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치킨 없는 판타지에 구원은 오는가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19.10.28 19:34
최근연재일 :
2021.03.04 14:24
연재수 :
287 회
조회수 :
766,350
추천수 :
28,912
글자수 :
2,157,900

작성
19.12.03 12:00
조회
3,819
추천
128
글자
19쪽

아모스에서의 하룻밤 #2

DUMMY

고요하고 거룩한 밤은 언제나 나의 분노를 식혀주는 고마운 존재다.

어떤 이는 어두운 게 싫다면 낮만 존재해야 한다고 하지만 낮과 밤의 교차에 익숙해진 생태계에 하루 종일 해만 떠 있다면 어떤 재앙이 닥칠지 모른다.



"아모스에 있는 모든 종족들이여!"



밤은 언제나 조용하다.

시끄러운 낮과 달리 모든 것이 잠들어 평온을 가져다준다.

살아있는 생물들은 낮이 아닌 밤에 주로 뇌의 해마에 담긴 기억들을 정리하고, 재분류하고, 필요없는 걸 삭제하는 작업을 진행하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얼마나 난폭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하는지 생각해본다면 잠과 밤이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듣거라! 지금 이 자리에 명예의 사도가 왔나니!"



고로 지금 우리들의 잠을 방해하는 꼭두새벽에 샤우팅을 내지르는 빌어먹을 자식을 때려줘도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그대들이 진정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명예를 중시한다면 내 말을 들으라!"


"아니 어떤 놈이 꼭두새벽부터 샤우팅을 지르고 있어! 넌 잠도 없냐!"



그냥 무시하고 자려고 했는데 비싼 앰프를 잔뜩 가져다가 내지르는 것 같은 소음공해에 결국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소리를 지르자 저 멀리 산 너머에서도 동의하는 메아리가 들려왔다.



"이 잠도 없는 새끼야아! 스칼라베이 돼지 놈들이냐!"


"잠 안 자는 털복숭이 녀석들 나쁘다아아아아! 우리 오크 밤에 잠 잘 잔다! 냐옹이 멍멍이들 밤에 잠 좀 잔다아아아아!"


"우리 아니야 이 돼지새뀌야아! 우리도 밤에는 잔다아아아아아!"



사방에서 목청 좋은 각 종족의 대표들의 항의가 메아리치면서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이 파랗고 날카롭고 차가운 새벽에 소리를 질러대는 밤낮 바뀐 누군가 덕에 잠이 확 깨버렸는데 마스터 드루수스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이 근처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들어보니 마법으로 키운 목소리도 아니고 쌩목이던데?"


"저길 보십쇼."



마스터 드루수스가 가리킨 방향은 다름 아닌 아모스 고지였다.

우리가 있는 릭샤카 왕국이 소유한 북동쪽 길에서 한참 떨어져서 간신히 꼭대기만 보이는 그 고지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이 나고 있었고 그 빛 속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사실 시력 강화 마법을 걸어서 간신히 알아볼 수 있던 거지 그냥 맨눈으로 보면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었다.



"뭐야 저놈? 오크?"


"나의 이름은 베스코스다! 스칼라베이 출신의 오크이며 결투와 명예의 신 안드로스 님의 사자로서 그대들을 중재하기 위해 왔다!"



그 고지에 서 있는 소음공해 유발자는 자신을 소개하며 외치는데 어떠한 마법도 발동된 흔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목소리는 우리들의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또렷하고 크게 들렸다.

저 목소리로 성악가나 할 것이지 왜 여기에 와서 깽판을 치는지는 모르겠는데 뒤통수를 후려갈겨서 조용히 만들까 고민하는데 뒤쪽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스코스? 그 명예 밖에 모르는 베스코스, 아너써스터 베스코스인가?"


"아는 놈이야?"



팔라딘 모르테스는 녀석이 누구인지 아는 것 같았고 잘 자고 있다가 갑자기 깨서 기분이 상당히 나쁜 상태였던 동료들이 모르테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모르테스는 여전히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사방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는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오크를 보며 말했다.



"이 레무 대륙에 온 뒤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오크 주제에 초록 교단이 아닌 결투와 명예의 신의 결투 교단을 섬기는 것도 모자라서 돈에도 관심 없고 늘 싸움터와 결투장, 전장에 명예를 지킬 것을 말하고 다니는 괴짜입니다. 설마 진짜로 있었을 줄이야."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 놈치고는 팔다리가 멀쩡한 거 같은데?"


"그대들은 왜 이렇게 시간과 피와 땀을 낭비하는가! 정정당당하게 대표가 나와서 결판을 보지 않는 것인가? 왜 무익한 피를 흘리는가!"



시력 강화 마법을 걸었어도 간신히 종족과 팔다리가 달려있는지만 알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베스코스는 여전히 사방으로 뭔가를 떠들고 있었다.

전쟁이 터질 확률이 매우높은 구역에서 저렇게 대놓고 주의를 끌고 다닌다는 녀석치고는 아직까지 살아있는 게 신기한데 혹시 싸움이 터지면 도망치나 했는데 내가 들은 대답은 다른 것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베스코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고 합니다."


"얼마나?"


"마을을 약탈하던 패잔병 무리에게 혼자 달려들어서 전부 쓰러뜨렸다거나, 한 지역을 공포에 몰아넣은 식인 괴물들의 둥지에 뛰어들어 상처하나 없이 괴물들의 목을 가지고 돌아왔거나, 99명의 기사들과 차례차례 결투를 벌여 끝내 전부 쓰러뜨리거나 항복을 받아냈다거나, 지나가다 들린 동네의 꼬마들과 쥐-호랑이-코끼리 게임을 99번을 해서 전부 패배해 눈물을 질질 짜면서 도망쳤다거나 하는 믿을 수 없는 전설들을 보유한 사내입니다."


"그냥 힘 좋은 바보란 소리지?"



이 동네의 가위바위보인 쥐호랑이코끼리 게임은 그냥 타이밍에 맞춰 손가락 중 하나를 내미는 게임으로 엄지가 코끼리, 검지가 호랑이, 새끼손가락이 쥐를 의미한다.

쥐가 코끼리를 이기고, 코끼리가 호랑이를 이기고, 호랑이가 쥐를 이기는 간단한 상성인데 지역에 따라 약지나 중지에 인간을 추가하는 지역도 있었다.

100판을 하면 그래도 한 두 판은 이겨야 정상인데 그걸 동네 꼬마들이랑 해서 한 번도 못 이겼다는 것이 앞에 나열된 소문들보다 더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그보다 뭔가 이상한데"


"지금 저놈이 뜬금없이 이 꼭두새벽에 튀어나온 것보다 더 이상한 게 있습니까?"


"내 기억으로는 결투와 명예의 신은 제2시대에 제2대륙에서 학살의 신의 부하들에 의해 부족이 몰살당해서 탈락했었다고 들었는데 아직 신도가 남아있던 건가?"



올'쏜 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결투와 명예의 신의 부족은 학살의 신의 부족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몰살되었다.

게다가 이 레무 대륙에 온 뒤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지만 결투 교단의 지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게 바람의 신 발라테아의 농간인지 아니면 결투의 신이 돌아와 저 오크를 자신의 챔피언으로 삼은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결투의 신에게 축복 받았다고 망상을 하고 있는 이상한 오크가 돌아다니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대들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답하라!"



베스코스가 주변에 소음공해를 일으키는 게 계속되자 각 진영에 펼쳐져 있던 결계가 걷히고, 길 곳곳에서 횃불을 든 행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행렬은 멈춘 상태였지만 그들이 내뿜고 있는 아주 달콤한 잠을 방해한 존재에 대한 분노가 느껴졌다.

만약 감정에 열량이 존재한다면 당장이라도 블루레어 스테이크가 웰던으로 바뀔만큼 거대한 분노였으나 각 부대 사령관들은 군을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잠을 못자게 하는 소음 공해는 군인입장에서 큰 문제이긴 하지만 섣불리 군을 움직이면 몇 개 국가가 얽힌 대규모 회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여러가지 선택과 양해가 필요한 사안이었다.



"과연 네 국가 중 누가 움직일까?"


"모르겠습니다. 콰둔이나 이디트야 둘 중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국가의 군대가 그 사이에 현 사태의 원흉인 남쪽 요충지를 점령할 위험이 있고, 스칼라베이가 움직이면 베스코스를 치워버릴 겸 아예 아모스 고지에 살림을 차리려고 할 가능성이 있어서 다른 국가들도 움직여야 할 겁니다. 그나마 릭샤카 왕국군이 올라가서 베스코스를 치워버리고 다시 내려오는 게 저들 입장에서는 최선일 겁니다."



모르테스는 냉정하게 전황을 살피며 말했다.

확실히 릭샤카 왕국이 갑자기 뜬금없이 나타난 저 괴짜만 치워버리고 내려오면 큰 싸움 없이 이 기괴하고 잠잘 시간을 갉아먹는 짜증나는 트러블은 일단락 될 것이다.

물론 릭샤카 왕국 입장에서 기껏 고지에 아무 방해 없이 도착했는데 아무것도 안 할 리가 없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릭샤카 혼자서는 스칼라베이의 총공세를 막아낼 수 있을 확률이 낮았다.



"그럼 우리 입장에서는?"


"릭샤카가 올라가서 안 내려오고 버티다 스칼라베이 군대가 뒤늦게 고지를 점령하러 올라가고, 그 사이 콰둔 왕국이 이디트야의 옆을 치려고 나서서 완전히 혼란에 빠져든 것이 틈이 제일 많이 생깁니다."


"좋아, 그럼 상황을 지켜보다가 전장이 혼란해지면 바로 마법으로 길을 뚫어서 콰둔으로 넘어가자."



안 그래도 적당한 혼란을 일으킬 계기가 필요했는데 알아서 혼란이 일어나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때 우리들이 있는 야영지 옆의 길로 말발굽이 땅을 박차며 우르르 몰려가는 소리가 들렸고 수풀에서 고개를 내밀어보니 고양이와 호랑이, 표범, 재규어 등의 수인들로 구성된 전령으로 보이는 이들이 이동하고 있는 게 보였다.



"다들 준비해라. 릭샤카에서 움직인다."



릭샤카의 전령들은 그대로 고지를 향해 달려갔고 나와 모르테스만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시야 차단 마법을 시전한 채 천천히 다가갔다.



"베스코스!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었다! 하지만 여기는 그대가 나설 곳이 아니다! 어찌 신들과 왕들이 결정한 중대사를 그대가 막으려 하는가!"



거리가 꽤 멀었기에 우리가 길의 반도 가기 전에 벌써 릭샤카의 전령과 베스코스가 대화를 시작하였다.



"얼마 전, 동쪽 하늘에 빛의 기둥이 올라오며 신성력이 퍼져나가는 걸 보았다. 그것은 틀림없이 내가 찾고 있는 신의 흔적! 허나 신의 흔적을 찾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 있지. 바로 무고한 피해자들을 구하는 일이다."


"그럼 그 무고한 피해자는 누구지? 그대의 이 행동은 누굴 위한 건가?"


"그대들이 아모스 접경지역을 봉쇄하고 있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피해가 나왔는지 모르는가? 수많은 상인들과 시민들이 통행에 불편을 겪고 있지 않은가! 물류가 막히고 산과 산 사이를 다니며 약초를 캐던 약초꾼들과 하루하루 사냥으로 먹고사는 사냥꾼들이 자신들의 터전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걸 모른단 말인가!"



지금 저 오크가 말하는 게 정론이기는 한데 지난 천년 동안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아모스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는 이유 하나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이 아모스가 지닌 전략적 가치가 어떤지 생각하면 함부로 저런 소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릭샤카의 고양이과 수인 전령들은 어처구니가 없어서인지, 굳이 이유를 자기들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건지 베스코스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때 저 너머 북서쪽과 북쪽 길에서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지대에 있는 우리들의 눈에는 누가 온 건지 보이지 않았지만 잠시 후 들려온 소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허울 뿐인 명예를 지키라고 징징대는 새끼 베스코스여! 제발 오크의 위신을 깎아먹지 말고 목 매달아 죽는 것을 추천한다!"


"명예바라기(아너써스터)!"


"돈의 소중함을 모르는 놈! 낭비꾼!"


"황금곳간의 파괴자! 패륜아!"


"너희 어머니 세벡사스 여공께서 너 같은 희대의 돈 낭비꾼을 낳고 블랙 오트밀을 먹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고향과 부모에 대한 정이 남아있다면 제발 그 검으로 목을 잘라서 자결한다! 자결해라! 이 세상에서 꺼져줘라!"



나타난 것은 말을 탄 오크 10명이었다.

그들은 전부 오른손에 창을, 왼쪽 손목에 방패를 달고 손으로는 고삐를 쥐고 있었다.

오크치고는 진짜로 잘 생긴 오크들은 헬멧의 뚜껑을 열고는 속사포처럼 비난과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오크들은 대체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베스코스를 향해 감히 입에도 담기 힘든 폭언을 날려댔음에도 베스코스는 되려 그들을 비웃었다.


대체 베스코스라는 오크가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다른 오크들이 나타나자마자 저런 소리를 듣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굳이 저런 욕을 하려고 여기까지 올 정도로 오크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여긴 또 왜 나타났다 못 생긴 놈? 제발 나가죽는다!"


"그저 남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는 그대들의 말을 들을 수는 없다!"



모든 모욕과 욕설을 웃으면서 넘기던 베스코스는 못생겼다는 말에 발끈하며 반응했다.

솔직히 그 말대로 베스코스는 엄청나게 못생겼다.

나도 잘 생긴 편은 아니지만 저놈은 진짜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회색 피부는 곳곳이 왕창 뜯겨나 보풀처럼 일어나거나 껍질이 벗겨지다 말았고, 코에 검버섯으로 추정되는 자국들이 잔뜩에 입술은 오크 수준에서도 심하다고 할 정도로 커다랗고, 그나마 황금빛 눈은 카리스마 있고 위풍당당해보이지만 그 위치가 창조신이 커스터마이징하다가 슬라이더를 잘못 당긴 것처럼 너무 코랑 가까웠다.

하지만 오크들은 베스코스의 말에 한 마디 하였다.



"너 같은 놈이 차별받는 이유는 얼굴 때문이 아니라 행동 때문에 그렇다는 건 왜 모른다? 베스코스 불효막심한 오크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세벡사스 여공에게 이런 아들이 있는 거 안 믿긴다!"


"위대한 오크의 신이여! 오늘 동족의 오점을 제거하겠다!"


"세벡사스 공을 위해 죽는다!"


"가자 스칼라베이의 투사들이여! 오늘 우리는 동족 최대의 오점을 지우리라!"



오크들은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베스코스를 제거하려고 들었고 릭샤카 왕국군은 슬슬 스칼라베이의 오크 군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베스코스에게 통보하였다.



"마지막 대화가 될지도 모르겠군. 그냥 물러나겠다면 빠져나갈 길을 열어주겠다 베스코스. 하지만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여기가 그대의 무덤이 될 것 같군."


"정당하지 못한 압력에 굴복하는 건 안드로스 님의 가르침에 없었다!"


"그럼 결정되었군."



협상이 결렬되고 릭샤카 왕국군의 기병들은 안장에 걸쳐놓은 창과 검을 들고 괴짜 오크를 향해 곧장 달려나갔다.

그들은 분노의 그르렁거림과 함께 울분을 터트리며 아모스 고지를 점령한 한 명의 오크를 향해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그 울음소리는 언어가 아닌 울부짖음이었으나 그 의미가 밤중에 난리친 오크를 향한 짜증과 분노를 뜻한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고양이과 수인 기병 10명과 오크 기병 10명이 좌우에서 단숨에 오크를 향해 곧장 돌진하였고 누가봐도 기병대가 들고 있는 창과 검에 꼬챙이가 된 오크가 찢겨나갈 결과가 예상되었다.

저 괴짜가 찢겨나간 뒤 릭샤카와 스칼라베이의 군인들이 신경전을 벌일 게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이 드는데 괴짜 오크는 여전히 멈춰있었다.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다른 현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오크 결투광은 갑옷의 무게와 말의 가속도와 기병의 악력이 더해진 돌격을, 심지어 양쪽에서 동시에 가해진 공격을 양손검을 가볍게 휘둘러 튕겨내더니 마치 보이지 않는 발판이 있는 것처럼 공중으로 뛰어올라 오크와 고양이 기병 2명을 베어버렸다.

완전한 풀 플레이트는 아니지만 나름 중갑 기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장을 하고 있던 고양이 기병과 오크 기병의 갑옷에 커다란 틈이 생겼고, 그 틈새로 피가 터져나왔다.


다른 기병들은 갑자기 동료가 쓰러져서 낙마하는 걸 보고 놀라 기수를 돌려서 다시 돌진하려고 했으나 이미 베스코스는 그들의 바로 뒤까지 날아든 상태였다.

믿을 수 없는 속도와 정확함과 힘으로 베스코스는 그레이트 소드를 휘두르며 기병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20명의 기병이 쓰러지는데 채 5분이 걸리지 않았고 베스코스는 기병들을 전부 쓰러뜨리고 그들이 타고 있던 말들을 각자 릭샤카 왕국군과 스칼라베이 왕국군이 있는 방향으로 엉덩이를 때려서 돌려보내며 외쳤다.



"이런 빈약한 논리로는 신성한 결투장에서 상대를 설득시킬 수 없다! 좀 더 논리적인 토론자를 데려와라!"


"논리가 아니라 근육 아닌가?"



아무리봐도 저 오크는 웃는 팔뚝과 비슷한 타입인 게 분명했다.

다만 웃는 팔뚝은 족장이자 주술사로서 머리가 잘돌아간 반면, 저 오크는 이성의 끈을 검을 묶는데 사용해서 작동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모르테스는 나에게 개입할 것이냐는 의미의 시선을 보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서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을 것 같아 고개를 흔들자 모르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모르테스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으니 돌아가기로 하였고 우리가 몸을 돌려 돌아가는 동안 베스코스에게 이디트야 왕국과 콰둔 왕국의 전령들이 왔으나 우리가 고지를 다 내려갔을 때 그들 역시 베스코스와의 협상이 결렬되었는지 고함과 욕설과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야영지에 돌아오자 짐을 싸서 대기하고 있던 팔라딘들을 대표해 이젝투스는 분위기가 험악해진 릭샤카 왕국 진영을 보면서 말했다.



"처음 예상과는 많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같은데 이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군 출격! 스칼라베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들에게 선수를 빼앗기지마라!"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장의 상황을 살피고 있던 릭샤카 왕국의 사령관의 분노가 담긴 출진 명령이 대신 울려퍼졌다.

그 말을 듣고 저 너머 스칼라베이 왕국이 점거한 2개의 길 쪽을 보니 거기에서 대기하던 오크 군대가 들고 있는 횃불들이 조금씩 물결치며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내 강화된 청력으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고함과 욕설을 들어보니 대부분 고지를 점령하기보다는 고지에 있는 베스코스를 처죽여라, 누군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라는 의미의 아우성이 대부분이었다.


예상과 다르게 스칼라베이에서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릭샤카 왕국이 움직이자 콰둔과 이디트야 왕국 역시 바짝 긴장하며 아모스 고지를 응시하는데 모두의 시선은 그 고지에 당당하게 서 있는 오크 결투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단 한 명의 오크가 고지를 점거하고 있으나 그 굳건함이 태산과도 같았고 사태는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있어. 후딱후딱 길 만들자"



달콤한 수면시간을 방해받아서 분노한 릭샤카 왕국군과 베스코스에게 분노하고 있는 스칼라베이 왕국군이 아모스 고지를 향해 돌진하고 다른 왕국군들은 거기에 시선이 쏠려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내 말에 팔라딘들은 일제히 마법을 준비하였고 우리들이 피워낸 마법의 잔향은 다른 왕국군들에게는 릭샤카 왕국군이 마법을 준비하는 것으로, 릭샤카 왕국군의 선두는 아군이 지원사격을 준비하는 걸로, 본진에 남아있는 릭샤카 왕국군은 뭔가 이상하지만 떠나간 부대의 마법사가 뭔가 하고 있는 거라고 착각할만 하였다.

그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인지 아무도 우리 쪽을 견제하지 않았고 우리들의 마법은 완성되어 소리 없이 울창한 산맥의 나무와 바위를 밀어버리며 길을 만들어냈다.



"떠나자!"


"거기 누구냐!"


"와아아아아아아!!"



뒤늦게 우리들의 마법으로 발생한 마력파동과 잔향이 아군의 것이 아님을 깨달은 릭샤카 왕국군 일부가 우리 쪽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그 목소리는 고지에서 일어난 거대한 함성에 파묻혀버렸다.

우리는 뒤에서 계속 소리를 지르는 이들을 뒤로하고 마법으로 형성되고 있는 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렸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우리는 이미 릭샤카 왕국의 영역을 벗어나 콰둔 왕국이 차지하고 있는 아모스 접경지대의 영역에 들어선 뒤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치킨 없는 판타지에 구원은 오는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0 사슴과 늑대의 우정 #8 +17 19.12.11 3,414 118 22쪽
79 사슴과 늑대의 우정 #7 +23 19.12.10 3,388 153 19쪽
78 사슴과 늑대의 우정 #6 +22 19.12.09 3,412 149 18쪽
77 사슴과 늑대의 우정 #5 +16 19.12.08 3,440 120 14쪽
76 사슴과 늑대의 우정 #4 +9 19.12.07 3,527 124 21쪽
75 사슴과 늑대의 우정 #3 +12 19.12.06 3,635 138 13쪽
74 사슴과 늑대의 우정 #2 +20 19.12.05 3,695 134 19쪽
73 사슴과 늑대의 우정 #1 +13 19.12.04 3,884 115 14쪽
» 아모스에서의 하룻밤 #2 +14 19.12.03 3,820 128 19쪽
71 아모스에서의 하룻밤 #1 +8 19.12.02 3,959 138 13쪽
70 디스코르디아의 기나긴 밤 #8 +35 19.12.01 3,956 183 13쪽
69 디스코르디아의 기나긴 밤 #7 +18 19.11.30 3,856 160 17쪽
68 디스코르디아의 기나긴 밤 #6 +17 19.11.29 3,931 158 14쪽
67 디스코르디아의 기나긴 밤 #5 +68 19.11.28 4,078 146 14쪽
66 디스코르디아의 기나긴 밤 #4 +14 19.11.27 4,178 160 18쪽
65 디스코르디아의 기나긴 밤 #3 +11 19.11.26 4,231 143 16쪽
64 디스코르디아의 기나긴 밤 #2 +18 19.11.25 4,319 166 18쪽
63 디스코르디아의 기나긴 밤 #1 +14 19.11.24 4,389 166 18쪽
62 아이들의 흔적 #11 +12 19.11.23 4,291 148 16쪽
61 아이들의 흔적 #10 +13 19.11.22 4,181 160 16쪽
60 아이들의 흔적 #9 +22 19.11.21 4,411 146 18쪽
59 아이들의 흔적 #8 +41 19.11.20 4,549 177 21쪽
58 아이들의 흔적 #7 +14 19.11.19 4,255 148 11쪽
57 아이들의 흔적 #6 +9 19.11.19 4,112 146 13쪽
56 아이들의 흔적 #5 +10 19.11.18 4,307 172 18쪽
55 아이들의 흔적 #4 +8 19.11.18 4,068 153 14쪽
54 아이들의 흔적 #3 +5 19.11.18 4,197 147 16쪽
53 아이들의 흔적 #2 +7 19.11.17 4,206 167 12쪽
52 아이들의 흔적 #1 +2 19.11.17 4,463 163 12쪽
51 시대의 발소리 #17 +8 19.11.17 4,542 174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