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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치킨 없는 판타지에 구원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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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19.10.28 19:34
최근연재일 :
2021.03.0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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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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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05.0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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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무기여 어서와라 #2

DUMMY

옛 아카이아 통일 왕국에서 갈라져나온 삼 왕국 중 하나인 동부 아카이아 왕국은 사막이 국토 절반을 뒤덮고 있어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영토가 크지 않은 국가였다.


에리니에스 여신의 신도들 중에서 생겨난 죽음의 신 투오넬의 신도들이 어떤 계기로 카자도신의 사막을 넘어서 동부 아카이아 왕국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견이 있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동부 아카이아 왕국을 세운 첫째 왕자가 권력투쟁에서 동생에게 패배했기 때문이라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고대 통일 아카이아와 고대 아카이아의 영토를 이어받은 현 서부 아카이아 왕국이 올문두 왕국의 전통을 따라 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삼고 있음에도 왕국의 분열 당시 계승권이 가장 높은 장남이 아카이아 왕국에서 가장 먼 카자도신의 사막 너머로 도망쳐서 왕국을 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일단 장남인 첫째 왕자가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다는 건 확실하였지만 그가 죽음의 신 투오넬을 믿게 된 것이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기 전인지 패배한 후인지에 대해서는 학계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동부 아카이아에서는 그동안 동생들의 반역으로 인해 밀려난 장남이 살아남기 위해 투오넬을 섬겼으며 그렇기에 현재 중부와 서부 아카이아의 왕족들은 정당한 왕좌를 탈취해간 찬탈자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서부 아카이아 왕국은 반대로 장남이 에리니에스 여신을 버리고 투오넬에게 헌신하는 배교를 저질렀기에 계승권을 박탈당해 장자의 자리가 비었기에 자신들의 선조인 둘째 왕자야말로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중부 아카이아 왕국은 이 두 의견을 절충하여 첫째 왕자는 장자의 신분을 믿고 두 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회색분자로, 둘째 왕자는 권력에 눈이 멀어 자기 형제들을 죽이려고 시도하다 총명한 셋째에게 저지당해 끝내 타협할 수 밖에 없던 암군으로 묘사하며 자신들의 선조인 셋째 왕자가 왕국을 분열시키지 않기 위해 한 노력을 강조하며 다시 통합될 아카이아 왕국은 자신들이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 셋 중 중부 아카이아 왕국이 가장 먼저 멸망해 그 영토가 반으로 쪼개져 서부와 동부에 각각 흡수되고 첫째와 둘째의 후손들은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면서도 셋째의 영토를 안정화시키는 작업을 진행시키느라 서로를 마주보고만 있었다.


허나 지금 아카이아에 찾아온 평화는 일시적인 것이다.

합쳐진 것은 쪼개지고, 쪼개진 것은 다시 합쳐지는 것이 세상의 순리인데 합쳐진 것이 쪼개진지 2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다시 쪼개진 것들이 합쳐질 시기가 왔다.

서부와 동부 아카이아는 지금껏 형제들을 집어삼키기 위한 힘을 모아왔고 언제든지 상대가 틈을 보이면 바로 모아놓은 힘을 터트릴 생각이었으니, 몇 년 전 각각의 왕국에 강림한 신과 여신 또한 필멸자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오늘 카자도신의 사막에서 이루어진 만남은 죽음의 신 투오넬이 서부 아카이아를 공격할 힘을 모으기 위한 계책 중 하나였다.



"동부 아카이아 왕국에 온 걸 환영합니다 귀인이여"



접선 장소인 사막 위에 동부 아카이아 내에서 명성 높은 청기사단과 투오넬을 섬기는 매장 교단의 아마마 하티브는 미리 약속장소에 도착해서 선채로 모래사막 밑으로 빨려들어가는 태양을 보고 있는 두 사람과 두 마리에게 예를 표했다.


죽음의 신 투오넬을 섬기는 동부 아카이아의 국교인 매장 교단은 때때로 죽음의 교단이라 불리며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기치를 내세우기에 평신도와 지도자 계급 간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집단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이 실질적으로 다른 이들을 이끄는 자가 있어야 하기에 그들은 다른 종교들과 달리 종교 내의 계급을 최대한 간략화시키고 계급을 셋으로 나누었다.


대부분의 동부 아카이아 사람들이 속하는 평신도, 전문적으로 설교를 하는 이들인 하티브, 마지막으로 하티브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수장을 선생, 앞선 자라는 의미를 지닌 아마마라고 불렀다.

아마마 하티브는 사실상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매장 교단의 교황과 같은 의미로 여겨지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죽음의 신 투오넬과 그를 섬긴 아카이아의 첫째 왕자의 정당한 계승자인 국왕에게 있다는 게 큰 차이였다.


제 아무리 실권이 거의 없다지만 아마마 하티브는 동부 아카이아에서 가장 신학에 정통한 자가 맡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에게 큰 존경받는 직위였고 그런 아마마 하티브가 직접 손님을 맞이하러 카자도신의 사막으로 향했다는 건 그만큼 상대의 직위가 높다는 걸 의미하였다.


저물어가는 사막의 태양을 보고 있던 두 손님들은 갑옷으로 무장한 검은 깃털 달린 거대한 새의 등에서 내려왔고 그들 중 회색 수도복을 입고 있던 자의 몸이 급격히 부풀어올랐다.

아마마 하티브를 호위하던 죽음의 청기사단이 급히 검을 뽑으려 하였지만 아마마 하티브가 그들을 제지했고 후드를 내리고 붉은 사자 갈기를 드러낸 거인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소 투오넬 신의 사도여. 나는 하로나스 님의 만신전을 대표해서 온 포이부스요."



동부 아카이아 왕국은 악수를 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문화권이지만 박식한 아마마 하티브는 다른 나라들의 풍습에도 정통한 자였기에 자연스럽게 악수를 받았다.

시선을 올려다보고 있고 말투도 정중했음에도 그의 말에는 힘이 느껴졌다



"반갑습니다 저는 모트 투오넬을 섬기는 학자들의 대표인 샤하다입니다."



그들이 맞이하러 온 손님은 다름 아닌 하로나스의 만신전을 대표해서 온 포이부스와 그를 수행하기 위해 따라온 마스터 드루수스, 그리고 이 둘을 태우는 코카트리스 형제인 종말의 쌍둥이였다.

종말의 쌍둥이는 죽음의 청기사단이 타고 온 말들이 평범한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인지 부리를 딱딱 거리면서 위협했고 청기사단의 말들은 종말의 쌍둥이를 보고 도깨비불이라고 흔히 불리는 귀화를 내뿜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종말의 쌍둥이의 예감대로 단순한 말이 아니라 팬텀 스티드 무리였다.

죽음의 신 투오넬의 권능과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이 도도한 최상급 탈것들은 차가운 숨결을 코로 내뿜으며 편자가 박힌 발을 사막에 쿵쿵 찍으면서 종말의 쌍둥이를 향해 도발을 하였고 마스터 드루수스는 아직 젊어서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종말의 쌍둥이의 입에 물려진 재갈의 끈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청기사단은 그 광경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정작 이들의 대표인 포이부스도, 아마마 하티브도 그들에게는 신경을 끈 채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 거래 혹은 신의에 대한 것을 말하기 위해 왔소. 우리의 만남이 둘 중 어느 것을 이룰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포이부스는 이그니로부터 가능하다면 투오넬과 델링그, 메데이나가 소속된 만신전과 동맹을 체결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소드라우프니르의 골칫거리인 금속을 보상으로 뱉어내는 던전을 파괴하는 것까지 감독하고 오라고 하였다.

하지만 거래 제안은 어디까지나 투오넬로부터 온 것이기에 투오넬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짐작만 할 뿐 그 진의를 알 수는 없었다.

포이부스는 상대 진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떠보기 위해 말했고 아마마 하티브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모트 투오넬께 부름받은 것은 하늘의 태양과 달들이 일곱 번 세상을 둘러보기도 더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위대한 신께서는 이웃 국가가 소속된 만신전으로부터 손님이 올 것이니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그 손님과 그 어떠한 것이든 주제를 가지고 논해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마마 하티브는 거래에 대한 것은 전해듣지 못했다 말하였고 포이부스는 투오넬의 진의를 생각해보면서 말했다.



"위대한 신들 사이의 거래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소?"


"예, 투오넬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해가 저물고 어두운 파랑색으로 변한 하늘에 별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주변은 팬텀 스티드들이 내뿜는 귀화 덕분에 밝게 빛나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고 포이부스는 분명 죽음의 신 투오넬이 이 만남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말했다.



"투오넬께서는 우리측 신들께 동부 아카이아의 전력으로 어둠의 신 아펩의 옛 영토에 있는 던전을 파괴하는 대가로 서부 아카이아 공략에 도움을 달라 요청하셨소."


"드워프 왕국의 문제 때문이군요."



아마마 하티브는 투오넬로부터 제대로 된 정보를 듣지 못했음에도 포이부스의 말만 듣고 금세 무엇 때문에 자신이 불려온 것인지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소드라우프니르의 드워프들은 최근 헤이메 왕국의 공격적인 확장에 맥을 못추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에 가장 먼저 적응한 그들이 우위를 선점하였고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우위를 되찾고 싶어하지요. 마침 혼란과 무법으로 뒤덮인 아펩 신의 영토는 우리 왕국과 가깝고 던전을 지키는 자들은 아무리 규모가 크다 해도 일개 용병단일 뿐이니 우리 왕국의 정예인 청기사단을 동원한다면 얼마든지 격파하고 던전을 장악하는 것이 가능하겠지요."


"맞소"


"하지만 청기사단을 동원하는데는 국왕 폐하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국왕 폐하는 위대한 모트 투오넬의 명이 있다고 해도 국익이 없다고 생각하면 단칼에 거절하실 분입니다."


"제 아무리 만인지상인 왕이라 할지라도 감히 위대한 신의 뜻을 거역한단 말이오?"



포이부스는 물론 동부 아카이아 국왕의 심정이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이그니의 개망나니짓에 항의한 게 몇 번이었던가?

어쩌면 동부 아카이아의 국왕 역시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신들이 진심으로 화를 내기 시작한다면 그 어떠한 장난감도 몸이 성하게 살아남을 수 없을 터.

포이부스가 의문을 품은 눈빛으로 아마마 하티브를 바라보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포이부스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으나 포이부스는 그가 자신의 뒤의 별들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도, 죽음을 너무 좋아하지도 말라는 것이 우리 왕국의 모토입니다. 죽음과 계절을 관장하는 투오넬께서는 존경 받아 마땅하신 분이지만 그분의 변덕만으로 왕국의 운명이 파멸로 내던지는 걸 보고만 있을 아카이아인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지 죽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왕국의 시조께서 위대한 투오넬을 섬기기로 한 것 또한 자신을 믿고 따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죽음을 미루려고 한 것이지 진심으로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포이부스는 이들이 투오넬을 진심으로 믿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다른 선택지가 없이 선조들이 투오넬을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포이부스는 투오넬이 왜 이곳을 약속장소로 잡고, 이런 자를 대리인으로 세웠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요청은 내가했지만 도움을 받고 싶다면 니들이 알아서 얘네를 설득해보라 이런 뜻이었다.



"그대들의 죽음과 신에 대한 생각은 충분히 알았소. 하지만 나는 처음에 말했듯이 신들 간의 거래 혹은 신의에 대한 것을 말하기 위해 온 것이오. 협상 대신 이런 대화를 나누도록 하신 투오넬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요? 신들 사이의 싸움에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 있긴 하신 거요?"



포이부스는 신들이 진심을 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투오넬이 진심으로 이들을 움직이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과연 투오넬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대부분의 게임에는 승리라는 목적이 주어진다.

하지만 이 게임에 참가한 신들은 단순한 승리를 원하기에 참가한 게 아닌 이들이 있다.

투오넬은 이기기 위해 참가한 이들과 달리 피조물들이 알아서 움직이는 걸 지켜보기 위해 게임에 참가한 신인가?

그게 아니라면 다른 목적이 있는가?


어쩌면 투오넬도 이그니가 그렇게 질색을 하는 메데이나 여신마냥 승패를 떠나 뭔가를 즐길 목적으로 게임에 참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투오넬은 무엇을 보면서 즐기고 있는 것인가?

매장 교단의 신학자들의 수장은 그런 포이부스를 보면서 여전히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투오넬께서는 승패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으십니다. 결국 신이 아닌 필멸자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하기에 언젠가는 투오넬의 품에 안기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마 하티브는 그러고는 포이부스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제대로 포이부스에게 박혀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귀인께서는 이곳에 거래나 신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 거래와 신의는 귀인 자신의 것입니까 아니면 귀인께서 모시는 신들의 것입니까?"


"당연히 신들의 것이오."



포이부스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으나 동부 아카이아 왕국의 신학자들의 수장인 이는 의문을 표하며 말했다.



"그러면 귀인께서는 어찌 신들 사이의 신의를 대신하여 말한다고 하실 수 있습니까? 귀함은 천함을 그 근본으로 삼고, 높음은 낮음을 그 기초로 삼듯이 신들 역시 필멸자들을 근본으로 이 세상에 간섭하는 법입니다. 신들의 뜻이 그들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귀인께서 말하는 거래와 신의 역시 신들끼리만이 아니라 신들의 밑에 있는 왕국들의 협력이 필요한 일이거늘 어찌 이것이 신들의 것이라 하실 수 있습니까? 신들의 것이라고 말하며 그저 거기에 생각없이 따르기만 한다면 왕국끼리 어찌 신의가 생길 수 있단 말입니까?"



포이부스는 아마마 하티브와 그의 뒤에서 정렬해 있는 청기사들의 미세한 반응과 뿜고 있는 땀의 냄새, 어떤 단어에 미세하게 근육을 움직이며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였다.

그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고 동시에 그들과 투오넬 신의 생각 차이에 대해서도 이해했다.

그리고 어째서 그들이 투오넬을 섬기는지 이해했다.



"그대들이 투오넬 신을 섬기는 건 선조가 투오넬 신을 섬기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오?"


"그렇습니다. 투오넬께서는 그분께서는 승리를 탐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를 몰아붙이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이 왕국의 시조께 이러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너의 백성들을 죽음을 겁내지 않는 이들로 만들어주겠노라고, 스스로의 운명을 택할 수 있는 이들로 만들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필멸자를 억압하는 다른 신들 대신 선택의 자유를 준 위대한 모트 투오넬을 섬기기로 하였습니다."



누군가는 이 말을 듣고 결국 투오넬을 섬기게 되었으니 별반 차이가 없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신들을 섬기는 게 결정되어 있던 이는 신을 섬기도록 정해진 것과 나중에라도 자신이 섬길 신을 선택하는 것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패도와 망도를 따르는 신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자비로운 신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포이부스가 내놓은 답변을 듣고 움찔거렸다.



"투오넬께서는 승리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신 것 같다는 건 알겠소. 하지만 당신들 또한 그렇소? 힘과 승리, 그 어느 것도 필요없냔 말이오."



포이부스의 물음에 아마마 하티브는 처음으로 웃음을 거두었다.

하지만 목소리와 어조는 이전과 똑같았다.



"아닙니다. 우리와의 합의로 중부 아카이아의 영토 절반을 가져가고도 거기서 만족하지 못할 서부의 비열한 형제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힘이 필요합니다."



포이부스는 그가 단지 따스하기만 한 신학자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연인지 몰라도 그는 서부 아카이아에 대해서는 투오넬을 섬기는 것처럼 냉정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고 포이부스가 할 말을 정리하는 동안 그가 역으로 포이부스에게 묻기 시작하였다.



"서부의 찬탈자들은 강합니다. 그들이 차지한 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땅보다도 훨씬 비옥하고 많은 자비를 보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땅을 통해 힘을 기르고, 친구를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께는 그런 그들조차 능가하는 힘이 있음에도 왜 직접 나서지 않는 겁니까?"



포이부스는 아마마 하티브가 자신에게서 뭘 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통해 포이부스의 힘을 짐작한 것인지 몰라도 그 말 자체는 사실이기에 제대로 대답해주었다.



"신들 중에는 하로나스 님이나 투오넬 신처럼 도량이 넓은 이들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오. 내게 만명을 한 손에 잡고 찢어죽일 힘이 있다한들 천상의 신들에게는 그저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나는 아이용 신발을 신고 있는 어린 노예일 뿐이지."



포이부스는 자신이 그저 장난감 상자 안에 넣어진 노예일 뿐이라는 걸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것도 창조신에 의해 어딘가에서 사고를 칠 때마다 신들에게 알림 메시지가 날아가는 뽁뽁이 신발을 억지로 신겨진 어린애였다.



"내가 직접 곤드 대륙에 퍼진 던전들에 내려가거나 헤이메 왕국을 망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오. 하지만 그들이 당하고만 있을까? 그들은 어떻게든 소드라우프니르를 고립시키고 숨통을 끊으려고 시도하겠지. 하지만 난 절대 친구들을 버릴 생각이 없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신들의 뜻이지만 내가 이 역할을 받아들인 건 내 친구의 후손들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함이라는 걸 알아주시오. 내 친구들을 돕는데 도움을 준다면 나 역시 그에 상응하는 힘을 그대들에게 빌려주겠소."



만약 하로나스의 만신전의 국가들이 곤드 대륙에 몰려있었다면 그들은 진작 포이부스를 앞세워 헤이메 왕국을 박살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하로나스의 만신전의 신들이 지켜야 할 국가들은 온 대륙에 퍼져 있었고 그 중 단 하나도 평화로운 곳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벌이지 않고 있는 소드라우프니르에 전화가 덮쳐온다면 포이부스와 드모'우레스만으로는 희생자를 최소화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게 분명했다.

포이부스는 그걸 막기 위해서라는 걸 분명하게 말하며 아마마 하티브 샤하다에게 답을 낼 것을 요구했다.


자신을 그저 신학자라고 소개한 그에게 이런 중대한 사태에 개입할 권한이 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투오넬이 그를 대리인으로 내세운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포이부스의 말을 들은 샤하다는 마치 왕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권한이 있는 것처럼 고심하고 또 고심하였다.

서로 으르렁대던 팬텀 스티드들과 코카트리스 쌍둥이조차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신경전을 벌이던 걸 멈추고 아마마 하티브를 바라보았고 그렇게 한참동안 말이 없던 신학자는 포이부스에게 말했다.



"저는 출가하기 전까지는 샤하다 아카이아, 왕제(王弟) 샤하다라고 불렸습니다."



역시 포이부스의 짐작대로 그는 단지 교황에 대응되는 직위의 신학자인 것만이 아니라 뒷배경이 화려한 남자였다.



"신학자라는 건 생각 외로 왕족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직업입니다. 그럴 목적은 아니었지만 출가한 덕택에 이 눈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샤하다는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고 포이부스는 그가 아까 포이부스에게 다른 국가들을 능가하는 힘이 있다고 단언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제 눈에는 여러가지가 보입니다. 힘이나 마력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오고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같은 것 말입니다. 덕분에 사람을 파악하고 대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왕궁으로 돌아가면 투오넬 님과 폐하께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해 건의드리겠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신들과 마찬가지로 상대의 스테이터스를 보는 능력이 있는게 분명하였다.

그가 포이부스에게서 뭘 보고 결론을 내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일이 잘 풀린 것 같았다.

샤하다는 그러더니 몸을 돌려 팬텀 스티드에 올라탔다.

갑자기 호위대상이 떠나려고 하자 청기사들은 허겁지겁 말에 올라탔고 샤하다는 고삐를 잡고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당당하게 친구라고 말할 수 있기를... 이럇!"



그 말을 남기고 중부 아카이아 왕국 사람들은 사막을 건너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팬텀 스티드들이 내뿜던 불빛이 사라지자 코앞에 있는 이들의 얼굴도 알아보기 힘든 어둠이 깔렸고 포이부스는 하늘의 별빛을 조명 삼아 마스터 드루수스에게 뭔가를 말하려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포이부스가 본 것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사막 하늘의 별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광경이었다.

우주에 흐르는 암흑성운의 가스층이 안에서 하늘거리는 어두운 우주의 구름들이 흘러가며 머리카락이 되고, 푸른 빛으로 빛나던 큰 별 2개가 갑자기 새빨갛게 타오르며 눈으로, 파란 별들이 코를, 백색광을 내뿜는 백색왜성들이 입이 되어 있었다.

그 하늘의 별과 암흑성운으로 이루어진 얼굴은 포이부스를 내려다보며 말을 꺼내고는 스르륵 사라졌다.



[기대하고 있겠다]



포이부스를 수행하기 위해 온 마스터 드루수스와 종말의 쌍둥이는 그 광경에 압도되어서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사막에 주저앉았고 포이부스는 잠깐 하늘을 바라보다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여길 협상장소로 정한 건 그냥 감시하기 편해서 그런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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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신들과 왕들 #5 +20 20.04.29 1,942 67 26쪽
182 신들과 왕들 #4 +17 20.04.28 1,660 70 13쪽
181 신들과 왕들 #3 +18 20.04.27 1,695 69 19쪽
180 신들과 왕들 #2 +20 20.04.24 1,680 87 17쪽
179 신들과 왕들 #1 +16 20.04.23 1,648 66 13쪽
178 또 하나의 복수의 끝 #5 +23 20.04.22 1,612 89 20쪽
177 또 하나의 복수의 끝 #4 +21 20.04.21 1,587 84 17쪽
176 또 하나의 복수의 끝 #3 +8 20.04.20 1,550 75 20쪽
175 또 하나의 복수의 끝 #2 +14 20.04.17 1,581 73 17쪽
174 또 하나의 복수의 끝 #1 +8 20.04.16 1,540 69 17쪽
173 아카이아 #10 +15 20.04.15 1,551 75 13쪽
172 아카이아 #9 +10 20.04.14 1,561 71 17쪽
171 아카이아 #8 +12 20.04.13 1,570 7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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