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고속도루 님의 서재입니다.

덜떨어진 용과 멸룡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고속도루
작품등록일 :
2018.10.12 14:09
최근연재일 :
2018.11.09 00:56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874
추천수 :
0
글자수 :
90,592

작성
18.10.13 18:00
조회
63
추천
0
글자
14쪽

1-5

DUMMY

용은 격노했다.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어제 분명 인간의 기척을 느끼고도 깊은 잠에 빠진 자신, 자신을 깨우지 않은 딸, 절진을 파훼하고 들어온 한 무리의 인간들부터 그들의 침입을 허락한 이 산까지. 용의 분노는 모든 것을 향하고 있었다.

메블로프라는 이름을 한 용은 감히 딸의 신변에 위협을 가한 침입자들을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그 움직임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느렸지만 살기는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호수의 수면이 평정을 잃고 몸을 떨었으며 키 낮은 풀마저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용의 분노 앞에 몸을 엎드렸다. 풀을 뜯던 양떼는, 용과 꽤 먼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에 울며 축사를 향해 뛰어갔다.

바르톨은 살기를 느끼고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기 직전 케이텐은 그를 저지했다. 그리고 양손을 들고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일행과 소녀와의 거리가 제법 떨어졌다. 아니, 애초부터 일행과 소녀는 그리 붙어있지 않았다. 딸은 전혀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다. 칼로 위협받고 있지도 않았고, 장대에 묶여있지 않았다, 늘 보여주던 무구한 눈동자로 어머니와 침입자들을 연달아 보고 있었다.

메블로프는 날개로 조심히 소녀를 감쌌다. 그리고는 몸을 꼿꼿이 선 채로 침입자를 맞이했다. 메블로프가 공격 대신 경계를 선택한 건 순전히 몰랐기 때문이다. 오래 살아온 의심 많은 드래곤에게 경험으로 짚을 수 없는 건 일단 경계의 대상이었다. 나이 든 자의 신중함이라고도, 많은 걸 알고 있는 자의 호기심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케이텐이 의도한 바였다.


[너희들은 누구냐?]


메블로프의 위협적인 태도에도 케이텐이 취한 대응은 그저 키 큰 사람에게 하는 것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그는 고개를 바르톨 볼 때보다 더욱 높이 들어 용과 눈을 맞췄다.


"일단 당신의 레어에 함부로 다가온 일에 대해 먼저 사죄드리겠습니다. 또한 드래곤에게 중요한 수면을 불쾌한 방법으로 방해한 것에 대해서도. 무례인 줄 알면서도 마음이 급해서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걸 알고도 할 수 밖에 없었던 제 사정을 고려해서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아마 당신에게는 나쁜 이야기가 아닐 겁니다."


케이텐은 과할 정도로 예의바른 태도로 용을 대했다. 용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든 갑작스럽게 자신의 잠을 깨운 이에게 상냥하기는 힘들다. 마찬가지였던 용은 가장 먼저 그의 언행을 트집잡으려 했지만 도리어 말을 끊을 타이밍을 놓친 셈이 되었다. 말을 길게 함으로써 도리어 케이텐은 자기가 하고자 한 바를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제 이름은 케이텐, 당신을 도우러 왔습니다."

"도와? 어떻게? 그쪽에서 멸룡자를 죽여주기라도 할 건가?"


메블로프가 이죽거렸다. 케이텐은 메블로프의 말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긍정적인 부분만 짚어내고는 말을 골랐다.


"키시이카스를 아십니까?"


그건 어떤 용의 이름이었고, 오로지 용만이 아는 이름이었다. 용의 눈이 살짝 커졌다. 용은 뱀과 나비를 뒤섞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살아가는데 지성은 필수였기에 머리만은 인간의 것이었다. 용의 얼굴에서 인간의 반응이 나타났고 케이텐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신다면 이야기가 수월해질 것 같군요. 키시이카스는 최후의 최후까지 반전을 주장한 드래곤이었으며, 다른 드래곤이 칼리네로 산의 일전을 준비할 때 홀로 멸룡자에게서 도망칠 방법을 찾았죠. 좀 늦기는 했습니다만, 키시이카스는 결국 완성했습니다."


메블로프의 태도가 달라졌다. 피부를 찌르던 살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분노 대신 놀라움이 자리잡았다. 날카로운 눈매에는 적의 대신 호기심이 돌고, 꼿꼿이 서 있던 머리는 케이텐의 말을 잘 듣기 위해 조금 내려왔다. 메블로프가 경청하는 태도를 취하자 케이텐은 이야기를 이었다.


"드래곤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 하지만 인간이 되어도 멸룡자가 여전히 드래곤을 찾아낼 수 있는 이유는 여전히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한 여전히 무엇이든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아시다시피 인간은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없죠. 이것이 인간과 인간이 된 드래곤의 차이입니다."


드래곤이라면 익히 아는 상식이었지만 인간은 거의 모르는 내용이었다. 또한 앞으로 제시할 방법의 기반이기도 했다. 몸이 단 메블로프는 경계하는 것도 잊고 안달이 나서 그의 말에 끼어들었다.


[그 변화의 가능성을 없앤다면 멸룡자의 눈으로부터 숨을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건가?]

"그렇지만 가능성을 어떻게 없앨까요?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언어가 나올 가능성을 없애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 스스로 다짐하는 것만으로도 그저 그에게서 언어를 앗아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을 칼로 째고 소리를 앗을까요? 그것도 가능한 방법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드래곤하트에 손을 대는 건 인간 목을 칼로 긋는 것보다도 위험합니다. 목은 소리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숨의 통로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어느새 그의 말은 웅변 비슷한 것이 되어있었다. 메블로프는 기대감에 차 케이텐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경청했다. 케이텐은 마치 달변가처럼 주의를 끌기 위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어길 수 없는 맹세를 한다면? 만일 누군가에게 그 언어를 하지 않겠다고 본질을 걸고 맹세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언어란 서로 다른 걸 하나로 묶어주는 약속입니다. 그 언어로 맹세한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그에게서 언어를 빼앗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인간에게는 아니겠지.]

"하지만 드래곤은 다릅니다. 태고의 드래곤, 말을 빚은 비룡에게서 용언을 빼앗아 드래곤이 된 이들은 용언의 힘을 얻고 영생불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힘을 취한 자는 용언에 속박되었죠. 드래곤은 용언을 어길 수 없습니다. 이제 힘을 위해 서로의 심장을 탐할 수 없으며 자신의 말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들의 힘은 언어의 정원 속에서만 뛰놀 수 있을 뿐이죠. 그렇기에 이런 말장난을 할 수 있는 거지만."


그리고 케이텐은 여의를 꺼내들었다. 거대한 라지실드가 슬슬 움찔거리더니 표면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라지실드 위로 문자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글자가 떠올랐다.


"드래곤이 된 이들과 함께 말을 빚은 비룡을 몰아낸 인왕 샤카르탄. 그가 만든 룬 문자는 글자에 용언 그 자체를 담습니다. 문자보다는 말에 가까운 글자죠. 욕심 많은 인간은 드래곤을 몰아낸 것도 모자라 그들의 말마저도 가지고 싶어했습니다."


메블로프는 케이텐이 만들어낸 글자를 보았다. 언어 그 자체를 힘으로 삼는 드래곤이기에 알 수 있었다. 저 문자는 가장 기초적인 의미의 변신을 의미한다.

글은 말에 비해 담을 수 있는 게 적다. 어조와 목소리의 고저, 울림과 강세는 언어만의 것이며, 곧 사라지는 뜨거운 말만이 그 열기를 전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자는 뜻 하나만은 영원불멸하게,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이 담는다. 상황에도 감정에도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뜻 하나만을 차갑게 새긴다.

변신의 뜻이 새겨진 라지실드는 천천히 모습을 바꾸었다.

누군가 방패를 잡아 늘리는 것처럼 옆으로는 홀쭉해지며 세로로 길어졌다. 방패의 완만한 곡면은 점점 더 휘더니 한쪽 끝과 다른쪽 끝이 닿을 정도까지 되었다. 상대의 발등을 찍기 위한 밑날은 이제 더욱 길어졌다.


"영육을 가진 드래곤만이 그 언어로 변신할 수 있지만, 용육도 없으며 용언을 쓰지 못하는 인간이라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것처럼."


케이텐은 여의를 들어보였다. 크고 투박했던 라지실드는 어느새 가볍고 날카로운 한 자루의 창이 되었다. 옛날 어떤 드래곤의 심장이었던 드래곤하트는 지금 한 인간의 손에서 모습을 바꿨다. 비록 스스로가 변한 건 아니었으나 어쨌건 이제 변신이라는 권능은 드래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메블로프는 깨달았다. 이들은, 그녀와는 다르게, 인간이 드래곤을 따라잡는 방식으로 멸룡을 피하려고 하고 있었다. 동시에 전율을 느꼈다. 인간은, 얼마나 오만하기에 드래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방식으로 드래곤을 구원하려 하느냐고.

하지만 그 어떤 감상과는 별개로 그의 방법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어.]


메블로프는 꼿꼿이 굳어있던 자세를 풀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알키에를 한 바퀴 휘돌아 나오고는 고개를 숙여 케이텐과 눈을 맞추었다.


[나는 메블로프, 나비의 허물을 벗은 뱀이다. 그대들을 환영한다. 케이텐,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반갑습니다, 메블로프."


메블로프는 날개를 펼쳐 소녀를 사뿐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확연하게 느껴지는 밝은 목소리로 소녀에게 말했다.


[알키에. 행운이 따랐구나.]


지난 15년간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미소였다. 처음 보는 어머니의 환한 미소에 알키에는 얼떨떨한 기분을 느꼈다. 메블로프는 늘 여유가 없었고 알키에는 웃음을 동화책 속의 무언가로 알고 있었다. 동화책에서 너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것에 당황해서 알키에는 아무 반응도 못하고 어머니를 보냈다.


메블로프와 케이텐은 한참 떨어진 장소까지 갔다. 서로의 동료들이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에서, 그러나 소리가 들리지는 않을 정도로 적당히 거리가 멀어지자 메블로프는 기어가는 도중 예고도 없이 말했다.


[내게 보여라.]

"보이시라하면?"

[그건 언어가 아니라 문자로 이루어진다. 나는 언어도, 문자도 안다. 하지만 문자를 이루려면 쓸 곳이 필요한데, 그럴 곳이 단 한 곳 밖에 떠오르지 않는군.]

"예상하시는 그곳이 맞습니다. 용언은 드래곤하트에 새기지 않으면 힘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불안해하시는 걸 이해합니다.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꺼내서 글자를 새기라고 하면 불안하지 않을 수 없겠죠."


케이텐은 오만한 드래곤이 차마 꺼내지 못할 말을 대신 해주었다. 아무리 위대한 존재라고 해도 자신의 근원에다 글자를 새기겠다는데 불안하지 않을 턱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식 앞에서 불안과 근심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케이텐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먼저 안심하셔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드래곤하트에 손상 없이 마나를 새기기 위해 강철산맥의 화산심장에서 특별한 드라고아를 제작했습니다. 그 드라고아의 이름은 므루낙. 형체 없는 것을 다루는 망치입니다. 그것이 있으면 손상 없이 마나를 새길 수 있습니다."

[그것도 키시이카스가 한 일인가?]

"그렇습니다. 또한..."


케이텐은 창이 된 여의를 들어올렸다. 형태는 바뀌었지만 아까와 똑같이 은빛으로 빛나는 드라고아에는 여전히 글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드라고아 여의. 므루낙으로 변신의 룬을 새긴 드래곤하트입니다. 이것이면 증거로 충분하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본 건 차가운 변신뿐이다. 말로는 열기를 불어넣을 수 있지만 글에는 열이 담기지 않아.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 변신하는 건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일 뿐.]

"부족한 열기는 드래곤하트가 채워줄 겁니다. 휘날리는 깃발에는 생동감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드래곤하트란 깃발보다도 몇 배나 생명력이 넘칠 겁니다. 그리고..."


케이텐은 다시 한 번 여의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글에도 아주 조금이나마 열기를 담을 수 있습니다."


창대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그리고 창대를 둘러 새겨진 글자도 덩달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이가 변하면 글자도 달라진다. 종이가 찢어지지 않는 한 글자의 위상은 그대로이나, 그 글자가 가진 인상은 분명히 변한다. 그리고 케이텐은 기를 불어넣어 글자를 아주 조금 바꾸었다.

위로 솟은 획은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자유롭다. 한 바퀴 도는 원에는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흐르고, 아래쪽 진하게 눌러 쓴 부수에는 땅과 같은 단단함마저 느껴진다. 중심에 어지러이 휘몰아치는 획은 꽃잎처럼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분명 같은 글자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기세는 분명하게 달랐다. 마치 종이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글자에는 전에 없던 생동감이 있었다. 메블로프는 글에 열기가 담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문자는 말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바람을 타는 대신 바위에 새겨져 얼어붙은 것처럼 보일 뿐 그 안에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죠. 저희는 그걸 깨닫고 글로도 변신을 할 수 있도록 문자를 변형했습니다. 이게 바로 그 결과."


문자가 빛을 냈다. 여의가 움찔했다. 잠시 꿈틀거린다 싶더니 여의는 폭발하는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심장을 중심으로 몸의 윤곽이 잡혀나간다. 다리가 펴지고 팔이 뻗어 나왔다. 머리가 생겨나고 눈코입이 잡힌다.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길어지더니 허리까지 늘어졌다.

어느새 여의는 소녀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 둘을 적당히 섞으면 아까의 잿빛이 될 것 같다. 자그마한 얼굴에 앙증맞은 입술이 자리해있었고, 몸은 아직 덜 여물었으나 여성으로서의 특징이 분명히 나타나있었다.

눈앞에서 생명을 만들어낸 케이텐은 그 어마어마한 위업을 위해 무언가를 지불했는지 창백한 안색이었다. 하지면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메블로프를 향해 말했다.


"...이것이 저희가 마법이라고 부르는 기적입니다."


순간 메블로프는 희열을 느꼈다. 저거라면, 저 방법을 따라가면 그녀는 살 수 있다. 턱끝까지 찾아온 죽음에게서 도망쳐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산다. 살아남아, 더 삶을 이어간다. 죽음을 각오했던 그녀에게 한 줄기 서광이 비쳤다. 그 빛은 너무 밝고 눈부셔서 메블로프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만들어진 소녀가 눈을 떴다.




비정기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덜떨어진 용과 멸룡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 1-10 18.11.09 61 0 24쪽
10 1-9 18.11.04 47 0 20쪽
9 1-8 18.11.03 54 0 31쪽
8 1-7 18.10.18 43 0 17쪽
7 1-6 18.10.14 65 0 14쪽
» 1-5 18.10.13 64 0 14쪽
5 1-4 18.10.13 48 0 14쪽
4 1-3 18.10.12 74 0 14쪽
3 1-2 18.10.12 94 0 18쪽
2 1-1 18.10.12 139 0 23쪽
1 서장 18.10.12 186 0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