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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루 님의 서재입니다.

덜떨어진 용과 멸룡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고속도루
작품등록일 :
2018.10.12 14:09
최근연재일 :
2018.11.09 00:56
연재수 :
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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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1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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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1-1

DUMMY

이야기가 끝나자 갈색머리의 꼬마아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손뼉을 쳤다. 한창 영웅담을 좋아할 나이의 사내아이에게는 영웅의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 흥미로운 소재였다. 심지어 그 대상이 소문 무성한 멸룡자라면 아는 이야기라도 재미있을 텐데, 이야기꾼이 하는 말은 새로움으로 가득했다. 특히 드래곤이 멸룡자의 강함을 인정하고 협상을 하는 부분은 뜬소문조차도 없던 이야기였다.


“와아, 굉장해요! 그래서, 그래서 멸룡자는 어떻게 됐어요?”

“후후, 싸워 이겼지만 아직 모든 드래곤을 죽인 건 아니지. 멸룡자는 잠깐 숨을 고른 뒤 끝없는 여정을 떠났어. 도망친 드래곤들이 인간들로 변신해서 그 틈바구니에 숨어 살고 있거든. 그렇게 숨어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드래곤을 전부 죽이기 위해서 멸룡자는 세상을 떠도는 여행을 시작한 거야.”


이야기꾼이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말을 마쳤다. 헐렁한 방풍의는 기묘하게 생긴 벨트로 고정되어있었고 빈틈없이 머리를 두른 터번 아래 장난스러운 까만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대평원 너머에 사는 할리피 족으로, 흥과 가락으로 유명한 유목민족이며 방랑벽 때문에 떠돌아다닌다는 그들은 모두가 인정하는 활의 명수다. 악기로써의 활이든, 무기로써의 활이든. 자신의 활로 잡은 짐승을 들고 오면서, 밤새도록 활을 켜며 이야기와 음악을 들려주는 그들은 다른 많은 방랑자와는 다르게 그들은 각지에서 환영받는 식객이었다.

오늘도 이곳에서 하루 묵은 음유시인은 마을을 떠나기 직전 궁금증 많은 소년이게 이야기를 해주는 중이었다.


“인간으로 변신해요?”

“그래. 드래곤은 변신술을 쓸 수 있거든. 그들은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어. 영주님의 성에 들어가도 머리와 꼬리가 삐죽 튀어나오는 커다란 짐승, 날개 한 짝으로 저어기 있는 산을 덮고도 두치 반이 남는 거대한 새, 천년 묵은 고목도 한손으로 단숨에 부숴버리는 거인 등. 어엄-청나게 무섭고, 커다랗고, 멋있는 존재로 변신할 수 있어. 멋있지? 응, 나도 멋있다고 생각해. 전설 속에나 나오는 괴물이잖아.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야.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면 엄청난 모습뿐만 아니라 사소한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거잖아? 멸룡자에게 패배한 드래곤들은 숨어야 하는데, 인간의 눈에 들키면 멸룡자가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는 말이야. 응? 이해가 잘 안 되니? 그러면 쉽게 말해줄게. 숨바꼭질을 하는데 집채만한 괴물이 찾기 쉬울까, 아니면 너 만한 아이가 찾기 쉬울까? 그렇지, 작으면 숨기 쉽다는 건 너 같은 꼬마도 아는 사실이지. 거기다 사람들은 워낙에 많으니 마치 풀숲 속에 숨은 약초처럼 찾기 힘들단 말이야. 그래서 드래곤들은 모두가 인간으로 인간들 사이에 숨었고, 멸룡자는 그 사람들을 찾기 위해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거야.”


소년이 이해하기에는 아직 조금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소년은 잘 모르는 내용도 일단 받아들이고 보는 모범적인 어린이였다.

그래도 어린아이의 호기심은 충만했다. 꼬마는 예의바르게 질문했다.


“그러면, 쥐나 벌레는 사람보다 훨씬 작으니까, 쥐나 벌레로 변하면 더 쉽게 숨을 수 있잖아요?”

“좋은 질문이야, 꼬마야. 굉장히 똑똑하구나.”


호기심은 아직 충족되지 않았지만 소년은 약간의 자부심을 느꼈다. 음유시인은 그런 소년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의 변신은 그렇게 편한 식이 아니거든. 대상이 되는 것, 그게 그들의 변신이야. 본질을 담을 그릇이라면 신비를 담을 수 있지만 그냥 쥐로 변해보는 거면 한낱 쥐와 벌레가 되어버려.”

“네? 드래곤이잖아요? 드래곤인데 쥐와 벌레가 되다니요?”


음유시인이 열렬히 설명했지만 소년은 이해하지 못했다. 늘 그랬듯 알아들었다는 시늉은 했지만 얼굴 속에 담긴 혼란은 그대로였다. 음유시인은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난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알면서 왜 자꾸 말하는 걸까?"


할라피의 숙명인가, 하며 고개를 휘저은 음유시인이 말을 고쳤다.


“드래곤들은 인간의 모습을 좋아해. 쥐는 더러운데다 너무 약하잖아. 만약 사람이 놓은 쥐약을 먹거나 그들이 키우던 고양이를 만나면 어떡해? 바로 꽥이야, 꽥. 그런 일을 피하기 위해서 드래곤들은 사람으로 변신해서 우리들 사이에 숨어드는 거야.”

“아...!”


소년의 눈이 커졌다. 알아듣기 쉬운 명쾌한 설명이었던 탓이다. 그리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음유시인은 소년의 생각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음흉하게 웃으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하지만 드래곤의 그런 습성 때문에 이런 괴담이 생겼어. 만약 네가 잘 아는 누군가가 홀연히 사라졌어. 처음에는 어디 갔겠거니 하고 있는데 너무 안 보이는 거야. 그래서 변이라도 당했나 하고 슬슬 걱정할 때 즈음, 사라졌을 때처럼 아무도 모르게 다시 돌아와. 반가워서 어깨를 치며 어디 갔냐고 물어보는데, 어색하게 볼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 하며 대답을 피해. 그러면서도 행동거지가 이상한 거야. 옛날 기억도 잘 못하고 평소 버릇대로 행동하지 않아. 물론 갑자기 분 바람이 그를 바꿔놓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건 사실... 그의 모습을 빼앗은 드래곤이라는 거지."


분위기가 달라졌다. 경쾌한 이야기를 하던 음유시인의 들뜬 목소리는 어느새 착 가라앉아있었고 반짝이던 검은 눈동자는 심연처럼 깊었다.

딸꾹. 꼬마의 몸은 반사적으로 딸꾹질을 시작했다. 음유시인은 찢어지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꼬마야, 조심해. 드래곤은 네 옆에도 있을 수 있으니까. 네 친구라거나, 이웃집 아저씨라거나... 아니면 나라거나.”


소년이 좋아하는 영웅담은 한여름에 들어야 어울릴 법한 무서운 이야기로 바뀌었다. 소년은 적응하지 못하고 얼빠진 표정을 하다가, 음유시인이 왁 하고 소리치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버렸다.


“엄마아아아!”

“조심해! 너희 엄마도 사실 드래곤일지도 몰라... 꿱!”


날렵한 손바닥이 음유시인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음유시인의 머리가 푹 수그러졌다. 그의 옆에는 가죽로브로 머리를 가린 채 작은 묘목처럼 생긴 석장(錫杖)을 든 여인이 서 있었다. 로브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는 미처 다 가려지지 못했다. 오똑한 콧날에 새하얀 피부, 그리고 붉은 색이 드문드문 섞인 청록 머리카락이 로브 바깥으로 살짝 삐져나왔다.

마을 사람들이 로브 안을 보았다면 분명 백이면 백 전설 속 엘프가 나타났다고 생각할 터였고. 엘프가 뭔지 아는 그녀는 조소 혹은 고소를 머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타인을 바보로 만들기 위해 관심을 끄는 취미는 없었다. 그렇지만 관심 끄는 게 취미이며 타인 놀리기를 좋아하는 짓궂은 동료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역할은 기꺼이 맡았다.

음유시인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야! 유하 님, 왜 그래요?”

“왜 그래요? 그건 내가 네게 할 소리야, 야켄. 왜 애를 겁주고 그래? 부모가 드래곤? 장난 칠 게 있고 안 칠 게 있지.”

“왜요! 가족이 진짜 드래곤이어서 집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는데, 엄마가 드래곤 아닐까 하고 찔러 볼 수도 있지! 어린 녀석들은 세상의 쓴맛을 알아야 해요!”


야켄이라 불린 음유시인이 두건을 확 뒤로 넘겼다. 그러자 두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그의 외모가 드러났다. 태양빛에 그을린 피부와 날렵한 얼굴선을 가진 앳된 소년이 뚱한 표정으로 유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열다섯. 할라피 족의 관습에 따라서는 이미 성인이고, 태양궁수인 그가 가진 능력은 일반적인 성인남성의 힘을 한참 넘어선다. 하지만 그를 볼 때마다 한참 어리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마 할라피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 때문일 테지만. 유하가 두 손을 올리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야기가 다르지. 그분은 네 가족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니라 네 누나랑 결혼해서 가족이 된 거잖니. 무엇보다 넌 드래곤이 인육을 먹는다고 믿는 저 아이와는 다르게...”


유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그들을 주목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유하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드래곤이 사악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그런 네가 이렇게 애들을 겁주면 이 아이들은 커서도 드래곤을 없어져야 할 몬스터로 볼 거야.”


멸룡자라는 한 인간에 의해 드래곤이 몰락한 시대, 명실공히 세상의 주인으로 우뚝 선 인간들은 보탠 것 하나 없음에도 멸룡자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멸룡자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드래곤의 지위는 떨어졌다. 한때 지역 곳곳에서 신으로 추앙받던 드래곤들은 인간을 속이고 그들의 삶을 빼앗는 사악한 몬스터까지 몰락했다.

야켄이 이를 까득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지는 증오를 낳는다. 드래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근본 없는 증오를 드래곤에게 보내며 멸룡자의 멸룡행에 도움을 준다. 드래곤과 인연이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면서도 안타깝기 그지없는...


“그렇죠. 드래곤은 그것도 못 될 위인들이에요. 기껏해야 남의 누나를 훔쳐간 개뼈다귀일 뿐.”

“맞다. 네가 둘의 신방을 방해하려다 집에서 쫓겨난 극도의 시스콤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네.”


유하가 어두운 눈으로 야켄을 보며 중얼거렸다. 야켄이 황급히 일어나며 외쳤다.


“악, 잠깐! 여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와요! 그리고 쫓겨난 거 아니라고요! 내 발로 나왔다는 말이야!”

“퍽이나 그러겠다. 신혼집 거실에서 대자로 누워 합방을 방해하다 멱살잡혀 내던져진 녀석이.”

“그건 그 개뼈다귀가 속도위반을 하려고 하니까 그런 거고! 난 할리피의 태양궁수, 태양의 빛처럼 세상 만물을 쏘아 맞추는 자! 할라피의 제사장만이 쓸 수 있는 그 집은 애초에 내 거라고요!”

“정확히는 네 누나이자 태양나무의 신녀인 헤이르의 것이지. 그리고 방금 한 개뼈다귀 발언, 네 매형에게 일러도 되니?”


야켄의 몸이 우뚝 굳었다. 마음은 그를 대항해 싸우고 있지만 몸에 새겨진 고통의 기억은 그의 몸을 옭아맸다. 아무리 할라피의 태양궁수라고 하나 드래곤은 이길 수 없었고 거사를 치르기 직전 방해한 죄로 그날 밤새 두들겨 맞고는 했다.

그러나 야켄은 아무리 맞으면서도 방해를 포기하지 않았다. 노크도 없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고, 중요한 타이밍에 굉음을 내서 분위기를 깨기를 몇 차례. 결국 지친 그의 매형은 순례 여행이라는 핑계로 야켄을 유하 일행에게 딸려 보낸 게 지금 상황이었다.

유하가 자신의 얼굴에 손바닥을 가져다대며 한숨 쉬었다. 솔직히 전력으로는 더할 나위가 없다. 할라피의 태양궁수는 드래곤이 방문하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할라피 족의 최강전력이었으니까. 다만 떠밀려 나온 거라 사명감이 부족했다.


“진짜 그때 널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아마 너랑 네 매형, 둘 중 네가 죽지 않았을까.”

“왜 나예요? 아무리 밤의 어둠이 강해보여도 다음날이 되면 빛은 승리하는 법, 그것이 태양의 정의에요!”

“응, 사악하고 비열한 어둠아. 정의를 위해 얼른 패배하도록 하렴.”


둘이 그렇게 말하는 때였다. 저쪽 끝에서 곰처럼 생긴 사내가 걸어왔다. 키는 이 골목에서 가장 큰 사람보다도 머리가 하나 컸고, 온몸은 잘 단련된 근육으로 가득했다. 어깨에는 묘한 홈이 새겨진 커다란 검을 빗겨 차고 있었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과연 휘두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거대했으나 그에게 있으니 평범한 양손검처럼 보였다.

용병 중에서도 가장 험악해보이는 사내가 편지를 들고 야켄을 향해 다가왔다. 해맑게 웃으면서.


“어이, 야켄! 축하한다. 방금 소식을 받았는데 헤이르 님이 아이를 가졌다는데!”


헤이르는 할라피의 태양사제, 그리고 이제는 드래곤의 아내가 되는 여인의 이름이며, 또한 야켄의 누이이기도 하다. 야켄이 무너지듯 무릎 꿇었다.


“누나아아아아! 내가 떠난 지 도대체 얼마나 됐다고!”


바르톨은 소년의 한탄에 순순히 대답했다.


“우리가 평원을 떠나온 지 석 달이 되었으니 슬슬 때가 되기는 했지?”

“시끄러워요, 바르톨! 당신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깐!”


면전에 면박을 받은 바르톨은 화내는 대신 호탕하게 웃으며 야켄의 어깨를 쳤다.


“얌마, 뭐가 불만이야? 돈 많지, 잘생겼지, 사랑도 지극하지, 인품도 훌륭하지! 그런 드래곤 찾기는 쉽지 않아.”

“인품이요? 어디가? 날 매일 죽기 직전까지 팼는데?”

“안 죽었잖아. 야, 솔직히 평범한 인간이었어도 신방을 그 정도 방해하면 진짜로 죽이려 들 텐데, 드래곤이 그만큼 참는 건 인내심이 뛰어나던지 헤이르 님을 엄청 사랑하던지 둘 중 하나야. 내 생각에는 둘 다 인 것 같다.”

“...쳇, 멸룡자는 뭐하나, 개뼈다귀가 저기 있는데 물어뜯으러 안 오고.”


반박할 말이 없던 야켄이 중얼거렸다. 그저 아쉬움에 던져보는 투덜거림이었지만 바르톨은 그의 말에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야 그 분은 우리의 비전인 폴리모프(polymorph)로 멸룡자의 눈을 피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물어본 거 아니라고요!”


야켄이 소리를 빽하고 질렀다. 그 기색에 바르톨과 유하가 조심스럽게 한 걸음 물러났다. 바르톨과 유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따, 사춘기냐. 섬세하구만.”

“당신이 굉장히 무신경한 것도 있지만... 첫사랑 상대가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청소년이 보여줄 흔한 반응이죠. 물론 그게 친누나라는 게 문제인데...”

“알았으니까 날 좀 내버려 둬요! 둘 다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쫑알쫑알!”


부당한 대꾸였지만 사춘기 청소년에게 이성적인 것을 바라는 것도 부당할 터. 바르톨과 유하는 서로를 보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 물러섰다.

곧 다른 동료가 도착했다. 얼굴을 전부 가리는 두꺼운 투구에 그 사이사이로 삐져나온 갈색 수염, 그리고 갑옷이라고 말해도 될 법한 두꺼운 가죽옷. 하지만 가장 큰 특징은 그가 단신이라는 것이다. 아직 소년티를 다 못 벗은 야켄보다도 머리 하나가 작은 단신. 위로 가야 할 것이 다 옆으로 간 듯한 그 모습은 흔히들 '소인'이라 부르는 드워프의 모습이었다.

바르톨이 먼저 그를 보고 아는 체 했다.


“아저씨, 왔어?”

“이 몸은 아저씨가 아니라 로기탄 님이다. 예를 갖춰 부르도록, 애송이.”


로기탄이라 스스로를 칭한 드워프가 투구를 벗었다. 무성한 갈색 수염과 머리털, 그리고 얼굴 한가운데 숨어있는 깊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눈동자는 셋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이 몸이 왔는데도 아직도 도착하지 않다니. 케이텐은 어디 있나?”

“아니, 맨날 늦게 오면서 그런 말을 해봤자... 그리고 케이텐은 좀 늦을 거야. 올 때까지는 찾지 마.”

“어째서지?”


로기탄이 매우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유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일행의 리더인 케이텐은 이 도시, 테네라드와 인연이 있으며 그 인연은 남이 함부로 떠벌리고 다니기 어려운 것이다. 유하가 그걸 어떻게 돌려 말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바르톨이 태평하게 말했다.


“여기 테네라드는 그 녀석의 고향이자, 그 녀석의 부모가 멸룡자에게 살해당한 곳이기도 하니까.”


유하가 휘청거렸고 로기탄은 침음을 흘렸다. 아무리 남의 신경 안 쓰는 드워프라도 혈족에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 막 나갈 수는 없었다. 로기탄이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적였다.


“케이텐의 어미는 드래곤도 아니라면서 왜?"

"글쎄, 그건 안 알려주던데. 녀석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래?"


아무리 안하무인인 드워프 치프틴이라도 해도 되고 안 될 건 구분한다. 로기탄은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그 망령은 마법의 창시자라면서 멸룡자에게 당했나?"

"15년 전 그때 멸룡자는 그저 일개 용살자였으니까. 윌 님도 위기감을 못느꼈던 거지. 그러다 멸룡자가 암습했고, 변변한 저항을 못한 채..."


여기 없는 사람의 과거를 찬찬히 읊는 바르톨의 말을 끊기 위해 유하가 크게 헛기침했다. 고개만 돌리며 '감기야?'라고 태연히 묻는 바르톨을 향해 유하가 질린 듯이 말했다.


“바르톨... 당신은 정말 무신경하군요. 길 한복판에서 남의 가정사를 다 까발리다니...”

“어? 나 뭐 잘못했나?”


바르톨은 자기 스스로를 가리키며 의아해했지만 유하에게는 설명할 기운이 남지 않았다. 그리고 무신경도 저 정도면 병이다.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아무리 짚어줘도 고치지 못할 것이다.

대강 사정을 이해한 로기탄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렇다면 좀 늦는 건 봐주겠...”

“다 모여 계셨군요. 제가 제일 늦었나요?”


모두들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온건한 인상의 미남자가 큰 배낭을 메고 서 있었다. 적당하게 관리된 금발에 깔끔히 면도한 턱, 몸은 늘씬하면서도 균형잡힌 근육이 잘 단련되어 있었고 걷는 자세는 곧았다. 남자가 배낭 몇 개를 내려놓았다. 바르톨이 손을 흔들었다.


“여, 케이텐, 성묘는 잘 갔다 왔어?”

“쫌!”


안 되겠다 싶었던 유하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바르톨은 움찔하며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무신경하지만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닌 그가 유하의 눈치를 보고 있을 무렵 케이텐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머니 성묘는 어제 진작 끝마쳤지. 성묘와도 같은 개인적인 일은 개인시간에 해야 하잖아. 정비시간에 개인적인 일을 하지는 않아.”


바르톨의 걱정은 헛것이었다. 유하가 살벌하게 바르톨을 노려보았고 로기탄은 크게 코웃음쳤다. 둘에게서 면박을 받은 바르톨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 그러냐? 그러면 왜 늦은 건데?”

“근처 상인에게서 지도를 얻어 봤는데 우리 것과 다른 부분이 있더라고. 사오려고 하는데 팔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외운 다음 새로 그렸어.”

“그래? 그러면 그 뒤의 배낭은 뭔데?”

“가는 길이 생각보다 긴 데다 산도 통과해야 해서 밧줄과 방수포, 그리고 마른 숯을 샀지. 로기탄 님, 이것 받으십시오.”


로기탄이 케이텐의 배낭을 받아들며 움찔했다. 숯과 숫돌 등의 장비를 챙기는 건 그의 담당이다. 하지만 드워프의 하이치프틴이자 수많은 도제(徒弟)를 거느렸던 그는 사소한 걸 챙기는 버릇이 없었고 꽤 많은 시간 동안 케이텐의 신세를 져 왔다.

사과나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줬다는 건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할 일이 가장 많은 리더가. 로기탄이 헛기침을 하며 배낭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케이텐은 당연한 일을 한 것처럼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랬기에 로기탄은 부끄러움을 화로 숨기지도 못한 채 애써 고개를 돌렸다.


“바르톨, 드라키옷애서 얻은 정보는?”


타지에서는 정보가 무엇보다 큰 의미를 갖는다. 그걸 감안한 케이텐은 가장 많은 인원을 배정했으며, 가장 믿을 만한 친구인 바르톨에게 드래곤 헌터 길드 '드라키옷'에서의 정보수집을 맡겼다.

바르톨은 그가 얻은 정보를 설명했다.


“드라키옷 테네라드 지부는 도시 크기에 비해 규모가 작았어. 드래곤헌터라고 할 법한 사람도 토박이가 아니라 거의 외지인이고 서로 겉도는 느낌? 테네라드의 군주 롤랜드가 지원은 해주고 있지만 다른 도시처럼 숨어들어온 드래곤을 찾으려고 날 서게 돌아다니지는 않아. 또한 이곳 사람들은 외지인을 엄청 경계하고 있고... 이곳에서 정보를 얻기는 힘들어보여서 그냥 왔어.”


별 정보 없다는 말처럼 들렸고 그건 바르톨의 입장에서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케이텐은 턱에 손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바르톨은 피식 웃으며 잠시 그를 내버려두었다. 케이텐은 이 파티의 리더다. 이 감당 힘들 정도로 개성적인 파티를 이끌려면 보통 기량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여태 케이텐은 제 기량을 차고 넘치도록 증명했다. 아마 케이텐이라면 정보의 파편으로도 그 너머의 함의를 읽어낼 것이다,

케이텐의 대답을 기다리던 바르톨이 미처 전하지 못한 사실을 떠올리고는 말했다.


“아, 그래도 드라키옷에 키스가 보낸 메세지는 와 있더라. 헤이르 님이 결혼했다는데?”

“그건 좋은 소식이군. 일이 끝나면 답장을 해야겠어. 다른 이야기는 없었어?”

“없었나... 아, 하나 있었다. 케이텐. 넌 정말 잘 하고 있지만 잊지는 말라는데. 네가 구할 수 있는 존재는 구원을 바라는 존재뿐이라고. 그러니 조심하라더라.”


케이텐은 조용히 그 말을 곱씹었다. 적힌 말을 전해 들었음에도 그 안에 담겨있는 걱정이 느껴졌다. 충분히 안정을 얻은 케이텐은 눈을 떴다.


"이곳 테네라드는 드래곤에게 우호적인 몇 안 되는 도시지. 그래서 드래곤헌터들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아. 거기에 폐쇄적인 분위기가 더해져 떠돌이들에게 가히 신경질적이라 할 만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어. 그런 분위기가 심하니 드래곤헌터도 정보 공유에 굉장히 인색할 거야."

"캐낼 것도 없었네, 그럼."


바르톨은 어깨를 으쓱하고 끝냈다. 둘의 대화를 말없이 듣던 유하는, 대화가 아무 소득도 없이 갑자기 끝나자 당황해서 끼어들었다.


"잠깐, 그렇다면 위험하잖아요? 멸룡자가 테네라드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한 발 먼저 왔는데, 막상 테네라드에서 드래곤의 정보를 찾을 수 없으면 어떡해요?"

"그건 괜찮습니다, 유하. 드래곤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네?"


유하가 멍하니 반문했다. 케이텐은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토록 토박이에게 경계받는 떠돌이도 드래곤 레어로 의심되는 장소를 찾아 알렸습니다. 찾고자 하면 찾을 수 있다는 뜻이죠. 그런데 전 테네라드 출신에 드래곤과 연이 있습니다. 이 근방에 있는 드래곤 레어가 있을 법한 장소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방향조차 몰랐다면 지도를 그려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럼 드라키옷의 정보는 왜 물어본 거예요?"

"온 김에 이곳에 인간으로 변신한 드래곤이 머물기 좋은 조건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조건만 좋다면 다른 드래곤도 살고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떠돌이에게 배타적인 장소니 드래곤이 정착하지 않았겠군요. 드래곤은 떠돌이일 수밖에 없고, 이곳은 떠돌이가 눈에 띄는 곳이니까."

"아...!"


유하가 감탄어린 시선을 보냈다. 대국적인 시선, 뛰어난 정보분석력, 철두철미함도 그의 능력 중 하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드래곤의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간이다.

드래곤 블러드. 어느 왕국에서는 이미 희미해진 흔적마저 신성의 상징인 용혈, 그걸 현시대에 가장 순수하게 가지고 있는 존재가 케이텐이었으니까.

용이 추락하는 시대. 역사가 전설이 되고 신비는 흔적만이 남은 세계의 격동기에 발버둥치는 자들. 케이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들은 전부 드래곤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 혈연, 은원, 친애, 충성 등. 드래곤이 쌓아 올린 업보의 한쪽 끝에 선 자들이며, 멸룡자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사람들. 그들 모두를 보며 케이텐이 선언했디.


"그럼 갑시다. 멸룡이 도착하기 전에 용을 구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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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떨어진 용과 멸룡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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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0 18.11.09 61 0 24쪽
10 1-9 18.11.04 47 0 20쪽
9 1-8 18.11.03 54 0 31쪽
8 1-7 18.10.18 43 0 17쪽
7 1-6 18.10.14 64 0 14쪽
6 1-5 18.10.13 63 0 14쪽
5 1-4 18.10.13 48 0 14쪽
4 1-3 18.10.12 74 0 14쪽
3 1-2 18.10.12 94 0 18쪽
» 1-1 18.10.12 139 0 23쪽
1 서장 18.10.12 186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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