로프의 몸이 불에 그슬린 책처럼 말려들어가며 부스러졌다. 살이 비틀어지고 피부가 갈라지는 광경은 더 이상 야켄이 수줍음 때문에 고개를 돌릴만한 광경이 아니었다. 야켄이 허둥거렸지만 메블로프는 예상했다는 듯 무덤덤했다.


[당연하다. 억지로 불씨를 살려봤자 더 급하게 타들어갈 뿐. 본질이 훼손된 이상 언젠가는 부스러질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러면! 알키에는! 알키에는요?!"

[알키에는 살아남는다. 비록 인간이 되었지만 어쨌건 내 심장을 먹었으니 불로장생할 거다.]


답답함과 아쉬움이 벅차올랐다. 야켄은 목구멍이 콱 막힌 것만 같았다.

알키에는 말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입술만 뻐끔이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과 심장포식이 처음부터 어머니가 계획한 것이었다는 사실, 그렇게 죽은 어머니가 다시 한 번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잔혹했다.

야켄은 알키에가 메블로프의 사랑을 실감했으면 했다. 결코 절망을 주기 위해 메블로프를 부르라고 한 게 아니었다.


"그게 아니야! 젠장,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알키에가 살아남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저렇게 슬퍼하는데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는 뜻이었어!"

[슬퍼할 수 있는 건 축복이다.]


야켄의 뜨거운 외침에도 메블로프는 노인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흥분이 얼음물에 담금질 당하는 것처럼 급하게 식는다. 메블로프는 거대한 호수였다. 수천 년을 넘게 살아온 드래곤은 고작 일개 인간이 감정을 부딪치는 걸로는 단 한 점의 동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 거대하고 깊이를 알기 힘든 감정에 압도된 야켄은 이를 악물어가며 꺼져가는 투지를 억지로 불태웠다.

그때였다.


[죽으면 슬픔도 기쁨도 사라진다. 육체도, 감정도, 영혼도 산산이 분해되어 다시 세상의 일부로 돌아가지.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보다는 슬플지언정 살아남는 편이 낫다.]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고 사실만을 이야기하듯 말하는 메블로프의 앞에서 야켄의 투지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분명 그녀의 마음은 무풍지대의 호수처럼 잔잔했다. 그러나 그 일부를 느낀 야켄은 굳이 풍파를 일으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굳이 물결을 일으키지 않아도 된다. 메블로프의 진심은 가려져있지 않았으니까.


[한 번 죽었고, 두 번 죽어보니 내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건 알키에가 겪어서는 안 돼.]


그 거대한 감정 전부가 알키에에 향한 애정이었다. 단지 인간처럼 격렬하지 않을 뿐이지, 헤아릴 수 없는 웅대한 애정으로 가득 담겨있었다.

야켄은 알아차렸다. 이 모녀는 표현이 극도로 미숙할 뿐이다. 서로를 향한 사랑은 이미 이 분지를 가득 채우고도 넘친다. 알키에는 알아야했다. 메블로프가 전하지 못한 진심을 그대로 안고 이별한다면 이 거대한 애정은 그대로 사라질 것이다. 야켄이 간절함을 담아 외쳤다.


"메블로프, 당신이 우리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면, 그 대가에요! 알키에에게 당신의 말해줘요!"

[바람?]

"그래, 바람! 당신이 심장까지 바쳐가면서 원했던 게 뭔지! 딸에게 자신의 목숨을 얹어가면서 무얼 바랐는지를!"


되살아나 처음으로 이야기한 건 잔소리였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홀로 세상에 나갈 알키에를 걱정했고, 자식을 살리는데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런 메블로프가 알키에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지 않은 건 수줍어서가 아니다. 알키에가 모르기를 바라서도 아니다. 그게 그녀의 삶이라서. 인간이 숨 쉰다고 말하며 호흡하지 않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기에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메블로프는 잠시 생각하다 알키에를 바라보았다. 알키에가 겁먹은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지금껏 너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탓에 한계에 도달한 그녀는 더 이상 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도망칠 수는 없어, 제자리에서 덜덜 떠는 알키에의 귓가로 메블로프의 말이 산들거렸다.


[꽃을 피우고 싶었다.]


분명 허용량을 초과한 것 같은데, 메블로프의 담담한 말투는 그녀의 안으로 억지로 비집고 들어왔다.


[나비는 꽃을 탐한다. 아름다움에 홀려 꽃에 다가가고, 달콤한 꿀을 빨면서, 꽃가루를 다른 꽃에게로 옮긴다. 그럼으로써 꽃은 임무를 마치고 다하여 스러지고 열매를 맺는다. 아름다움을 향유하면서 세상에 그것을 흩뿌린다. 그런 나비가 부러웠다. 나도 꽃을 피우고 싶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없었다. 아름다움이 무엇일까 알지 못했기에.]


홀린 듯 중얼거린 메블로프는 다시 한 번 알키에에게로 초점을 맞췄다. 메블로프는 농담이나 시적표현을 하는 성정이 아니다. 언제나 간결하고, 정보전달에 적합한 언어를 사용했다. 즉 그녀는 진심으로 알키에를 꽃이라 여기고 있었다.

메블로프는 몸이 부스러지는 와중에도 내색하지 않고 알키에를 계속 바라보았다.


[하지만 종말이 찾아왔다. 난 절망했다. 이 세상에 내가 남길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내가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건 분명히 아름다웠다. 내게 웃어준 덕분에 난 기뻤고, 노래를 불러준 덕분에 소리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 그건 내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메블로프의 전신에서 황금빛 가루가 일어났다. 붕괴는 한층 가속화되어 불길처럼 온몸을 뒤덮었다. 육체가 먼지보다도 작게 되어 스러지는 가운데 메블로프는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네가 나의 삶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만들어진 몸은 더 이상의 붕괴를 견디지 못했다. 메블로프의 몸이 세차게 빛났다.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빛에 야켄은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간신히 시력을 회복하고 고개를 돌리니 메블로프는 사라져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알키에의 앞에 드래곤하트가 쪼그라들고 있었다. 온기도, 빛도 잃고 그저 마나덩어리로 전락한 심장을, 알키에는 망연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알키에는 그 심장을 다시 한 번 부여잡고는 룬 문자를 써내려갔다. 그러나 심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깨진 그릇은 마나를 제대로 담지 못하고, 뜻을 이루기 전에 흩어져 사라졌다.

헛고생이었다. 그럼에도 알키에는 계속 손가락으로 심장을 문질렀다. 글씨를 쓰기도 하고, 소중하게 쓸어내기도 했다. 손톱이 갈라질 정도로 룬 문자를 써보았지만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알키에는 심장을 양손으로 끌어안고 침대에 엎드렸다. 알키에의 작은 등이 약하게 들썩였다. 야켄은 말없이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땅이 불길하게 흔들렸다.




비정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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