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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치킨 없는 판타지에 구원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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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19.10.28 19:34
최근연재일 :
2021.03.04 14:24
연재수 :
28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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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28,913
글자수 :
2,157,900

작성
20.05.29 14:00
조회
1,485
추천
62
글자
12쪽

에라스무스의 고생길 #3

DUMMY

엘프들은 엘븐델 시절부터 작물과 과일을 기르는데 능숙했고 드워프들과 교류하며 익힌 제련기술을 대숙청 시기에도 잊지 않고 계속 발전시켜왔다.

거기에 나무 정령들의 왕인 헤카가 지난 2천년 동안 여신을 대신해 엘프들의 땅을 관리하였기에 차가운 북부 지역 밑의 지방들은 대지모신의 손녀이자 바다의 딸인 여신 하로나스의 축복으로 풍족함을 누리고 있었다.


신들이 돌아오면서 그동안 세상을 비틀어버리는 창조신의 힘 앞에서 흩어졌던 왕국들이 다시 교류하기 시작했고 깨어난 여신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에스티나 왕국은 신들의 귀환으로 이전보다 더 부강해졌고 그 중에서도 에스티나 왕국의 수도 스도티르는 수많은 엘프들의 고향이자 제일가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수도의 시가지에서도 귀족들이 주로 사는 구역과 상업구역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는 왕립 극장에서는 일주일에 3번씩 연극들이 상영되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본토가 위협받은 적은 최근 60년 동안 한번도 없는 평화에 젖어있는 에스티나 왕국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곳의 3층 사무실에서 극작가 두란테 오비디우스는 극장의 하인들이 가져온 책상자를 검토하고 있었다.



"어디보자 [릴리푸트의 국왕 골바스토 모마렌 에블람 거딜로 쉬핀 물리 울리 궤가 기록한 거인의 이야기], [세계의 여러 외딴 나라로의 해적선장이자 모험가이자 탐사자인 레뮤엘의 세계 탐사록], [조난을 당해 모든 가족과 선원을 잃고 자신은 라시아 대륙 학살토끼의 강 하구 근처 해변에 표류해 오십하고도 삼 년 동안 홀로 살다가 마침내 기적적으로 오크들에게 구출된 선장 알렉산더의 자신의 생애와 기이하고도 놀라운 모험 이야기], [리퍼 형제의 뮤 대륙 영웅전]"


"대체 왜 책 제목을 저렇게 길게 해놓는 겁니까?"



땀을 뻘뻘 흘리며 책이 차곡차곡 적재된 상자를 옮겨온 극장 일꾼들을 통솔하는 십장 칼스의 물음에 두란테 오비디우스는 인간들과 교류할 때 얻은 가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책이라는 건 원래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닌가?"


"그렇습죠"



현시대에 책은 대부분 소가죽이나 양가죽을 가공해서 피지를 만들어 그걸 꿰고, 엮고, 붙여서 책을 만드는 방법이 대다수였다.

이 방법은 책 한권을 위해 소와 양 수십 마리를 죽여야 하고, 피지 장인들에게 지불할 인건비, 피지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연금술사의 용액을 구입하는 비용 등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인쇄 방법이 발전하는 것에 비해 기록할 매체를 제작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졌다.


레무 대륙의 코끼리 수인들이 만드는 종이는 그런 세상에 일종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었지만 아쉽게도 코끼리 수인들은 종이 제작 비법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려고 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이런 동화책을 읽을 시간에 사냥을 나가거나 사교 파티를 하거나, 아니면 우리 극장에 와서 연극을 보는 자들이 대다수라네. 그러니 수많은 작가들은 책만 가지고 먹고 살려면 일단 제목만으로도 시선을 끌 수 있어야 하지. 원래부터 유명했던 책들은 간결한 제목만으로도 모두가 알아보지만 그렇지 않은 책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 법이야."



이런 비싼 책에다 마법이나 연금술 용액 비밀이나, 핵심 군사정보, 회계 기록 같은 중요한 걸 적지 않고 소설이나 동화를 적는 건 귀족들 사이에서도 너무 심한 사치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물론 어린 아이들을 위해 삽화가 잔뜩 들어간 동화책을 구입하거나, 소설을 좋아하는 귀족은 있었지만 대다수의 에스티나 왕국의 귀족들은 그런 걸 읽을 시간에 연극을 보는 게 싸게 먹히는데 굳이 소설책을 사 읽는 건 하로나스 님이 내려주신 자원을 낭비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지금 대본, 극본, 각본을 작성하기 위해 참고자료로 소설책들을 주문한 극작가 두란테 오비디우스는 오비디우스 가문의 삼남으로 태어난 명실상부한 귀족이었지만 그런 그조차도 자기 직업이 극작가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소설책 같은 건 주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수명이 넘쳐날 정도로 길고 젊음을 유지하는 시간이 긴 엘프들로서는 그냥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같은 분들 붙잡고 전설을 들려달라고 하는 쪽이 더 빠르게 옛날 이야기를 알 수 있는 방법이었기에 소설책을 낭비로 보는 경향이 다른 종족보다 훨씬 심했다.


하지만 두란테 오비디우스는 극작가였다.

그에게는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보다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 속에서 피어나는 미담과 영웅들의 이야기가 더 시선을 끄는 것이었기에 그는 새로 출간되는 소수의 소설들과 음유시인들에게 돈을 주고 다른 대륙과 다른 국가들에서 들려오는 소문들을 모으고 있었다.


오늘도 이쪽 업계에서 대히트를 칠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참고자료들을 뒤적거리던 두란테는 상자에 담긴 온갖 소설과 다른 대륙 소식이 적힌 쪽지와 책들 중 하나가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는 걸 발견하였다.



"이건 뭐지? 마법서인가?"



그는 별다른 위기의식 없이 책장 사이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책을 집어들었다.

책 제목은 [레무 대륙 신화]였고 작가는 이미 오래 전에 별세한 유명한 대학 교수이자 마법사인 엘프 원로 케일라 마뉴스였다.


에스티나 왕국이 자랑하는 스도티르 마법병단의 창시자로 알려진 오리스 마뉴스의 조카인 케일라 마뉴스는 고모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마법실력을 자랑하던 자였고 몇 백년 전에는 고모인 오리스 마뉴스를 따라 레무 대륙의 마법사 집회에 참가해 수많은 레무 대륙의 마법사들을 논쟁으로 격파했다는 전설을 지닌 자였다.

하지만 그가 작성한 [레무 대륙 신화]는 그저 그가 거기서 들은 레무 대륙의 신화를 적어놓은 책일 뿐 마법서는 아니었다.



"마력은 크게 안 느껴지는데 혹시 반딧불이가 들어갔나?"


퍼엉!


"작가님!"



극작가 두란테가 책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장을 열자 그 순간 갑자기 황금의 빛이 터져나왔고 하인들이 급히 달려왔으나 두란테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단지 그가 펼친 책 사이에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는 그 카드가 누런 황금빛 섬광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빛은 점점 줄어들었고 빛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두란테의 손에는 한장의 카드가 쥐어져 있었다.



-오우, 황금 슈퍼 레어!


"....???"



그리고 그 순간, 카드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흥겨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뒤 방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두란테의 손에 쥐어진 카드는 황금으로 테두리가 씌워져 있었고 아주 고풍스러운 그림이 카드 면적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마법사 케일라 마뉴스

비용 5

공격력 3

체력 7

능력: 한 턴에 한 번, 처음 사용된 주문카드를 비용 없이 한 번 더 사용합니다.


"뭐야 이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카드는 더 이상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두란테와 극장 일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카드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일이 끝난 뒤 집 혹은 술집으로 가서 이 기묘한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고 며칠 후 그들은 자신들도 비슷한 카드를 새로 구입한 다른 책에서 찾아냈다는 다른 엘프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기묘한 일에 대해 듣고 모여든 이들은 자신들의 카드를 서로에게 보여주었고 카드들은 거의 중복되는 것이 없이 전부 제각각이었다.

어떤 자는 그냥 철로 된 테두리의 하급 인간 병사 카드를 내밀었다.

어떤 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엘프 군단병 카드를 내밀었다.

또 어떤 자는 두란테처럼 황금으로 테두리가 씌워진 괴물 카드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이 중에서는 제가 제일 희귀한 카드를 가지고 있는 것 같군요"



카르돈 가문의 사남이 내민 그 카드는 대균열의 은룡이라는 이름이 있고, 역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숨을 쉴 때마다 비늘들이 번뜩이는 용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그림은 단순한 눈의 착각이 아니라 진짜로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그림이 그려진 카드는 오만가지 색으로 빛나는 투명한 보석들로 테두리가 장식되어 있었고 비용이라고 적혀있는 숫자 또한 9로 제일 높았다.



"엄청나게 정교한 환영마법이 그림이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군요. 근처의 마력을 빨아들여 스스로 마력을 충전하기까지 합니다."



단순히 누군가가 재미로 넣었다기에는 수준이 너무 높았기에 카드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이 카드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았다.

이 카드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전부 책에 끼워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드 사이에서도 등급이 있고, 비용과 공격력과 체력 등의 스테이터스가 존재하며 몇몇 카드는 특별한 능력이 하단에 적혀 있었다.


그들은 더 정확한 분석을 위해 카드가 나온 책을 가져왔고 조사결과 카드들은 해당 카드가 끼워져 있던 책의 주제나 등장인물 중 하나를 골라서 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같은 호메로스 여행기에서도 주인공 호메로스가 그려진 카드가 들어있던 책이 있던 반면, 다른 호메로스 여행기에서는 잠깐 스쳐지나가는 악당인 도적 발론의 카드가 들어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인 혹은 마법사가 책의 내용과 관련된 카드를 하나씩 끼워놓았다는 게 확실했고 책을 계속해서 조사를 하던 중 한 귀족 차남 엘프가 말했다.



"그러고보니 카드가 나온 책들은 전부 국가에서 검열된 것들 뿐이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전부 국가에서 검열되었다는 도장이 표지 안쪽에 찍힌 책들 뿐입니다. 처음 책을 낼 때 국가에 납본되었다가 돌아온 책들 말입니다."



시중에 나오는 책들 태반이 국가의 검수와 검열을 거치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카드가 나온 책들은 하나 같이 전부 검열 완료 도장이 찍힌 책들 뿐이었다.

그들은 즉각 왕성의 검열부서로 문의를 넣었고 답변은 금방 돌아왔다.


부서 직원은 검열부서를 도와주고 있는 어느 고명한 자가 검열 받기 위해 들어온 책들에 무작위하게 자신이 만든 책갈피를 선물로 끼워주고 있다고 답했고 카드를 얻은 자들은 그 고명한 자의 이름을 물었지만 부서 직원은 그냥 에라스무스라고만 불리고 있었다고 답해줬다.


카드를 조사하던 이들은 며칠 후 전설과 영웅기를 쓰던 유명한 작가 타마라가 에라스무스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와 전속 계약을 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곧 출간된 타마라의 책들 사이사이에서 책갈피 카드가 발견되었다.


에라스무스라는 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왕궁의 검열부서에 마음대로 드나들고 유명 작가를 포섭할 수 있는 돈과 권력을 지니고 있는 건 분명하였다.

카드의 출처를 쫓던 이들 중 일부는 이게 그저 화려하게 장식된 책갈피에 불과하다며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스스로 움직이는 보석으로 장식된 드래곤 카드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들은 혹시나하는 마음에 타마라의 소설 책을 사들였고 그들 사이에서 그 전에 발견된 대균열의 은룡과 마찬가지로 보석으로 장식된 레무 대륙 콰둔 왕국의 초대 마스터 오브 헌트인 쿠루의 카드를 발견한 자가 나왔다.


허영심을 채워주는 화려하게 장식된 책갈피 카드에 대한 소문은 그걸 계기로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책갈피를 모으는 자들은 이 게임용 책갈피들을 에라스무스의 책갈피, 이 카드들을 모아서 하는 게임을 책갈피 게임, 혹은 에라스무스 게임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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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그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5 +10 20.06.09 1,327 7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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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라스무스의 고생길 #3 +15 20.05.29 1,486 62 12쪽
203 에라스무스의 고생길 #2 +10 20.05.28 1,455 6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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