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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루 님의 서재입니다.

덜떨어진 용과 멸룡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고속도루
작품등록일 :
2018.10.12 14:09
최근연재일 :
2018.11.09 00:56
연재수 :
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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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592

작성
18.10.1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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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서장

DUMMY

흙먼지가 일었다. 나무 하나 없는 바위산에는 고삐 풀린 바람이 내달렸고 희미한 아침 해는 바람을 타는 흙을 덧없게 비추었다. 흙먼지는 바람에 펄럭이는 비단처럼 산비탈을 따라 올라가다 정상 부근에 도착하자 올올이 풀려 흩어졌다.

그 황량한 바위산을 한 사내가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돌산에는 사내의 등반을 방해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 돌산 이곳저곳에 산재한 바윗덩이가 방해물을 자청하고 있었고, 평범한 사람에게는 실제로도 그러했을 터다. 허나 사내는 어렵지 않게 바위를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그는 거친 지면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가볍게 발을 굴러 집채만한 바위를 뛰어올랐다.

한낱 인간을 수월하게 자신을 오르는 걸 고깝게 여긴 산이 까마득한 높은 절벽으로 길을 막으면, 사내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검을 눈높이께로 들었다. 그리고 마치 화가 혹은 건축가나 할 법한 자세로 무언가를 가늠하고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절벽은 통째로 도려내지거나 무너지고 으스러지는 등의 다양한 변화를 겪었으며 그중 대부분은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겪지 못한 것이었다. 산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고 갈색 구름이 피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내는 다 모으면 집도 한 채 지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먼지를 아무렇지 않게 헤치며 만들어낸 비탈을 걸어 올랐다.

그는 더러운 망토를 늘어뜨렸고, 그보다 더 더럽고 긴 적발의 머리카락을 풀어헤쳤으며, 중구난방으로 난 붉은 수염은 보는 사람마저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가장 번화한 도시의 가장 더러운 거지조차도 혀를 내두를 몰골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을 향했으며, 그의 발은 나침반처럼 꼿꼿하게 한 방향만 가리키고 있었다. 사내는 그 방향으로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치우며 걸어갔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한때 바위산의 일부였던 흙먼지만이 남아 바람을 탔다.

그리고 그런 사내를 ‘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가 오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 그러니까 인간이 산책 삼아 등산하는데 걸리는 시간 정도가 걸렸으나 영원을 사는 ‘그들’에게는 찰나와도 같았다.

목숨을 넘어 종족의 명운까지 걸린 순간이었으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은 늘 그렇듯 차라리 빨리 왔으면 하는 동시에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는 법이다. 그 이율배반의 감정속에서 '그들'은 사내가 오기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짧기도 길기도 한 시간 끝에 사내는 그들과 대면했다. 그러자, 무엇이 먼저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내는 멈췄고 그들은 말을 꺼냈다.


[우리는 그대의 강함을 인정한다, 용살자여.]


특이한 소리였다. 분명 목소리였지만 허파가 제공한 공기를 성대가 울려 만드는 일반적인 의미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마치 하늘을 진동시키고 땅을 흔드는 현상과도 같은, 천재지변과 다름없는 울림이었다.

사내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 그리고 위에는 앞다리만 두 개 달린 황금색의 거대한 뱀이 물고기처럼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강철보다 단단한 비늘로 몸을 둘러싼 황금 빛 용이 그를 내려 보며 말했다.


[한 인간을 사냥하기 위해 모든 용이 힘을 합친다는 건 본래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그대는 이 대접을 받을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걸 모두 인정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우리가 패배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역시도.]


그 용의 비늘은 바다 속에 담근 황금과도 같은 색이었다. 무수하나 무성의하지는 않게 자라난 산호초 같은 뿔은 대자연처럼 경이로웠으며 길게 흘러내리는 수염은 신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동방에서는 신으로 불리며 세계의 수호자라고 여겨지는 존재. 살아온 날은 헤아릴 수 없으며 쌓은 지혜는 잴 수 없고 권능은 인간의 상상조차도 미치지 못한다는 절대적인 초월자였다.

하지만 그 황룡이 사내를 대하는 태도는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그 모두를 겸허히 인정하며, 그대 하나와 우리 전체가 능력적으로 동등하다는 전제 하에 그대에게 제안하는 바이다.]


초월종족, 심지어 그 모두를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인정받은 사내는 놀랍도록 감흥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긴 시간동안 조개처럼 꼭 다물어져 있던 사내의 입이 열었다. 덥수룩한 붉은 수염 아래서 단조로운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그건 답이지만 대답은 아니었다. 어디인가 어긋나있는 반응. 허나 황룡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싸울 수 있는 모든 용은 여기 모였다. 오지 않은 용은 해츨링이거나 알을 품은 용. 인간으로 치면 어린아이와 임산부라고 할 수 있지.]


"너희들은 드래곤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어린아이와 임산부를 보호하고 존중한다지. 그것이 인간들이 말하는 인륜인지 아니면 그저 종족의 보존을 위해 만들어낸 본능과도 같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용도 비슷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우리의 미래를 짊어진 그들이 해를 입는 건 바라지 않아.]


"난 드래곤을 죽인다."


[그러니 제안하는 바이다. 우리가 널 사냥하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인간 전부를 없애지는 않겠다. 그러니 그대도 죽이는 건 우리뿐으로 해다오.]


"그러니 난 너희들을 전부 죽일 것이다."


[그대가 죽든 우리가 죽든, 우리들의 종은 살아남도록.]


"비록 내가 죽더라도, 반드시."


받침점이 없는 지레처럼 빙빙 돌기만 하는 대화. 하지만 대화와는 달리 둘의 의지는 한없이 똑바로 전해졌다. 단지 방향이 완전히 상반되어 서로의 아무것도 수용하지 못했을 뿐.

용살자의 말에서 타협할 수 없음을 느낀 다른 용들이 울부짖었다.


[쿠어어어어! 인간 따위가!]

[네가 우리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뜯어먹어주마! 네 놈을 죽인 뒤에 인간들을 모두 산 채로 잡아 뜯어 먹을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제발, 제발...]


녹색 깃털 날개가 달린 거대한 뱀이, 힘줄이 얽혀 터질 듯한 굵은 다리와 쇠로 만든 것 같은 뼈대를 자랑하는 억센 네발짐승이, 동물의 몸을 적절히 토막 내 붙여 놓은 모습을 한 사자머리 괴물이, 날개만으로 초원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은 괴조(怪鳥)가, 푸른 안광을 빛내며 날카로운 뿔을 세우고 쇳덩이 같은 근육을 불끈거리는 거인이, 여섯 장의 날개를 휘날리는 아름다운 여인이... 수많은 형상, 수많은 환상을 담고 각자의 모습을 한 용들이 아우성쳤다. 각자 나름대로의 특질과, 공통된 공포를 담아.

황룡이 탄식했다.


[그런가. 그대는 이미 그런 존재였는가...]


사내는 대답 대신 검을 뽑아들었다. 이름 없는 철검이 노을을 받고 빛났다. 어느 대장간에서 흔히 볼 법한 볼품없는, 심지어 이름조차 없는 검이었지만 저 검 아래 기백에 달하는 용이 대지의 품으로 돌아갔다는 걸 황룡은 알고 있었다. 황룡은 눈을 감았다. 다시 뜬 그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그래.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서로 좁힐 수 없는 의견 차이를 목숨으로 메워보자꾸나.]


그리고 역사 속에서 신화로 기록된 칼리네로 산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전해지지 않는다. 하나 확실한 건, 그날을 기점으로 용살자는 멸룡자가 되었으며 세상의 지배자'였던 것'들은 몰락했다는 것.

하지만 이것은 전후사정으로 유추해낸 결과일 뿐이다. 불에 탄 재를 보고 누군가 불을 피웠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는 있지만, 그 불이 얼마나 강렬했고 뜨거웠는지는 알 수 없다. 모두가 궁금해했지만 말을 전할 목격자가 없었기에 그날이 싸움은 그토록 두꺼운 베일에 가려져있었다. 당사자들은 죽거나 도망쳐 인간들 틈에 숨어들었으며 용살자는 자신의 업적을 떠벌릴 시간에 용을 한 마리라도 더 죽이는 걸 추구하는 존재였으니까.

다만 어찌된 영문인지, 목격담도 증언도 없는데도 사실처럼 전해 내려오는 소문이 있다. 근거도 증인도 없어 뜬소문이라고 무시할 법하건만 모두들 마치 자기가 똑똑히 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소문이.

소문에 의하면, 싸움이 끝난 뒤, 멸룡자가 되어버린 용살자는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고 한다.

[용은 떨어졌다] 고.




비정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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